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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함의 힘
-성명진론
김제곤
친숙하면서도 낡지 않은 시
2010년을 전후한 시기를 우리 동시가 새로운 도약을 하던 시기라 명명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시인들의 출현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인들은 비슷비슷한 소재, 언어, 서정성 등을 탈피하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상상력과 어법들을 발명해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지난 십 년간 우리 동시단은 어떤 생기와 활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우리 동시단의 현상을 단지 ‘새로운 상상력과 어법’이라는 용어로만 한정 짓는다면 우리는 또한 그만큼 어떤 갑갑증을 느끼게 된다. 2010년 이후를 함께 살아온 시인 가운데는 단지 그 ‘새로움’이란 잣대로만 설명되지 않는 성취를 이룬 시인들도 여럿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령 2011년 첫 동시집을 내며 동시단에 부지런한 발걸음을 보여준 성명진 시인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한다.
성명진 시인의 작품을 볼 것 같으면 그의 작품은 한 마디로 기발한 상상력과 새로운 언어 탐구와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둔 작품이다. 그가 발견한 소재들은 우리 동시가 전통적으로 많이 다루어 온 자연이거나 그 자연과 합일을 이루려는 동심과 가까이 있는 것들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의 작품은 낯설고 신기한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에게 낯익고 친숙한 무엇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이 주는 기쁨과 설렘보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어떤 세계를 재확인할 때의 충만함과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동시는 그러나 그 내부에 친숙함 같은 것을 내장하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해묵은 동시’의 느낌 따위를 주지 않는다. 현란한 어법을 쓰지 않으면서도 뭔가 참신한 감흥을 던지고, 표나게 색다른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소소하다고만 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겉은 순박하고 허름하면서도 옹골찬 속내를 가진 사람처럼 그의 동시는 보면 볼수록 진중한 맛과 깊이를 드러낸다.
외유내강형의 시인
성명진은 착하게 생겼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순박한 시인의 얼굴이다. 순해 빠진 그의 외모만큼 그의 동시에 등장하는 아이들도 착하고 순박하고 촌스럽다. 때로는 어눌해 보이기도 한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너무 평범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은근 소심”하거나 “왕 소심”인 아이들이다.1)
종종이는 기주네 개,/ 강아지 땐 내 거였다.// 귀에 흰 점이 있는/ 제일 이쁜 놈이었다./ 종일 함께 놀았다./ 밥도 내가 먹이고// 그 종종이를 엄마가/ 나 몰래 기주네 주어 버린 거다.// 기주네 집 앞 지나는데/ 제법 자란 종종이가 날 보고 짖는다./ 이를 드러내고 짖는다.// 나쁜 놈, 나쁜 놈/ 욕해 주려다가/ 무서워서 멀리 돌아간다.-「종종이 미워」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남의 것에 욕심을 내기는커녕 제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고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저 ‘소심한 호구’가 바로 그의 동시에 주로 등장하는 아이들 모습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과 함께 그의 순박한 외모를 떠올리고 보면 그의 작품이란 그저 순하고 어눌한 소심파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섣부른 판단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섣부른 오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월요일 저녁 7시에 어김없이 시작되는 시평 시간은, 후배들에게 말 그대로 ‘죽음의 라운드’였다. 제물로 바쳐진 한 편의 시는 그야말로 선배들의 검에 무참히 난자당한 채 내려와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때문에 나 같은 잔챙이 초짜들은 오돌오돌 떨며 선배들의 십자포화를 머리 위로받아내면서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 마땅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녀석의 반응만큼은 간간이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으니, 시크하다 못해 초건방진 표정이 그것이었다. 선배들의 지적질이 계속될수록 우리들의 고개가 땅으로 꺼지는 반면, 녀석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도 픽 웃어넘기는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뭐 이런 걸 가지고 다…’라는 식이었다.2)
이 글에 등장하는 ‘녀석’은 성명진을 가리킨다. 성명진은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녔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과묵한 탓인지 그 때의 일을 그가 입 밖으로 자세히 내놓은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3) 이듬해 그는 이성부, 조태일, 박봉우 등 쟁쟁한 시인들을 배출한 광주고 문예반에 들게 되니 오월 광주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연결되었을지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광주고 졸업 후 성명진은 전남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한다. 위의 인용문은 그때의 일화를 적어 놓은 것인바, 우리는 거기서 성명진이 지닌 성격의 일단을 짐작해 보게 된다. 성명진은 ‘비나리’라는 이름의 시 동아리에 가입해 종종 합평 자리에 나갔는데, 그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공격에도 전혀 동요됨이 없이 “시크하다 못해 초건방진 표정”으로 응수하곤 했던 것이다. “검풍에 장풍까지 일으키는” 선배들의 신공에 그저 고분고분 고개를 조아리기는커녕 “픽 웃어넘기는” 여유까지 부릴 줄 알았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일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기죽지 않는 자세가 아무리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부터 단련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내부에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웬만한 위력에도 되레 시크한 표정을 짓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배짱을 가지기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겉으로 순박해 보이는 외모의 이면에는 무엇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 ‘자기만의 무엇’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뒤에 그가 보여주는 순정함의 세계를 단지 소심파가 빚어낸 고분고분한 순응주의의 산물 따위로 해석할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인 내부에서 조용하면서도 열렬히 끓고 있던 정신의 산물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조화로움의 세계
성명진은 2011년 첫 동시집 『축구부에 들고 싶다』(창비)를 시작으로 2016년 『걱정 없다 상우』(문학동네), 2019년 『오늘은 다 잘했다』(창비)까지 모두 세 권의 동시집을 엮었다. 왕성하다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시의 새로운 도약기라 할 2010년 이후 그 어떤 시인들 못지않게 비교적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셈이다. 그럼에도 세 권의 동시집을 엮어 오는 동안 그의 시 세계는 그다지 큰 변화를 보여 온 것 같지 않다. 2010년을 전후로 활동을 펼친 시인들 가운데는 출발 시점과 사뭇 다른 변화를 보여준 시인도 적지 않았음을 떠올려 본다면 그의 발걸음은 언뜻 한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창작에 비해 늘 열세인 동시단의 비평적 조건에도 원인은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비평적 조명이 다소 뜸했던 것도 그의 작품이 지니는 그런 한결같은 인상에 기인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추구하는 그 한결같음이란 무엇인가?
생명이 탄생하거나, 사람들이며 동물들이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제일 바라보기 좋았어요. 진심이 거기서 시작되어 여러 길을 거쳐 저에게 오는 것 같았어요. 이 진심이야말로 동심이 아닐는지요. (…)요즈음 동심들이 무엇인가에 눌려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화나고 슬퍼요. 이런 현실을 작품 속에 넣어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자꾸 그렇게 되네요. 아무튼 힘들어하는 동심을 북돋아 주고 싶습니다. 걱정 없어요. 동심은 밝고 생기로우니까요. 동심이야말로 모든 마음들의 원천이잖아요. 진심이잖아요.4)
성명진은 두 번째 동시집 머리말에서 동심이야말로 모든 마음의 원천이며 진심이 아닌가 묻는다. 그의 말처럼 그의 동시를 구성하는 키워드는 ‘동심’이며, 그의 동시가 지향하는바 또한 ‘진심인 동심’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친구의 우산을 함께 쓰고 왔다.// 미안해서/ 내가 비를 더 맞으려고/ 어깨를 우산 밖으로 내놓으면/ 친구가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여 주었다.// 빗속을/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좁은 길에서 일부러/ 내가 빗물 고인 자리를 디뎠다./ 그걸 알았는지 친구는 나를/ 제 쪽으로 가만히 당겨 주는 것이었다.-「빗길」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가 드러난다. 친구의 우산을 함께 쓰고 갈 때 나의 마음은 친구를 오롯이 위하는 마음이다. 친구 또한 나처럼 나를 지극히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서로는 서로에게 순하고 순한 마음을 건넬 뿐이다. 시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곁에서 순하게 자라는 짐승들과 풀, 나무들을 이렇게 노래하기도 한다.
새 하나가/ 그 집 위를 뱅뱅 돌다 갔어요./ 잠시 후에 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갔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누렁소의 잔등을 쓰다듬고/ 할머니는 텃밭의 푸성귀를 다독였지요.// 그러고 보니 그 집에선/ 짐승들이며 풀 나무도/ 다 순하게 자라 있었어요.// 다음 날 새는 또 왔어요./ 그 집의 마음씨가 미더웠는지/ 뒤꼍 깊은 데에/ 참아 왔던 알을 낳았지요.-「미더움」 전문(『걱정 없다 상우』)
성명진이 그려 보이는 세계는 이처럼 사람과 자연이 ‘미더움’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세계다. 그 세계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서로 이기고 지배하려 들지 않고, 순하게, 다정하게, 미덥게 서로를 쓰다듬고, 돌보고, 다독이고 서로에 깃들이면서”5)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다. 미더움으로 서로가 서로에 등을 기댄 채 살아가는 세계, 그 세계에는 사람과 자연 간의 불화가 없다. 어른과 아이 간의 갈등이 없다. 강자와 약자 간의 우열이 없다. 상부(꽃)와 하부(뿌리) 간의 시기 질투가 없으며, 안과 밖, 빛과 어둠 간의 대립과 분열이 없다. 다만 서로는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창조할 뿐이다.
오늘밤엔/ 용이 아저씨네 집에 켜진 불빛이/ 세상의 한가운데 같아요.// 용이 아저씨가/ 불빛 속을 들여다보고 있고,/ 멀찍이서 나무들이/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집 밖 언덕빼기와 먼 산줄기도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환한 그 속에선 지금/ 갓 태어난 새끼를/ 어미 소가 핥아 주고 있어요.-「불빛」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한 생명의 탄생 순간을 그리고 있는 위 시는 절창으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시다. 이 시 또한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미덥게 서로를 보듬는 순간의 그 눈부심을 묘사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불이 켜진 외양간에서 시작하여 점점 그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과 나무, 집 앞 언덕과 먼 산줄기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외양간 속 갓 태어난 송아지와 그를 핥고 있는 어미 소에게로 돌아온다. 시인은 깜깜한 밤 송아지의 탄생을 ‘불빛’에 빗대는바, 그곳을 마치 “세상의 한 가운데 같”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단지 살아있는 것들 스스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생명력) 때문만은 아니라, 그 불빛을 둘러싼 어둠 속 존재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어둠은 다만 밝음과 대비되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그 밝음을 더욱 신비롭고 성스럽게 하는 무엇이 되고 있다.
아이들 일상과 동심의 세계
성명진은 196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태생으로만 보면 그는 완전한 시골 출신이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외양간이 딸려있는 농가에서 자랐다. 농사를 짓던 그의 부모는 성명진이 6학년에 올라갈 무렵 도시로 터전을 옮겨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순전한 촌놈이라 보기에는 좀 일찍부터 도시 물을 먹은 처지이고, 완전한 도시 출신이라 보기에는 그 뿌리가 농촌의 정서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셈이다. 굳이 말한다면 이농이 보편화되는 70년대에 유년기에서 소년기로 이행하는 삶을 겪게 되면서 이른바 반농반도(半農半都)의 정서를 몸으로 익힌 세대라 할 수 있다.6)
실제 그의 작품은 그가 함께 체험한 농촌의 정서와 도시적 정서를 모두 담고 있다. 앞에서 먼저 살펴본 시편들에 등장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순박한 인물들이 그의 농촌 정서를 대변하는 존재들이라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일상과 가까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시들은 도시로의 이주 후에 시인이 갖게 된 도시 정서를 얼마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농촌 정서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 생태적 감수성과 아울러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현실에 모두 민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피는 겹눈이야말로 성명진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과일 파는 영우네 집에/ 숙제하러 모였다.// 과일을 먹으며 장난치다가/ 가게에서 다투는 소리 들려와/ 멈추었다.// 어떤 욕하는 소리에 맞서/ 영우 엄마도 욕을 했다./ 잠시 후 영우 엄마 우는 소리,/ 방구석에서 영우도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들은 잠자코/ 귤 쪽들처럼 붙어 앉아/ 책을 폈다// 이상하게도 숙제가 잘 되었다.-「가겟방에서」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앞에서 살펴본 저 순하디순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시들과 비교한다면 이 시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의 악다구니가 끼어든다. 물론 그 악다구니는 직접 노출되지 않고 시적 화자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는 하지만, 풀과 나무마저 순하게 자라던 공간에서 맛볼 수 없었던 어떤 긴장감이 이 시에는 들어 있다. 이 시에서 묘사되는 가겟방에서의 일은 어쩌면 대도시로 이주해 시인이 겪었던 시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이런 도시에서의 삶은 외양간이 있던 농촌에서의 삶과는 분명 구별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 삶은 순하고 푸근한 삶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실금이 가 있다. 누군가를 품고 감싸기는커녕 모질게 밀어내기조차 하는 삶이다.
상우네가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큰 도시로 갔지만 잘 살지 못했나 보다. 엄마들은 모여서 수군거린다. 이제 동네가 시끄럽게 됐다고. 상우 때문에 아이들이 잘못될까 걱정이라고-「상우야」 부분(『걱정 없다 상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를 펼치던 모습은 간데없고, 사람들은 나와 다른 타자가 자기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누군가를 다정히 감싸고 다독이던 그 귀한 마음을 어디엔가 모두 내다 버리고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단절감은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어른들은 “학원 빼 먹으면 알지?”(「으, 정말」) 곧잘 으름장을 놓거나,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공부 잘해서 성공해!’하고 이내 “뾰족한 흑심을 드러내고”(「연필심」) 만다. 그런 어른들이 짜놓은 시간에 맞춰 아이들은 다만 숨 가쁘게 허겁지겁 하루를 건널 뿐이다.
나의 비밀/ 잠바 주머니에 난 구멍/ 엄마도 모른다.// 손가락을 구멍에 넣어/ 아니,/ 시원한 밖으로 빼내어/ 까딱거린다./ 숨 쉬는 거다.// 나는 공부하느라 힘든 아이니까/ 몰래/ 재미있게/ 손가락으로 숨 쉰다.-「숨구멍」 전문(『걱정 없다 상우』)
“공부하느라 힘든 아이”인 나는 엄마와 마음속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존재다. 아이의 성적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은 엄마는 정작 아이의 잠바 주머니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나는 무슨 비밀처럼 나만 아는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본다. 시인은 요즈음 동심들이 무엇인가에 눌려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다는 속내를 토로한 바 있거니와, 위 시 「숨구멍」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아이의 현실을 담담하지만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요즈음 동심들이 무엇인가에 눌려 있긴 하지만 그들이 결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시편 곳곳에서 이렇게 보여준다.
학교 끝났는데/ 상우는 운동장가/ 철봉 위에 올랐다.// 학원 가기 싫다면서/ 반 바퀴를 돌아/ 거꾸로 매달려/ 팔을 활짝 벌렸다.// 할아버지가 아프다면서/ 다시 힘껏 돌아/ 철봉 위에 앉았다.// 그러더니/ 가볍게 뛰어내려/ 땅에 우뚝 섰다.-「걱정 없다 상우」 전문(『걱정 없다 상우』)
보지 마라./ 저런 거 보면 저렇게 된다.// 걱정 많은 할머니 말 듣는 척하고/ 슬쩍 봤는데/ 안 좋은 거 아니던데.// 내 친구 기주가/ 술 취해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옆구리 받치고 가는 거.// 저런 거 자주 봐서/ 내가 기주처럼 된다면/ 좋은 거 아니야?-「내 생각」 전문(『걱정 없다 상우』)
우리들은 특공대원이 되어/ 낙하산을 타고/ 서로 신호하면서/ 수학 학원 그냥 지나치고/ 영어 학원 몰래 지나치고/ 집도 지나쳐// 드디어 무사히/ 게임방에 도착했다.-「작전」 부분(『오늘은 다 잘했다』)
위 시들에서처럼 시인은 아이들이 생득적으로 가진 씩씩함과 건강함, 그리고 어떻게든 자기 처지를 견뎌 나가는 동심에 응원을 보낸다. 위 작품들에 그려진 아이들을 보면 그들은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에게 힘을 북돋우고 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대립과 분열의 감정 대신 끈끈한 우정과 유대의 감정에 기초해 있다. 그들은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아”7) 간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안온하고 포근한 자연 공간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조화로운 세계를 꾸리던 동심과 결코 먼 자리에 있는 동심이 아니다.
지금 여기를 견디는 힘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자. 성명진이 추구하는 저 동심의 세계는 그만이 발견한 득의의 세계인가? 또 그것은 조그만 치라도, 분열과 갈등이 난무하는 지금 이 시대와 맞설만한 힘을 가졌을까?
우리 동시가 이른바 ‘동심의 문학’을 표방한 것은 하루 이틀 전의 일이 아니고, 성명진 말고도 이미 여러 선배 시인들이 진심인 동심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이름을 거론할 것도 없이 가령 그이 앞에는 그를 동시로 이끌었다는 임길택의 『탄광마을 아이들』의 세계가 놓여 있지 않은가.8)
뒤에 처지는 이 없이/ 혼자 먼저 가는 이 없이// 뽐내어 솟아나는 이 없이/ 넘어져 밟히는 이 없이// 맑고 따스하게/ 우리는 모여서…… -「호숫물」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붓꽃잎 자매는/ 올해도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왔다.// 저 아래엔/ 다정하고 부지런한/ 어머니가 계시나 보다.-「뿌리」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위의 시들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건강한 주제의식과 단아한 서정이 깃들어 있는 시들이다. 말을 비틀지 않아 해석이 모호한 구석도 없다. 특히 「뿌리」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눈으로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의 지극 정성을 이야기한다. 코앞의 가시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분명 참신한 깨달음을 줄 만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다시 말을 바꾸어 반복되는 질문을 해 보자. 시인은 과연 임길택이 보여준 세계에서 얼마만큼 더 걸어 나온 걸까.
모든 작품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성명진의 어떤 작품에서 어쩔 수 없이 이른바 ‘민중적 서정시’의 한계를 읽게도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명민한 평론가가 지적했듯 한 때 유효했던 민중적 서정시라는 틀은 언제부터인가 “‘진보’라는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적 형태인”지 점검을 요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9) 성명진의 몇몇 동시들 또한 어찌 보면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단아한 서정시”10) 의 범주 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작품들은 아닐까.
첫 동시집 해설에서 남호섭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서는 어떤 지극함이 읽힌다”고 전제한 뒤, “요즘 쏟아져 나오는 동시집들과 달리 뚜렷한 주제의식을 보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11) 이안 또한 그 첫 동시집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성명진의 그 동시집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꾸밈없이 나타내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좋은 시가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집이라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12) 그런데 이안은 성명진의 두 번째 동시집 해설에서 첫 시집에 대한 평가에서는 비치지 않았던 조금 다른 불만을 제기한다. 그는 성명진의 동시에서 자주 보이는 어법이 시 세계를 한정하고 상상력의 범주를 제한하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비판하며, 「김밥 꽁다리」, 「꿈」 같은 작품에서 엿보이는 좀 더 “발랄한 위반의 언어와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13)
성명진의 동시가 가지는 한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안이 제기한 그 어법의 문제를 필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을 깨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대안을 고려할지라도 그것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명진은 자신만이 갖고 있던 ‘성명진다움’을 함부로 잃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발랄한 위반의 언어도 좋고, 발랄한 상상력도 좋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것을 빌려오거나 흉내 내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명진 스스로가 내보였던, 성명진다운 것들에서 재발견되고 자연스럽게 솟구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시에 화자로 등장하는 아이를 주목하고 싶다.
공을 차는 축구부원들./ 6학년 김수형 선수도 있다// 방과 후/ 나는 운동장가를 서성인다./ 김수형 선수처럼 되고 싶다.// 우리 학교를 우승으로 이끌고/ 텔레비전에도 나온 스타,/ 월드컵에서도 뛰겠지.// 공이 밖으로 나오자/ 나는 재빨리 공을 따라 달렸다./ 운동장 안으로 공을 던져 주었는데/ 달려와 받은 사람은/ 반갑게도 김수형 선수!// 나는 신나서/ 운동장가를 마구 달렸다.-「축구부에 들고 싶다」 전문(『축구부에 들고 싶다』)
물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명진의 동시에는 이 아이 말고도 여러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들은 시 안에서 모두들 스스로의 몫을 하고 있다. 그들은 농촌에 살며 자연과 한 덩어리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이거나 뭔가 결핍이 있는 도시의 삶 속에서 어떻게든 친구들과 어울려 자신의 삶을 헤쳐 가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여러 아이의 유형 속에서 위 시에 나오는 “축구부에 들고 싶”어 하는 아이는 유독 새롭고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아이는 축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다. 자신의 롤 모델인 ‘김수형 선수’를 흠모하며, 축구부에 들고 싶은 마음을 유난스럽지 않은 언어로 그러나 간절하게 보여주는 이런 캐릭터야말로 우리 동시에서 쉽게 마주치기 어려웠던 인물이 아닐까. 이런 아이야말로 성명진 이전의 임길택이나 남호섭, 서정홍이 포착해 본 적이 없던 아이다. 성명진이 내딛는 한 걸음은 이렇게, 분명 있었지만 우리가 채 발견하지 못했던 그런 아이의 삶을 그려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내 손아귀 바라본다// 한 끼 분의 쌀을 풀 만큼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감쌀 만큼이다// 심장을 받쳐 들 만큼이다// 가만히 합장하여 본다// 오 평생 비어 있기를……. -「손」 전문(『그 순간』)
기우뚱한 산길들이/ 산에 든 사람들을 절 마당으로 모으니/ 사람들은 대웅전 앞에도 서 보고/ 탑 앞에도 서 보다 잠시일 뿐// 산 아래 어느 집으로 몰려가네/ 그 집은 밥집,/ 밥집이네// 오 따스한 도로아미타불-「미황사 아래」(『그 순간』)
위 시들은 성명진의 첫 동시집과 두 번째 동시집 사이에 나온 시인의 시집 『그 순간』(문학들, 2014)에 나온 시들이다. 마치 임길택의 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는 그의 동시와 뚜렷한 경계 없이 수월하게 읽힌다.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조금 더 강한 것은 아무래도 시 쪽이긴 하지만, 소재나 발상, 주제의식,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의 동시와 시는 많이 닮아 있다. 위에 소개한 두 편의 작품에서 보듯 그의 시는 진지함과 발랄함의 세계를 모두 갖고 있다. 나만의 감상일지 모르지만 나는 시집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손」 같은 시보다 조금은 싱겁고 가볍게 읽히는 「미황사 아래」의 “도로아미타불”의 세계에 왠지 더 눈이 갔다. “따스한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속에는 단지 가벼움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평범한 우리 중생들의 솔직함과 정겨운 모습이 스며들어 있다. 그 속에는 무겁고 진지한 말들에서는 쉽게 맛보기 어려운 여유로움과 발랄함이 들어있다. 아이들이 가진 생명력 또한 저 ‘따스한 도로아미타불’의 세계에 늘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성명진은 자신의 내부에 그런 힘을 발휘할 시의 근육을 이미 갖고 있다. 전보다 그가 자신이 가진 그런 시의 근육을 좀 더 써보았으면 한다.
김제곤
아동문학평론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동문학 평론 활동을 해 왔다. 쓴 책으로 평론집 『아동문학의 현실과 꿈』, 연구서 『윤석중 연구』 등이 있다.
1) 김유진, 『축구부에 들고 싶다』 서평 「살금살금 다가가고 가만가만 뒷걸음치고」, 『창비어린이』(2011년 여름호), 272-273쪽.
2) 정경운, 해설 「우주적 어미 아비들을 위한 헌시」, 『그 순간』, 문학들, 2014, 92쪽.
3) 다만 그의 시집 『그 순간』에 수록된 「무등산」이 그의 광주 체험을 녹여낸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 작품은 무등산을 시적 화자로 하여 당시의 아픔을 다음과 같이 은유하고 있다. “몸을 한번 틀어 편히 눕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골짜기 한 곳에 세상에 내보인 적 없는/ 돌부처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삶이 참혹하여 별안간/ 나 스스로 무너져 버릴까 두려워/ 그를 안고 견뎠다.”(「무등산」 부분)
4) 성명진, 머리말 「걱정 없어요」, 『걱정 없다 상우』, 문학동네, 2016, 4-5쪽.
5) 이안, 해설 「순하고 다정하게, 돌보고 다독이는 말」, 『걱정 없다 상우』, 문학동네, 2016, 89쪽.
6) 성명진은 한 계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당연히 집에 외양간이 있었고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부모님을 따라 도시로 이주를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게는 농촌의 정서와 동시적 정서가 섞여 있습니다. (…) 부모님이 가게를 하셔서 가겟방에 대한 체험이 작용했고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시인을 주목한다」, 『어린이책 이야기』 2013년 가을호, 122-123쪽.)
7) 이충일, 해설 「성장은 홀로 자라는 게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것」, 『오늘은 다 잘했다』, 창비, 2019, 116쪽.
8) 성명진은 임길택 시인의 동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을 읽고 비로소 우리의 동시를 읽기 시작했으며, 이후 동시를 써 보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성명진, 「맘대로 고른 임길택 동시-여럿이 함께 간 발자국」, 『동시마중』 42호, 2017년 3・4월호, 150-151쪽.)
9) 신형철, 「시는 어디를 향하는가」,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15-19쪽.
10) 신형철은 창비시선 300권 기념 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 2009)를 서평하는 글에서 “시를 시로 만드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은 언어”라고 전제하며, 그 시집에 수록된 시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작품들이 언어가 주는 긴장감이 없이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백반 정식 같은, 단아한 서정시”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그런 “모범 답안처럼 단정한 시들에서 오히려 ‘이렇게 쓰면 감동적일 것’이라는 ‘계산’이 읽힌다‘며 그 시들이 갖는 미학적 보수성을 질타하고 있다. (「졸업하고 싶지 않은 학교를 위하여」,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182-184쪽.)
11) 남호섭, 해설 「더불어 함께 걷는 길」, 『축구부에 들고 싶다』, 102-115쪽.
12) 이안, 『축구부에 들고 싶다』 서평 「너른 품으로 안아주는 시」, 『열린어린이』 2011년 7월호.(『다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 문학동네, 2014, 207-216쪽.)
13) 이안, 해설 「순하고 다정하
첫댓글
낯익으면서도 새롭고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나지막하면서도 멀리가는
성명진 시인님의 시세계가 궁금했었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축구부에 들고 싶다. 를 강열하게 기억합니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공감가는 시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읽지는 못하고 ..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공부가 될 것으로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