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마지막은
버리는 것부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같은 라인 32층에 서울대학 농대학장을 역임한 교수가 살았다. 19년 전 아파트 신규분양 때부터 함께 산 이웃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도 나누곤 했다. 당시 나는 60대 초반이었고 학장은 77세셨다. 그는 얼굴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여 더 정정해 보였다. 마님과 함께 단지 내 산책도 하고 두 분이 손잡고 외출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녔는데 주일이면 어느 대학 교수라는 사위가 와서 픽업해 모시고 교회를 오갔다.
그러다가 7년 전 마님이 돌아가셔서 비교적 넓은 집에서 홀로 사셨다. 여전히 주일이면 사위와 딸이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수원에 산다는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외출하는 모습을 딱 한 번 보았다. 언제쯤인가 사위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는데 그 사위는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후 학장님이 혼자서 아파트 단지를 쓸쓸하게 거니는 모습을 보며 인생 마지막 행로가 누구에게나 다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두어 달 전부터 학장님이 눈에 띄지 않아 궁금했지만 남의 일이라 그냥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어제는 우리 라인 주차장에 책이 가득 찬 커다란 탑차가 보여 직감적으로 학장님 책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오전에 아내가 쓰레기 버리러 나갔더니 아주 고급스런 책장을 비롯한 꽤나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한 살림 가득 나와 있더라고 했다. 값깨나 나갈 만한 서양화 액자들 그리고 교수님의 박사학위 학위모를 쓰고 찍은 사진까지.
가구들은 중고가구점에 연락하면 ‘얼씨구나’하고 가져 갈만한 고급품이고 학장님 사진과 가족사진은 태워버리지 않고 왜 저리 내다버렸는지 자식들이 원망스럽더란다. 학장님은 95세로 세상을 살다 가셨지만 인생의 끝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저렇게 쓸쓸하고 허망하게 끝나나보다 싶어 새삼 인생무상이 떠오른다. 전하고 싶은 말은 학장님의 죽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 마지막에 대한 대비이다. 젊은 시절 나도 그랬다.
자식들이 태어나 한창 자랄 때 식구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집안이 들썩거리던 기쁨과 그 사랑과 좀 더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꾸며 놓고 만족해하던 시절. 자식들 공부 잘해 가슴 뿌듯해하고 또 공부 못해 가슴 조이던 시절. 세월 따라 그런 오붓한 시절은 점차 사라지고 자식들은 제각기 자기 일, 자기 가정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기둥 같던 엄마 아빠는 병들어 쇠약해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면 그 가정은 허물어지듯 해체돼 버린다는 사실.
지금 내 앞에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하나하나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도 붙들고 있는 것이 많다. 책이며 옷이며 가구들이며 모든 것이 한낱 쓰레기가 될 것인데 젊은 시절 읽던 책들 더러는 읽지도 않고 쌓아둔 것도 있고 내가 아껴 입던 옷들은 드라이클리닝 후 비닐커버도 벗기지 않은 그대로다. 많은 추억사진들과 나름 욕심내서 산 브라운톤 오크 가구들은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요즘 애들은 유행에 맞지 않으니 그냥 버린다. 그러니 아까운 것이 어디 있나. 내가 세상 떠나면 다 버려질 것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