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dWUDthXcyI
예배영상
히 12:13, 저는 다리로 고침을 받게 하라. 24-12-1
권투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 체력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더 잘 싸울 수 있었는데’라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전투입니다. 전투라고 했으니,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전쟁터인 것입니다. 대충대충해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신앙생활을 대충대충해서, 신앙인들이 자기 멋대로 해서는 결코 승리, 곧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고통받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록된 편지입니다. 지금 히브리인들이 같은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고통과 혹독한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시련과 고통이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동족 히브리인들이 가하는 시련입니다.
단적으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에게 고통을 받으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히브리인들입니다. 자기 민족,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셨는데,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취급을 했습니다.
요 1:11, 자기 땅3)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각주 3) 또는 자기 소유에
히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합니다. 곧 기쁨이 있을 것이니까, 지금의 징계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고, 십자가와 징계를 참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 결국 좋은 날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러므로 징계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으라.
기안 84가, 뉴욕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TV는 매일 재방송을 해 됩니다. 기안 84는 이번 대회를 위해서 러닝코치와 훈련해 왔습니다. 마라톤 경주자들은 다 징계, 곧 훈련을 받아들입니다. 고된 훈련이지만, 이 경주에 참여하기 위해서 훈련을 합니다.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은 감독과 코치의 훈련계획을 따라서, 싸워 이기는 법을 배웁니다. 어떻게 후려치고, 어떻게 자기방어 및 보호를 하고, 또 상대를 넘어뜨리는지를 훈련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검투사들은 매우 혹독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훈련일 뿐입니다. 누구도 그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 경기에 들어서면, 죽든지 살들지 할 것입니다. 그러니 검투사들은 훈련의 강도를 통해서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징계의 강도에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도 부끄러움 십자가의 징계를 개의치 않으시고 참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징계가 슬퍼보이지만, 징계로 말밍마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연단/훈련받은 자들은 실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가장 보배로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둘째.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검투사들이 훈련 중에 손이 피곤해서 쭉 늘어 뜨려져 있고, 무릎은 연약해져서 자빠져 있다면, 실제 전투에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적의 칼날이 그 지쳐 있는 검투사의 목을 잘라 버릴 것입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손은 피곤하고, 무릎은 연약해져 있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런 지경에 이르렸습니다.
검투사들이나 권투선수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무기와도 같은 손이 피곤해서 들 수도 없다면, 바로 적의 주먹이나 칼이 들어닥칠 것입니다. 경주자들이 경주하면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면, 그 경주자는 다리를 계속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다리의 신경이 다하고 쇠약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무기력한 상태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일으켜 세우라’고 말입니다.
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기안 84가, 특히 마라톤 코스 중 ‘죽음의 다리’라 불리는 퀸즈버러교를 만났을 때,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바닥에 주저앉고, 결국 벌러덩 누워버렸습니다. 그는 몸이 방전된 상태에서 “인체의 신비가 와요”라며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참가 선수 5만5,508명 중에선 3만 6,625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출전 선수로는 154명 중 114번째입니다.
‘일으켜 세우라’(아노르도오), ‘다시 세우다. 일으켜 세우다’. 이 말은 ‘앉거나 구부정한 자세에서 바로 세우다’, ‘똑바른 자세로 놓거나 회복시키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올린다는 뜻이 아니라 고치거나 바르게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서 마땅한 의무를 행하기까지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경주를 계속하며 결연한 인내의 자세를 가지라는 촉구입니다. 마음속에 낙담하지 말고 현재의 고통을 핑계삼아 나약해지지 말고,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위험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소망을 포기하려는 것들에 압도 당하지말라는 것입니다.
‘피곤한 손’(파리에미), ‘약해진, 내버려두다, 무시하다’. 힘이 빠져 흔들리는 손을 일으켜 세우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무릎’(파라리오), ‘약해지다. 마비되다’, ‘몸의 일부나 전체가 움직이지 않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다’는 뜻입니다. 무릎을 지탱해주기 위해서 동여맬 것이 필요한 힘없는 상태입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신앙의 상태에서 사도는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마라, 용기를 내어 시련을 견뎌내라고 촉구합니다. 신앙생활은 그 출발부터 끝날 때까지 끝없는 싸움과 갈등이 발생합니다. 사탄과 원수들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끝까지 견뎌내는 자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사 40:31).
셋째, 곧은 길을 만들어 연약한 자들이 고침받게 하라.
저희 교회에는 좋은 전통보다 나쁜 전통이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좋은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신체적으로도 연약한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곧은 길을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바라보는 ‘연약한 신앙인들이 고침을 받게 해야 합니다’.
히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곧은 길’(길, ‘트로키아’)은 ‘수레바퀴 자국, 길’), ‘지나가거나 이동함으로 닦인 경로’, ‘아마도 이미 나 있는 길이나 지나간 자국을 가르킵니다’. ‘바퀴가 지나다 난 자국’입니다. 다시 말해서 ‘표본’입니다. 악한 방식을 배우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다리’는 더 약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악한 영향력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고침을 받게 해야 합니다.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여러분의 곧은 길이 그들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회복시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더 약한 성도들을 위해서라는 이유 외에 다른 어떤 이유가 없다면 주의하여 행동하십시오. 뒤로 물러가 배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역병입니다. 교회는 좋은 전통과 표본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