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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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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
곽경덕 시집 / 한국대표시인선 101 / 시와산문사(2016.03.25)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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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
곽경덕
바람 부는 날은 꼬리연을 날리고 싶다
대나무살과 한지로 뼈와 살을 붙이고
지느러미 두 팔을 늘어뜨린다
물 밑바닥을 헤엄치전 가오리 한 마리
밤마다 잠의 꼬리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먼 미리내 마을 길목에서 막아서는 방패
잔뜩 멋부린 채 한쪽 눈을 깜빡거리는
새침을 떼며 풀먹인 실 감았다 푼다
빙빙 돌리다 서로 한 바퀴 감기고
못 이기듯 꼬리 흔들며 옆으로 달아난다
밤의 길목은 연연을 맺기에 불빛이 너무 밝다
쫓고 쫓기며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구름 위를 날듯 얽히고 설키는
한지가 벗겨지고 대나무살 휘어진다
너무 많이 엮여 되돌아갈 수조차 없는
풀리지 않는 실은 끊을 수밖에
뼈와 살이 갈라지며 연줄을 끊는다
손사래 치는 몸짓으로 끝없이 떨어진다
꼬리를 추스르다 잠에서 깨어나
자국 없이 두들겨 맞은 몸, 식은땀에 젖은
바람 부는 날, 연은 하늘에 닿지 않으나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
닫혀진 창문
곽경덕
당신과 나의 풍경 속애 수많은 거울이 세워져 있다 당신의 말이 당신에게 돌아가고, 나의 말이 나에게 되돌아온다 다 안개 때문이다 아니다 다 바람 때문이다 당신과 나는 처음으로 말을 맞춘다
당신과 나의 시계 속에 수많은 유리벽이 버티고 있다 당신과 나의 말이 가운데서 겹쳐서 서로 다다르지 못하고 가라앉아, 굽이치는 계곡 안개에 휩싸인다 당신과 나의 말이 가다 말고 서로 부딪쳐 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솟아올라, 몰아치는 골짜기 바람에 흩어진다
이제 당신의 눈을 가리고 나의 입을 잠군다 그리고, 창문마다 닫혀버린 빈자리에 흔들리는 입을 맞춘다
가변차선
곽경덕
이제 가까이 다가와도 돼, 아무도 우릴 몰래 사진 찍지 못해 발길이 드문 샛길로 따라와 자 밟아, 어차피 빠져나가기까지 아직 함께 할 거리가 남아있어 하지만 불빛이 다가 올수록 발을 떼도록 해야 돼, 거기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야 나에게 너무 빠져들지 마 너의 무게를 밀쳐내기에 나는 너무 편하게 누워있어
이쯤에서 그만 나가야 돼, 저 앞에서 그가 이쪽을 보고 있어 다들 다니는 큰 길로 먼저 가, 자 늦춰, 이대로 같이 가기에 남아 있는 거리가 너무 짧아 하지만 그를 지나고 나면 다시 끼어들어도 좋아, 그 때까지 참아내야 할 선이야, 나를 너무 잊으려 하지 마, 편안한 나를 지우기에 너는 너무 지겨워할지 몰라
변덕스러운 나를 가지려 하지 마, 한 눈 파는 사이 언재든 떠날 수 있어, 나를 탈 때는 노래를 틀지마, 나의 변주變奏에 차선을 잃을 수도 있어
한 마디 납덩이
곽경덕
이제 나는 가늠쇠 위에 서 있다
한 마디 납덩이가 그의 입술에 물려지고
첫 번째 손가락에 걸린 혀, 방아쇠를 당긴다
눈에서 반짝, 탄피가 튀고
하나의 그가 둘로 번진다
나는 아직 둥그런 가늠자 안에 갇혀 있다
숨고른 그의 눈은 나를 놓치지 않는다
다시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고
구겨진 내 귀까지 들어오지 못한다
시계가 멈추고 소리가 부러진 자리에서
나는 이제 천천히 사라진다
그가 겨냥했던 과녁으로 쓰러진다
뚫고 지나가지 못해, 박혀있는
한 마디 납덩이를 끌어안고
스스로의 무게로 가라앉는다
지나온 거리만큼, 다리를 절며
나는 어제로 달아났고, 그는 내일로 돌아갔다
다시 두 개의 그가 하나로 포개진다
귀에 익은 낮선 소리가 바탕을 채운다
고래가 살고 있다
곽경덕
의자는 무릎을 꺾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
네 개의 다리는 탁자 밑을 해엄치는 버릇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래를 잡으러 기다린다
얼음잔 올리며 자리를 망설인다
마주하기에 거리가 멀어 보이고
고개 돌려야 보이는 옆자리는 더욱 버거워
눈동자 구부려 볼 수 있는 모퉁이에 앉는다
그 거리가 가운데서 꺾인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옆에 둔, 마주한 듯
그리 멀지 않은 깊이, 그리 버겁지 않은 넓이
탁자 밑으로 서로 발끝이 닿는다
쓰러진 술병으로 바닥은 깊고 넓게 출렁이고
네 개의 다리가 헤엄을 친다
신발 벗은 고래가 건너와 구두코를 닦고
양말 벗은 고래가 건너가 발톱을 다듬는다
마주치다 비껴가는 눈빛, 술잔 속에 빠지고
잔 비운 말끝이 모서리에 걸린다
모서리 한쪽이 차츰 둥글어지는 저녁
목젖이 매달린 햇덩이가 번지고 있다
출렁이는 바닥에 휘청이는 고래가 살고 있다
붉게 물든 모서리에 잡혀 있다
무릎 위를 지나는
곽경덕
11시에 나섰다 11시까지 버텨야 한다
눈은 문 앞에 던져두고 정오를 향해 간다
찬바람 나는 미니스커트가 지나간다
저 불꽃은 오래도록 주저했다 그럴 때마다
스키니진과 레깅스가 재갈을 물렸다
이어폰이 옮겨주는 들뜬 걸음걸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가는 눈총마다 다리에 불 지피고
그녀는 리듬을 태우며 정오를 향해 간다
인도를 건너서 오후를 가로 지른다
어제를 뛰어 넘는다 저녁을 뛰어 넘는다
무릎 위 어디쯤 끝나 있을까
꽃무늬 스커트가 자꾸만 뒤돌아 본다
몸을 제대로 불살라본 적이 있는가
저를 고스란히 다 속여본 적이 있는가
자정은 그녀의 무릎으로 따라 붙고
하루살이가 가로등을 뜯어 물고
하루를 버텨낸 다리를 불빛이 뜯어 문다
한 송이 불꽃이 지나간다
멈춰선 리어카 2
곽경덕
그의 뼈는 강철로 만들었다
그의 발은 쇠심줄로 움직인다
말 없는 스는, 숨소리를 끌고 다닌다
고새 고개 숙인 그는, 모퉁이 돌 때 얼굴을 보인다
발자국이 바퀴 자국에 지워진다
신발 갈지 않고 길 바꾸며 가는
아스팔트 달릴 땐 지붕이 없는 자
야영장 지날 땐 한 살림 차린 집
골목길 누빌 땐 은륜銀輪의 맨발
올라앉은 맨홀 뚜껑이 발목을 걸어댄다
지나온 길이 나뭇가지에 널려 흘러내린다
가던 길이 귀 자르고 밀밭 속으로 사라진다
뒤쫓아간 그의 웃음과 울음이
흔들리는 물음으로 되돌아 온다
낯익은 도로 어딘가에 늘 낯선 골목이 있고
이제 그의 숨소리가 뒤쪽으로 끌려간다
얼굴보다 먼저 앞꿈치가 바닥을 밀어내고
바퀴 자국이 발자국에 지워질 때
그의 뼈가 빗물에 녹이 슬다
그의 발이 바람에 멈춰 선다
제 살도 모르게
곽경덕
갑자기 열린 곳은 기다려야 덮게가 생긴다
아프던 때를 지나면 가려운 때를 지나야 한다
그나마 안에서 곪지 않고 밖으로 터져나와
아물기까지 닫아 둘 뚜껑을 만들고 있다
살을 열고 나온 피가 살을 닫으려는 덮게
가려울 때는 가장자리를 긁어주며 참아야 한다
가운데를 건드리면 처음부터 다시 말려야 한다
근질근질 해질수록 잊혀지고 있다는 몸짓이다
연고를 바르면 깨끗해지기는 하나 오래 걸려
빨리 아물게 하려면 그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제대로 굳지 않은 채 자꾸 열어보면 덧나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다짐마저 잊어야 한다
다 굳었다 싶어 참지 못해 들춰볼 때는 천천히
아프던 언저리, 두께가 얇은 테두리부터
단단해진 것도 한번에 갑자기 때면 다시 터진다
겉으로는 단단해도 속이 젖어있을 수 있다
는 물기가 젖어 있으면 잘 마르지 않는다
말린다고 햇볕에 내놓으면 속살까지 타버린다
제 살도 모르게, 덮고 있던 저도 모르게
스스로 떨어져나가 흉터조차 남지 않게
기울어지는 별
곽경덕
말하자면 저 지구는 저개발 지구다
그들은 지구전에 강하게 길들여 왔으므로
맺고 끊는 버릇이 뚜렷하다
먼저 물이 끊기고 이어 불이 나간다
물세례로 끊어내고 다음 불기둥을 세워 잇는다
거리를 끊고 바리케이드로 잇고
서로 말이 끊어진 자리에 아우성을 이어간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에 지구는 따로 없다
말하자면 저 지구는 재개발지구다
그들은 지구력을 바탕으로 버텨나가므로
수 금 지 화 목 토, 날마다 해와 달을 껐다 켠다
겹겹이 덮인 판자로 지붕을 엮어 살던 별들이
남아야 할 눈길과 떠나야 할 발길로 엇갈리는,
이제 저 골목의 별들은 서로 멀어지고 있다
저녁녘 내려와 조잘대던 샛별들 볼 수 있을 지
새로 펼쳐질 미리내, 다시 세들어 잘 수 있을지
뜨겁게 달궈진 별들이 움직이고 있다
말하자면 난개발된 이 지구는
별은 별들대로 지구는 지구대로 제 갈길 가고
밤이면 지구별로 불빛을 밝히는 미리내 마을
날 때부터 23도쯤 기울어진 지구
한번쯤 기울었던 자들이 모인 철거민 지구地區
눈 부릅뜨고 밝히던 달이 반쯤 감겨 졸고 있다
쓰러진 망루望樓 쪽으로 별들이 식어간다
코그모스의 저녁
곽경덕
마음은 지워져도 몸이 잊지를 않아
나는 다시 피었으니 피었던 곳에 피고
가던 길을 가게 되고 보던 얼굴들
보게 된다 버릇이 뿌리를 내려 저절로
피어나고, 덧없이 되풀이 되어
스스로 굳어진다 굳어진 버릇은
속을 바꾸어도 몸을 바꾸지 못한다
몸에 길을 내고 길에 길들여져
수천 개의 다른 내가 길가에 뿌려져 있다
길을 만들고 길을 흔들고 있다
얼굴빛은 다르나 생김새는 해를 닮아
저녁 하늘 어둑어둑 나를 길들이려 오면
수천 개의 같은 내가 끝없이 흔들린다
나의 몸은 달빛에 그림자로 길을 내는데
얼굴을 팔아 마음을 사는 가시 돋친 꽃들아
너희는 스스로의 흔들림으로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
열림 맨홀manhole
곽경덕
물길 내기 위해 열리고, 길 내기 위해 닫힌다
열 수 없는, 누군가 잠시 열었다 닫아두는
때로 반나절을 열어 두다 총총한 눈빛
가득 담아주는, 가끔 바닥 보다 높게 올라
앉아, 바퀴 달린 발목을 걸어댄다
마시는 물, 버리는 물, 받아둔 빗물
무쇠의 등판에 문신을 새긴 채
불어난 물길에 솟구쳐 올라 한번쯤 날아보고
씽크홀 속으로 내려앉아 보았던
안팎에 걸친 물음표, 길 벗어나 서 있는
나무는 모른다 길을 끝없이 뻗었으나
가다 맑다 끊긴 가변차선, 낮에 흘러간
물길을 더듬어 보고 밤길을 건너다 멈춰버린
네 발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해마다 곪은
가슴에 젖은 안개가 들어 와
묵은 곰팡이 한 번씩 지워주는
물길 내기 위해 열리고, 길 내기 위해 닫힌다
열 수 없는, 누군가 잠시 열었다
닫아두는 사람의 길이 갈라질 때,
시궁의 길목이 좁아들 때 둥그런 가슴은 열린다
맨홀을 따라가며
곽경덕
나무 밑으로 둥근 물관이 묻혔다
뿌리는 더듬거리며 제 뿌리를 찾아
가로막힌 몸통 휘감으며 오르내린다
화내거나 겁내지 않고 스스로 감싸 안으며
그러나 물길은 흐르지 못해 떠밀려 간다
고개 숙여 맞아주던 그 가로등 밑으로
달려가 손흔들며 바라보던 그 건널목으로
한 방울 삼키며 걷던 마른 잎 쌓인 거리로
두근대는 마음 추수리던 그 카페 앞으로
떠밀리고 떠밀려 간다
숲은 나온 물길이 강으로 가지 못하고
수많은 물관을 따라 오르내린다
간혹 둥근 하늘이 열렸다 닫히고
터널 속 울림으로 떠돌다 사라진다
안으로 우거진 숲을 지우지 못하고
모든 이야기는 이곳으로 흘러들어
이곳에서 다시 떠난다
그 거리 그 카페, 그 건널목 가로등 밑
더러는 강으로 더러는 터널 속으로
마시는 물, 버리는 물 서로 뒤바뀌면서
거꾸로 매달린 시
곽경덕
그들이 시를 쓸 때 나는 시답잖아 했다 그들이 말맞출 때 나는 말고리 잡았고 그들이 발맞춤 때 나는 발길질했다 그들이 손뼉칠 때 나는 손찌검했고 그들이 눈에 색안경 낄 때 나는 색안경을 그렸다
그들이 걸어나올 때 나는 뒷걸음 쳤다 그들이 숨을 쉴 때 나는 숨 넘어 갔다 그들이 물마실 때 나는 물벼락 맞았고 그들이 불을 켤 때 나는 불을 껐다 그들이 불을 끌 때 나는 내 머리에 불을 켰다
내려다 보기
곽경덕
나는 왼발잡이다 왼발이 공을 찰 때 오른발이 땅을 디뎌주지만 왼발이 헛발질할 때 오른발은 늘 땅을 찾다 왼발이 하는 일에 오른발이 동동 구른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이 공을 던질 때 왼손이 받아주지만 오른손이 손가락질할 때 왼손은 주머니에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른 척 한다
나는 양발잡이가 될 수 없다 두 발이 따로 노는 사이 발붙일 곳을 잃었다 나는 양손잡이가 될 수 없다 두 손이 서로 맞지 않아 가리킬 곳을 잃었다
갈 곳이 없을 때 물 속을 내려다 본다 오른쪽에 서 있을 때 왼쪽을 바라보았다 왼쪽에 서 있을 때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사람 속 어딘가 돌아올 수밖에 없는 연어의 길이 있을 것이다
저 아래, 산천어가 헤엄치는 상류上流를 따라 오른쪽으로 떠난 사람이 왼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왼쪽으로 떠난 사람이 오른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내려다보면 하나의 점點일 뿐, 방향은 없는
뉴스는 제로다
곽경덕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덮는다
지나간 이야기를 지나간 이야기로 덮는다
새로운 이야기를 지나간 이야기로 덮는다
지나간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덮는다
덮기 위해 이야기 되고 이야기를 위해 덮는다
덮기 위해 덮이고 이야기를 위해 이야기 된다
덮이면 안 될 것도, 덮일 수 없는 것도 덮인다
덮이지 않던 것도, 덮이기 싫은 것도 덮인다
지나간 이야기가 새로워져 가고
새로운 이야기가 지나가 버린다
지나간 이야기가 다시 지나가 버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새로워져 간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덮으며 날이 밝는다
이야기가 모니터를 덮으며 불을 밝힌다
모니터가 이야기를 덮으며 불이 꺼진다
모니터가 모니터를 덮으며 날이 저문다
무
곽경덕
무청 밑으로 내민 종아리가 보인다
바람이 키우기는 했어도
아직 바람이 들지 않았다
속은 가득 차 있으나 속없는 이름을 가져
무로 늘려 불리며 밭은 안개비로 가득 찬다
뼈도 없고 씨도 없는, 다 벗겨도 살덩이뿐
지난 날 말리려 햇살 안고 서 있다
고량지高冷地 무럭무럭 밀치고 올라와
산채로 뽑혀 누웠다
밭이 밀어낸다 살덩이 먼저 걸어나가고
치렁한 머리칼 처마 끝에 목을 매달 때
스스로 마당에 늘어선 그림자까지
버릴 몸 하나 없이 다 주고 간다
나사못 조이며
곽경덕
나사못 정수리가 더하고 빼는 셈을 가르친다
회오리진 몸의 고랑을 채우며
때리지 않고 소리 없이 돌려 심는다
서로 덧붙여져 움직이지 못하는
어디든 갈 수 없지만 언제든 돌아나올 수 있어
삐걱대거나 휘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뽑혀 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다 풀린다
잇몸 어딘가 뿌리내린 나사못 하나
벌레 먹어 패인 곳 애벌레 한 마리 심어 메꾼다
떨리던 혓바늘이 흔들고 간 빈 방에
열쇠 없는 자물쇠 하나 꽂아 잠군다
그 때는 무엇이든 서로 붙들어 맬 수 없었다
잊자, 그는 못 박았고 나는 못을 품었다
뽑는 일이 더하기고 심는 일이 빼기라며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셈을 하며
옮겨 심은 것일수록 가끔씩 조여가며
가을볕에 주며
곽경덕
빈 상자더미 위에 부풀려진 푸성귀
허리에 찬 손가방 어느덧 어울려가는
풀뿌리 뿌리치고 올라와 풀이 죽은 사내
한 때를 떠올리며 하루를 풀어헤치며
흙묻은 날을 털어내며 펼쳐 놓는다
가슴 펼쳐 내보여 삶이 짧고, 다른 사람
간 맞추려 속비우고 한결같이 뿌리내린,
누군가를 위해 단내를 다 내주고
과일이 되지 못한 김송이 이영지 박표고,
잊지 못해 그늘진 곳에 곰팡이들 키우는
저마다 이름표 하나씩 붙들고
졸리운 한나절 꾸벅꾸벅 일으며 세운다
없는 것 빼고 몽땅 세일sale
목소리 달구며 날마다 값을 바꿔 달지만
스스로 몸 값 바꾸지 못한다 한숨질 때
그렇다고 끄덕이며 마른잎 떨어지고
아니라고 내저으며 풀꽃이 흔들린다
갈수록 속 비워가, 저 많은 아이들
데리고 나와 가던 길에 내주고
또 어느 이름 모를 골목에 내주고
비좁은 그늘가지 가을볕에 덤으로 내주며
저녁 밑 지는 해 그림자로 거슬러주며
홍매紅梅는 지고
곽경덕
그대, 나무가 지우개로 지우는 모습으로 그러져 지는 산수유가 되어본 일이 있는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순간에 떨어지는 동백을 바라 본 일이 있는가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하나하나가 낱낱이 바람에 불려가 사라지는, 사라져 꽃보라로 다시 피어 날리는 홍매紅梅가 되어본 일이 있는가 뒤늦은 기지개로 흙덩이를 밀어내는 풀싹 하나, 발아래 위태로운 몸짓 하루쯤 사람일 수 있다면 오오, 이제는 온 산하에 지는 봄 그대는 등불이 켜지듯 천천히 피어나 느리고도 무겁게 떨어지는 목련을 보며 고개를 숙여본 일이 있는가
마루
곽경덕
숲에 있던 버릇으로 몰래 일어날 때가 있다
밑둥이 배인 뒤부터 대패로 살다 지고
대못으로 뼈를 세우며 익숙해진
엎드려 살게 된 뒤부터 연필 칼에 베이고
콤파스에 파이면 가끔씩 떨구던 물감이
스며들어 문신을 새겨 간다
가끔 지우개로 지우며 때를 밀어준다
등이 벌게지도록 연필자국 번지는 것이다
아이 등에서 문신이 굴러다녔다]
조금 더 자랄 때 도화지가 굴러다녔다
더욱 더 자랄 때 시험지가 굴러다녔다
다 자랐을 때 A4지만 굴러다녔다
어느 날 등이 깨끗해졌다
아무 것도 굴러다니지 않는다
이아가 다 자라고 나면 나뭇바닥은 사라진다
방과 방 사이에 엎드린 채 이어져
저 마당의 평상처럼 옮겨질 수 없어
제자리에서 사라진다
구르던 종이가 하나 둘 사라지면서
같이 구르던 문신도 스스로 지워지면서
물소
곽경덕
홀로된 상갓집에 끌고 온 물소 두 마리
왼쪽에 세워둔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누군가 끌고 갔는지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한 쌍을 데려갔다면 사람에게 끌려간 것인데
한 마리는 두고 간 것이 술에게 끌려간 거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짝을 찾는다
생김새가 모두 엇비슷해 일일이 뜯어보며
하나씩 붙들고 안절부절 묻고 또 묻는다
지친 시곗바늘이 한쪽 발을 버린다
소처럼 일만 하는 주인을 만나
끝없이 짐차를 밟으며 때로 빗길을 헤엄치며
쉴 새 없이 내달려온 물소 한 마리
뒤꿈치 물집 잡히며 뭉뚝한 발 길들여가던
한때 메마른 땅에서 새끼와 헤어져 왔을지 모를
상갓집에 수백 마리 물소 떼가 몰려와 있다
빼곡한 틈 사이 비집고 들어오는 무리들
휘청이는 엇박자 받쳐 이고 떠나가는 무리들
암수가 짝을 지어 쌍쌍이 붙어 있지만
어깨를 부딪치며 이리 저리 채이다, 흩어져
더러는 다시 만나고 더러는 끝내 헤어진다
절뚝이는 목발이 되어 문을 나선다
슬리퍼 얻어 끄는 남은 물소 한 마리
짝을 잃은 상주와 물끄러미 마주 본다
떠나는 문상 길엔 갈지자로 술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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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自序
일 년 반 동안 시와 연애를 했지
아예 결혼을 하자고 하더군
무덤이라 하기도 했지만 연말에 예식을 올렸지
내가 다 껴안지 못했던 그녀,
그 날은 그녀에게 가장 미안한 날이었지
그래서, 두 달 만에 아이를 낳아버렸지
나의 시는 이랬으면 좋겠다. 환상이 아니어도 좋다. 세렴미가 없어도 좋다. 너무 독해가 쉬워 수준이 높아 보이지 않아도 좋다. 현상이 공감될 수 있으면 좋겠다. 투박해도 이미지가 보이면 좋겠다. 너무 솔깃해 수준이 낮아 보인다면, 웃을 수 있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6년 3월
곽 경 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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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덕 詩集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
[ 해설 ] -
끝없는 변주變奏, 그 감춤과 드러냄
― 곽경덕 시집『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에 부쳐
이 충 이<시인>
1.
곽경덕은 전통적인 시와 차별화하며 단호하게 말을 아낀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을 되돌아보면서 내면 깊은 곳에 내려앉은 기억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일상의 안팎을 적절하게 드러내며 일상어를 무의식적으로 비틀어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타자와의 낯설기에 길들여지고 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시를 위협하는 것은 영상매체가 아닌 쉽게 읽혀지는 대중시였다. 이는 시가 오락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오락을 시로 잘못여기는 풍토다. 그러나 곽경덕은 많이 읽혀지는 대중시의 덫에서 벗어났다. 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물론 시인은 의도적으로 끊임없는 변주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너무 쉽게 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시를 물마시듯 들이마시지 말고, 천천히 씹어 맛을 알아야 한다는 의도가 그의 시에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곽경덕은 시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쓸쓸한 내면을 부드럽게 위무慰撫하는 손길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시는 지루한 일상에서 반전을 거듭하며 삶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시적 대상의 표면을 쓸쓸함으로 감싸며 내면의 온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일상을 묘사함으로써 생생한 전개를 펼치고 있다. 이는 행과 연마다 따스한 효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시는 짧고 간명하지만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시의 바탕은 감성이지만 때때로 지혜나 사물의 통찰에 의해 확대시키려는 의도가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매 시마다 자유로운 형태와 모티브가 불확실한 관념에 머물지 않으려고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이것은 순간적인 직관 속에서 많은 경험들이 집중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혜에 도달하는 지름길과 눈에 띄지 않는 잠재된 길을 찾는 연금술의 기법이 좋은 시를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란 샘의 원천이나 강가의 갈대, 몇 백년 만에 한 번씩 지구에 가까이 다가오는 별과도 같다. 이것은 세속적인 열정과 감성으로 일상의 내밀한 부분을 통찰한 결과이다.
2.
곽경덕 시의 소재는 먼 곳보다 가까운 것을 선택하고 낯선 곳에 관심을 나타낸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대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졌다. 시의 언어에는 이상과 관념, 그 내면에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갈등이 잠재해 있어야 한다. 일상은 습관처럼 지속되면서 끝없이 반복한다. 이같은 일상은 인간의 내면, 감수성을 통해 외․ 내적 확장을 꾀해야 한다. 이는 감각과 감수성의 확장에 따른 변화를 뜻한다. 우리의 보편적인 일상과는 다른 상상력이 일상의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자는 무릎을 꺾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
네 개의 다리는 탁자 밑을 헤엄치는 버릇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래를 잡으러 기다린다
얼음잔 올리며 자리를 망설인다
마주하기에 거리가 멀어 보이고
고개 돌려야 보이는 옆자리는 더욱 버거워
눈동자 구부려 볼 수 있는 모퉁이에 앉는다
그 거리가 가운데서 꺾인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옆에 둔 듯, 마주한 듯
그리 멀지 않은 깊이, 그리 버겁지 않은 넓이
탁자 밑으로 서로 발끝이 닿는다
쓰러진 술병으로 바닥은 깊고 넓게 출렁이고
네 개의 다리가 헤엄을 친다
신발 벗은 고래가 건너와 구두코를 닦고
양말 벗은 고래가 건너가 발톱을 다듬는다
마주치다 비껴가는 눈빛, 술잔 속에 빠지고
잔 비운 말 끝이 모서리에 걸린다
모서리 한쪽이 차츰 둥글어지는 저녁
목젖에 매달린 불덩이가 번지고 있다
출렁이는 바닥에 휘청이는 고래가 살고 있다
붉게 물든 모서리에 잡혀있다
-「고래가 살고 있다」전문
이 시에서 고래는 무의식을 상징한다. 그 무의식에 숨겨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네 개의 다리’ 사이에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루한 일상을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쉴 새 없이 ‘헤엄치는 버릇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고래를 잡으러 기다린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현실과 그 현실로부터의 이탈은 환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일상에서 마주하기에 거리가 멀어 보이고’ ‘고개 들어 보이는 옆자리 더욱 버’거운 일상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못해 씁쓸해진다. 이 장면에서 사회적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거리가 가운데서 꺾’여 멀어지곤 한다. 우리는 이렇게 아주 가까운 사이이면서 서먹한 눈길과 느낌으로 앉아있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식탁 아래 내면의 열정으로 ‘고래는 살고 있’다. 이것은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주한 일상에 온기가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옆에 둔 듯’ ‘마주한 듯’ ‘그리 멀지 않은’ ‘탁자 밑으로 서로 발끝이 닿는다’ 역시 ‘고래’는 숨어있던 내면의 열정과 열망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자신의 심정과 상상을 투사시켜 더욱 뚜렷한 이미지로 일상을 변주한 것이다. 또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체험을 표현해내고 되새겨보는 형태이다. ‘네 개의 다리로 헤엄친다’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두가 실종된 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그러니 내가 실종되었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생긴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즉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곽경덕의 시에서 끝없는 변주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가령, ‘신을 벗은 고래가 건너와 구두코를 닦고’ ‘양발 벗은 고래가 건너가 발톱을 다듬는’것으로, 다시 ‘마주치다 비껴’ 가던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따뜻한 ‘말끝이 모서리에 걸’고, 마침내 ‘모서리 한쪽이 차츰 둥글어지는 저녁’ ‘출렁이는 바닥’에 푸른 ‘고래가 살고 있다’는 묘사는 일상의 한 단면을 감칠맛 나게 표현한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은 꼬리연을 날리고 싶다
대나무살과 한지로 뼈와 살을 붙이고
지느러미 두 팔을 늘어뜨린다
물 밑바닥을 헤엄치던 가오리 한 마리
밤마다 잠의 꼬리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먼 미리내 마을 길목에서 막아서는 방패
잔뜩 멋부린 채 한쪽 눈을 깜빡거리는
새침을 떼며 풀먹인 실 감았다 푼다
빙빙 돌리다 서로 한 바퀴 감기고
못이기듯 꼬리 흔들며 옆으로 달아난다
밤의 길목은 연緣을 맺기에 불빛이 너무 밝다
쫓고 쫓기며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구름 위를 날듯 얽히고 설키는
한지가 벗겨지고 대나무 살 휘어진다
너무 많이 엮여 되돌아갈 수조차 없는
풀리지 않는 실은 끊을 수밖에
뼈와 살이 갈라지며 연줄을 끊는다
손사래치는 몸짓으로 끝없이 떨어진다
꼬리를 추스르다 잠에서 깨어나
자국 없이 두들겨 맞은 몸, 식은땀에 젖은
바람 부는 날, 연은 하늘에 닿지 않으나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전문
이 시는 풍요로운 상실의 시대에 혼탁한 현실과 고귀한 영혼 사이에 내외적 자유의 억압에 대한 시적 저항으로 보아도 좋다. 또한 소시민적 비애에 대한 성찰로 확대해서 읽어도 좋다. 곽경덕은 자신의 팍팍한 일상을 뛰어넘으려고 성실하게 생활한다. 이런 일상을 감성이나 사유로 묘사하려는 행위는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 시적 사유는 한 곳에 종숙하지 않고 접점의 위태로움을 살려내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일상과 비일상의 양방향 가운데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소통시키기 위해 ‘나는’ ‘물밑바닥을 헤엄치던 가오리’‘지느러미 두 팔을 늘어뜨린다’. 그러다가 ‘밤마다 잠의 꼬리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같은 강렬한 현실의식은 시대정신에서 출발해 일상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현재성을 형상화한다. 현실과 상상력이 만나 팽팽히 긴장하면서 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계곡으로 치닫기는 잠깐이다. 절망에 빠질 때 구원에 이르는 길은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더욱 높이 ‘연을 날린다’, ‘빙빙 돌리다 서로 한바퀴 감기고’ ‘못이긴 듯 꼬리 흔들며’ ‘달아난다’. 밤마다 연을 날리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거나 머리 속이나 기억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기억 속에서 이런 시적 효과는 폭발적이다. 시어들은 기억 속에서 용해되고 분산되고, 그들의 음절들은 서로 갈라진다.
시의 기억은 추억 위로 던져지는 빛이다. 긴장한 일상처럼 ‘쫓고 쫓기며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너무 많이 엮여 되돌아갈 수 없는’ ‘연줄을 끊는다’. ‘손사래치는 몸짓으로 끝없이 떨어진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만남과 이별은 언제나 후회와 슬픔을 원죄처럼 갖는다. ‘바람 부는 날’ ‘연은 하늘에 닿지 않으나’ 나는 밤마다 연을 날리다. 이 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삶의 불꽃을 더욱 타오르게 만든다.
언제부턴가 시계들이 하나 둘 멈춰 선다
주방에 있던 아내의 벽시계가 멈춰선다
방에 있던 아이들의 탁상시계가 멈춰 서고
마루에 서 있던 괘종시계가 제자리를 걷고 있다
그들은 멈추지 않기 위해
새로운 시계를 하나씩 눈에 넣고 다닌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눈 떼지 못한다
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날들
방에서 마루까지 열세 개의 문이 있다
부엌에서 마루까지 열세 갈래 골목이 있다
한쪽 문을 열면 열두 개의 문이 닫힌다
한쪽 모서리를 돌면 열두 개의 모퉁이가 보인다
문이 길을 막고 길이 문을 가린다
그들이 나를 모른 채 하고 나의 말을 듣지 못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시계가 멈춰진다
가끔씩 소리로 들었을 뿐 본 지가 오래된 그 시계
약을 넣고 수리를 한 지는 상당히 지난 일이었다
이제 나의 시계가 기어간다
어딘가 잠자고 있을 그 손목시계, 아직 있을까
다시 들여다보고 소리 들으면 움직일 수 있을까
시계바늘이 혀를 찰 때, 서랍을 뒤진다
-「시계가 멈춰 설 때」전문
이 시는 익숙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섦이다. 지난 과거의 일상들이 처음 마주치는 그 무엇인 것처럼 낯설게 보일 때 안타까움과 후회를 느꼈다면 우리는 이 시의 감성에 젖은 것이다. 이러한 시는 우리를 오랜 그리움이 간직된 시절로 불러 세운다. 지난 시간은 다시 만날 수 없으나 그것들이 표류하는 풍경들을 하나씩 묘사한 것이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에서 아름다웠던 시간을 찾아본다. 시간의 편린을 의미로 남기기 위하여 삶을 되돌아보며 잊고 지내던 ‘시계’를 각각 호출한다. 여기에서 일상의 단절을 표현할 때 ‘시계’가 멈추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데, 이것은 삶의 흔적과 상처는 지우려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삶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언제부턴가’ ‘주방에 있던’ ‘아내의 벽시계가 멈춰 선다’. ‘아이들 제자리를 걷는다’. ‘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날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눈 떼지 못’한다. 이렇게 보편적인 주제로 자기 추스르기를 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아쉬움을 동반한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아쉬움을 동반한 애특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공간에서 숨쉬는 시계가 멈춰선 것은 일상의 존재론적 비극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미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든다. 왜냐하면 현재를 보기 위해 과거의 시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지 포착과 겹치기, 그리고 긴장의 덧칠에 의하여 전개된다. 그는 과거라는 ‘시계’를 찾아서 자기의 서사를 재구성한 다음 ‘열세 개의 문’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러한 발견은 일상에 대한 깊은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는 투명한 ‘문’이 있다. ‘한 쪽 문을 열면 열두개의 문이 닫힌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마주치는 장면들이 간단없이 다가선다. ‘왼쪽 모서리를 돌아서면 열두 개 모퉁이가 보인다’. 누구나 보이는 것만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다. 우리의 삶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시계’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과거의 인간은 시간에 용해되어 있다. 현재는 시간의 습격에 쫓기고 있다. 인류가 발명한 위대한 것들 중 하나가 ‘시계’이다. 이것이 인간을 가두면서 인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은 시간의 지문을 추적한다.
3.
곽경덕 시인의 시집『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를 “끝없는 변주, 그 감축과 드어냄”으로 읽었다. 문학, 바꾸어 말해서 시는 타협을 모르지만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간다. 세상은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 지속된다. 그러나 시작詩作은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작이 민주주의처럼 다수결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대중시일 것이다. 시와 현실은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세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인식이 없는 현실은 꿈꾸는 이상과 숨쉬는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시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패자가 앉아있는 자리, 그 곳이 시의 자리이다. 시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거짓이나 앞장서기나 다른 곳으로 널뛰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곽경덕은 소외되어있는 사람들과 도시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친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시「자전거 하이제크」,「나사를 조이며」「떡두꺼비」「뉴스는 제로다」「무」「맨홀3」「마루」「경인천」등에서 전개되는 시구詩句마다 긴장감이 절묘하게 전개되어 있다. 또한 대칭의 구도가 선명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탁월하게 이루어내고 있다. 이렇게 시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고,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느낌을 받지 못하는 시현실詩現實은 우리의 이중적 자세, 즉 새로운 시를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시를 위하여 과거의 시 형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경덕은 처음부터 체험이 많은 시인들과 만났으며 여럿이 더불어 만날 수 없는 시인들까지 만났다.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인은 개인적으로 외롭게 시를 만들지만 세상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산재한 모티브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죽을 때까지 고통과 좌절 속에서 현실을 능동적 태도로 담아내야 한다.
곽경덕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로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닌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시인은 바다를 닮아야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새로운 본질을 부여받은 시인으로써 정신의 자유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가져야 한다.
시는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짧은 여행이다. 또한 시인은 일관되게 비범한 감정과 더불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희생이 뒤따르는 길이다. 시인은 고통스런 반복 속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은 유기체를 만든다. 새로운 시를 만드는 시인은 똑같은 형태와 특징 없는 시구詩句를 쓰는 시인과 구별된다. 새로운 시란 반복이 유일한 길이며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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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경덕 시인∥
∙ 2015년『시와 산문』으로 등단했으며,
∙ 시집『나는 밤마다 연을 날린다』가 있다.
∙ 현재 시와산문문학 회원
∙ <시의 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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