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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단(韃靼 : Tatar)으로 본, 조선사(朝鮮史)를 위한 조언(助言)
○ 고지도(古地圖)를 들이대며, 달단(韃靼)이냐? 타타르(tatar)냐? 타르타르(tartar)냐? 타타리아(tartaria)냐? 하는 이야기들이 회자(膾炙)된 적이 있었다. 벌써 오래된 얘기지만, 우리 카페(Cafe)에서는, 이미 수년(數年) 전(前)에, 한참 논의(論議)되었던 적이 있었다.
조선사(朝鮮史)에서 타타르【Tatar : 달단(韃靼)】란, 북변(北邊)과 서북변(西北邊)의 골칫거리였을 뿐이다. 타타르【Tatar : 달단(韃靼)이란 말은, Tatar를 음역(音譯)한 것이다.】「양수척(揚水尺) 곧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등으로 깊은 관계(關係)가 있는 종족(種族)이다. 〈이들은 수백(數百), 수천(數千)이 무리를 이뤄, 가축(家畜)들과 이동(移動)하며, 유랑(流浪)하였는데, ‘백정(白丁)과 재인(才人)’들도 이들로부터 기원(起源)한다고 하며, ‘기생(妓生)’ 또한 마찬가지라고 설명(說明)한다. 이들은 고려(高麗)초부터 천인(賤人)으로 분류(分類)되어, 주류(主流)들과 화합(和合)하지 못하고 떠돌았다.〉고 전(傳)해진다.
※ 조선사(朝鮮史)의 달단(韃靼 : Tatar)이란 :〈달노(㺚奴)·달달(達達)·달적(達賊)〉이라고도 하며, 예(例)를 들면 / 조선(朝鮮)왕조실록(王朝實錄) 태종실록 17년 4월 19일 (을해) :《敎曰:咸吉平安豐海道各官散接生鴈干酥油干名目推考,其中韃靼仍舊定體,平民竝屬軍役 : 하교하기를 : 함길·평안·풍해도 각 고을의 산접간·생안간·수유간의 명목을 추고하되, 그 중에서 달단(韃靼)은 그전대로 정체하고, 평민은 모조리 군역에 붙이도록 하라하였다.》[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 이런 자(者)들을 두고…조선(朝鮮)이라고 한다든가, 또는 고구려(高駒驪)라고 하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즉(卽) 옛 조선(朝鮮) 또는 고려(高麗 : 高句驪)는 타타르【달단(韃靼) : Tatar】를 포용(包容)할 수 있으나, 타타르【달단(韃靼) : Tatar】는 “조선(朝鮮)이나 고려(高麗 : 高句驪)”를 담기엔 너무 작은, 미미한 존재(存在)다.〉
고지도(古地圖)중에서, 일부(一部)의 지도(地圖)에서, 우연(偶然)치고는 특이(特異)하게도,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는 곳마다, “타타르(tatar)…타르타르(tartar)…타타리아(tartaria)”등으로 표기(表記)되어, 마치 “조선(朝鮮)”이 아닌 다른 나라 영토(領土)인 것처럼 인식(認識)되게끔 만들어 놓았고, 또 타타르(tatar)…타르타르(tartar)…타타리아(tartaria)가 조선(朝鮮)인 것처럼 헷갈리게 만들어 놓았다.
➊ 이건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한 자(者)들의 음모(陰謀)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를, ‘타타르(tatar)·타르타르(tartar)·타타리아(tartaria)’등의 가공(加工)된 이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➋ 또 하나는, 당시(當時)에 동방(東方)에 대한 정보(情報)가 부족(不足)했던 구라파(歐羅巴)에서 특히 현 러시아(Russia)에, 몽고(蒙古)군대(軍隊)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물밑 듯이 쳐들어와, 그들의 지배(支配)를 받게 되었는데, 몽고(蒙古)군대(軍隊)중의 달단(韃靼)소속 병사(兵史)들의 잔인(殘忍)한 습성(習性)으로 인하여, 몽고(蒙古)는 곧 달단(韃靼)으로 인식(認識)하고, 동방(東方)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등지의 몽고(蒙古)지배(支配)하에 들어간 곳 모두를 달단(韃靼) 곧 타타르(Tatar)라고 했다는 것에서, 고지도(古地圖)의 타타르(Tatar) 영역(領域)이 탄생(誕生)된 배경(背景)이라고 보는 견해(見解)가 많다. 가장 설득력(說得力)있는 주장(主張)이다.
➌「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스피(Caspi)해(海)의 그 동(東)쪽 땅과 우랄(Ural)산맥의 그 동(東)쪽 땅」, 이 모두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통치(統治)가 미치던 땅이었다. 그런데 소위(所謂) 고지도(古地圖)라는 것들을 보면, 이곳 모두에 “타타르(tatar)·타르타르(tartar)·타타리아(tartaria)”등의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이름으로 도배(塗褙)되어 버렸다. 이게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일 수 있을까?
“타타르(tatar)·타르타르(tartar)·타타리아(tartaria)”가 무슨 말인가? 옛 달단(韃靼)부족(部族)의 이름일 뿐이며, 근원(根源)은 사투리가 잘못 전해져, 이로 인해 지들 스스로 ‘달단(韃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고전(古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다.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의 진위여부(眞僞)(與否)는? 이게 사실(事實) 중요(重要)한 것이다. 13세기경으로부터 그 이후(以後)로 나오는 지도(地圖)들을 보면 오늘날의 지도(地圖)와 거의 같은 수준(水準)의 것들이 주류(主流)를 이루는데, 그러한 지도(地圖)를 당시(當時)에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順序)일거라고 본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데, 돈과 시간(時間)을 줄이면서 극적(劇的)인 효과(效果)를 노리는 것이 바로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이다. 옛 지도(地圖)라는 것에, 그들이 목적(目的)하는 대로, 그리기만 하는 되는 것이니 말이다.
혹자(或者)들은 ‘고구려(高駒驪)가 타타르(tatar)’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런 이야기가 조선사(朝鮮史)를 어지럽게 만드는 요인(要因)이다. 고구려(高駒驪)는, 본시(本是)「고려(高麗)·고려(高驪)·구려(句麗)·구려(駒麗)·구려(駒驪)」등으로 불리다가 고구려(高駒驪)라고도 했다.〈“타타르(tatar)”는 : 고구려(高駒驪)에게 의탁(依託)하고, 정복(征服)당한 많은 나라(國)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 중의 하나는 될 수는 있어도, 고구려(高駒驪) 자체(自體)가 될 수는 없다.〉 고구려(高駒驪)를 이은, 후(後)고구려(高駒驪)인 “고려(高麗)”초부터 “달단(韃靼 : 타타르)족은 천인(賤人)으로, 일반(一般)백성(百姓)들과 혼인(婚姻)조차도 하지 못하고, 농경생활(農耕生活)에 적응(適應)하지 못하고, 지들끼리 수백(數百), 수천(數千) 무리가 가축(家畜)들과 함께 유랑(流浪)생활(生活)을 했다고 한다. 이걸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을까?
고지도(古地圖)에 그려져 있는 것들은, 목적(目的)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현혹(眩惑)된다면 오류(誤謬)를 양산(量産)하게 되며, 고지도(古地圖)의 목적(目的)은 바로 이런 것들을 노린 것이다. 옛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면서, 고구려(高駒驪) 또는 고려(高麗)등의 “조선(朝鮮)” 땅에 타타르(tatar)라는 조그만 부족(部族) 이름을 차용(借用)해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간파(看破)하지 못한다면 : 조선사(朝鮮史)는 영원(永遠)히 어둠속에 묻히고 말 거다.
○ 우리 카페(cafe)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論議)되고 주장(主張)한 바와 같이, 〈달단(韃靼 : 達靼)은, 곧 타타르(tatar)이고, 타르타르(tartar)이고, 타타리아(tartaria)〉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인 ‘백과사전’등을 검색(檢索)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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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실크로드 사전 / 타타르[Tatar]〉 : 몽골인에 대한 비칭. 유럽의 중세 작품들에는 ‘타르타르’(Tartar) 혹은 ‘타타르’(Tatar)라는 이름으로 몽골 혹은 몽골인이 묘사되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 문학의 시조인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Iliad)에서 언급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악마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세 영국의 유명한 연대기 작가인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 1200년경~1259)는 1240년에 쓴 『히스토리아 마조르』(Historia Major, 일명 Chronica Majora)에서 그해에 지옥의 악귀처럼 유럽에 내습한 무리가 바로 ‘타르타르인’들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타르타르’인(人)들을 기독교의 공적(公敵)으로 간주하고 일치단결해 축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시류에 편승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41년 7월 3일 영국 왕 헨리 3세(재위 1216~1272)에게 보낸 서한에서 “타르타르인들이 지옥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아니지만,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서방을 정복하여 기독교를 근절하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들은 하루 빨리 협력해 이 야만족을 본국으로 축출해야 합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오늘날 타타르란 이름을 가진 약 500만의 투르크계 민족이 우랄 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 러시아 땅에 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타르 [Tatar]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창비) / -인용(引用) / 끝-
(2)〈다음백과 / 타타르족(Tatar)〉 : 튀르크어를 쓰며, 인구는 약 500만 명이다. 러시아의 동부, 남부와 시베리아 남부에 산다. 10세기에 러시아 남부의 투르크계 유목민이 유입되어 타타르족을 구성하였고 몽골 제국이 건설되면서 그밖에 다른 민족이 추가되었으며, 19세기에 인근 부족들이 타타르족에 흡수되었다.
8~19세기에 러시아 제국 하에서 상인·교사·관료 등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다. 최고 통치자는 타타르의 칸이었으며 그 가족 가운데 일부가 16세기에 러시아의 귀족이 되었다. 이러한 계층 구조는 러시아 혁명기까지 존속되었다.
타타르족은 14세기에 수니파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투르키스탄에 이슬람 신앙이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9~15세기 경제생활의 기초였던 유목과 농경의 혼합형태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음백과/인용/끝)
(3)〈타타르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타타르족(Татарлар/Tatarlar) : 약 700만 명 : 타타르 족(타타르어: Татарлар/Tatarlar 따따르라르, 러시아어: Татары, 중국어: 鞑靼人/韃靼人, 영어: Tatars)은, 투르크계 민족이며 타타르스탄의 주민이다. 타타르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를 믿으며, 타타르어를 쓴다.(위키백과/인용/끝)
(4)〈중국민족지 / 타타르족의 기원과 형성〉: “타타르”는 본 민족이 자칭한 칭호로서, 중국의 한문 사료에서는 이를 ‘달단(鞑靼)’, ‘달달(达达)’ 등이라 표기하였다. 타타르족은 고대 아시아 북부의 보쟈얼인(保加尔人), 치푸챠커인(奇普恰克人)과 몽골인(蒙古人) 등 여러 민족이 장기간 융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7세기 전후, 카스피 해 이북 초원의 보쟈얼(保加尔) 유목 부락은 볼가 강(伏尔加河)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류와 카마하(卡玛河) 일대에 왔으며 당지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볼가-카마하 보쟈얼 부락연맹(伏尔加-卡玛河保加尔部落联盟)’을 건립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보쟈얼 부락연맹은 이슬람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13세기 몽골인들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보쟈얼 부락연맹을 정복하였고, 볼가 강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광활한 지역에 금장칸국(金帐汗国)을 건립하였다. 금장칸국의 성원은 구성이 복잡하다.
금장칸국에는 보쟈얼인 외에도 돌궐어를 사용하는 치푸챠커인이 있다. 몽골인 내부에는 부락이 아주 많은데 타타르부는 그중의 하나로, 당시 서방인들은 몽골인을 두리뭉실하게 타타르인이라 불렀다. 칸국의 통치자인 몽골인은 점차 현지 주민들이 사용하는 돌궐어를 사용하였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슬람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이로써 금장칸국 내의 보쟈얼인, 치푸챠커인과 몽골인은 점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 15세기 중엽, 금장칸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원래의 볼가 강과 카마하 지구에는 새로운 카산칸국(喀山汗国)이 세웠졌다.
칸국의 사람들은 돌궐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신앙하며 비슷한 생활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의 새로운 민족인 타타르족으로 융합되었다. 카산칸국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몽골인에 대한 경내 주민들의 공포 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을 몽골인의 후예라고 자처하였으며, ‘타타르인(塔塔尔人)’이라 자칭하면서, 칸국 내의 주민들도 ‘타타르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기 카산칸국은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타타르라는 칭호도 계속하여 사용되었으며, 하나의 민족 명칭이 되었다.
중국의 타타르족은 19세기부터 러시아의 카산, 세미레이치(斜米列奇), 재쌍(斋桑) 등의 지역에서 이동하여 왔으며, 그 이동 시기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19세기 전반, 러시아 농노제의 위기가 심화될 당시 토지를 약탈당한 사람들과 제정러시아의 각박한 세금과 병역을 피해 중국 신강으로 온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제정러시아 정부의 조사가 두려워 성씨를 고치고 카자흐인의 부락에 들어가 생존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20세기 전후 중국의 정치, 경제에 대한 제정러시아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신강으로 유입된 러시아의 상인들이다. 이 시기 카산 지구의 타타르 상인들도 신강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신강의 각 도시로 이동하여 가게를 운영하거나 교육, 종교에 종사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920~1930년대, 제정러시아의 병역을 피해온 사람들과 10월 혁명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여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온 소상인, 농민, 수공업자 등이다. 이들은 신강에 이주하여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편입되었다.(인용/끝).
(5)〈타타르 연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국교 : 텡그리교 : 타타르(몰도바어: Татар, 몽골어: Татарын, 고대 튀르크어: 𐱃𐱃𐰺)는 12세기 몽골 고원의 주요 다섯 부족연맹체(몽골, 케레이트,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중 하나이다. "타타르"라는 이름은 732년경 돌궐의 퀼테긴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비문에 보면 “타타르 30부족 연맹”이라는 뜻의 “오투즈 타타르 보둔(고대 튀르크어: 𐰆𐱃𐰕 𐱃𐱃𐰺 𐰉𐰆𐰑𐰣 Otuz Tatar Bodun)”이라는 말이 나온다.
타타르인들은 5세기에 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다가, 10세기 거란의 요나라에 신종했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금나라는 타타르가 다른 몽골 부족연맹들과 싸우도록 뒤에서 조종하였다. 그 결과 타타르는 몽골의 암바카이 칸이 금나라에 잡혀가 죽는 데 공헌하였고, 몽골과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이 시기 타타르는 후룬 강과 부이르 강 유역의 비옥한 지대에서 유목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무역길을 틀어쥐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성립된 뒤 타타르는 몽골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이후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은 타타르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몽골의 침략을 받은 서양, 특히 러시아에서는 몽골(이 경우 킵차크 칸국)을 싸잡아 "타타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타타르족"이라 하면 12세기의 타타르 연맹과는 별 관계없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한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타타르족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인, 쿠만인, 튀르크화된 몽골인(노가이인)들의 혈통이 섞여 있다.(인용/끝).
◇ 텡그리 신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Tengrian crescent.svg : 텡그리 신앙(-信仰) 또는 텡그리즘, 텡그리주의는 샤머니즘, 정령 숭배, 다원주의, 조상 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중앙아시아의 종교이다. 텡그리(고대 튀르크어: 𐱅𐰭𐰼𐰃)는 "하늘"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고대 튀르크족, 몽골족, 흉노족, 훈족의 국가였던 돌궐 제1카간국, 서돌궐, 고대 대불가리아, 하자르 칸국, 불가리아 제1제국 등에서 숭배되었다. 1991년에 있었던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구소련의 튀르크계 국가 및 지역(러시아 타타르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포함)에서 숭상되고 있으며 사하 공화국, 하카스인, 투바인 및 시베리아에 있는 튀르크계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부흥 운동이 이뤄지고 있다. (인용/끝).
(6) 〈타타르 / 나무위키〉: 타타르어 : Татарлар (Tatarlar) / 영어 : Tatars, Tartars / 중국어: 達靼 / 鞑靼 (Dádá, 달단) 또는 塔塔爾 / 塔塔尔 (tătăěr, 탑탑이)
튀르크 계통 부족의 하나. 유럽, 러시아 등에서 몽골-튀르크 계통의 중앙아시아 종족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현재는 이슬람을 믿고 터키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타타르란 고대 터키어로 "다른 사람들"을 뜻한다. 서구 국가에서는 "Tartar"라는 표기를 주로 썼다. 중국어로는 달단이다.
엄밀히 말해서 서양(서유럽과 러시아)에서 말하는 "타타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계와 튀르크계 유목민족을 모두 통칭하는 말이다. "몽골리아"라는 말이 정착되기 전 까지 "타르타리"라고 불렀을 정도. 따라서 근대 이전 서구 문헌의 '타타르'란 그냥 '중앙아시아 여러 유목민족들'을 통칭하는 말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 '타타르 부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 터키, 우크라이나 등에 사는 타타르인은 관련이 있는데 바로 이들이 칭기즈 칸이 속한 키야트 몽골족에게 적대시하다 정복당하고 나서 ‘주치’의 유럽 원정 대원들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터키의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가 크림 칸국 멸망으로 쫓겨난 이들이 망명한 것이다.
비슷하게 다른 튀르크 부족들도 홀라구의 바그다드 원정 때 선봉대로 끌려온 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눌러 앉아 하자라인이 되었다. 구미권에서 타타르란 단어를 본다면 그냥 몽골과 튀르크계가 혼합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 전부를 일컫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쪽도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 이후 킵차크 칸국이 내부 붕괴 하면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노가이 칸국 등의 여러 튀르크화된 유목 국가로 나누어져 반목을 하다가, 결국 하나 둘씩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유럽, “특히 이들과 본격적으로 역사적 접점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이런 이슬람을 믿는 몽골-튀르크계 유목민들을 모두 뭉뚱그려 타타르”라 불렀기 때문에, 이 단어가 널리 퍼진 것이다.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던 기간(1230년대~1480년)을 일컬어 소위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대충 흑해에서 현 러시아령 연해주까지 펼쳐진 광활한 스텝 평원 전체를 그냥 뭉뚱그려 '타타르족의 땅'이란 뜻인 타타리아, 영어로는 타타리(Tartaria, Tartary) 라고 불렀고, 유럽에서 나온 역사 지도를 보면 청나라를 두고 '중국령 타타리', 만주를 두고 '극동 타타리', 크림 칸국이 한창 주름잡았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소(작은) 타타리',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령 타타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16세기~17세기 루스 차르국 측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카잔 칸국, 크림 반도의 무슬림 타타르들에게 대항하여 동시대 한창 청나라에게 밀려나 서쪽으로 도망치던 오이라트, 러시아 현지에서는 칼미키아라고 불리는 불교 타타르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다. 실제로 준가르의 일부가 현재 러시아 쪽으로 이주하여 새운 칼미키아 칸국은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던 몽골의 후손들인 크림 칸국, 카잔 칸국에 대항마인 러시아 제국의 역사적인 동맹이자 속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튀르크나 몽골과 근연 관계에 있는 같은 알타이어계통인 퉁구스인 즉 만주족이 세웠고, 내몽골의 몽골인들도 여기 동조해 가담했다. 일반적으로 만주 및 몽골은 불교 타타르, 티무르 제국이나 킵차크 칸국, 오스만 제국 등 튀르크계는 이슬람 타타르로 서로 구분했으며, 만주족 내지 여진족의 근원지 중 하나인 연해주와 사할린의 사이 바다는 타타르 해협이라 불린다. 심지어 인도의 몽골국가로 티무르의 후예들인 무굴 제국(구르카니)의 경우 인도 타타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식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중국 역시 청나라 정부를 놓고 '중국은 현재 타타르 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묘사했을 정도. 즉 타타르라는 명칭이 알타이 계통의 기마 유목민족들 즉 몽골인, 만주족, 튀르크족 등을 통칭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셋 다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고, 말을 타며, 언어도 비슷해서 백인이나 한족 입장에서는 헷갈릴 만하다. 사실 근대적 의미에서 언어, 문화,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 등에 기반한 체계적인 인류학적 구분과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국제적 대학 체계와 학계라는 게 생기기 전에 이러한 문화적 교류와 각종 집단 간의 상호 이해 과정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과 직결 된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니 저렇게 눈으로 딱 보이고 대충 보면 비스무리 해 보이는 생활 습관과 종교적 차이로 민족 간 구분을 지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담으로 이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오해'도 큰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를 뜻하는 '타르타로스'가 '타타르'와 매우 발음이 비슷했던 것이다.
'타르타로스'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몽골족'보다는 '타타르'라는 명칭이 더욱 깊이 와 닿았고, 그 때문에 중세 시기부터 서구에서는 몽골인이나 튀르크인이 "카프카스 산맥 지하의 타르타로스(Tartaros)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기어 나왔다."는 황당한 전설이 널리 퍼졌다. '타르타로스'에서 나왔으니까 '타타르'라는 이름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였던 것. 실제로 튀르크는 흉노 시절부터 동유럽을 털었고, 악몽같은 기세로 진격하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킵차크 칸국 군대도 튀르크 기병들이 주축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말이 필요없는 "유럽의 악몽" 이었으므로 이런 전설이 통했다. 그리고 실제로 튀르크인은 서돌궐에서 유래했는데, 그 서돌궐이 차지한 영역이 캅카스와 카스피 해, 우즈베키스탄 부근이다.
이런 민간 전설에서 타타르에 대한 인식은 딱 모르도르에서 몰려나오는 우르크하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나오는 '때거지, 군중, 군락' 등을 의미하는 호드의 러시아 단어인 Орда(오르다)란 단어를 아무런 접두사 없이 쓰면, 역사 속의 그 킵차크 칸국을 의미할 정도로, 이때의 충격이 깊게 각인되었다. 애당초 호드(Horde)라는 단어자체가, 영어에서 보통 킵차크 한국을 의미하는 Golden Horde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만큼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가 러시아에 깊은 유산을 남겼기에, 이후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온전히 살아남아 끊임없이 수많은 슬라브인들을 억압, 수탈하고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징키스칸과 주치의 후예들인 카자흐, 키르기즈, 우즈벡 등의 튀르크인들을 적대하면서도, 내부적으로 복속된 타타르족 앞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하얀 대칸 (белый хан)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웠다. 물론 유일하게 살아남은 킵차크계 국가인 크림 칸국은 같은 튀르크계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 알아서 복속되어 영주국이 되었다.(인용/끝). -(1)에서 (8)까지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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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역사통설(歷史通說) (1)에서 (6)까지의〈“달단(韃靼)=타타르(tatar)”에 대한 설명을 보면, 비록 왜곡(歪曲)된 것이기는 하지만 “타타르(韃靼)”에 대한 대략적(大略的)인 이해(理解)를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달단(韃靼)=타타르(tatar)」는, 몽고(蒙古)족의 일원(一員)으로, 글란(契丹)의 별부(別部) 소부락(小部落)이다. 〈몽고(蒙古)니, 달단(韃靼)=타타르(tatar)니 하는 종족(種族) 또는 부족(部族)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한 일원(一員)이 될 수는 있었어도, 조선(朝鮮)을 대표(代表)한 일은 없다. 자격(資格)조차 없다.〉
「달단(韃靼)=타타르(tatar)!」 이들에 대해서 “명(明)”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던 자(者)들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을 격파(擊破)하고, 명(明)왕조(王朝)를 세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고전(古典)인 원전(原典)보다 더 자세(仔細)하게 설명(說明)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그 서(西)쪽 지방(地方)【구라파(歐羅巴)】에서는, 이런 고전(古典)을 기록(記錄)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卽) 당시(當時)에, 역사서(歷史書)를 기록(記錄)하고 만드는 재주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 명(明)나라【서력(西曆) 1,368∼1,644년】말(末)과 청(淸)나라 초(初)를 겪었던 “고조우(顧祖禹:1,631~1,692)”가 편찬(編纂)한 것이다. 서력(西曆) 1,659년에 착수(着手)하여, 1,678년에 완성(完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말하는 달단(韃靼)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讀史方輿紀要 / 卷 四十五 / 山西 七 / 外夷附考 : (몽고(蒙古)와 달단(韃靼)과 관계(關係)되는 부분(部分)만을 발췌(拔萃)함)
➊《四裔考:中略.蒙古,契丹別部也.契丹部落之小者,曰蒙古·曰泰赤烏·曰塔塔兒·曰克列,各據分地.既而蒙古皆兼有之.或曰:蒙古即韃靼也. : 사예고(四裔考) : 중략(中略). 몽고(蒙古)는, 글란(契丹)의 별도(別途) 부락(部落)이다. 글란(契丹)부락(部落)의 작은 부락으로, 몽고(蒙古)는, 태적오(泰赤烏) 또는 탑탑아(塔塔兒), 극열(克列)이라고도 하였는데, 각자 의탁하여 나눈 땅에 있었다. 몽고(蒙古)가 모두 이를 합쳤다. 혹은 이르기를 몽고(蒙古)는 곧 달단(韃靼)이라고 하였다.》
➌《續通典:韃靼本東北方夷( )別部。唐貞元以後,奚、契丹漸盛,部眾分散,或屬契丹,或依勃海,漸流徙於陰山。其俗語訛,因謂之韃靼。: 속통전(續通典) : 달단(韃靼)은 본래 동북방(東北方) 오랑캐( )의 별부(別部)이다. 당(唐) 정원(貞元)이후에, 해(奚)와 글란(契丹)이 점점 성해지니, 부족 무리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혹은 글란(契丹)에 들어가고, 혹은 발해(勃海)에 의지하였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자 음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풍속 말이 잘못되어 이로 인해 달단(韃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歐陽修曰:韃靼在奚、契丹東北,後為契丹所攻,部族分散,居陰山者,號曰韃靼。: 구양수가 이르기를 : 달단(韃靼)은 해(奚)와 글란(契丹)의 동북(東北)에 있었다. 뒤에 글란(契丹)이 공격(攻擊)하자, 부족(部族)이 분산(分散)되었는데, 음산(陰山)에 살고 있는 자(者)들을 달단(韃靼)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기록(記錄)을 보자 : 〈달단(韃靼)은 ‘해(奚)·글란(契丹)’의 동북(東北)에 있었는데, 뒤에 글란(契丹)의 공격(攻擊)을 받자, 도주(逃走)하여 부족(部族)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음산(陰山)으로 숨어들어 의탁(依託)한 자(者)들을 “달단(韃靼)”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음산(陰山)」이란 해국도지(海國圖志) 구장춘(邱長春)서유기(西遊記)에 의하면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서북(西北)에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이다.〉【또 하나의 천산(天山)은, 그 서남(西南)쪽에 있는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이다.】
㉮「서(西)쪽에 있던 글란(契丹)의 군대(軍隊)가 공격(攻擊)했다면 더 멀리 동북(東北)쪽이나 동(東)쪽으로 도주(逃走)해야 맞는 말이다.」 이와는 반대(反對)로 글란(契丹)의 군대(軍隊)가 공격(攻擊)해 오는 쪽으로 도주(逃走)했다면, 그건 도주(逃走)가 아니라 한바탕 싸워보고자 진격(進擊)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위 기록(記錄)은, 도주(逃走)하여 여기저기로 흩어져 분산(分散)되었다.」고 하였다.
㉯ 그렇다면 글란(契丹)의 동(東)쪽이나 동북(東北)쪽에 크고, 높고, 깊은 산이 있으니 그곳으로 숨어들어 부족(部族)을 보존(保存)했다는 것이다. 그 산(山) 이름이 〈음산(陰山)〉이란 거다. 「음산(陰山)」이란 해국도지(海國圖志) 구장춘 서유기(西遊記)에 의하면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서북(西北)에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이다.〉【또 하나의 천산(天山)은 그 서남(西南)쪽에 있는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이다.】
㉰ 그렇다면 구양수(歐陽修)의 설명(說明)은 뭔가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음산(陰山)은 글란(契丹)【현 하북성(河北省) 동북(東北)지방】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만 리(萬里)도 넘게 떨어져 있는,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서북(西北)에 있는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결과적(結果的) : 글란(契丹)은 당시(當時)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지방(地方)에 있었고, 그 동북(東北)쪽에 달단(韃靼)의 여러 부족(部族)들이 있었는데, 글란(契丹)이 공격(攻擊)하자 뿔뿔이 흩어져, 일부(一部)는 글란(契丹)에 항복(降伏)하여 노예(奴隷)가 되고, 또 일부는 발해(勃海)로 의탁(依託)했고, 또 일부(一部)는 음산(陰山)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부족(部族)을 보존(保存)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음산(陰山)에 숨어 살며 보존(保存)한 자(者)들을, “달단(韃靼)”이라고 불렀다는 거다.
➍《宋國史:蒙古在女真之北,唐為蒙兀部,亦號蒙骨斯. : 송(宋) 국사(國史)에서는 : 몽고(蒙古)는 여진(女眞)의 북쪽에 있는데, 당(唐)때는 몽올부, 또 몽골사라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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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蒙古)」는「몽골(Mongghol)」이다. “울란바토르(Ulaanbaator : 붉은 영웅)”를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形成)되어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위치(位置)에 자리 잡고 있다.
몽고(蒙古)란 본시(本是) 부족(部族)의 이름으로 소수종족(小數種族)이라고 하였다. 곧 글란(契丹)의 소부락(小部落)이다. 인종(人種) 역시(亦是) 동양인(東洋人 : 황인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칭기스칸【철목진(鐵木眞) : 成吉思汗 : Genghis Khan】의 선조(先祖)들이 오늘날의 「카스피(Caspi)해(海)를 건넜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몽고(蒙古)라는 나라와는 전혀 다른 영토(領土)와 인종(人種)으로 구성(構成)되어 있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고구려(高駒驪) 및 발해(勃海)의 왕자(王子)였다〉거나 하는 주장(主張)을 하는 분이 있다. 이 분들은 ‘성길사한(成吉思汗) 곧 철목진(鐵木眞)’이 어떤 인종(人種)이었는가를 먼저 연구(硏究)해야 될 것이며, 본래(本來)의 몽고족(蒙古族)이 어떤 인종(人種)이었는가를 먼저 고찰(考察)하는 것이 순서(順序)라고 본다.
만약(萬若), 〈고구려(高駒驪) 및 발해(勃海)의 왕자(王子)였다〉는 주장(主張)을 계속(繼續)할 수 있으려면 : 신원사(新元史) 서두(序頭)에 기록(記錄)된 : 칭기스칸【철목진(鐵木眞) : 成吉思汗 : Genghis Khan】의 선조(先祖)들이 오늘날의 「카스피(Caspi)해(海)를 건넜다」라는 기록(記錄)을 해결(解決)해야 한다. 이것은 이 가계(家系)가 황인종(黃人種)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내용(內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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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蒙古)=몽골」에 대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설명(說明)하기를 :
《몽고(蒙古)고원(高原)을 중심(中心)으로 만주(滿洲)와 중국(中國) 북부(北部) 등의 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유목민족(遊牧民族)이다.》라고 하면서,
《몽고(蒙古)는 넓은 의미로는 황색(黃色)인종(人種)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使用)되기도 하며, 국명(國名)을 지칭(指稱)하는 경우(境遇)도 있는데, 이 경우 몽골(Mongol)로 호칭(呼稱)한다. 본래(本來) 몽고(蒙古)고원(高原)에서 유목(遊牧)생활(生活)을 하였으나, 13세기 초(初)에 흥기(興起)하여 아시아와 유럽 양(兩) 대륙(大陸)에 걸치는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11·12세기의 몽고고원에는, 나이만(Naymann), 케레이트(Kereyid), 메르키드(Merkid), 타타르(Tatar), 옹구트(Ongghud) 등의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몽고족(Mongghol)도 이러한 여러 부족 중의 하나였다.》고 추가(追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인용(引用)/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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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을 보면 :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해설(歷史解說) 그 이상(以上)도, 그 이하(以下)도 아닌 똑같은, 무려(無慮) 72년이 자났음에도, 그 때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어 놀라울 뿐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놀랍게도 몽고인(蒙古人)이란 뜻을 전체(全體) 황인종(黃人種)으로, 확대해석(擴大解釋)하는 어리석기 한없는 짓을 하고 있다. 스스로 조선사(朝鮮史)를 조작(造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본시(本是) 몽고인(蒙古人)은, 색목인(色目人)일까? 황인종(黃人種)일까?〉 이런 중요(重要)한 사실(事實)조자 알지 못하는 자(者)들이, 몽고인(蒙古人)을 황인종(黃人種)으로 몰고 가는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1)「몽고(蒙古)」란 말과, 「몽고인(蒙古人)」이란 뜻을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➊ 통상적(通常的)으로,「몽고(蒙古)」는 ‘철목진(鐵木眞)’ 이후(以後)에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한 나라를 몽고(蒙古) 또는 원(元)이라고 통칭(統稱)하며, 이 안(內)에는, 많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등의 이민족(異民族)도 포함(包含)되어 있다.
➋「몽고인(蒙古人)」이란 “본시(本是)의 몽고(蒙古)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을 말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시절(時節) 연행기(燕行記)를 보면 : 〈몽고인(蒙古人)의 특징(特徵)은, 색목인(色目人)이며, 광대뼈가 뛰어나오고, 수염은 붉은 색이다.〉라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으며, ‘몽고(蒙古)비사(祕史)’에서도 똑같은 말을 한다.〈철목진(鐵木眞)=성길사한(成吉思汗)의 아버지는 파란눈동자(碧眼)를 가졌다.〉고 하였다.
(2) 몽고족(蒙古族)은, 글란(契丹)의 한 부족(部族)으로, 〈글란(契丹)의 많은 부락(部落)중에서, 이들에게 의탁(依託)한 소부락(小部落)이었다.〉고 하였다. 이들 몽고족(蒙古族)은, 글란(契丹)의 동북(東北)에 있었는데, 글란(契丹)의 공격(攻擊)을 받자, 일부(一部)는 항복(降伏)하여 이들의 노예(奴隷)가 되고, 일부(一部)는 발해(渤海)에 의탁(依託)했고, 또 무리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도주(逃走)했다고 하였다.
(3)〈철목진(鐵木眞)=성길사한(成吉思汗)〉의 선조(先祖)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는「‘카스피(caspi) 해(海)’를 건너 왔다」고 신원사(新元史)는 말한다. 즉(卽) 흑해(黑海)쪽에서 카스피(caspi)해(海)를 건넜다는 이야기다. 이는 〈철목진(鐵木眞)=성길사한(成吉思汗)〉의 선조(先祖)는, 흑해(黑海)연안(沿岸)이나 우랄(Ural)산맥(山脈) 서(西)쪽에서 살았던 “벽안(碧眼)과 붉은 수염을 가진 색목인(色目人)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기록(記錄)이다.
〈신원사(新元史)에서 말하는 ‘카스피(Caspi)해(海)’를 건넜다〉는 말과 〈글란(契丹)의 공격(攻擊)으로, 부족(部族)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도주(逃走)했다〉는 말은, 같은 내용(內容)을 다르게 설명(說明)하고 있을 뿐이다.
(4)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은, 몽고(蒙古)가 점령(占領), 통치(統治)했던 많은 지역의 백성(百姓)들을 “몽고인(蒙古人)”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몽고인(蒙古人)들의 통치(統治)를 받던 몽고(蒙古)백성(百姓)들을 말하는 것일 뿐이며, 그 속에는 수많은 이민족(異民族)들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에, 그 흔적(痕迹)이 남아있어 20세기 초(初)까지도 원(元) 당시(當時)의 가문(家門)들이 토호(土豪), 군벌(軍閥), 지주(地主)로 남아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몽고(蒙古)의 지배층(支配層)들은, 벽안(碧眼)과 붉은 머리와 구레나룻가 많았던 색목인(色目人)들이다.《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雖極寒之時.只設帳於車上而宿於道路.朝乃拂雪而起. :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나는 자들이다.》라고 설명(說明)하는데, 이게 바로 본시(本是)의 몽고족(蒙古族) 형상(形相)이다.
그 중에서도 “잿빛(灰色) 눈동자(目睛)” 를 가진 자(者)들이 있었는데, 이 자(者)들이 바로 “몽고(蒙古)의 귀(貴)한 자손(子孫)” 들이라고 했다.
신원사(新元史) 卷 一 本纪 / 第 一 序纪 에서는 :《蒙古之先,出於突厥.本為忙豁侖,譯音之變為蒙兀兒,又為蒙古.金人謂之韃靼,又謂之達達兒. : 몽고(蒙古)의 선대는, 돌궐에서 나왔는데, 본래 ‘망활륜’이며, 역음이 변하여 ‘몽올아’이고, 또 몽고(蒙古)이다. 금인(金人)이 부르기를 ‘달단(韃靼)’이라 했는데, 또 ‘달달아(達達兒)’라 불렀다. 蒙古衣尚灰暗,故稱黑達達.其本非蒙古,而歸於蒙古者,為白達達,野達達.詳氏族表. : 몽고(蒙古)는 회색의 어두운 옷을 숭상하는데, 고로 ‘흑달달(黑達達)’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본시의 몽고(蒙古)인이 아니다. 돌아온 자가 몽고(蒙古)인인데, ‘백달달(白達達)’이요, ‘야달달(野達達)’이다. 씨족(氏族)표에 상세하다. 孛兒只斤,突厥語譯義灰色目睛,蒙古以灰睛為貴種也. : 발아지근(孛兒只斤)은, 돌궐(突闕)말인데, 그 뜻은 회색(灰色) 눈동자(目睛)인데, 몽고(蒙古)사람이 회색(灰色)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신분(身分)이 귀(貴)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5)〈고구려(高駒驪) 왕자(王子) 또는 발해(勃海) 왕자(王子) 또는 후손(後孫)이, 이런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들을 제압(制壓)하고 이들을 통솔(統率), 부족(部族)을 일통(一統)하여, 새로운 나라(國)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르는 많은 고증(考證)사료(史料)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로부터 “환-빠”라는 소릴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또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등으로 매도(罵倒)당하지 않으려면 합당(合當)한 논거(論據)를 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진정 조선사(朝鮮史)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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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或者)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서 「옛 조선(朝鮮)이 시원(始原)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勿論) 그들도 많은 논거(論據)를 갖고 주장(主張)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역(逆)으로 :〈옛 조선(朝鮮)은 동방(東方) 땅에서 시원(始原)하며, 그곳에서【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동방(東方)의 선진화(先進化)된 문물(文物)을 받아들여, 오랜 세월(歲月)이 흘러 토착화(土着化) 내지 풍속(風俗)으로 자리를 잡았다.〉이게 답(答)이다.
이러한 수순(手順)을 반대(反對)로 하여,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서 시원(始原)한다고 말하면,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얘기다. 이것은 거꾸로 타는 보일러가 아니라, 거꾸로(반대로) 설명(說明)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종적(人種的)으로 보아도, 어림없는 이야기다.
우리도 이제 인간(人間)다운 삶의 이야기 곧 역사(歷史)를 인식(認識)해야 된다고 본다. 누구도 이해(理解)하기 어렵고, 신(神)들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축지법(縮地法)이라도 사용(使用)해야 갈 수 있는, 수천(數千) 수만리(數萬里)를 조석(朝夕)으로 왕래(往來)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그만하자.
2018년 02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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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양한 주장과 의견은 발전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에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선대의 삶의 발자취인 조선사(한국사)를 모욕하는 행위는, 누어서 침밷는 행위와 똑같습니다.
우리들의 부모, 증조, 고조등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있을 수 없겠지요.
조선사는 우리의 선대들이 살아온 발자취입니다.
항상 이 점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