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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시 전경
일제 36년동안 목포항은 남북을 합한 전국에서 가장 농작물이 많이
생산되는 전라남도의 농작물 즉 쌀과 면화를 비롯한 밭 작물을 수탈(收奪) 해가던
곳이여서 농민들의 수난(受難)과 저항(抵抗)이 컷던 곳이라고 합니다.
자료가 많아서 한꺼번에 보시기가 버거우시면 몇차럐 나누어서라도 꼭 읽어보시기바랍니다. 그 당시 일제에 의한 수난이 얼마나 가혹했으면 300년전에
전사하신 이순신 장군을 사모(思慕)하는 정이 깊은 이 노래가 나왔겠습니까?.....
성탄과 年末年始를 맞이하여 이 게시물을 조회하시는 회원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충만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011/12/26 작성자 명사십리 올림
不滅의 愛唱曲 木浦의 눈물 호남평야의 곡창을 뒤에 업고 서해와 남해의 일제가 강점하기 이전에는 인심 후하고 인정 뜨거웠던 항도였다.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반도가 풍량을 막고 있는 淸湖[목포 앞 바다)는 그 옛날 여인들이 밥을 짓다가 찬거리가 고기를 퍼내어 생선국을 끓였다는 황금 어장이었다. 더욱이 시와 노래로 전해오는 삼학도는 마치 세 마리의 학이 바다에 앉은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삼학도란 이름이 붙은 곳이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면 시객들이 유달산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유혹하는 은파연월(銀波煙月)을 바라보며 저마다 시상을 고르기도 하였고, 달빛과 정답게 속삭이며 즐거운 한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호남평야를 굽이굽이 누비며 청호로 흘러드는 영산강 물결 위에 꽃구름이 비끼던 봄날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수면에 어리던 가을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서해 남단의 절경을 안고 있는 이 명승(名勝)의 항도는 일제침략자들이 강점하면서 눈물의 대명사로 변한다.
노래의 흐름 속엔 그 무렵 사회의 시대상과 생활상.표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엔 바로 항일(抗日)하기엔 힘이 없고 눌러있자니 억울한 그런 시절엔 피안(避岸)의 대상으로 ‘바다와 항구’를 설정하여 멀리 나가는 뜻의 노래가 많았다. 즉 ‘항구’, ‘떠난다’는 노랫말들이 다 그런 뜻이다. 아마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가면 뭔가 다른 유토피아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그리움과 기대감 때문에 그랬다. ‘김해송 작곡과 장세정 노래의 ‘연락선은 떠난다’가 그랬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의 ‘항구의 청춘시’,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의 ‘해조곡’ 등이 그렇다. 그러면 그때 시대상황을 좀더 조명해보자 1931년에 부임한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의 농촌진흥운동과 다음 1936년에 부임한 그 유명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운동 등으로 한국말로는 노래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39년에 실시된 창씨개명과 1940년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은 국가 전체에 식민지라는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였고 모든 문화활동이 회색 빛을 띨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같은 노래도 금지 당하는 시대가 되어 결국 모든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 숙명처럼 부여된 비극적인 삶이란 것도 어쩌면 호사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는 그런 시기였다. 김해송과 이난영의 음악과 노래도 이 시대에 일반 서민대중들이 처한 시대적인 배경을 알면 더 이해가 깊고 공감이 갈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바로 시대의 아픔이었고 서민의 울분이었으며 하소연이자 화풀이였다. 요즘 말로 한다면 스트레스 해소용이란 뜻이다. 비록 노랫말은 ‘님’이고 ‘이별’이지만 서민적 정서가 담뿍 배여 있는 공출, 징병, 징용에 대한 항거였다.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는 그만큼 살벌한 정책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日帝의 갖은 탄압속에서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 레코드와 손잡고 향토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本名 윤재희 1916년생)의 작품 "목포의 노래" 가 3천여편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된다. 윤재희는 일본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때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는바, 당시 집안에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28세때 작고하였다.
OK 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 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부르게 된다. 이 노래가 우리의 가슴을 후리는 까닭을 노래 행간에 서려 있는 민족적 정서의 애절함이다. 이 애절한 情調( 정조)를 작곡가 孫牧人이 그의 작곡상의 세련된 솜씨로 한껏 고조시켰으며 , 이를 이난영이 鼻飮(비음) 섞인 목소리로 흐느끼듯 불러제켰다. 2절의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日本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며 원컨대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이라고 둘러댔다. 이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의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 결국 이질에 걸려 스물 여덟 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밑에'의 가사는 3백년전 정유재란때 명량대첩과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점을 담은 내용이다.이것은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1932년 유랑극단 "태양극단"이 목포 공연을 하고 있을때 무대뒤 분장실로 단발머리 한소녀가 조용히 들어 왔다.다음 출연을 위해 분장을 가다듬는 가수들로 북적대는 분장실에 들어온 이 촌스런 시골 소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용기를 내어 단장에게 다가 갔다 단장은 앳되 보이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심히 말한다.지방공연 때마다 가수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소녀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 보이구 말야" "아니어요 전 괜히 허영심에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예요. 전가수가 되는 것이 평생꿈이에요 노래는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도 있고요""그래 ? 그럼 노래나 한번 불러보지" 단장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소녀를 쫓아 보낼 요량으로 한곡 불러보도록 했다.소녀는 잠시눈을 감고 감정을 잡더니 노래를 시작 한다.소녀의 노래가 시작되고 시끄럽게 북적이던 분장실이 잠잠해졌다.뛰어난 가창력. 가슴을 파고 드는 애절한 목소리가 제법이었다."그래 넌 노래해도 되겠다"
이난영은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李蘭影의 본명은 이玉禮(옥례), 당시만 해도 냇가 언덕 위의 바윗등으로 불리는 빈민촌이었다. 내 60년도 기억으론 아마 목포여고밑 산정동으로 들어오는 도로 때문에 깎은 언덕 같다. 그녀는 어머니가 식모살이하는 일본인 집에서 '애기업기'를 했는데 그집에 유성기가 있는걸 보고 신기해 했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주인은 순회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932년 16세 되던 해 였다. 태양 가극단 단장이 난영을 무대가수로 키우겠다며, 즉석에서 특별단원으로 채용한다. 그리고, 이옥례라는 본명 대신 蘭影이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반년후.재일 한국인 (在日朝鮮人) 위문공연차 일본원정을 떠나는 태양 가극단에 섞여 일본의 오오사카에 도착했고,레코드 기획을 위해 그곳에 와 있었던 당시 흥행계의 거물 OK 레코드 사장 李哲의 눈에 띄게된다. 그는 그녀를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시켰고, 그녀에 맞는 곡을 준비하도록 부탁한다. .먼저 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의 '불사조'를 불렀다. 그녀를 떠올리면 남편 김해송(본명 김송규) 이라는 작곡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에 처음 시도한 인물이다. 못다루는 악기가 없고 당시에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다. 오케 레코드 이철 사장과 친분으로 이난영을 알게 되었고, 약 2년 정도 열애 끝에 1937년에 결혼을 했다(사실은 지방 공연 차 이난영을 겁탈해 임신 시켜서 할수 없이 결혼 했지만). 39년에는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을 이난영이 불러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이 곡이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고 한다
이난영은 1940년대부터는 단순히 노래하는 싱어로서 뿐만 아니라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본인도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37년 속편격인 ‘해조곡’(이부풍 작사, 손목인 작곡)을 거쳐, 목포노래의 완결판이자 42년 또 한차례 대대적 목포 열풍을 일으킨 ‘목포는 항구다’를 통해 다시 한번 관련지역 이름을 부흥시킨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쓴 이 곡은 시리즈 전편인 ‘목포의 눈물’에 나왔던 지명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유달산 잔디 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아아! 추억의 고향! 6.25때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이 친일 행적과 미8군 위문 등의 죄목으로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행방불명이 됐을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 김해송과 연예인들은 왜 끌려갔을까
당시 공산당의 입장으로 보면 연예인들은 브르조아의 상징이나 부패한 군상으로 여겨져 숙청대상의 우선 순위였다. 동란 직전까지 김해송과 이난영은 필동의 대한극장 앞에 방이 13개나 되는 저택에 살만큼 윤택했고 김해송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보컬그룹을 만들 꿈을 그때부터 꾸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피난을 갈 수 있었음에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평안남도 개천군이 고향이고 또 학창시절 일본에 저항한 경력도 있기에 ‘설마’ 했을 것이다. 이난영도 잡혀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아이들 핑계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이난영은 매년 무대에 서면서 12남매를 낳을 만큼 금슬이 좋았지만 동란은 이 가정을 풍비박산시키고 말았다. 김해송은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던 사람이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와 밝혀졌다. 그제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이난영과 김해송 사이에는 7명의 자식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김씨스터즈와 김부라더스라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원래 두 부부 사이엔 9남매가 있었으나 둘은죽고 7남매만 남아 있었다. 이들 7남매 모두는 김해송에게 어렸을 적부터 악기와 노래 연습을 재롱 수준이 아닌 혹독할 정도로 피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한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을 받은듯하다. 5.16이후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당시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가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을 보다못한 손목인 선생등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우리의 가수 이난영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데 왜 집회를 허가해주지 않느냐'며 사방을 쫓아다녔다. 결국 이난영의 장례식은 특별케이스로 허가됐다. 이난영의 집이었던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도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이난영의 일생은 「목포의 눈물」 이 히트곡이 되어서인지 자신의 인생에 눈물이 너무 많았다.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 고향 목포, 본명 이옥례(李玉禮)로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그렇게 갔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소리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서 울려퍼지고 있다. 관련 자료 참조 민족 수난기의 대중가요사==코리아나 뉴스==이동순의 가요이야기.등
위의 자료를 제공해주신 다음카페 "그리운 초가삼간"별★ 지기님과 우렁각시님께 우정어린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명사십리 올림 |
↓목포항 전경
↓문헌으로 본 개항 직전의 목포 풍경
옛 유달산 자락의 조선인 마을[출처:목포문화원(사진으로 보는 개항 100년)]
광주에서 목포로 오는 버스안에서 어느 대학생들의 수다를 듣는다.
얘기를 듣다보니 목포가 초행길이다. 난생 처음 낯선 고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설렐 수 밖에 없다. 얘기 중에 "목포는 항구
" 라며 "목포에 왠지 정감이 가서 좋다"고 말했다. 그랬다. 목포는 항구다.
문득 목포 항구가 열리기 전후의 모습이 궁금했다.
이대흠 시인은《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에서 "목포는,
조선말기 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였을 뿐이다. 그러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일제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목포는 도시의 틀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보성사람 한창기가 만든 뿌리깊은나무사에서 낸《전라남도》<목포시>에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목포도 무안현 안에 들어 있는 유달산 기슭의
갈대 숲에 우거진 조그만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목포가 항구
도시로 형성된 것은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97년 목포항이 개항" 했다고 기록했다.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가 있습니다'는 《전라도 닷컴》(2005.1)<신의주로
가는 이천리 길 출발점>에서는 "1897년 목포항이 일제에 의해
개항될 때만 해도, 목포는 전남 무안군 일로촌면 목포리의
목포진과 쌍교리 부근까지의 90여 호에 불과했다"고 했다.
목포문화원에서 2003년에 낸《목포의 땅이름》<목포시가지의 형성(1)>에
"1897년 개항당시의 목포는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촌면
목보리의 목포진(남평리, 서평리)과 쌍교리(雙橋里)부근까지의 90여호에
불과하였다 한다. 그러나 1897년 10월 16일 조선외무대신과
일본, 미국, 불란서, 독일, 영국, 로서아의 각 대표사이에 서울에서 조인된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의하여 각국거류지가 동으로 송동(松都; 동명동
어판장 부근), 남으로 목포진(만호동), 북으로 노적종, 서로는
서산동 어항에 이르는 임해지역으로 정해져 전 계획구역이 726,024㎡이었으나
나중에 방조제의 구축 등으로 998,082㎡로 늘어났다."고 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가 2004년에 낸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에서는, 현재의 목포는 1439년 만호진이 설치되면서부터 사람 사는 곳으로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고 밝히면서 16세기 초 목포진의 성이 완성되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목포는 차츰 단순한 변방에서 사람 사는 마을로
바뀌어 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항 이전 목포를, 일본인 마에다 교사쿠(前間恭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중 <出張員 前間恭作의 復命書, 1896.11.11)>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현재 목포 상황을 진술하건대 목포진성 내외에 민가가 24, 5호가 있다.
어느 것이나 추하고 좁은 오막살이에서 옛진아(鎭衙)만 약간 가욱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무안가도(務安街道)에 목포에서 20정(町)
거리에 석교리(石橋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도 호수 24, 5호로 농가가 많다.
주민의 생활은 목포보다 낫지만 그렇게 차이가 없다. 이밖에는 근방에
촌리(村里)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저저는 이 글이 당시의 모습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라 사실에 가깝다고 밝혔다. 다른 글도 보이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고석규 교수는 "개항 이전의 목포는 대체로 150여 호 전후의 사람들이 진의
관할 하에 농업 또는 어업 등에 종사하면서 나름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자취를 확인하기 어려운 옛 三鶴島
↓많은 조각과 詩碑와 노래비가 있는 儒達山
↓유달산 이순신 장군 동상
↓노적봉
↓유달산 노적봉의 거북바위
목포역에서 5분 거리인 유달산 등구 표지석에서 다시 5분여를 걸어 오르면
유달산의 정문격인 등구의 좌편에 큰바위 봉우리인 노적봉이 보인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해발 60미터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 설화가 깃든 호국사적지이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더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소수의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하여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이 봉우리를 가리켜 노적봉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양식이 많은 듯이 보이게
한 것과 진도의 강강술래, 울돌목 의 쇠줄 등도
모두 이런 전술의 일환으로 이 곳은 이러한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의 지형을 이용한 고도의 심리전이 돋보인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덮어 놓은 노적처럼 꾸며서,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했으며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왜장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주차장에서 바라본 노적봉의 거북바위(?)
1934년 조선일보주최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이 열렸다.
전국에서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무명의
시인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
오케 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당선 지방 신민요곡’을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이 부르게 했다.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1935년 8월 작 ‘목포의 눈물’이다. 특유의
콧소리에다 흐느끼는 듯 애간장을 끊어내는 느낌의 이난영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에서나 느낄 한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났다.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이 된 이난영은 한 곡의
유행가로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
지금껏 애창되는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곡이다.
이 노래는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로 추앙받으며
이미자, 조용필, 남진, 나훈아, 문주란, 주현미, 김수희, 심수봉을 비롯해 루시드
폴 같은 최근 가수에 의해서도 리메이크된 불멸의 명곡이다.
현재 ‘목포의 눈물’ 오리지널 SP(유성기)음반은 부르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명반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확인하긴 힘들지만 발매이후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는데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지 실물구경조차 불가능한 초
희귀음반이 되어있다. 물론 LP. CD시대에 재발매된 이난영의 음반들은 무수히 많다.
1968년 가수 개인을 추모하는 가요제가 대중
가요사상 최초로 개최되었다. 난영가요제다.
1969년에는 최초의 노래비가 목포 유달산에 건립되었고 이난영, 남인수의
사랑과 인생, 노래를 소재로 영화 ‘이 강산 낙화유수’까지 제작되면서
그녀는 전설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06년 3월 25일. 이난영의 유해는 41년 만에
경기도 파주에서 목포 삼학도에 조성된 ‘가수 이난영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사공의 뱃노오래 가무울 거어리이며~~~
'목포의 눈물'은 1935년 발표되었습니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의 노래입니다.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죠.
2절의 가사가 혹시 기억나시나요?
이난영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라고 부릅니다.
KBS가요무대에서 오은주도 그렇게
불렀고 자막도 그렇게 표기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봉우리를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씌워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식량과 군사가 많은걸로 오인시켜 일본군을
패퇴케 했던 일화를 상기시킨 대목이랍니다.
임진왜란부터가 300년 원한이며
그 원한 서린 노적봉
밑에 님=(이순신장군)의 자취가
또렷하게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발표당시 공연에서 왜경이 이 구절을 당연히
문제삼았답니다. 왜경은 제작자측에 출고를
등을 줄줄이 불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를
해명하라고 족쳤습니다.
그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이
레코드 판매와 함께 내보낸
가사지를 내밀었습니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 깁히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리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서름
2.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로적봉 밋헤
님자최 완연하다 애닯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깁흔밤 쪼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지타 녯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문제의 구절은 '세 그루의 동백이 있는 연못의
평안한 바람이 부는 노적봉 밑에...'라는 뜻으로
풀이했었답니다. 왜놈들은 이상한데 이상한데
하며 어쩔수없이 그냥 넘어갔다더군요.
우리가 그저 옛날노래 뽕짝이라고 또는 왜색가요라고
폄하하던 노래에 이런 사연이 있었더랍니다.
제가 요새 우리가요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책저책 이음반저음반을 뒤적거리는데
참 재미난게 많네요... 위에 <목포의 눈물 사건>은 김지평
지음 아름출판사 발행의 '한국 가요 정신사'에서 발췌했습니다.
한 이십여장만 더 모으면 엘피도 천장을 돌파하는데, 있으신
분들 좀 도와주셔요. 술집차리면 브이아이피 대접해드릴께요.
근데 '목포의 눈물'을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던날 일산집근처에서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불러제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대중이성이 대통령이 되앗다아!"고 누군가는 소리치면서...
고 이난영의 딸들
김시스터즈는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 부부의 두 딸(숙자, 애자)과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3인조 여성보컬트리오.
1953년 데뷔해 미8군에서 활동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진출한다.
국내 최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입성한 이들은 노래뿐만 아니라
춤과 각종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등 재능이 탁월했던 까닭에
미국에서도 탁월한 음악성을 지닌 여성보컬그룹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다.
미국의 유명잡지 버라이어티와 라이프에 소개되었고
프랭크 시내트라, 마릴린 먼로 등 할리우드의 톱스타들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데저트인호텔' 무대에서 활동했다 하며,
66년 코미디 스타 밥 호프와 베트남전 참전용사 위문공연을 가졌고,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은
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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