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먹이 풀을 베려고 낫질을 할 적에는 낫을 먼저 풀에 댄 후에 풀의 윗부분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 손으로 당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만약 왼손으로 풀을 먼저 싸잡고 낫을 당기면 새끼손가락 옆의 손바닥의 모서리의 살점이 잘려 나간다.
나는 이 방법을 모르고 첫 번의 풀 자르기 흉내를 내다가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흘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미국은 풀을 베어서 모을 일은 없으니 그냥 죽이기 위해서 낫의 모양이 벋어 있고 풀을 후려쳐서 죽이기만 하면 되니 긴자루에 양쪽으로 된 톱날같은 강철연모가 있을 따름이다.(골동품. 내가보관 중)
키가 작은 학생-1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미취학 아동이어서 집에서 아버님으로부터 창호지에 붓글씨로 쓴 언문(諺文)을 배웠는데 양반같이 정좌를 하고 글씨를 쓰지 않고 서당에게 배우듯 대나무 책대로 짚어가면서 한자 한자 읽게 되는데 ‘가’자(字)기역 ‘각’하고, ‘가’자 니은 ‘간’하고,……‘개’는 ‘가'자 땡이 개라!’라고 큰소리로 읽었는데 만으로 5살인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글자는 ‘ㅎ’ 자 이었는데 아버님께서 붓끝을 문종이에서 떼지 않고 펜 흘림체로‘
'이렇게 써 놓았으니 그 당시의 내 생각으로는 이 글자만은 원래부터 이렇게 생긴 글자인줄로 만 여겼다.
하루는 장에 가시면서 내가 글을 읽기로 약속을 했는데
‘약속과 그릇은 깨지기 쉽다’
고 내가 총념(聰念)을 했어야 되는데 다른 아이들과 놀다 보니 잊어 버렸고 아버님은 돌아오실 때 주전부리를 하라고 장날이래야 먹을 수 있는 ‘아메다마(飴玉, 아까워 입에 넣고 서서히 녹여먹던 시절이었다)’라는 눈깔사탕까지 사 오셔서 귀중한 선물이 안겨지기 직전인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낭패(狼狽; 이리를 뜻함, 모든 것을 망친다)가 나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장에서 돌아오신 아버님께서는 불알을 만져 보면 내가 공부를 했는지 또는 놀기만 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넌지시 말씀을 하셨는데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이었을 것이니 주저주저하면 의심을 가지실 것이 뻔 하니,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가자미 마냥 냉큼 위장술을 써서 옷 위로 만져 보게 했다.
“공부를 안했네?”
하시기에 나는 솔직하지를 못하고 이판사판(이판;수도승, 사판;살림승)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임기응변으로
“나는 공부를 했는데 아부지는 거짓말하네요!”
라고 양심은 뒤로 젖히고 우렁찬 목소리로 짐짓 탄식조의 감탄사 제1호를 발했더니
“아! 참! 네 말이 맞다, 맞다! 내가 일부로 해본 말이다!”
하시면서 얼굴에 주름을 가득히 만드셨다.
거짓말하는 당신 아들의 말을 천연스럽게 믿으셨으니 그 당시의 나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을 것이고 새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을 텐데 느끼시지 못하셨나 보다.
하기야 아이들이 이익이 된다면 양심은 뒷전으로 밀쳐놓고 가끔은 거짓말을 앞세워 가며 자라게 되지만 그때에 내가 솔직하지 못하고 아버님을 속인 이 거짓말 한마디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지금까지도 떨떠름하게 잊혀지지 않고 두고두고 교편(敎鞭; 가르치는 막대기, 원어는 채찍)으로 돌아온다.
하기야 조지 워싱턴의 부친이 영국에서 수입한 어린 버찌나무를 누가 잘랐느냐고 물으니 워싱턴이
“손도끼를 잘 드나 시험하기 위하여 잘라보았습니다.”
라고 했는데
“당장 벌을 내릴 것이야!”
하니
“저는 벌이 무서워 거짓말을 하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하며 딱 잘랐다는데 이 말도 만들어 낸 것임이 최근에 판명이 됐다니 나도 조금은 위안을 받기는 한다.
영어시간에 함철상선생님께서 워싱턴은 자랄 적에 블랙버드(blackbird)라는 검은 새들과 같이 자랐다 하니 우리는 까마귀인줄로만 계속 여겨왔는데 선생님께서는 까마귀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틀림없이 까마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온 후에 보니 작은 검은 새이며 까마귀는 크로우(crow)라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포토맥 강을 뒷마당으로 하여 전망이 좋은 자리의 언덕위에지은 워싱턴의 저택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는데 침실의 굵은 기둥은 실같이 가는 줄을 그어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마호가니(mahogany)로 둔갑시켜 놓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어서 얼음 창고, 소다리 훈제 실, 신발과 말안장 제조실이 있으며 집주위의 백년도 더 묵은 큰 나무들은 낙뢰를 우려하여 피뢰침을 달아놓았다.
기역, 니은, 디귿,…,모두 ‘으(ㅡ)’를 써는데 오직 ‘ㅅ(시옷)’ 만이 ‘오(ㅗ)’를 사용한다는 것은 ‘옷’에서 온 말인지 ‘의복’이 중요하다는데서 온 말인지 아직도 미지수로 남는다.
그때에는 입학 이전인데 삼촌의 초등학교 붓글씨의 습자(習字)책에는 아버님이 쓰신 글씨보다 훨씬 멋지게 글씨 끝이 뾰족하게 씌어 진 글들이 많이 있어서 읽어보곤 했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가갸 가다가, 거겨 거랑에, 고교 고기 잡아, 구규 국 끓여서, 나냐 나하고, 너녀 너하고, 노뇨 노나 먹자’,
라고 되어 있었다.
미국의 아이들이 하얀 방 벽(dry wall)에 낙서를 하듯 하루는 외갓집에 나들이를 갔었는데 바로 옆집에는 하얗게 회 칠을 한 큰 벽이 꼭 크디큰 종이로 착각 내 눈에 확 들어 왔다.
죄의식 보다 의욕이 앞서서 일을 저질러느라고 붓글씨 교본의 글씨처럼 한번 멋지게 써보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어린 아이머리에 꽉 차니 잠시 돈키호테가 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틈바구니가 없어져 외갓집 부엌에서 큰 숯덩이를 주워와 ‘자유대한 독립만세’ 라고 여덟 자를 습자책(習字冊)에 있는 그대로 두 줄로 크고 멋지게 정자로 써 놓았다.
이 일을 안 옆집 주인이 노발대발부터 시작하고 외할머님과 이모님께 야단을 치며 지우라고 하셨으나 지워지지 않아 부엌 식칼로 벽을 긁어 크게 글자모양의 상체기를 내니 내 마음 또한 죄책감의 상처를 받아 두고두고 생각이 나서 가끔은 나를 괴롭힌다.
이 경우 학교입학을 하기 전인데, 한 가지는 알고 다른 한 가지는 모르고 있는 둔한 나를 사람들은 총기(聰氣)가 있다고 칭찬들을 많이 했다.
아버님으로 봐서 내가 첫 아들이 되어 나하나 밖에 없으니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실 적에는 지게 위에 앉혀서 다니 신 적도 있었고 황소로 짐을 실어 나르실 때 길마가 비면 나를 위에 태우고 다녀셨다.
옷 칠을 한 일본산 대나무 화분(썩지 않음)에 심어 놓은 진달래꽃들을 내가 따먹고 싶다고 응석을 부렸더니 아버님께서는 거부를 해야 할 말씀을 찾지를 못하셨다.
첫댓글 먼 먼 옛 날의 추억
그림자도 없는 세월
그때가 그립기만 한 것은?
그당시의 상황이 비록 슬펐을 지라도 추억은 아름답기만 하답니다.
사람이 늙어면 과거에 산다고 했던가요?
상상하며 읽으니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