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농가주택인 줄 알았다. 큼지막한 백구가 자기 집에서 나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기 전까지는. 밭뙈기라 할 것도 없는, 작은 공간 옆에 지어진, 허름한 농가를 따라 산자락에 붙으려는 순간, 천천히 몸을 드러낸 백구 한 마리가 너희들 누군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새벽 4시40분. 14개의 마빡불이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짖지도 않고, 여유있는 자세를 취한다는 건 어지간한 담대함과 평정심이 없고서는 취하기 힘든 포스이다. 두둑한 뱃심이 있는 녀석이다. 비록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대견하다.
다짜고짜 한굽이 올려치니 숨통을 틔어 주려는 듯 넓직한 무덤가가 나온다. 모두 앉아 등산화도 조이고, 장비도 점검하다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쏟아질 듯하다. 이건 오리온자리, 저건 카시오페아 그리고 북두칠성, 북극성 – 밤은 칠흙같고, 공기는 알싸하다. 14개의 얼굴이 하늘바라기를 하는 광경도 따지고 보면 저 별들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개개의 별은 실은 성운인데 하나의 별로 보일 뿐이라고 설명해주는 도자의 강의 주제가 에이리언으로 바뀔 무렵 일어나 길을 재촉한다.
봉화군 소천면 두음리. 두메님은 노란색 버스가 종일토록 마을안쪽에 서있는다고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냐는 내 질문에, 뭐라는 것은 둘째치고 하루내내 사람구경을 못하였다고 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땅을 오지라 정의한다면, 이곳이야말로 그 정의에 딱 들어맞는 곳이다. 영양가는 31번 국도에서 시멘트도로를 타고 한참을 들어온 소천초교 두음분교장 인근. 두음교에서 만인골 우측능선으로 죽미산을 오른다. 경사는 급하고 나뭇가지의 저항은 심해도 소복이 쌓여있는 갓 떨어진 낙엽을 밟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사각사각 그 소리가 맛있다.
오늘의 깜짝 선물은 무한과 스틸이다. 대학교수이신 온내님은 무단출석했다가 가이버에게 야단맞은 뒤, 그 문화충격을 몇 번이나 말씀하신바 있지만, 명단에 없이 등장하는 인물은 언제나 우리에게 망외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산사람의 3락은 ‘산에 가는 것’, 그것도 ‘가고 싶은 산에 가는 것’, 더하여 ‘함께 하여 기쁜 사람들과 가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짜임새는 예정에 없이 출현하면 더욱 환영을 받는다는 현상을 관찰하여, 이를 농담의 소재로 삼은 바 있지만, 어쨌거나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여명이 밝을 무렵 죽미산에 도착한다. 동쪽으로 희미한 빛이 나타나고 산그리메와 나무들의 모습이 분간된다. 저 밑으로 운해가 골짜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도 보인다. 요란스럽지도 않고 무언가 비어있는 듯 소박하고 차분한 풍경이 한층 정감있게 다가온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길을 간다. 흩어질 듯 합치고, 합칠 듯 흩어져 진행한다. 혼자 떨어져 갈 때는 혼자의 생각에 빠져, 모여 갈 때는 누군가는 얘기하고 누군가는 들으며. 상도의 독서량이 많다는 것은 그의 얘기 내용이 항상 신선하고 소재의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생에 있어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게 삼분지 일이라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나 대화로 삼분지 일, 그리고 나 자신의 쓰디쓴 경험으로 나머지 삼분지 일을 채우는 법이다.
오늘 오른 죽미산을 중심으로 본다면 동쪽으로 남회룡산 서봉(지도에 없는 봉우리명칭인데, 누군가가 붙여놓았다)에 이르러 북으로는 횡악산, 남으로는 장군봉을 지나 일월산이나 제비산에 다다를 수 있고, 일월산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 북쪽의 지맥들이다. 일월산에서 덕산지맥을 따라 청량산에도 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백작이 ‘어디를 둘러봐도 산이네요’ 라고 말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첩첩산중이란 바로 이곳을 일컫는 말이리라.
처음 만나는 임도에 도달하자, 봉화군에서 낙동정맥 트레일이라는 명칭의 트레킹 코스를 개설해 놓은 것 같다. 현재 위치는 외씨버선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나중에 남회룡산 서봉을 지나 점심을 먹고 다신 만난 임도에도 여전히 외씨버선길이라는 명칭의 팻말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엄청 긴 임도인 모양이다. 아마도 교통편으로 보나 뭘로 보나 보통 사람들이 걷기는 힘들 거고 자전거 도로로 이용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소위 남회룡산 서봉을 지나서 점심상을 편다. 무한이 지난 번 소고기 육전에 이어 오징어 회무침을 가져왔다. 삶은 오징어를 따로, 초고추장을 따로, 오이와 무, 배, 당근, 양파를 따로. 즉석에서 무친다. 가져오는 음식마다 대박이니 그의 필살기가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기에 질세라 모닥불도 왕새우, 대합, 만두, 오뎅을 듬뿍 넣은 김치찌개를 선보인다. 얼큰하고도 시원하여 자제가 안된다. 도자는 후식으로 따끈한 커피를 내놓고. 무거운 코펠, 빠나를 짊어지고 고생한 상고대와 도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일월산 천문대
배가 너무 불러 걷기 힘들 정도다. 장군봉 오를 일이 걱정이다. 중간에 임도를 만나 잠시 숨을 고르고 장도에 나선다. 이제까지는 나뭇가지의 방해만 있었을 뿐 육산이었지만, 장군봉 산허리에 이르자 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비켜가며 한바탕 힘을 쓴 끝에 장군봉에 오른다. 차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장군봉은 어쩌면 진짜 정상에는 오를 수 없는 일월산보다 전망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정남방향으로 아까부터 보이던 일월산 천문대가 선명히 잘 보이고, 멀리 서남쪽으로는 청량산이 뚜렷하다. 북쪽으론 비룡산과 달바위봉도 보일 텐데 경황이 없어 구별하지 못하였다.
제비봉으로 나선다. 오전과는 달리 고행길이다. 거의 계속해서 닭벼슬 같은 암릉이 도사리고 있어 진행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한동안 바위지대를 지나고 괜찮아지겠지 하면 다시 나타난다. 거리로 보면 길지는 않아도 지난 번 가야산 같이 뻥뚫린 곳과는 다르다. 암릉을 만나면 우선 올라타야 될지, 우회하여야 할 지, 그 경우 오른 쪽이 나은지, 왼쪽이 나은지 살펴보아야 되니 부질없이 시간만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에 비해서는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장군봉 기상관측시설
청량산 조망
장군봉 암석군
1100m을 통과하고 1000m봉을 지나, 전체 투표에 부친다. 컨디션 괜찮은 인샬라나 백작, 산그림애 등과 특공대를 조직하여, 제비산을 갈 것인가, 모두 함께 행동할 것인가. 그러나 다훤, 한계령님을 위시하여 대다수가 같이 왔으니, 같이 가잔다. 지당하신 결론이다. 10년전에도 있던 제비산인데, 어디 가겠는가. 하산시간 맥시멈을 오후5시로 정하고 갈 때까지 가보기로 한다. 상고대는 일찍이 팀산행과 관련하여 벽력같은 한 말씀을 남긴 바 있다. ‘어차피 산에 와서 하루 놀다 간다고 마음 먹는다면 어느 산을 가면 어떻고, 얼마 만큼을 걸던 어떠하겠는가’ 가만히 가슴에 새기어 보라. 어지간히 도가 통하지 않고서는 그 참뜻을 새길 수 없을 것이다.
벽암록 제6칙에서 저 유명한 운문화상이 말하였다. ‘세상사람들은 비가 오면 날씨가 나쁘다 하고, 비가 그치면 날씨가 좋아졌다고 한다. 계속 해만 쪼이면 가뭄이 든다 하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다 하고 소란을 피운다. 그러나 우주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체에서 보면 소나기도 태풍도 홍수도 가뭄도 모두 자연현상일 뿐 거기에 선도 악도 없다. 우주의 절대적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날마다가 참 좋은 날이다. – 좋은 사람들과 좋은 산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다. 더 바랄 게 없다.
나무의 예술
제비봉
847봉을 지나 제비산을 약 1시간 거리 남겨둔 곳에서 하산하기로 한다. 차가 서있는 두음분교장이 목표다. 여기도 까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암릉은 오르기보단 내리기가 까다로운 법. 아예 무조건 아래를 향해 내리려고 산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여기라고 수월할 리가 없다. 절벽처럼 생긴 돌덩어리 위에서 곤혹을 치르다가 계곡을 건너 바위 사이의 길을 잘도 찾아 내려가는 메대장을 얌전히 따른다. 그러나 산허리에 나있는 임도에 이르니 거의 수직에 가깝게 깎아 놓은 사면의 돌 부스러기가 흘러내려 위험하기까지 하다. 모닥불은 쏟아지는 돌덩어리에 머리를 맞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밑에서 악쓰고 소리치고 전쟁을 치른 끝에 모두 무사히 내린다.
임도에서 일단 전열을 정비한 다음 다시 하산작업에 들어간다. 내가 먼저 나타난 능선에 들었지만, 뒤에서 거기가 아니네요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가운데, 홀로 외로운 새가 된 나만 사면치기로 길을 찾아간다. 몇 굽이 돌아 제 등로에 들어서자 여기는 훨씬 부드러워 이제 제대로 하산하는 기분이 난다. 고추밭을 지나 창고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두음교에 이르니 아침에 출발했던 농가가 보인다. 완벽한 원점회귀산행이 된 것이다. 산그림애가 아침에 올랐던 곳을 보고 한마디 한다. ‘아니 아까 저 걸 올랐단 말이야?’ 무한이 버스에 오르며 칼퇴근이라며 재미있어 한다.
산허리 임도, 경사가 심해 위험하다
하산지점 단풍나무
이미 가을이 무르익었다. 봉화로 나가는 차창 밖으로 추색이 완연하다. 인생은 흐르기만 할 뿐 되돌릴 수 없는 것. 31번 국도를 따라가면서 보이는 낙동강이 즐거운 추억을 선사한다. 맨발로 차가운 강물에 뛰어든 메대장과 산진이 형의 용감무쌍한 모습. 그리고 소천면 소재지 현동에 이르자 배대인님과 베리아의 잠 못들은 밤. - 추억으로 먹고 사는 일이 늘어난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만 흐르는 게 아니니 그저 두 눈 꼭 감고 즐겁게 살 일이다. 어디 한 잔 진하게 마셔보자.
첫댓글 참 쉽고 재미나고 맛깔나게 써셨습니다.
"우주의 절대적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날마다가 참 좋은 날이다."
– 좋은 사람들과 좋은 산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다.
더 바랄 게 없다.
제가 추구하는 산행입니다.
몇시간에 주파하고, 몇미터를 오르고, 어디를 어떻게 가고...
그런건 저한테는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산에 있다는 것 그게 제일 좋지요....
그래서 독도가 안느는걸까요? 길 잃고 혼자 낭패보기 싫으면 빨리 숙달하긴 해야할텐데 별 재미를 못느끼니 어찌합니까? ㅎㅎㅎ
산행길 독도하시랴
작업?하시랴?
이젠 기자정신에 입각하여 사진도 찍으시랴?
하여튼 바쁘디 바쁘십니다.
게다가 이렇게 재미나고 입가에 웃음이 피어나게 하는 산행기까지 하시느라...
보는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웅 성
모닥불님이 머리에 돌을 맞으셧지만 큰 상처는 아닌 것 같네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무한과 스틸의 깜짝 출현에 대간거사님이 엄청 기쁘셨나 봅니다. 산정무한님 나도 보고싶네요........
산행기에 출연했으니 댓글로 감독의 캐스팅에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하리..
같이 하는 산행, 같이 즐기는 산행, 같은 목표를 갖는 산행, 같이 즐거운 산행
이런 것은 그냥되는 것이 아니고 고수들의 하수 보살핌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산행에서 무단결석보다 무단 출석이 더 중벌로 간주되는 것도,
장거리 이동하며 멤버들에게 오는 예기치 않은 부담을 줄여 주려는 고수들의 헤아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임을 이끄시는 고수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비칩니다.
장군봉,제비산을 향한 몸짓
그곳에
내님이 계신 듯
발걸음 재촉하지만
둔탁한 몸,고행이어라.
닭벼슬 암릉...
온 힘이 소진된 듯
고운 철죽잎
부딛침 따라 우수수..
꽃비되어 위로의 손길을
낙엽 속 박힌 돌 섬짓하여
마음엔 보호의 손길을 ...
불안했던 마음
산행이 거의 끝날 무렵...
다행히 그 돌은 가속도가 없었기에
내곁에 항상
보호의 손길...
감사함 그리고
신뢰와 사랑을 ...
- 함께한 님들 감사합니다!-
가속도가 없었다는 말은
누가 일부러 던진 돌이 아니었다는 말씀이네요????
@온내(김만구) 돌담처럼 쌓인 곳을 2사람이 지나가고 제가 그곳을 지나자마자 넘어지고 넘어진 머리위로 돌이 스스르 떨어져서 그 당시만 얼얼했습니다.
외씨버선길이 이렇게 이어지니 다리에 힘있을때 함 가봐야 겠네여
길게도 쓰네요 갔다 왔다라고만 써도 다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