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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오피스텔 ..
유희는 옛집에서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 서로 많이 사랑했던 거 같은데 왜 헤어진 것일까 ..
이어지던 생각 끝에는 유진이 있었다. 문득 몸서리쳐질 만큼 그가 그리워졌다. 유희는 이층 계단을
오른다. 이층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라 텅 비어 있었다. 텅 비어있는 공간 한쪽 벽면을 사진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희는 그 사진들 앞에 서 있었다.
떨리는 유희의 손끝이 사진 속 유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옆으로 정이 그리고 은수 ..
은수 옆에는 사고 전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얼굴의 자신 ..
정이는 이 세상에 없다. 사고가 있던 날 정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까 ..
유진과 은수가 지금 자신을 본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할 거라고 유희는
생각했다. 여러 번의 성형수술로 자신의 얼굴에서는 예전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 오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 유진과 은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
그때였다. 음산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유희의 주의를 맴돌고 있었다.
.. 사진 속 어디에도 지금의 너의 모습은 없어 ..
유희는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수많은 사진 속 어디에도 지금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들은 예전의 사진들이고 당연히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 안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희는 그 곳에 자신이 없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와 온 몸을 떨고 있었다.
.. 그들을 용서하지 마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잖아 그들은 이미 너를 잊었어 ..
목소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고 있었다.
"누구야 .. !"
유희는 두려움을 이기려 소리쳤다.
.. 너는 날 잊지 않았잖아 ..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울려 퍼졌다.
.. 사진 속 저 여자 항상 은수 옆에 있는 저 여자 그 여자가 나야 ..
유희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사고 전 자신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또 다른 유희가 자신을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 사고가 있었어 난 얼굴을 잃어야 했지 하지만 잃은 건 얼굴뿐만이 아니었어
나의 사랑 나의 친구 그리고 나의 인생 모든 것이 사고 후 내 얼굴처럼 변해 있었어 ..
유희는 또 다른 유희에게서 떨어져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또 다른 유희의 얼굴은 수술 전 심한 상처로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얼굴은 놀란 유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 안 가득 얼음을 씹으면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만들며
사라져갔다.
그녀의 거짓말
고열이 나의 몸을 뒤흔들고 있을 때 나는 가까스로 핸드폰을 찾아냈다.
힘없는 손이 핸드폰을 귓가로 가져가려 하던 그때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는 유진의 일기장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재촉하는 전화벨 소리에 나는 먼저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여보세요?"
"나야 .. 은수"
나는 대꾸할 힘도 없었다.
"유진인 아직 자고 있어."
나는 너무 놀라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어디야?"
"유희야 .. 부탁이 있어"
은수의 부탁은 자기 대신 유진이 옆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달려가 그곳에는 유진이 몸을 구기고 누워있었다.
나는 먼저 은수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난 그의 옆에서 그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
몸을 뒤척이던 유진이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저 그런 모습을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내가 할 질문을 오히려 유진이 내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그곳을 빠져나와 호텔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나의 이런 기분을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 날씨는 너무도 맑았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드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후 .. 유진은 셔츠의 단추도 다 잠그지 못한 채 급하게 뛰어나왔다.
평소 반짝이던 머릿결은 삐죽삐죽 흐트러진 모습이었고 구겨진 셔츠에 부스스한 얼굴
운동화도 똑바로 신고 있지 않았다. 겨우 세수만 하고나온 모습이 역력했다.
지젤까지 오는 내내 우리는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앉는 그 자리에 마주하고 늘 마시던 아이스티와 레몬에이드가 올 때까지도
우린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젯밤의 일들이 마치 먼 일처럼 느껴졌다.
"미안해 .."
유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핸드폰은 왜 꺼져있었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정면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잃어버렸어 .."
"그랬구나 .."
"은수도 핸드폰을 에콰도르에 놓고 왔다고 해서 .. "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줄래?"
그제 서야 난 처음으로 유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유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의 말을 기다리다 지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얘기를 먼저 해줄게 어제는 내 생일이었어 갑자기 너와 은수가 사라지고
정이와 난 사라진 너희들 때문에 파티를 망쳐버렸어. 우린 서로 말하진 않았지만 머릿속은
오만 잡다한 생각들로 넘쳐나고 있었어.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고 남겨진 정이와 나는 집으로
돌아 갈수도 그 자리를 지키며 너희들을 기다릴 수도 없어서 비를 맞으로 목마름으로 갔어.
거기서 실컷 술을 마시고 어둠이 다 거친 후에야 각자 집으로 돌아갔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너에게 선물로 받은 일기장을 보다 잠이 들었는데 조금 전 은수의 전화를 받고 너에게 간거야"
내가 얘기하는 내내 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화가 나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유진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촉촉한 그의 눈동자가 나를 보며 부탁하고 있었다. '그냥 묻지 말아달라고 ..
어떻게 나에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지 참으로 기가 막혔다.
눈물이 나려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지만 정이한테는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할 거야, 먼저 갈게"
선 채로 차갑게 그 말만을 남기고 지젤을 나왔다. 그는 나를 붙잡지도 따라오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 고열에 시달리던 내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지만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니?"
"샤인이야 커피 마시고 있어."
샤인은 에콰도르 근처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지금 거기로 가도되니?"
"유진인?"
"좀 전에 헤어졌어."
"그래, 기다릴게"
난 바로 택시를 타고 샤인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잡지책을 보며 앉아있는 은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은수 앞에 앉자 은수는 잡지책을 덮으며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은수는 맨 얼굴에 긴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제 유진이한테 고백했어. 좋아한다고 .."
"그래서?"
난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에콰도르에서 유진이가 나가는 걸 보고는 따라 나갔는데 날 보더니 어지러워서 찬바람 좀
쐬러 나왔다고 하더라. 유진이가 술이 좀 약하잖아."
그때 은수의 핸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은수는 핸드폰을 보더니 소파쿠션 밑으로 밀어 넣었다.
"왜 안 받아?"
"정이야, 지금은 받고 싶지 않아."
"유진이 말로는 네가 핸드폰을 에콰도르에 두고 왔다던데?"
"그거야 그냥 둘러댄 말이지. 자기 핸드폰이 없다면서 내거를 빌려달라고 하잖아."
"너는 나나 정이 생각은 안했니?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지 뻔히 알면서 말이야"
"내게는 그때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어. 미안하지만 너희들 걱정까지 할 여유는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니?"
그때 다시 쿠션 밑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은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핸드폰 배터리를 빼려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유진이니?"
나는 놀라서 은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은수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계속 전화기속 유진에게
열중해 있었다.
"기억 안나니? 네가 너무 많이 취해서 호텔로 데리고 간 거야"
"달리 방법이 없었어. 기억나지 않는다니 할 말이 없다. 그저 난 진심을 얘기한거였고,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던 거뿐이야"
"넌 마음 따로 몸 따로 그런가보지?"
"어쨌든 내가 한말, 그리고 어제의 일 진지하게 생각해줬음 좋겠어.
지금은 길게 통화하기 좀 그러니까 나중에 전화해줘 기다릴게."
은수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고 머릿속은 새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은수는 핸드폰과 배터리를 분리해서는 핸드백 안에 넣고는 말을 이었다.
"많이 놀랐을 거야. 너에겐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왜 하필 유진이인지 ..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 내 감정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 이러지 말아야지 이러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진일 보면 그게 안 되는 거야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데 .. 나도 많이 힘들었어.
내가 어떤 짓까지 했는지 알아?"
은수는 핸드백 안에서 유진의 핸드폰을 꺼내 올려놓았다.
"함께 있고 싶어서 유진이 핸드폰을 훔치고 술도 많이 먹였어. 내가 이런 짓까지 했다고!"
은수는 조금 흥분한 것 처럼 보였다.
"어제 너희 함께 잔거니?"
난 침착 하려고 애쓰면서 은수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니까 유진인 많이 놀라고 당황해 하는 거 같았어.
자기에게는 유희가 있고 나는 정이의 여자 친구라고 하면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설득을 하더라,
한참을 설득하더니 자기도 상황이 심각 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권하는 술을 다 받아 마시더라고
유진인 곧 만취상태가 되었어. 그때 까지만해도 유진이를 데리고 에콰도르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
잘 걷지도 못하는 유진이를 부축하니까 내게 기대어 오는 거야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나는 통제력을 잃고 말았어. 호텔 안에서 유진일 유혹한거는 나였지만 나중에는 ..
유진이도 분명 받아들였어. 그의 정신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히 그의 몸은 나를 원하고 있었다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정신이 멍해져왔다. 물속에 잠긴 것 처럼 아득하게 ..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니? 유진일 알게 된 후 널 다시 만나게 되었고, 정이도 알게 되었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정말로 행복 했었는데 .. 생일 촛불을 끄며 빌었던 내 소원이 뭐였었는지
알아? 우리 네 사람 지금처럼 영원하게 해달라는 거였어.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건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럼 생각이 들어서 .. 나보다 네가 먼저 유진일 사랑하게 됐더라면 ..
처음부터 너희 둘이 연인사이였다면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에겐 정말 미안해 .."
맥이 풀렸다. 왠지는 모르지만 은수를 질책할 수 없었다.
우리 사이를 왜 이렇게 망쳐 놓았느냐고 원망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