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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제국의 만남>
사실 중국과 러시아의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몽골을 통해서 중국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1608년 러시아는 대상을 보내 중국과 교역을 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1618년 이바시코 페들린을 단장으로 하는 일련의 사신들이 자금성에 도착했었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1)를 알현하지는 못 했지만 베이징에 며칠간 머물면서 만리장성 등을 보았다. 이들은 명 황제를 알현하고 조공을 바치라는 국서를 받아왔지만 이 국서는 1675년까지 번역이 되지 못 했었다. 당시 중국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2001년에 만들어진 바실리 포야로코프 기념 주화 -
한편 바실리 포야로코프는 1643년부터 아무르강 유역을 탐험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화기로 다우르족 등 인근 원주민들과 싸워서 이기고, 약탈하며 상당한 양의 모피를 긁어모았다. 그는 1646년에 야쿠츠크로 돌아가 아무르강 유역이 식량이 풍부하고 모피가 많다고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가 시작되었다.
1649년에는 예로페이 하바로프가 이끄는 탐험대가 아무르강 유역을 탐사했다. 이전에 바실리 포야로코프가 벌인 약탈 원정 때문에 러시아인들을 나찰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원주민들은 모두 숨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자신감이 찬 하바로프는 일단 야쿠츠크로 돌아가서는 추가 병력을 얻어내고 아무르강 일대로 다시 갔다. 그걸 본 다우르족 등은 화친을 제의하는 척 하면서 러시아인들을 공격했지만, 러시아인들의 총 앞에 모두 패배했다. 하바로프의 탐험대는 원주민 여자들을 강간한 뒤 노예로 끌고 다니고, 집을 불태우고 모피를 빼앗아가고는 현재의 하바로스크 지역에 아친스크 요새를 세웠다. 결국 원주민들은 자신들을 복속시켰던 청나라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 "거 녀석들 별거 아니구만. 하하하!" -
1639년에서 1643년에 걸쳐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벌였던 청나라는 이 무렵 명나라 잔당들을 소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에 웬 이상한 놈들이 분탕질을 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순치제는 1652년 영고탑에 주둔해있던 하이써(한국식 한자발음으로는 해색)란 장군이 1500명의 병력을 동원해 하바로프를 치라고 명령했다. 하이써의 군대는 1652년 3월 24일 206명의 탐험대만이 주둔해있던 아친스크 요새를 기세등등하게 공격했지만, 러시아인들은 고작 10명이 죽을 때 676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해색은 그 죄로 처형당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새로 임명된 장군 사르후다는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켜, 청야작전을 펼치는 한편 해색이 대패한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분석해본 결과 패배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하바로프 탐험대는 전부 수석식 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해색의 군대는 화승총을 가진 병사가 30명 정도였고, 대포도 고작 6문이었다. 화력에서 밀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조총을 가진 병사들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 "주력은 남쪽에 다 투입해야 하는데 북쪽은 자꾸 간지럽고.... 어쩐다... 그래! 그 놈들을 부르자!" -
문제는 당시 청나라는 주력을 강남 지방에 투입해야 했다는 것이다. 해안가를 간지럽히는 정성공 일당이나 윈난 등지에서 항거하는 남명을 때려잡는 것이 당시 청나라로써는 최우선이었다. 조총에 숙달된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남방에 투입되어야 했고, 따라서 만주 방면에는 그닥 실력이 좋지 못한 자들이 아주 소수만 배치되어있었던 것이다. 이 때 사르후다는 병자호란을 떠올렸다. 병자호란 당시 사르후다는 조선 원정에 참가했던 장수들 중 하나였고, 따라서 당시 조선군이 조총을 잘 다루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선군의 조총에 광교산에서 홍타이지의 사위가 전사하는 등 일부 고위급 지휘관들이 조선군의 조총 때문에 전사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청은 이들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1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은 북벌을 목적으로 군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북벌을 진짜로 할 생각이었는지와는 별개로 조선군은 강화되어있었다. 1654년 청의 사신 한거원은 효종에게 조총수 100명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 효종이 나선의 정체에 대해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 인근 별종이라고 말했다.(2)
- 나선정벌 당시 조선 조총병 상상도 -
어찌 됬든 효종은 이야기를 듣고 변급에게 152명의 병력을 주어, 영고탑으로 보냈다. 영고탑에서 사르후다와 합세한 조선,청 연합군 천명은 120척의 배를 끌고 러시아군을 치러 나갔다. 이 무렵 러시아 탐험대는 기존 수장 하바로프가 공로를 치하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란 자가 수장으로 온 상태였다.
400명 정도로 증강되어있던 이들은 주변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여자들을 능욕하고 노예로 부렸으며, 모피를 빼앗고 다녔다. 그러다가 1654년 4월 28일, 헤이룽강과 쑹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양측이 서로 만나 교전을 벌였다.
- 유유히 흐르는 아무르강변. 이 강에서 조선-청 연합군이 러시아와 전투를 치룬다. -
처음에 사르후다는 수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쪽의 배가 크고, 자신들의 배는 작은데다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 내구성도 취약하다고 조선측이 항의하자, 수전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닫고, 강 근처 언덕에 진을 쳤다. 사르후다는 참호를 파고 나무 방패를 잔뜩 세운채 조선 조총병들을 선두에 보냈다. 서로간에 총알과 화살이 오갔다. 조선과 청측은 나무 방패덕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방면 배에 타고 있던 러시아군은 계속 조선군의 조총에 맞아 숫자가 점점 줄었다. 러시아쪽은 안 되겠다 싶어서 상륙전을 시도했지만 조선군의 반격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
결국 스테파노프는 잡아두었던 여자들을 나무에 묶어두어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한 후에 재빠르게 쿠마르스크 요새로 도망쳤다. 조선과 청의 군대는 의기양양하게 귀환했다. 당시 조선군은 한 명도 죽지 않고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3)
<2차 나선정벌>
- "쓰읍. 어쩔 수 없지. 녀석들의 힘을 또 빌리는 수 밖에! 가라! 조선!"
그러나 조선군이 조선으로 돌아가자마자 청군은 다시 러시아를 막아내기도 버겁게 되었다. 쿠마르스크에서 힘을 비축한 스테파노프는 이듬해부터 다시 만주를 기웃거리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순치제는 1500명의 병력을 보내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게 했지만 쿠마르스크를 함락시키지도 못 하고 식량이 끊겨서 돌아가야 했다. 거기에 1657년에는 사르후다의 군대도 러시아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순치제는 다시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했지만 아직 남명이 멸망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방의 병력을 뺄 수는 없는 노릇. 결국은 또 조선군의 힘을 빌려야 했다. 조선은 함북병마우후 신류에게 200명의 병력을 주어서 영고탑으로 보냈다.
그러나 정작 영고탑에 도착해보니 이미 청군은 출발한 상태였다. 조선군은 허둥지둥 사르후다가 주둔한 곳으로 합류했고, 그 곳에서 훈련을 하다가 베이징에서 온 추가 지원병력과 합세한 후 스테파노프를 토벌하러갔다. 나나이족 등 현지 원주민 병력과 조선군, 청군이 포함된 1400명의 병력에 47척의 배를 끌고 간 이들은 6월 경 스테파노프의 탐험대와 충돌, 교전을 벌였다.
조선-청 연합군은 이 때 러시아측에 화공을 벌였지만 전리품을 탐낸 사르후다가 배를 태우지 말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조선-청 연합군은 허둥지둥댔다. 이 사이 러시아측이 반격을 가해 조선군 7명과 몇몇 청나라 병사들이 전사했다. 하지만 조선-청 연합군은 계속 공격을 가했고, 결국 스테파노프를 포함 코사크인 270명이 전사했다. 연합군은 스테파노프의 탐험대에 붙잡혀 성노예가 되어있던 여자들을 구출하고, 다수의 모피, 군기, 총 등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은 겨우 이콘을 실은 배에 95명 정도를 태우고 도주했다.
- 수석식 머스킷에 대한 사진. 이 수석식 머스킷은 18세기 물건이나 17세기 수석식 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이후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사르후다는 모피와 총 등 조선군의 전리품 다수를 강탈하고, 노획한 배 한척을 주어 전사자를 화장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신류가 화장에는 강력히 반발해 전사자들은 매장되었고, 신류는 러시아의 배를 검사하면서 상당히 튼튼하다는 감상을 남겼다. 이후 신류는 어찌저찌 사정하여 겨우 수석식 총(머스킷)을 한 정 얻어 돌아갔다.(4)
- "아싸! 기회다! 아무르강을 우리가 제패하리라!" -
이후 청은 1660년에 러시아군대를 자력으로 격파해냈다. 하지만 1661년 2월 순치제가 병으로 죽고, 아직 8살밖에 안 된 순치제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가 황제에 올랐다. 4명의 대신들이 섭정을 보기로 했지만 오배가 곧 전권을 장악하고 청나라의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남명이 같은 해 멸망하기는 했지만 정성공이 대만을 점령해버리며 남중국을 찔러대고 있었고, 남중국에는 청나라의 중원 정벌을 도왔던 세 명의 항장들이 번왕이 되어 일종의 반독립적 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청은 아무르강 일대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 틈에 러시아는 다시 슬금슬금 아무르강 일대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무르강 일대 소수민족들은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53년에 러시아를 피해 도주, 청나라에 의탁했던 다우르족 족장 간티무르가 1667년 러시아로 넘어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청나라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알바진 이야기>
1665년 일림스크의 보이보다 오브호프가 일림스크에 살던 폴란드인 니키포르 체르니코프스키(5)의 딸을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니키포르 체르니코프스키는 오브호프를 죽이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주했다. 그들은 다우르족 족장 알바즈가 살았던 아무르강 유역으로 도주한 후, 알바즈의 이름을 딴 도시 알바진을 세우고 일종의 소왕국을 형성했다. 그는 그 곳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다우르족과 코사크족등을 통치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모스크바의 인정을 받기 위해 꾸준히 모스크바로 세금을 바쳤다.
- 알바진과 그 주변지역이 그려진 18세기 중엽 아무르강 일대 지도 -
알바진은 1670년 경 청의 소규모 공격을 막아냈다. 이를 본 러시아 정부는 1672년에 알바진의 반란군들을 정식으로 사면하고, 관리를 보내 이 지역을 정식으로 중앙정부가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알바진은 이제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분쟁에서 핵심적인 장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편 1653년 표도르 이사코비치 바이코프가 교역을 목적으로 베이징을 방문했지만, 고두의 예를 거부했다며 쫓겨났다.(6) 하지만 1658년과 68년에 세트쿨 아부린이란 부하라 사람이 바이코프의 명으로 베이징에서 모피 장사를 했는데 꽤나 큰 수익을 올렸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모피 교역이 큰 이득을 낼 거라는 것을 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마침 아무르강은 청나라의 청야전술로 식량생산 및 모피 생산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판이었기 때문에 아부린의 성공은 러시아가 아무르강 일대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당시 황제는 만력제였다. 웬지 안 만나준게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2) 당시 서양에서는 러시아를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스크바 공국이라고만 불렀다. 따라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중국에서도 모스크바 공국으로 알고 있었기에, 뜬금없이 러시아라고 나타난 자들이 모스크바 공국과 같은 나라라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 하고 북방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종족으로 보였다.
(3) 북정록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인들은 벙거지 쓴 조선인들을 머리 큰 사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나니아족들이 말했다고 한다.
(4) 조선에서 이 총을 몇 정 시험적으로 생산했지만 가격이 화승총의 3배나 되는데다가 그에 비해 성능은 아주 조금 개선된 수준이라, 가격 대비 효율이 안 나온다고 판단하고 생산을 중단했다.
(5) 그는 폴란드 혹은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1633년에 러시아군에 포로로 붙잡힌 후 정교회로 개종했던 상태였다. 1636년 경에 그는 폴란드로 도망치려고 시도했다가 붙잡혀 시베리아로 추방된 상태였다. 그는 일림스크에 거주하면서 나름의 세력을 일구었던 상태였다.
(6) 개그 한 토막. 러시아어로 항복 요청이나 협상 요청은 '세르비체'라고 했는데 이는 고두의 중국식 발음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첫댓글 캬 대두가 자랑스럽긴 처음이네욬ㅋㅋ 대두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