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세의 歸農(?)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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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일부터 내 직업이 바뀐다. 내 나이 66세.
할아버님의 옛날 흑백사진을 보면,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히고, 뒤편에는 나무숲 같은 후손들이 죽 늘어서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아직도 회사일에 몰두 하고, 합창단이나 성가대와 함께 노래도 신나게 부르며, 가끔 해외명산을 산악회 따라 등반하고, 점점 양이 적어지기는 하지만 두주불사 스타일을 안타깝게도 폭탄주 열잔으로 줄여 유지하고 있다.
뒷 선에 물러나서, 관조(觀照)의 생활에 들어서도 누가 뭐라 나무랄 나이가 아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을 수도 있다는 나이이지만, 나는 65세를 전환점으로 귀농(歸事?)을 택했다.
2015년 내 소속사가 바뀌고, 새 근무처로 출근하고, 새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변신은 무죄. 신발 끈을 다시 묶어보는 전말(前末)은 이렇다.
나의 첫 출발직장은 삼성(三星)이었다.
롯데니 대한전선이니, 몇 몇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거나 입시시험을 보았는데, 줄줄이 낙방이었다. 아마도 지방대학 출신이 낙방의 주 원인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삼성도 사실은 포기했었다. 모두 나를 낙방시켰는데, 낙방시킨 그들보다 훨씬 덩치가 큰 국내 최고기업이 설마 나를 뽑으랴. 그냥 찍는 마음으로 원서를 냈는데 합격.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결혼생활을 시작해서 대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드디어 신랑이 대기업에 취업하고, 꿈에 그리던 신혼생활도 하게 되었으니, 부엌에서 밥 짓던 아내가 부뚜막 앞에서,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릴 만도 했다.
지금 서부경찰서 뒤 역촌동 주택가의 깨끗한 2층을 아버님이 전세(지금 시세라면 아마도 1억원쯤 되려나?)를 얻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한 부모님이시다. 집까지 사주시진 못해도, 우리 6남매를 모두 대학졸업 시키고, 집사는 것은 각자 노력해서 돈을 모아사거라 하시면서 전셋집(물론 6남매 모두 일찌감치 집들 장만을 마쳤었다)까지 마련하여 모두 독립시키시다니.
교편생활과 언론사 논설위원 봉급으로 우리를 독립시켜주시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도사적인 검약이 기본이셨을 것 같다. 청렴 위에 무장되신 정의는 시대정신이셨다. 당시 사설을 통해 무능정권 장면을 공격하시고, 불법구테타의 박정희의 민주파괴를 성토하시다가 수시로 구속 되시면서도(많은 재판이 있었지만, 모두 무죄 판결이셨다) 꼿꼿하시던 기상을 지금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세상 누구에게서 배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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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三星에 입사해 三星火災(당시 사명은 安國화재였다) 기획실로 발령받고, (당시 이석용 전무 면담)통해 弘報팀으로 보직을 받았다.
아마도 그 때부터 축적되었던 나의 독서의 힘, 글쓰기의 힘, 아이디어의 힘이 발휘되고, 몇 년만에 삼성 회장비서실로 전격 발탁되는 등 거침없던 날이었던 것 같다. 이 병철 회장의 자서전이나 홍보는 물론이고 각사의 홍보업무 조정과 기획, 사보발행, 사내방송 원고 개발과 송출, 그룹 홍보물이며, 삼성그룹 50년사 등 업무에 참여했다. 지금 돌아보면 엄청난 그룹 차원의 관심사였던 업무들이었다. 이 때의 에피소드는 정말 엄청나다. 직장의 성공자를 위한 매뉴얼도 만들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병철 회장이 작고(지금 삼성화재 본사사옥을 준공 후)하시던 1987년 말 전환기에, 독립하여 홍보회사를 설립한 후 지금까지 우보천리(牛步千里)로 한 길을 걸어왔다. 삼성화재에 적을 두고, 비서실에 발령을 받아 청춘을 바치며 일했고, 최고의 가정 안정과 고속 집장만과 늘리기와 일터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능력발휘 기간이었다. 봉사활동으로 바쁘던 아내를 위해 별도의 차도 구입해 주고, 아들 딸도 호텔신라 워커힐 인터콘티넨탈 음식 귀한 줄 모르고 즐겼으니 말이다.
그 이후, 내가 홍보회사를 설립해 승승장구하던 것도, 삼성에서 제대로 익힌 업무와 경영방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부심도 대단했던 청장년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60대중반이라니, 나 원 참.
평탄한 길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폭풍같은 위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잘 나가던 내 회사가 알지도 못하는 아이엠에프(IMF)의 직격탄으로 부도가 나고, 민형사의 책임이 돌아오고 할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수십여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벼란간 그 많은 직원이 일시에 지급 요청하는 퇴직금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너무 일제히 지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몇 달만 기다리면 순차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아무리 하소연해도, 그렇게 사이좋고 한 마음으로 일하던 종업원들도 심지어는 우리집 까지 압류를 붙이는 소송도 서슴치 않는 것이었다.
모든 재산을 날리고 어두컴컴한 열 몇평 집에 살 때, 채권을 추심하러 왔던 거래처 직원조차 힘내라는 한마디하고는 그 이후에 아무 연락이 없었을 정도로 캄캄하게 살던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성공도 명예실추의 위험이 있을 수 있는 다른 세상으로 나는 또 나가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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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부터 40중반기의 직장기, 40중반부터 다시 20년의 사업기를 마치기로 과감하게 결단했다.
그동안 나를 도와서 우리 회사 직원으로 오랫동안 일 해온 아들에게 사업자등록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럼 나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원래 첫 입사했던 삼성화재로 귀사하게 되었다. 그 사정은 또 이렇다.
우연히 생명보험협회의 '우수인증설계사 매거진' 겨울호에 원고 집필 건이 있었는데, 글을 쓰기 위한 보험미담 자료를 요청하기 위해 삼성화재의 정향수 매니저와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자료를 받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사업체를 인계 고려중인데, 넘겨주면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부동산중개사? 부동산평가사? 부동산경매사? 법무사시험? 보험대리점사업? 사인보드 등의 간판제작업? 이런 저런 걸 많이 생각중이라고 고민을 얘기하니까, "아, 삼성화재 얼마나 좋은데요." 라면서 업무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정향수 말이라면 믿는다. 아내 신소피아의 대녀이기도 하고, 평소의 언행이 반듯하기때문이다. 즉, 그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좋다. 하루만에 결심.
직무교육 신청을 했는데, 마침 삼성화재에서 "전략영업부서"가 신설되어, 올해부터 가동이 되기에 시의 적절했다고 한다.
(최근 화재보험의 일반화 추세에 맞추어, 인터넷과 홈쇼핑을 통한 보험가입이 증가 추세다. 그런데 보험 약관처럼 복잡한 것이 세상에 있으랴. 그러다 보니 정작 사고시에는 보상받지 못해, 불신이 큰 상황이다. 여기에 삼성이 빨리 착안해서, 온라인 보험 가입고객을 전략부서에 이관하여, 고객들에게 보험증권 내용에 대한 진단과 체크를 일일이 해주는 과정을 거치게 했는데, 바로 그 업무를 맡는 것이다. 물론 기타 영업에 대한 실적은 실적급으로 추가지금하지만ㅎㅎ)
이를 위해 지난 해 이미 두 달 교육 받고 자격시험을 보았고, 올해 4개월의 보수교육을 더 받는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하나 더 들었다.
이왕 하는건데 내 아내보고 화재보험설계사(즉, 보험영업)자격시험을 보도록 권해서 지난 해 재수 끝에 통과(ㅎㅎ)한 거다. 아내도 이미 적십자사 교육원의 전임교수직도 나이가 차서 물러나고, 시간강의만 하던 터라 시간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하던 회사를 넘기고, 아들에게 손 안벌리기로 작정했으니, 완전히 주요 수입도 끊어지는지라, 그동안 아내의 봉사활동, 즉, 돌보아오던 결손가정 아동돕기(보통 부모중 한쪽이 없거나, 다 없어서,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 등이 보살피는 아이들에게, 해당지역 동사무소 복지직원과 동행하여 수시로 방문해 도서나 학용품도 전달하고, 격려하거나 가르치는)봉사하기엔, 당분간 지원해줄 돈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 봉사도 아마 몇 달 후면 좀 넉넉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결과적으로, 기본업무 외에 수당이 늘게 되는 보험영업도 병행하기로 했다. 따라서 오랜 사업파트너와 거래선들이나 친구들의 사업장이나 영업장과 관련된, 특수건물공장화재보험, 창고적하운송보험, 전문가배상보험, 직원단체 보험 등을 다루려 했는데, 아내가 흔쾌히 같이 하겠다 하므로, 가정과 점포의 저축성장기화재보험, 의료건강노후연금보험, 자동차보험 등의 보험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내 나름대로 종합 시스템을 갖춘 셈이다ㅎㅎ.
바로 이 것이 나의 66세 이후 제 2직업이 되었고, 이 직종으로 갈아타는 것이 나의 귀농인 셈이다.
앞으로 5년간 70세까지 최선을 다해 직장에 충실하며, 나름대로 영어 좀 달달 익혀서, 70세 이후부터는 진짜 배낭족 여행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소련을 가로 지르기도 하고, 지구촌 구석을 배낭으로 돌아다녀 보리라. 꿈이지만, 때로는 지중해 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피요르드 해안의 명품 크루즈 여행이나 다닐 계획이다.
하긴, 그때쯤이면 세계의 명산을 등반하기에는 숨이 가쁠지도 모르지만, 히말라야의 어느 롯지에서 맞은 편의 설산을 바라보며 커피 향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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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이 더 없어졌다.
오래 동안 가르치고 같이 운영해온 아들이지만, 맡겨보니 정말 잘한다. 대단한 전문가다. 그런데도 괜히 완전 초보운전자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안놓이는 거다. 나이 먹은 이들의 공통점인, 노파심이다. 요즘 청년들이며 젊은이들이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괜히 늙은 이들이 폼만 잡는답시고 이리 저리 간섭이나 하려드는 것이지.
아들이 너무 당당히 잘해내가는 것같아 흐믓하지만, 넉넉한 회사로 덩치를 키워 넘기지 못하다보니 (오히려 채권 채무를 떨어보면 채무가 넘쳐있는 상황이다) 짐이 된것만 같아 체크라도 해주려는 기우(杞憂)인지라, 8시30분 출근이던 것을 7시30분에 한 시간 먼저 출근해서, 30분 동안 하루 있을 업무를 점검한 후, 그 처방이며 해결순서를 꼬박꼬박 체크해서 한 장으로 정리한 후, 출근하면 읽어 보라고 아들 책상위에 올려놓고, 다음 직장인 삼성화재로 시간이 쫒기다보니 전철을 갈아타는 동안 김밥을 한 줄 먹으며 출근하는 것이다.
회사인 충무로역을 출발해 을지로3가역에서 환승해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리면, 이동시간 15분만에 삼성화재에 도착하니 다행이다. 역시 퇴근 시에도 역으로 진행된다.
66세는 청년이다. 좋은 직업이 있으면 이렇게 과감히 도전도 이직도 할 수 있는 한창 때다.
세상의 금중에 제일 귀한 금은 무엇일까? '지금'이라고 한다.
그것이 설령 떠나는 일일지라도 지금 일어서서 훌 훌 털지 못할 게 무어랴.
(201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