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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논개 묘역 의암사에 있는 논개 영정
아득히 먼 옛날. 왜구의 침략(임진왜란 1593년)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국가의 존망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 했을때 19세의 연약한 아녀자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일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지는데 무려 40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매년 음력 칠월칠석이면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논개 묘역에서는 논개를 기리는 제향이 치러진다. 왜? 논개 제향이 그가 순국한 진주도 아닌, 그의 고향인 장수도 아닌 함양에서 지내는지 그리고 그가 왜 함양 땅에 잠들어 있는지 되돌아 봐야겠다.
제향을 모시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최낙건 전 함양군수가 ‘꽃, 강에 지다’라는 의암부인에 대한 소설책을 저술하여 출간한 뒤, 묘전에 그 책을 놓고 고유제를 올리는 것을 기화로 함양의 유림들이 제향을 모시기로 하고 제례경비는 함양군청이 매년 2백만원을 지원하고 안의유도회 주관으로 지금껏 봉행하고 있다.
작년까지 묘역에서 제향을 올렸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영정이 봉안된 사당(의암사)에서 봉행됐다. 함양군수, 도의원, 일부 군의원, 함양군 유림들, 신안주씨 문중, 해주최씨 문중, 방지마을 주민 그리고 한해도 거르지 않고 서울에서 참석하는 최낙건 전 함양군수 등이 참석했다. 특히 용인부시장을 역임한 최태열 전 손학규 도지사 비서실장 부부가 서울에서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전통가치를 일깨워 줄 함양교육의 관계자들은 보이지를 않았다. 아쉬운 대목이였다. 논개는 유관순 열사보다 더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논개 묘역이 역사교육의 산 교육장이 되기를 바란다.
논개 묘역은 1970년 2월 경상남도의 향토유적관리 지시에 따라 “전설의 논개 묘”라는 작은 간판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입구에 세우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논개 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전북 장수군에서는 전북문화화재위원인 오치황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의암사적보존위원회가 결성됐다. 그해 3월부터 1975년 사이에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일대에 6회에 걸친 탐문조사와 더불어 논개의 숙부인 주달무의 13대손인 마을주민 주규상씨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논개 묘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오치황 위원장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의 논개 묘라 전해 내려오던 묘를 논개의 묘로 확정,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6년 1월 의암사적보존위원회는 논개의 출생지 명분을 이유로 장수 의암사 경내 이장을 위해 함양, 화순, 진주를 방문해 사적 고증 추진과 함께 묘소이전 신청을 문화공보무에 했다. 하지만 문화공보부에서는 ‘쌍방간 협의 문제’라며 반려했다. 한편 진주시는 논개 묘의 진주성 안으로 이장을 추진했다. 같은해 1970년부터 1년간 함양군수를 역임했던 김상조 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은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으나 고증자료 미비로 반려됐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제28대 함양군수로 부임한 최낙건 전 군수가 장수군의 오치황씨로부터 논개묘 이장 요청을 받았다. 최 전 군수는 당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논개가 태어 난 곳은 장수고, 순국한 곳은 진주, 죽어 묻힌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함양인데, 여기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고 역사의 순리가 있다고 판단, 오치황씨의 이장 요청을 거절한 뒤 논개 묘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지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신안주씨 문중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운구를 반장하여 방지마을 앞산에 안장하는 것을 당초부터 반대하였다는 구전이 세세손손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유인즉 조선조 유교사회에서 기생을 천시하고 후실을 박대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문중의 수치고 망신이라며 자손대대로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최낙건 전 군수는 신안주씨 문중을 찾아 “이제는 현대사회가 되었으니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 1988년 10월 신안주씨 문중에서 ‘유인 신안주씨 논개지묘’라는 상석을 설치했다. 동시에 최경회 장군의 상석도 설치했다. 이듬해 도비1억원을 지원받아 1990년 토지를 매입하고 봉분을 쌓고 논개가 칠월칠석에 순국했다고 77계단을 만들고, 의병반장비를 건립하는 등 1단계 성역화사업을 완료했다.
이어 1995년 민선 초대 함양군수로 당선된 정용규 전 군수가 ‘의암 주논개’의 숭고한 정신을 정립하고, 민족사를 재조명하자는 취지로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에 의뢰해 1996년 1월 ‘논개사적의 역사적 의미’라는 용역보고서를 편찬했다. 1998년 다시 문화재지정신청을 하고 예고까지 했으나 한 진주시 향토사학자의 반대로 보류됐다. 민선 3, 4기 천사령 군수는 2, 3차 논개묘역 성역화사업으로 4억2천1백만원을 들여 사당, 화장실, 음수대, 주차장 토목공사와 아스콘포장을 2008년도에 완료해 큰 틀의 성역화사업은 완료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있다. 바로 여러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한 논개 묘역 문화재 지정과 논개 묘 사당 주변의 담장 조성과 조경 등 조금만 보완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