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부리 영감
어린 시절에 들었던 도깨비 이야기는 지금 나이 먹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아스라이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그리운 향수다. 일전에 어느 명사들이 쓴 신문 칼럼에도 이런 향수담이 실려 있었다.
한밤중에 나그네가 숲길을 걸어갔다. 달빛 닮은 여인이 나타나 그를 유혹했다. 그녀의 오두막에서 기분 좋은 하룻밤을 보낸 나그네, 아침에 일어나니 부지깽이 한 자루를 안고 있었다. 지난밤 그를 유혹한 아름다운 여인은 백 년 묵은 여우 도깨비였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이 땅의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는 밤만 되면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했다. 밤새 도깨비랑 싸우다 간신히 도깨비를 넘어뜨리고 상처투성이가 돼 돌아왔다는 아저씨도 있었고, 도깨비가 등에 올라타고 놔주질 않아 논바닥을 구르다 간신히 떼어 놓고 달아났는데, 날이 밝아 찾아보니 싸리 빗자루였더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할머니는 도깨비 퇴치법도 함께 일러주셨다. 도깨비를 만나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상대를 깔보는 눈빛을 해야 한다며 직접 시범까지 보여 주셨다. 그놈 머리 쪽을 쳐다보면 몸뚱이가 집채만 해져서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단다. 무조건 발 쪽을 봐야 해. 그러면 도깨비가 순식간에 개미처럼 쪼그라들어서 네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녀석이 알아서 줄행랑을 치게 될 거야. (이하 생략)
얼마나 향기롭고 할머니 냄새가 나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우리는 우리 도깨비의 참모습을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도깨비의 모습은 머리에 뿔이 있고 원시인 복장을 한 채, 손에는 못 박힌 몽둥이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깨비는 우리의 도깨비가 아니고 일본의 요괴인 ‘오니(おに)’다. 일제강점기 교과서에 일본 전래동화 ‘혹부리영감’ 이야기가 실리고, 오니가 등장하는 삽화까지 그대로 쓰이는 바람에 오니가 우리의 도깨비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를 만들 때, 일본의 것을 가져와 그대로 베끼면서 일본의 요괴가 우리의 도깨비로 변신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 교과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혹부리영감’ 이야기를 싣고 일본의 삽화까지 그대로 가져다 썼다. 일본이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제의 조선 통치정책으로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라는 뜻)’라는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그렇게 끼워 붙인 것이다. 그 뿔 달린 오니 삽화는 일제 침략기 내내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당시 문교부는 비판적 검토 없이 혹부리영감 이야기와 삽화를 그대로 교과서에 수록했다. 이런 영향으로 ‘혹부리영감’이 한국 전래 민담으로 둔갑해 동화책으로까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