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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호는 후기에서 “조선 선비들의 음식문화를 써놓고 탐식가 이야기라고 우기는 것 같아 읽는 분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밝힌다.
저자로서 미안한 감정을 토로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맙다. 일단 글이 재밌고 흥미롭다. 재미와 깊이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 과거의 생활사가 다르게 펼쳐진다. 조선시대의 사료가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왕과 사대부에 관한 것들뿐이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서적들도 많다. 저자는 원전들을 샅샅이 뒤져서 조선시대 먹을거리에 대한 역사를 재편해낸다. 음식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심도 깊은 책을 썼다. <조선의 탐식가들>(따비)이다.
출판사도 음식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서울을 먹다>,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협동으로 만드는 먹거리 혁명>, <음식 문맹자 음식 시민을 만나다>, <스파이스>,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등 출간하는 책들 중에 음식 관련 서적들이 무척 많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와 다른 점은 육식 금지가 풀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개성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는데........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사대부들은 집착하듯이 쇠고기를 탐닉했다. 고기 소비가 지나치게 늘자 소도살 금령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성리학적 밥상론’이 등장한다. 왕은 12첩 반상, 공경대부는 9첩 반상, 중인 이하는 5첩이나 3첩 반상을 차려 먹도록 강제한다. 사대부 중심의 계급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밥상까지 통제했던 것이다.
사대부들은 예의 출발을 식사 예절에서 찾았다. 공자의 식습관이 모범답안이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밥은 정백한 것을 좋아하였고, 회는 얇게 썬 것을 좋아하였다. 밥이 쉬고 상한 것과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썩은 것을 먹지 아니하고, 색이 나빠도 먹지 아니하고, 냄새가 나빠도 먹지 아니하고, 조리가 알맞지 아니하여도 먹지 아니하며, 식사 때가 아니면 먹지 아니하였다. 벤 것이 똑바르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고, 거기에 알맞은 장을 얻지 못하면 먹지 아니하였다.” <예기>에는 “제후는 까닭 없이 소를 잡지 않으며, 대부는 까닭 없이 양을 잡지 않고, 선비는 까닭 없이 개, 돼지를 잡지 않으며, 서인은 까닭 없이 진미를 먹지 않는다.”라고 했다. 공자의 말과 <예기>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식습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임신한 여성들에게 공자의 식습관은 반드시 지켜야 할 태교 철칙이기도 했다.
낯설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로 해야 했다.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시 가난한 형편이고 먹는 양 또한 매우 적은데다 천성이 청검하고 체질이 취약하다. 언제나 분수를 알아 명복을 아끼고 먹는 것을 절제하여 건강을 꾀하려 했다.” 그는 식시오관(食時五觀)을 지키려 노력했다. 학자로서 이덕무는 가수저라(카스테라), 승기악이(스기야키) 같은 외국 음식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이 먹는 음식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서로 즐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했다.
사대부들이 가장 좋아했던 소의 부위 중 하나는 심장이었다.
우심(牛心). 우심적(牛心炙)은 진나라의 주의가 소 염통을 구워 왕희지에게 주었다는 고사가 담긴 음식이다. <진서>에 “왕희지는 어릴 때 말을 더듬어서 아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13세에 주의를 찾았을 때에 주의는 그를 특출하게 여겨 우심구이로 대접했다. 당시 이 음식을 매우 중히 여겼는데 좌중의 다른 손님은 누구도 먼저 먹은 이가 없었다”라고 나와 있다. 우심적은 소의 염통을 얇게 저민 후 양념간장으로 간을 해서 구운 음식이다. 그 뒤로 우심적은 선비들 사이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명예로운 음식으로 퍼졌다.
우심적은 문인들의 시에 종종 등장한다. 고려의 문신 이인로의 <파한집>에 우심이라는 말이 나온다. 서거정은 “젊은 날엔 늘 우심적을 생각했는데, 노년에는 해안다(蟹眼茶)의 내력이나 적고 싶구려.”라고 썼다. 당시 우심을 먹는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호탕한 기개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권근은 우심을 보내준 한상덕에게 사례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서거정은 <필원잡기>에 김문이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우심적을 꼽았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공은 술을 잘하였는데, 일찍이 집현전에서 동료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나라 여러 학사들이 차의 품질을 논하는데 자소탕을 제일로 삼았고, <사림광기>에는 궁중의 아름다운 요리로는 증계를 제일로 삼았다.” 하니, 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자소탕이 어찌 새로 익은 술의 맛만 하며, 증계가 어찌 소간적(우심적)만 하랴.”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두부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 한나라의 회남왕 유안(劉安)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두부는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 처음 등장한다. 982년, 성종이 “미음과 술과 두붓국을 길 가는 사람에게 보시”했다고 한다. 사찰에서 만든 두부는 부처에게 공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고려 왕실은 행사에 쓰일 두부를 만들 조포사를 지정했다. <고려사절요>에는 공민왕이 부인 노국공주가 죽자 개성 봉명산 광암사를 조포사로 지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은 이색은 두부에 관한 시를 썼다.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국만 먹다 보니 / 두부가 마치 금방 썰어 낸 비계 같군 / 성근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 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 / 오월의 객은 농어와 순채를 생각하고 / 오랑캐 사람들의 머릿속엔 양락인데 / 이 땅에선 이것을 귀하게 여기나니 / 황천이 생민을 잘 기른다 하리로다.”
명 황제는 세종대왕에게 공녀(貢女)로 보낸 여성 요리사들의 음식 솜씨를 칭찬했다. 황제는 조선 여인들이 두부 만드는 솜씨를 “정묘하다”고 했다. 조선 정부가 두부에 신경을 쓴 까닭은 종묘에 천신하는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두부는 메밀묵무침, 꼬막숙회와 함께 12월에 천신했다. 미꾸라지를 넣은 두부인 미꾸라지두부숙회나 백봉령을 넣은 복령두부선이 천신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사상에는 두부가 올랐다. 두부는 오미(五美)를 갖춘 음식이었다. 맛이 부드럽고 좋음이 일덕, 은은한 향이 이덕, 색과 광택이 아름다움이 삼덕, 모양이 반듯함이 사덕, 먹기에 간편함이 오덕이라는 것이다.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무골육(無骨肉: 뼈 없는 고기), 숙유(菽乳: 콩에서 나온 우유)로도 불렀다. 서거정은 지인이 두부를 보내준 데 대해서 사례하는 시를 남겼다. “보내 온 두부는 서리 빛보다도 더 하얀데 / 잘게 썰어 국 끓이니 연하고도 향기롭네. / 부처 숭상한 만년엔 고기를 끊기로 했으니 / 소순(蔬筍)이나 많이 먹어 쇠한 창자를 보하려네.”
양촌 권근도 두부를 좋아했다. “맷돌에 콩을 갈아 눈빛 물 흐르거든 / 끓는 솥 식히려고 타는 불 거둔다. / 하얀 비계 엉긴 동이 열어 놓으니 / 옥 같은 두부덩이 상머리에 가득하다. / 아침저녁 두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거니 / 구태여 고기 음식 번거로이 구하랴. / 병 끝에 하는 일, 자고 먹을 뿐 / 한 번 배부르니 만사를 잊을 만하네.”
두부와 닭을 주재료로 만든 연포탕이 있었다. (낙지를 넣은 연포탕과 다른 음식이다.) 사대부들은 모여서 연포회를 즐기곤 했다. 겨울철에 먹기에 좋은 음식이었다. 양반들은 연포탕을 즐기려고 절간으로 몰려가곤 했다. 절에 맛좋은 두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들이 몰려들면 조용한 산사는 졸지에 유흥 공간으로 변하곤 했다. 정약용도 유배 이전에는 벗들과 이런 행사를 즐겼던 모양이다.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라는 시가 있다. “다섯 집에서 닭 한 마리씩을 추렴하고 / 콩 갈아 두부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라. / 주사위처럼 두부 끊으니 네모가 반듯한데 / 띠싹을 꿰어라 긴 손가락 길이만 하게. / 뽕나무버섯 소나무버섯을 섞어 넣고 / 호초와 석이를 넣어 향기롭게 무치어라. / 중은 살생을 경계해 손대려고 않는지라 / 젊은이들이 소매 걷고 친히 고기를 썰어 / 다리 없는 솥에 담고 장작불을 지피니 / 거품이 높고 낮게 수다히 끓어오르네. / 큰 주발로 하나씩 먹으니 각기 만족하여라.”
성호 이익은 유난히 콩 음식을 좋아했다.
그는 평생 소식을 실천했고, 대식을 경멸했다. 이익은 조선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음식 사치와 주책없이 많이 먹는 것에서 찾았다. 그는 부유층이 일곱 끼나 먹는다고 질타했다. 이익은 콩을 주식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삼두회(三豆會)를 만들어 몸소 실천했다. 삼두란 콩죽, 콩장(콩자반), 콩나물이다. 그는 “곡식이 사람을 살리는 면에서 가장 공이 큰 것이 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두부 만드는 법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반숙가’에서는 콩을 노래한다. “콩은 하늘이 준 오곡 중 하나 / 그 가운데 붉은콩이 더욱 좋다네. / 여름에 싹 터서 겨울에 죽으니 / 달고 부드러워 맛이 더욱 좋네.” 그리고 싹을 내어 콩나물을 기르면 몇 갑절이 더해져 온 가족이 배를 채울 수 있다고 예찬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때 부인에게 음식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종종 보냈다. 곶감, 김치, 젓무, 산채, 고사리, 소로장이(소루쟁이), 두릅, 약식, 인절미, 새우젓, 조기젓, 장볶이(볶은 고추장), 미어, 산포(육포), 민어, 어란 같은 고급 음식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는 미식가였지만, 유배 생활에서는 이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 추사가 최고로 꼽은 음식은 무엇일까. 예산 추사 고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다. “위대한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가장 즐거운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주를 만나는 것”이라고. 그가 좋아했던 것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를 솥에 넣고 끓인 소박한 음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규보의 시에 순채(蓴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순채의 가을 맛’이란 표현은 진나라 장한의 고사 때문에 생긴 표현이다. 벼슬을 하던 중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문득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난 장한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순채는 가을이 아니라 봄에 난다!) 조선 중기 시인 권필은 이런 시를 남겼다. “호남의 좋은 경치 강동과 같은데 / 이 순채가 들판의 물에 많이 자라는구나. / 장한은 본래 이 맛을 알지 못했구나. 돌아가는 돛배 무엇하러 가을바람을 기다렸던가.”
시인들은 장한의 귀향을 선비가 지녀야 할 청빈한 마음씨로 평가했다. 이규보는 ‘친구 집에서 순채를 먹다’라는 시도 남겼다. “내 평생 조금도 누라곤 없어 / 스스로 깨끗한 마음 자랑했지요. / 그러나 항상 속된 식물을 먹었기에 / 목구멍에 티끌이 끊이지 않았는데 / 오늘 순채를 먹으니 / 가늘고 가벼워 은실 같구나.” 순채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많은 시인들이 공감했던 노스탤지어였다. 순채는 선비들에게 군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고결한 음식이었다. 목은 이색도 순채를 “학의 정수리마냥 살짝 비치는 주홍색 / 매끄럽기도 하여라 흡사 용의 침이로세.”라고 비유했다. 자신도 장한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흥취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순챗국과 농어회는 청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읊었던 시어이자 영원한 메타포였다. 귀거래의 소박한 꿈이 담긴 음식들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순채를 맛보는 것을 ‘신선의 취미’로 소개하고 있다.
그 요리는 순채차이다. “순나물을 좋게 여김은 그 맛이 시원한 데에 있는 것이다. 오미자를 우려낸 물에다 벌꿀을 탄 다음, 수나물을 적셔 먹으면 달콤하고 시큼하며 맑고 시원한 맛이 흡사 선미라, 이를 당할 만한 맛이 없다. 육기, 장한 제공도 지혜가 오히려 여기에 미치지 못했으니, 이는 한 꾀가 모자랐다고 해야 마땅하겠다.”
순채는 위장 기능에 좋다. 조선 전기 전순의의 <식료찬요>에는 붕어와 석수어(조기)를 순채와 함께 요리하는 식치방이 있다. “위장을 열어주고 그 기운을 기르는데는 조기와 순채로 국을 끓여 먹으면 좋다”고 했다. <산림경제>에도 조기를 사용하는 식치방을 소개했다. 조기는 “고기 머리에 바둑알만 한 돌이 있는데 그것을 갈아서 먹으면 임질을 치료할 수 있다. 그리고 석수어는 순채와 함께 국을 끓여 먹으면 매우 좋다.”
이색은 무려 십여 편의 시에서 순채와 장한의 귀향을 노래했다. 서거정은 ‘순채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순채를 사랑했다. ‘순채가’가 있다. “순채는 남국에서 생산되는 거라 / 시골 노인이 부지런히 뜯어다가 / 이것을 친구에게 보내주니 / 빛깔과 맛이 다 뛰어나누나. / 미끄럽디 미끄럽고 가늘디 가늘어서 / 실보다 가볍고 타락죽보다 보드랍네. / 나는 본래 채식만 하는 식성이라 / 평생에 담박한 것을 즐겨 먹는데 / 이 나물이 내 식성에 꼭 맞는지라 / 이 때문에 내가 몹시 좋아하노라.”
순채는 비쌌고, 꽤 귀한 식재료였다.
연산군도 순채를 즐겼다. ‘순(蓴) 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순채 명산지였다. 철원 순담 계곡, 김제 순동리, 의성 순호리 등이다. 강원도 간성군(고성군) 오음산 밑 선유담이라는 호수는 <신동국여지승람>에 “순채가 못에 가득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순채를 좋아해서 조선산 순채를 대량 반출했다. 일본에서는 순채를 ‘환상의 풀’이라는 뜻으로 ‘준사이’ 또는 ‘누나와’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도 순채 초회, 순채 전골, 순채 불고기 등이 있었다. 순탕은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여름철 보양식이었다. 민물고기에 연한 순챗잎을 넣고 끓인 국이다. 그러나 일본 강점기 동안 순채 요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후에는 아무도 순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970년 대일 수출이 재개되었고 순채가 자생하는 습지는 ‘돈못’으로 불렸으나,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 1990년대에는 멸종위기 식물종으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그리워하던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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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순채, 두부. <조선의 탐식가들>스크랲을
공부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