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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2일부터 3달간 여수에서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여수 엑스포가 개최된다. 여수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수에서 유년을 보낸 추억 때문에 여수하면 나는 이순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번 기획은 여수 엑스포를 기념해 여수를 방문하게 될 사람들에게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소개하고 이순신, 백의 종군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는 답사가 될 것이다. 이번 기행은 1박 2일 코스로 진행되며 1597년 음력 1월부터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까지 숨가빴던 이순신 백의종군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쳐 약 286.5km를 모두 둘러볼 수는 없으므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간들을 이순신 백의 종군의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이번 기행의 편의에 따른 순서로 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짧은 백의종군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노량해전의 순국까지를 생각하며 장군의 일생도 더불어 생각해 보도록 한다.
이번 기행의 코스는 첫째날엔 진주 손경례집 진배미 훈련장- 하동 이희만 이홍훈 집 - 사천 응취루 - 남해 노량리 - 여수 진남관 장군도 등을 돌아본 후 일박한 후 둘째날엔 낙안읍성 - 장흥 회령포 - 고금도 충무사 - 해남 명량대첩지(울돌목)을 돌아보는 코스이다.
불멸의 이순신의 백의종군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1,2위를 세종대왕과 다투는 인물, 여해 이순신 아마도 그의 생애를 조금이라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단순한 백전백승의 장수를 넘어 민족의 영웅이자 신화가 되었다. 구구절절한 이순신 연보는 그러니 생략하자.
전쟁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 1월 이순신은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임금을 속인 죄로 나국(拿鞠)[죄인을 잡아다 국청에서 신문함. 또는 그런 일]을 받아 3월 4일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이순신은 판부사 정탁(鄭琢)[1526~1605]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선조로부터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에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았다. 당시 도원수는 권율[1537~1599]이었다. 그리고 4월 1일 출옥하여 5월 26일 하동에 도착했다 도원수부를 갔다 돌아온 후 이순신으로서는 고문에 찢긴 상처보다 더 아팠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다. 하동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패전 소식을 듣고 이순신 움직이다.
하동에서 칠천량의 비극을 들은 이순신은 발빠르게 움직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번 기행의 첫번째 여행지 바로 진주시 수곡면 운계리 마을의 손경례 고택이다.
손경례 고택 전경
칠천량 해전은 있어서는 안 될 패전이었고 조선 수군의 전멸, 하니 조선의 국가방어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했다. 300여척이나 되는 배를 잃고 칠천량도 지금의 거제도에 올라갔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원균 이하 수군 전체가 몰살을 당했고 남은 건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끌던 12척의 배와 수군이 전부였다. 이순신도 원균과 똑같이 부산포 진격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이 책략에 도사린 함정을 눈치챈 이순신은 조정에 거부의사를 밝혔고 이를 보고한 권율이 조정에 죄를 줄 것을 청하자 나국된 것이다. 조선 조정과 수군의 알력 싸움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부산포 진격 거부가 이런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걸 예측했을까?
충무공 삼도수군통제사 제수비
자신이 만들고 키웠던 그리고 당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을 하던 부하이자 전우들의 참혹한 죽음, 삼백척이 넘던 조선 해군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렇게 포기할 수가 없어서 이곳 저곳 전황을 살피며 이곳 진주 운계리에서 머물다 선조가 보내온 교지를 받는다.
"지난 날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 이렇게 패전의 욕됨을 입었으니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 주기 바란다."
스스로 부수어 내팽기친 이순신밖에는 패전의 난국을 극복할 방안이 없었던 선조의 솔직한 사과문이자 부탁이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 교지를 유성룡이 들고 와 전하며 자네가 거부해도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이순신은 칭병하여 거부할 수도 없었지만 이 교지를 받들어 삼도수군 통제사의 자리를 받는다. 욕하고 저주하며 이 나라가 망하는 꼴을 꼭 보겠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종군보다 더 치욕적이고 힘든 길, 아무것도 없는 이름뿐인 해군 총사령관이 기꺼이 된 것이다. 난 여기에 이순신의 가치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진주시 수곡면에는 진배미 훈련장이란 곳이 있고 그 유허비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손경례의 집으로 오기전 하동으로 종군을 와서 산청을 거쳐 합천의 초계에 있던 권율장군에게로 가서 일종의 신고를 치르고 다시 정개산성에서 군사와 군량, 말먹이 등을 지원받아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럼 이희만과 이홍훈의 집으로 가보겠습니다. 진배미에서 훈련을 끝내고 이희만과 조카 이홍훈의 집에 머물면서 장군은 명량대첩을 위한 고뇌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동 이희만집 이홍훈집
이희만집 전경
이홍훈집 전경 이홍훈은 이희만의 조카이기도 하다.
충무공께서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단성을 거쳐 7월 20일 오전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재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인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잠을 잤다. 오늘날 이희만의 집은 개조되어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스레인 지붕과 시멘트 블록으로 형성되어 최근까지 15대손 이병일 모친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홍훈의 집도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이고 있지만 골격이나 구조는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 하여 마치 장군을 보는 듯 반갑다.
합천에서 산청과 지금의 하동으로 넘어오는 백의종군길은 최근 경상남도에서 네개의 코스로 나누어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로 만들어 충무공의 뜻을 기리고자 하고 있사오니 인터넷에서 백의종군로를 검색하여 자세한 도보 답사 코스를 찾아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의 뜻을 기려 보기를 바란다.
참고로 전라남도도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를 복원하기로 하였는데 경상남도와는 달리 매우 지지부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경상남도가 그나마 고증에 충실하게 백의종군로를 복원하고 후대에 사람들이 난중일기의 기록과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인간 이순신의 심정을 곱씹어 보게 한 일은 분명 필요하고 좋은 일인 것 갔다. 그리고 전라도 쪽의 길도 반드시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전라도쪽 백의종군로는 2편에서 마저 답사해 보자.
이제 사천쪽으로 옮겨가서 응취루에 가보도록 하자.
사천 응취루
2008년 복원된 응취루의 모습이다. 응취루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남해 전황을 살피기 위해 초계를 떠나 7월22일 유숙하셨던 장소로 조선 세종 12년(1430년)에 완공된 곤양읍성 객사의 출입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곤양에 머물면서 권율 도원수부에 보낼 장계를 보완해 수행군사에게 보내고 다음날 곤명면 봉계리 원전마을 십오리원을 거쳐 이동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당시는 곤양초등학교 내에 소재했으나 1963년에 철거되고 이를 현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농담같은 이야기지만 이순신장군은 질 것 같은 전투는 하지 않아서 백전백승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투를 준비하면서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조건을 찾고 그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전투에 나갔다. 남해안의 구석 구석을 알고 있었던 장군은 적을 율돌목에서 맞서 싸워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느닷없이 선조는 수군이 이미 이름뿐이니 남은 군사를 데리고 권율에게 가서 협조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이른바 수군 폐지령이었다.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서 승리를 하기 위한 준비 중이었던 이순신으로서는 크게 낙심하게 된다. 이름뿐인 해군 총사령관도 더 하지 말고 바다의 적을 땅에서 맞아 싸우다 죽으라는 말로 들렸을 터다.
이 교지를 받은 것이 1597년 중추절이었다고 하고 그 때 지은 시가 그 유명한 한산도가라는 것을 역사스페셜에서 말하고 있다. 장군은 바로 장계를 올려 선조를 설득한다. 그 이야기와 뒷 명량대첩 준비 이야기는 2편의 보성에서부터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제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 노량해협으로 가 노량해전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남해 노량리
노량해전 사실 상의 백의 종군이 끝나다.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당시 일본군 와카자키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으로 무조건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그들을 그냥 돌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남해안으로 쫓겨 내려와 왜성 등을 쌓아 농성전을 벌이며 식량이나 물이 떨어지자 그들은 다급했다 이순신은 아마도 그들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죽인 백성이 그 얼마이며 노략질해간 것들과 포로로 잡아간 이들은 또 그 얼마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돌려 보냈다가 정유재란처럼 다시 쳐들어오지 말란 법이 없으니 장군은 아무래도 다시는 돌아올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조정과 선조, 그리고 명나라는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뜻과는 달리 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결국 명나라군과 일본군이 이순신을 따돌리고 서로 약속하여 길을 터주는 상황에서 그나마 양심 있는 명나라 군과 조선 수군을 활용 적을 치다가 끝내 총탄을 맞고 쓰러졌던 장군, 그리고 적에게 알리지 말고 한 놈이라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며 조카의 품에서 숨을 거둔 이순신 노량해전 이 해전에서 우리는 충무공을 잃었지만 노량해전은 조선 최대의 시련을 끝낸 영원히 남을 싸움이 되었다. 진주 손씨 집에서 삼도수군 통제사를 다시 제수받아 명목상의 백의종군은 그날 끝난 것이지만 사실상의 백의종군은 이 노량해전에서 끝났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이제 오늘의 최종 여행지인 여수로 가보도록 하자. 여수에서 유년을 보낸 나는 어린 시절 소풍을 진남관으로 갔던 기억 때문에 유독 정겨운 공간이 바로 진남관이다.
진남관 건물 전경
망해루 누각 전경
진남관은 전라 좌수영의 본영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이다. 그 규모를 보았을 때 아마도 지금까지 남은 조선 관아 건물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은 조선시대 사백여 년간 수군의 본거지(전라좌수영)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 이용되었고 전승의 사명을 다한 역사적 현장으로 여수를 상징하는 곳이다.
진남관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제 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다. 또한 1599년 선조 32년 기해년 12월에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이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 갑진년에 개축하고 숙종 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객사는 조선 역대 왕들의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정례참배를 행했으며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는 하례를 드리고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는 봉도식을 관민일동이 수행해 왔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때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다.
학교로 사용되던 시절의 사진인 것 같다. 일본식 애국조례 중의 사진인 듯 갑자기 옛날 생각 난다. ㅋㅋ
준국보 제480호로 1959년에는 보물 제324호로 지정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보수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1973년 단청을 하고 1978년에 4억 2천만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를 개설한 바 있다. 2001년, 국보로 승격 지정했다.
건평 240평,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길이 75cm, 높이 14m, 둘레 2.4m의 기둥 68개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양을 자랑하며 한국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조선 초기 객사양식으로서 보기 드문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의 공간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이러한 구성의 건축은 주심포 내지는 익공집계통의 수법에 의하여 2출목으로 짜올려서 외목도리를 받쳤다. 건물의 전후면에는 안쪽으로 제2주례에 고주들을 배치하여 그 위에 대량을 가구하였다.
전라 좌수영?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좌수영과 우수영을 생각해 보면 전라도에서 좌수영과 우수영이 경상도에서 좌수영과 우수영이 있는데 지도를 똑바로 놓고 여수를 생각하면 전라 우수영의 본원이 있어야 맞지만 조선 당시에는 궁성인 서울에서 임금의 시각으로 이름을 붙였으므로 전라 좌수영이 되는 것이다.
충민사
덕충동 마래산 중턱에 위치한 충민사는 충우공 순국 3년 뒤(1601년) 우의정 이항복이
사당건립을 제안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의 주관하에 사당이 건립되고 그 후 조정에서
사액하여 국립 사당으로 된 것으로서, 현 통영에 있는 충렬사는 순국 65년 후에 사액되었으며,
아산의 현충사는 순국 106년 후에 사액된 것이므로 여수의 충민사가 국가적 기념사업
제 1호지이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다하여
충렬사만 남기고, 충민사와 현충사는 철폐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광복 후 1947년 충민사를
다시 복원 관리해 오다가 1993년6월1일 국가 사적지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충민사와 충렬사 같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들은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곳이 아무래도 현충사인 것 같다.
난 현충사에 대해 조금 부정적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의 영향력을 등에 업으려 하기 위해 국책 사업으로 마련한 아산의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자신의 군사 쿠테타를 정당화시키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민적인 존중감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술책이었으니까. 난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후광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독재자로 이해한다.
장군도
지금은 여수의 명물이 된 돌산대교 밑에 장군도라는 섬이 있다. 돌산대교를 넘어가면서 자세히 볼 수 있는 섬이다. 나는 어렸을 적 여수에서 유년을 보냈는데 돌산대교가 놓이기 전에 그 시절 장군도 인근의 학교를 다녔다. 여수 봉산초등학교다. ㅋㅋ 지금 교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봉산국민학교 교가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군도는 이 충무공 넋이 깃든 섬, 여수에도 봉산땅 우리 배움터"
장군도는 해전 중에 충무공이 잠시 배에서 내려 휴식을 취했다는 전설을 통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렸을 때 점심 시간에 학교에서 빠져 나와 장군도가 바라보이는 외삼촌 집에서 대나무 낚시대로 학꽁치를 낚아 올려 그 걸 구워 밥반찬을 하던 추억이 있다. 지금은 돌산대교를 건너면서 남해의 리아시스식 해안 구조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여수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아름다운 섬이다. 섬을 보며 이순신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여수 밤바다 풍경이 가장 멋진 곳은 바로 돌산대교를 중심으로 한 바로 이 장군도를 바라보는 풍경이 아닐까 한다. 돌산도공원에서 내려다 본 여수항 풍경이 압권이다. 물론 오동도나 돌산도의 바다 풍경도 멋지지만 말이다. 여하튼 여수 밤바다의 낭만을 직접 느껴 보러 여수의 저녁 밤바다 꼭 가보시기를
여유가 있다면 최근 복원된 선소유적지(이순신 장군 당시 배를 만들던 곳) 임진왜란의 여수지역 항쟁의 근거지였던 흥국사 등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정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