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무련’이 성공리에 조직을 마치고 활동에 들어가자 김좌진과 김종진, 이을규는 ‘한족총연합회’의 결성에 나섰다. 그 결과 ‘재만무련’과 신민부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방식은 신민부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재만한족총연합회로 개편한 것이다. 단체의 조직과 운영 역시 이회영의 정신에 따른 이을규, 김종진의 주도로 일궈 낸 성과였다. 한족총연합회는 목적을 “재만 한족의 정치적 경제적 향상 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 구국 완수를 위해 재만 동포의 총력을 집결할 교포들의 자주 자치적 협동체” 임을 선언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재만무련’과 유사한 사업목표를 정하고, 간부회의의 공천에 의해서 임원을 선출하였다.
총연합회위원장 - 김좌진
부위원장 - 권화산
농무위원장 겸 조직선전위원장 - 김종진
부위원장 - 한청함, 정신
교육위원장 - 이명원(이을규)
부위원장 - 박경천
군사위원장 - 이붕해
부위원장 - 강석천
각부차장 - 이달, 김야봉, 김야운, 이덕재, 엄형순
중앙조직을 마친 간부들은 지방으로 파견되어 조직활동을 벌였다.
재만 동포들은 농민 속에 들어와 함께 일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한족총연합회에 적극 찬동하여 가입자가 날로 늘고 조직이 확대되었다. 그러던 중 한족총연합회의 구심인 김좌진이 암살되었다. 이회영은 1930년 초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등 활동을 하고 있던 이을규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김좌진 장군의 암살 소식이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공작이 이처럼 급진전을 보게 되니 일제의 영사관과 그 주구들의 방황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간도 공산당사건 이래 진용 재정비를 서두르고 있던 적색분자들의 방해공작도 당연히 예상되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회 측에서는 일제 주구들과 적색분자들의 준동을 특별히 감시하라고 각지에 시급히 지시했다.” 그러나 적대 세력의 도발은 이어지고 예상은 적중되었다. 김좌진과 연합회 간부들은 운동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정미공장을 짓기로 하였다. 동포들의 미곡 생산을 정미하여 줌으로써 중국 상인들에게 이익이 농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즈음 10월부터 총연합회에서는 산시(山市)에 정미공장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농무소관 사업이므로 시야(김종진)가 주재하고 백야(김좌진)도 일을 도왔다. 중동선 일대 교포들의 개척 농지에서는 매년 수 만석의 미곡이 생산되므로 정미공장과 위탁판매로서 중국 상인들에게 이익이 농단되지 않도록 동포들을 보호코자 한 것이었다. 1930년의 새해가 밝았다. 동지들의 희망과 기대는 자못 컸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 비운이 닥쳤다. 만주 운동의 대들보가 부러진 것이다. 1930년 1월 20일 오후 4시경 백야 위원장이 공장수리를 지시하러 나갔다가 공산당원 김봉환(일명 金一星)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金信俊)의 권총 저격을 받고 넘어졌으니 재만 동포 200만은 앞이 캄캄했고 일제 주구와 공산분자는 손뼉을 쳤다. 앞이 캄캄하기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차에 독립운동의 거목 김좌진의 암살소식은 큰 절망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쳤다. 강폭한 적을 앞에 두고 민족진영 내부에서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쟁투와 대립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신이 일찍부터 주창해 온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지도부 구성이 새삼 절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