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문에 서있는 군졸 두 명이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북문에서 體城 31m와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곽 위에 낮게 쌓은 담인 女牆 64m 와 성곽 방어를 위해 성곽 앞에 조금 돌출된 부분인 雉는 근래 복원되었다.
복원되지 않은 丘陵地 끝에는 팽나무 그늘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벤치가 있다.
위로는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건물인 서장대가 있고
아래로는 영혜의 모교인 동래여고 옛 자리에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가 있다. 그 당시 교정에서 찍은 영혜의 사진들을 보니 校舍 앞에 아름드리 벚나무 수십 그루가 하얀 벚꽃을 피우고 있다.
그 校舍는 단순히 역사성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가치도 높아 보여 근대 유산으로 보존 가치가 충분한데 그 당시 정상배의 巧言과 권력자의 傲慢으로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말았다.
이곳 동래읍성 서쪽 구간은 자비암과 동래 복천 현대 아파트
에 의해 끊긴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으로 된 내리막길 끝 동래로에 동래향교가 있다,
동래향교는 명륜 사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위치적으로 據點인데도 마치 이곳 만이 그때 그시대 그장소로 빠져 드는
것 같은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 있다.
나는 교육생 한 명을 귀가시키기 위해 마을버스인 동래 6ㅡ1번을 이용하고 돌아올 때는 동래시장 신가네 호떡을 입에 물고 그때 그시절을 회상하며 허느적거리며 다니도 되는 그런
인적이 드문 거리다.
향교 동래로 맞은편 교육생 도규 집 앞 골목은 옛 날 기와집 황토 담장과 담쟁이덩굴이 비에 젖어 붉은색에 초록이 배어
들어 생기가 넘치고 석류나무 , 대봉 감나무, 목련 등의 가지가 이끼 낀 기와 담장을 넘어와 사시사철마다 초록 잎에 빨간 석류꽃, 노란 감꽃, 백목련, 홍목련이 가는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보건소 앞에서 만나는 옛날에 서면 학원 수학선생은 "수학의 정석 저자" 가 자기 친구임을 자랑하면
나는 그 당시 수학과 영어의 지존 비슷한 위치에 놓여있었던
정통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왜 그렇게 어려워던지가 새삼 떠올랐다.
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儒學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官學 교육기관이다. 시대적 배경은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수준에 도달한 고구려가 개경에 太學, 백제가 박사, 신라가 大學을 세웠던 사실은 새로운 정치이념과 권력구조의
모형을 유교 속에서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삼국시대 교육에 대한 것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의 교육과 학문
ㅇ태학 : 우리나라 최초의 관학
ㅡ소수림왕 2 년 (서기 372)에 설립
ㅡ귀족과 특수 계급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관리 양성기관
ㅡ 교육과정 : 5경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주역), 3 사 (사기 헌서 후한서) 삼국지등 교육
ㅇ 경당 : 우리 나라 최초의 사학
ㅡ초등에서 대학까지 담당한 최초의 사립교육기관
ㅡ일반평민과 지방부호들의 미혼자제를 지도대상으로 함.
ㅡ 경전과 활쏘기 교육
백제의 교육과 학문
ㅇ학교교육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많이들 나와있는 사례가 많으나,백제에서도 태학이라고 불러, 그곳을 졸업한 자에게는 박사라고 불렀다
ㅇ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한 학자(왕인)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교육도 상당히 발달되었다고 본다.
신라의 교육과 학문
ㅇ 국학(통일 이후의 교육)
ㅡ 신문왕 2년(682년)에 당의 영향을 받아 세운 유교 교육기관으로 신라의 관학이었다.
ㅡ 관리양성과 유학의 연구와 보급
최초의 교육기관은 고구려의 太學인데 이후 통일신라의
國學, 고려의 國子監, 조선의 成均館으로 이어졌다. 이들 교육기관은 고급관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 王建 이후 역대 고려왕들은 유교를 새 사회 질서의 근간
으로 왕실뿐만 아니라,기층사회까지 유교 이념을 침투시키
려는 기구로 향교제도를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하향적인 통치방향과 함께 신라 말 고려 초에 등장한 지방호족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학원을 세워 유교
를 교육하였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파악할 때 향교는 상향적·하향적 요구의 합치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향교는 상향적 역사운동
에서 나타난 측면보다는 하향적 운동과정에서 형성된 교육기관
으로 파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