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첫 번째 내가 올렸던 글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자.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창조된 자이다. 그러나 그 창조는 우리 삶의 경험을 체현하는 한에서의 창조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창조는 삶의 재구성이다. 그런데 기존의 드라마적 질서에서 이 재구성은 바로 전형적 인물의 창조와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드라마 속 인물은 어떤 전형성을 담지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전형적 인물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 보편적으로 ‘그러그러함’이 승인된 인물이다. 따라서 이 질서에서 창조된 인물은 그 인물의 사회적 계층, 조건 등에 어울리는 행동과 말투를 부여받는다. 물론 각각의 인물들도 창조된 인물인 이상 그만의 독특한 행동양식이나, 개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이 개성은 그 전형성의 하위항목이다. 이 인물이 이 계층 안에서 그러그러하게 행동하는 한에서 개성이 빛을 발하게 된다. 인어아가씨에서 아리영의 표독한 성격, 구체적 행동, 눈물...이 모든 것은 그녀가 놓여져 있는 전형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다. 바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전형적 상황 속에서 관객들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형태의 행동과 성격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로망스에서 김하늘과 김재원의 아름다운 사랑(다양한 이벤트, 눈물나게 하는 감동적인 대사 - 예를 들자면 다음에 태어날 때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말아요 - 와 인물들의 개성)은 그 두 사람이 계층적으로 구분되는 전형적 도식 안에서 종속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애틋하고, 개별의 이벤트들이 이 드라마 안에서만 가능한 개성 넘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두 사람이 전형적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은 선생님으로서, 한 사람은 제자로서, 그래서 사회적으로 질시와 질곡을 면하기 어려운 - 이미 주어진 예증된 멸시 - 전형적인 위치에 정위될 때 비로소 그들의 구체적 사랑은 그 애틋한 정서로서 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그 전형성이 인물의 구체성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따라서 이 전형적인 트랜디 드라마에서 인물의 창조는 그 자체로 왜곡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개성의 형성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승인된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명시적으로 말하자면, 인물의 독특한 개성은 이 전형성의 성긴 그물망으로는 잡을 수 없는 구체적인 것들이라는 점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전형적인 인물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그 계층의 사람들의 일반적 속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많이 생략되고, 일반적으로 그러게 행동해야 하는 행동만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인물들은 작가와 사회적 눈에 결박된 포로이다. 쉽게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걸러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관우가 그만의 개성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성취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전형적인 제자 - 따라서 선생님과 사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 임을 우리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인 것이다. 여기서 그의 개성은 아무리 로망스의 관우만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전형성이 인정된 이후에나 빛을 발하게 되는 종속적인 성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전형적 트랜디 드라마가 인물의 개성을 완전히 사상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개성을 주변부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말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위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알 것이다. 때로는 이성적으로 이러면 안된다고 거부하는 성질(드라마로 보자면 전형적 성질)이 있는 반면 그런 것들 다 떨쳐버리고 남을 자유분방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욱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그냥 우리 인간 내부에서 공존하고 투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 이성적 판단에 의한 전형적 행동들이 답습되고 권장되어 왔을 뿐이다.
이 전형적 인물들이 창조되는 드라마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은 바로 인물간의 구도를 단순화시킨다는 점이다. 이 단순화는 드라마의 도식성을 가능하게 하고, 어쩌면 이 도식성이 드라마를 보는 이의 눈을 편안하게해 줄 것이다. 너무도 모든 것이 명확하게 구획되어 있고, 자신들이 응원해야 할 대상, 증오해야 할 대상들을 명시적으로 지정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로망스에서는 관우와 선생님의 계층적 구도가 대립적이고, 또한 그 둘의 사랑과 사회적 관습과 질서는 그 반대편에서 서로 저항한다. 일반적으로 드라마에서 어떤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는 반드시 방해물이 있게 마련이고 -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겠지만 - 그 방해물은 때로는 사회적 질서 또는 그 질서를 수호하는 전형적 인물에 의해 표상된다. 악인의 설정 역시 이러한 맥락이다. 어떤 두 사람의 사랑은 상당히 정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둘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일 때 등장하는 사람들이 소위 악인들이다. 비단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뿐 아니라, 착한 사람이 성공하는 이야기(명랑소녀 성공기, 별을 쏘다) 이면에는 반드시 악인이 배치되게 마련이다. 왜? 그들의 투쟁과 성취가 관객에 의해 아주 눈물나게 감동적인 것으로 증폭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이 없으면, 그들의 성취도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로망스>의 사랑도, <별을 쏘다>의 사랑도 어쩌면 반대편에서 전형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들이 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로망스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는가? 그렇다면 <네 멋대로 해라>는 이러한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 멋> 역시 경이와 복수의 사랑 반대편에서 그것을 흠집애고 방해하려는 전형적인 악의 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따라서 이 죽음만큼 강렬한 최루성 악의 축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극복되기는커녕, 체념적으로 승화되는 것이 고작일 때가 많다. <네 멋>도 현대 트랜디 드라마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바, 여기서도 죽음은 그 둘의 사랑을 더욱 더 견고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해주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드라마가 탈 트랜디 드라마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