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전(羅漢殿)
예로부터 나한영험도량으로 유명했던 석굴암은 6.25 사변으로 초토화되고 폐허가 되어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석굴도 1954년에 초안(超安) 스님이 오셨을 때는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 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석굴암 중흥의 원력을 세우고 기도정진한 가운데 불기 2505년(1961)에 17평으로 확장하였다고 합니다.
나한전(羅漢殿) 편액 -우봉(又峰) 선생 글씨-
독성(獨聖)과 아라한성중(阿羅漢聖衆)
아라한(阿羅漢)이란 arhat의 주격인 arahan의 음사(音寫)로 흔히 나한(羅漢)이라 약칭하여 쓰기도 합니다. 이를 한역하여 응공(應供)ㆍ살적(殺賊)ㆍ불생(不生)ㆍ무생(無生)ㆍ응진(應眞)ㆍ진인(眞人)이라 번역합니다. 이는 소승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하기도 하지만 크게는 대ㆍ소승(大小乘)을 막론하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합니다.
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는데 응하는 이, 이에 상응(相應)하는 이,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를 말합니다. 살적(殺賊)이란 번뇌의 적(賊)을 죽였다는 뜻이며, 불생(不生)이나 무생(無生)은 영구히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뜻이며, 진인(眞人)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며, 응진(應眞)이란 응당 예배ㆍ공양을 받을 만한 진인이란 뜻입니다.
또한 아라한은 여래십호(如來十號)의 하나로 부처님을 뜻하기도 하여 응공(應供)이라 합니다. 그런데 후에 부처님과 제자인 아라한을 구별하여 불제자(佛弟子)가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칭하게 됩니다.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라 합니다.
나반존자는 독성(獨聖)이라 일컫는데 한국불교 고유의 신앙대상으로, 부처님 재세시 빈두로 파라타존자(賓頭盧頗羅墮尊者)와 동일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독특한 성인입니다. 나반존자에 대한 기록은 어떤 경론(經論)이나 사기(史記)에 나타나지 않지만 의식문인 제반문(諸般文)에 독성재의문(獨聖齋儀文)에 나옵니다.
"우러러 고하노니 독성존자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인 그 중간세에 출세하나 진계(塵界)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숨기고 드러냄이 자재하니, 혹은 층층대상(層層臺上)에서 좌선하거나 혹은 낙락장송의 소나무 사이로 소요하며 왕래하거나, 혹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은은한 산 속에 한 칸의 난야(蘭若)를 지어 놓고는 앉거나 눕거나 하며 노닐고, 꽃은 환하게 피어나고 새는 조잘조잘 노래하며 성색(聲色)이 분연(紛然)한 가운데 자유롭게 경행(經行)하며, 노을 같은 흰색 납의(衲衣)로 어깨를 반쯤 드러내고 앉아 도를 즐기기도 하니, 눈빛 같이 희고 긴 눈썹은 눈을 덮었다....
오늘 헌공하는 제자가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옵나니 영산회상의 부처님으로부터 '너는 열반에 들지 말고 말세중생(末世衆生)의 복전(福田)이 되라는 당부를 받고 항상 천태산(天台山)에 있으면서 홀로 오매(寤寐)에 걸쳐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고 열반에 들지 않으므로써 중생의 복전이 되고 있으니, 용화회상(龍華會上)의 미륵부처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나반존자와 아울러 항상 존자를 따르는 모든 권속(眷屬)들께서는 이 도량에 강림하시어 저희들의 공양을 받아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또한 운심게(運心偈)에 이르기를 "삼명(三明)을 이미 증득하고 자신과 중생의 이익을 모두 원만하게 이루었으며 신통력이 자재하신 위대한 성인 나반존자님께 귀의합니다.(南無三明已證 二利圓成 神通自在 大聖那畔尊者)"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식문에 나오는 나반존자의 모습으로 볼 때 부처님 재세시 빈두로파라타존자(賓頭盧頗羅墮尊者)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빈두로존자는 영원히 세상에 머물며 외적인 특성으로 흰머리와 긴 눈썹을 가진 것이 특징인 점입니다. 어려서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었으나 세속인들에게 신통력을 드러냈다가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염부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열반에 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서 영원히 남천(南天)의 마리산(摩梨山)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한다고 합니다.
양주 석굴암 석조나한상(楊州 石窟庵 石造羅漢像)
나한상에 대한 안내문을 옮겨 봅니다.
양주 석굴암 석조나한상(楊州 石窟庵 石造羅漢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2-1호-
「양주 석굴암 석조나한상은 석굴암 중앙 수미단(須彌壇. 靈氣壇)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불상이다. 2011년 3월 8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2-1호로 지정되었다.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 고적편[1873]에 한봉창엽(漢峰瑲曄)과 금곡영환(金谷永煥)이 제작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높이 60cm의 나한상이다. 양주 석굴암 나한상 사적기를 통해 제작 연대와 작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전국 사찰에 산재한 석조 불상 가운데 19세기 후반에 불화승(佛畵僧)이 제작한 기년명(紀年銘) 불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조선 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독성상좌대 아래에 모셔 놓은 동자승상(童子僧像)
석굴암에는 『독성님과 동지팥죽』이라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설화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부산 마하사(摩訶寺)를 순례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이 동지팥죽과 나한의 전설이 있는 유명한 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지팥죽에 얽힌 원조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하사 외에도 몇 군데 더 있음을 알았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절마다 약간의 각색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한은 신통이 뛰어났음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봉산 석굴암 홈피에 있는 전문을 소개해 봅니다.
독성님과 동지팥죽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인 1792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석굴암에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두절되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씨 부인(파평 윤씨)이 인기척에 놀라 부엌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아라한성중(阿羅漢聖衆)의 모습
「깜짝 놀란 차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는냐?"하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대답했다. 차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 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은 차씨 부인은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차씨 영감(차대춘 씨)에게 부인이 새벽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 차씨 영감은 혹시 동자의 흔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았지만 눈 위에는 발자국 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아라한성중(阿羅漢聖衆)
「그 후 눈이 어느 정도 녹아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차씨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스님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동짓날 사시에 마지를 드리려고 예불을 드릴 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것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래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항망 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들었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동자승의 안타까운 사정을 굽어살핀 독성님이 이적(異蹟)을 보이셨던 것이다.
이후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차씨 집안은 6대조 차대춘(1802년 작고)씨와 2000년 현재의 차영민(60세)씨에 이르기까지 6대째 화제(話題)의 그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차씨 집안은 특히 이날 독성님께 팥죽을 공양한 음덕과 어머니의 간절한 나한기도 덕분에 6ㆍ25전쟁 피난길에서 잃어버렸던 당시 아홉 살 차영민씨가 살아서 돌아오는 등 집안이 나날이 번창해 화목한 일가를 이루었다.」
주지 도일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석굴암은 나반존자를 모시는 기도도량입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비롯해 1,250 나한을 모셔 진정한 나한기도처로 만들 생각입니다."
불탑을 든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우리는 독성님과 아라한성중님께 예배를 드리고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을 카페에 소개하고자 촬영하다가 가운데 계신 분은 누구이며 불탑을 들고 있는 분은 누구일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마침 석굴암 관계자이신 듯한 젊은 보살님이 오셔서 절을 하고 계시기에 절이 끝나면 질문을 해 보고자 앉아 있었습니다.
언제 끝나려나 하고 마냥 앉아서 기다렸는데 이윽고 끝나서 궁금한 점을 이야기 했는데 묵묵무답이라 염화님과 얼른 사진이나 더 촬영하고 나가려는데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곤 내려가기에 미진한 사진을 하나 더 찍으려 했는데 그새 다시 와서 여기서 함부로 존엄한 성상을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해서 더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중요한 것은 다 담은 상태였습니다. 그 보살님은 아마도 우리가 미심쩍었던 모양입니다.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카페에 소개하고픈 생각에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례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사찰순례를 하다보면 내부사진을 못 찍게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사진을 못 찍게 하는 사찰들은 홈페이지에 내부장면 곳곳을 명확하게 촬영하여 퍼 갈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 아니고 깊은 관심과 신심의 발로라고 생각하여 봐주면 안 될까? 앞으로는 가급적 종무소에 들어 허락을 득하고 찍을 일입니다. ^^
석굴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나한전 위에 위치한 삼성각
나한전을 물러나 삼성각으로 향했는데 법당 내부 사진을 찍지 말라는 말에 위축되어 아무것도 찍지 않아 눈에만 담아 두었습니다.
삼성각은 칠성, 독성, 산신을 모신 전각입니다. 안에는 삼성의 탱화 외에 엉뚱?하게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석조 지장보살상이 특별히 모셔져 있습니다.
삼성각을 찾은 후 내려와서 찾을 신축법당
최근에 건립된 이 전각은?
신축법당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에 건립된 전각으로 앞으로 협소한 대웅전을 대신할 큰 법당으로 여겨집니다. 뒤에는 적멸보궁의 창처럼 통유리로 창을 내어 뒤 축대 병풍석에 모셔질 조각상을 볼 수 있도록 할 것 같은데....
뒤에 무엇이 새겨질까?
이 그림 같은 전각은 무엇일까?
출입금지란 푯말이 붙은 곳은 휴심당(休心堂)
이곳은 스님의 주석처이자 수행공간으로 여겨집니다.
석굴암 경내의 풍경
석굴암 앞쪽의 풍광
공양간 위 장독대 모습
장독대 모습
제1탄에서 소개했지만 이 건물이 공양간입니다.
오후 3시 23분, 불이문을 나섭니다.
오후 1시 42분에 불이문에 도착해서 약 1시간 40분 정도 머물다 나섰습니다. 1950년 6ㆍ25사변으로 인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허 위에서 1954년부터 원력을 세워 63년 동안 이룩해 놓은 불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위대한 불사는 계속 중입니다. 인연 있는 다음 날에 다시 한번 찾아보고자 하며 물러났습니다. ()()() _(())_
하산 길에 만난 함박꽃
아름다운 함박꽃
함박꽃 망울
늘 함박 웃음으로 살아갑시다.
내려오다가 바라본 저 바위를 우리는 '책바위'라 이름붙여 보았습니다.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탐방지원센터
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까지는 2.7km네요.
이제 석굴암을 막 순례하고 나오니 석굴암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이 석굴암을 승용차나 시내버스(34번, 704번)로 가려면 구파발쪽에서 송추쪽으로 난 길로 향하다가 우이령입구 석굴암 이정표를 보시고 찾으시면 됩니다.
우이령 길을 완전히 안전하게 완보하였습니다.
우이령 길 이용안내
우이령 길 개방에 대하여.
양주와 강북의 주민들은 우이령길 완전개방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민서명운동도 벌여 왔습니다. 지난 5월 24일, 강북구의회는 우이령길 완전 개방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탐방예약제로 운영되는 우이령길에 대하여 사전예약, 신분확인, 탐방시간 통제로 이용에 대한 시민들의 불편과 앞으로 개통되는 우이-신설 경전철 개통으로 우이령을 찾는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아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 완전개방의 추세로 나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잘 보호된 자연이 무분별한 탐방객들로 하여금 훼손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안내
중요 야생생물 서식지 보호를 목적으로 우이령 일원에 내려진 출입금지입니다.
그럴 리야 없지만 흡연, 고성방가, 동ㆍ식물 포획이나 채취 등은 안 되는 것이죠. 이런 일은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공중생활 법도지요.
북한산국립공원(우이령길)을 나옵니다.
우리는 4시 13분, 탐방지원센터를 통과했습니다. 이것으로 오전 9시 35분부터 도선사 입구에서 시작한 탐방순례길은 약 6시간 반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워낙 천천히 소요하는 기분으로 길을 걸었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습니다.
염화님과 미소님의 안내로 다녀온 우이령길, 그리고 오봉산 석굴암, 모두 처음 가는 길이었기에 신선한 길이었습니다. 우이령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고찰하는 시간이어서 무척 유익하였고, 오봉산 관음봉 아래 멋지게 앉은 석굴암을 찾은 동안은 6ㆍ25 전화로 초토화된 곳에서도 초인적인 원력으로 화중생련(火中生蓮)의 도량을 건립하신 초안(超安) 스님과 그 뒤를 이은 도일(度一) 스님의 원력에 깊이 합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함께 하신 염화님과 미소님, 비니초님께 감사드립니다. _()_
혹 우이령길과 석굴암을 찾아보지 않으신 분들은 기회가 되면 인연을 지어 보시기 바랍니다.
긴 후기 끝까지 보아 주신 법우님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첫댓글 느긋하게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하루였습니다._()_
비경 속을 여유작작 사박사박 거닐으니거움을 잠시나마 본 듯하오. _()_ _(())_
니르바나
초연히 세속을 떠나 일만 시름 잊었다오.
우이렁길과 오봉산석굴암
좋은곳 좋은법우님들과 함께여서 즐거운하루였습니다.
상세한 후기 덕분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갑니다.
감사합니다._()_
미소님과 염화님 그리고 비니초님 _()_ _(())_
소요(逍遙)한 우이령길 감탄한 석굴암
님들과 함께 나누며 짧은 하루 한하였네.
오봉산석굴암의 세세한 순례기를 통해 석굴암의 풍광과 면면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_()_
뜻 깊은 시간 함께하신 백우님, 비니초님, 미소님 감사합니다.
염화님이 안내하신 우이령길, 석굴암. _()_ _(())_
화락한 마음으로 도란도란 고개 넘고
당도한 오봉산 석굴암 저절로 화수(華手)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