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Noah]
노아와 홍수의 유명한 이야기는 창세기 6~8장에 나온다. 인간이 심하게 타락하자 신은 인간 전부를 파멸시키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8). 그 이유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노아는 500살의 늙은 나이에 셈, 함, 야벳의 세 아들을 두었다.
신은 노아에게 노아와 그의 아들들, 며느리들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암수 한 쌍씩과 함께 탈 수 있는 커다란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다. 신은 방주의 정확한 크기를 말해주고, 노아가 모든 동물들을 방주에 넣자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그 뒤 비가 40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내려 인류 전체가 물에 빠져 죽었다. (방주는 배가 아니었으므로 노 같은 항해 장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보호소 같았고, 어디에 상륙할지는 신의 뜻에 달려 있었다.)
물은 150일 동안이나 빠지지 않았다. 방주는 이내 아라랏 산에 이르렀다. 부근에 마른 땅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보냈으나 비둘기는 뭍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한 주일 뒤 노아가 다시 비둘기를 보내자 이번에는 올리브 가지를 부리에 물고 돌아왔다. 물이 빠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후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가족과 동물들이 방주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뒤 노아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신은 이제 다시 세상을 홍수로 파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성서에서 최초로 제단과 제물이 언급된 경우다.) 그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였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세기 9:13).
신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했는데, 현명한 충고였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이은 후손들의 명단이 나온다. 개략적으로 말해 함은 현대 아프리카인의 조상이고, 야벳은 유럽인의 조상, 셈은 중동인의 조상이다. 유대인을 비롯한 중동의 여러 종족들이 스스로 '셈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히브리인, 가나안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아랍인 등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고대 민족들의 집단을 '셈족'이라고 부른다.
신의 명령을 받아 주위의 조롱을 무릅쓰고서 방주를 만든 노아는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미덕을 가졌음에도 창세기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전한다. 문제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다(그는 포도 재배 기술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그것을 재미있게 여긴 함이 다른 두 형제에게 말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함보다 더 컸던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로 노아의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쳐다보지 않고 옷으로 덮어주었다. 아버지에게 불경스러웠던 함의 자손은 노아의 저주를 받았다(창세기 9:26).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저주 때문에 (함의 자손인) 아프리카인들이 오랫동안 노예 상태로 있었다고 말한다.
노아의 이야기에서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그가 500살 되었을 때 신이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600살 때 방주가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노아는 950살에 죽었는데, 이것은 969살까지 산 그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에 근접하는 기록이다. 만약 창세기의 연대 기록이 옳다면, 므두셀라는 늙어 죽은 게 아니라 홍수 때문에 죽은 게 된다.
노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홍수의 전설은 전 세계에 여러 가지 변형이 있지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독특하다. 신은 특정한 이유에서(인간의 타락) 홍수를 내렸고, 노아는 특정한 이유에서(선한 사람) 살아남았다. 방주는 악이 파멸했을 때 선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이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방주는 천국의 희망을 상징했다. '방주'라는 말은 파멸로부터 벗어난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 나치의 손아귀에서 유대인을 구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토머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쉰들러의 방주 Schindler's Ark』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노아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아버지였다. 다행히 그는 최초의 인간 아담보다 더 선량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신약성서에 노아는 신앙심이 깊은 인물로 몇 차례 언급된다. 에스겔 14:14는 노아를 다니엘, 욥과 더불어 세 명의 선한 사람으로 꼽는다. 예수는 신도들에게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그랬던 것처럼 심판의 날도 예기치 않게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마태복음 24:36~39).
하지만 코란에서는 노아의 아내인 와일라가 사람들에게 남편이 미쳤다고 말하고 다닌다. 무슬림 전설에서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는 천국에 사는 열 가지 동물 중 하나다. 알코올 중독에서 생기는 해악을 우려한 일부 유대인들은 노아가 포도주를 빚은 일을 사탄의 탓으로 돌렸다. 전설에 따르면 사탄은 양, 사자, 원숭이, 돼지의 피로 포도나무에 거름을 주었다고 한다. 그 네 동물은 각기 의미가 있다. 포도주를 마시면 사람은 유순해졌다가(양), 사나워졌다가(사자), 어리석어졌다가(원숭이), 결국에는 진흙탕에서 뒹굴게 된다(돼지).
노아와 방주는 미술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다. 화가들은 동물들이 줄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즐겨 그렸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덜 유쾌한 주제도 여러 차례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선한 사람도 때로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에는 두 가지 상황의 노아가 다 나온다. 술에 취한 장면에서는 세 아들도 벌거벗은 모습이다. 술에 취한 노아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조반니 벨리니가 1515년경에 그린 「술 취한 노아」일 것이다. 이 그림에서 노아는 장막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누워 있다. 세 아들이 옷으로 그의 몸을 덮는데, 하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고, 또 하나는 킬킬 웃고, 나머지 한 아들은 공손하게 시선을 돌린 자세다.
노아의 이야기는 무대에도 올랐다. 저명한 극작가 클리퍼드 오데츠(Clifford Odets)는 그 이야기를 『꽃이 핀 복숭아나무 The Flowering Peach』라는 작품으로 극화했다. 이 희곡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투 바이 투」는 코미디언인 대니 케이가 주연을 맡았고 리처드 로저스가 음악을 담당했다. ('투 바이 투'란 물론 방주에 탄 암수 한 쌍의 동물들을 가리킨다.) 중세에 노아는 추리극의 인기 있는 주제였다. 노아를 다룬 연극에서 그의 아내는 흔히 홍수의 예언을 미친 소리라고 여기는 잔소리가 심한 여자로 묘사된다. 노아는 영웅이라기보다 어릿광대 같은 모습이며, 술병을 든 공처가 남편으로 등장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흑인 노예의 말투로 각색한 미국 남부 작가 로아크 브래드퍼드(Roark Bradford)의 『아담 노인과 그의 자손들 Ol' Man Adam an' His Chillun』에서도 노아는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영화 제작자들도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놓칠 리 없다. 초기 대작은 1929년에 개봉된 「노아의 방주」였다. 1936년 영화 「푸른 초원」은 배우들이 모두 흑인으로 캐스팅되었고, 에디 앤더슨이 주연을 맡아 선량하면서도 코믹한 노아를 연기했다. 노아 이야기는 1966년 영화 「천지창조」에서도 핵심이었는데, 여기서 노아의 역할은 영화의 감독인 존 휴스턴이 맡았다(그는 또 신의 목소리와 해설자의 역할도 담당했다). 질이 좀 떨어지는 1999년 TV 영화 「노아의 방주」는 창세기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황당무계하게도 해적을 끌어들였다.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은 노아의 이야기로 「대홍수」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노아의 이야기는 성서의 내용 중 가장 세속화된 부분일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신이 인간의 죄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버릴 만큼) 얼마나 완강한 태도를 취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종교적이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 이야기는 인간이 야생동물들을 방주 안에 집어넣고 긴 폭풍을 견디는 내용, 바꿔 말하면 떠다니는 동물원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니 애완동물 용품 체인점의 명칭이 노아의 방주인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아동 도서는 무수히 많지만, 방주에 탄 동물을 그린 미술 작품들이 그렇듯이 대부분 그 이야기의 종교적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 창세기에는 방주가 상륙한 곳이 아라랏 산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방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아라랏이라는 이름의 산은 터키와 이란의 경계에 있는데, 아직도 두 나라 정부는 고고학자들의 탐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창세기에는 많은 산들이 나오기 때문에 오늘날 아라랏이라는 산이 바로 방주가 상륙한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아 [Noah]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J. 스티븐 랭, 남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