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간도협약 체결 - 100년 ← 1909년 간도 벌판에 모인 조선농민들의 모습
간도(間島)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고조선ㆍ고구려ㆍ발해 때까지 우리의 영토였다가 오랫동안 미개척상태로 남아있던 간도가 우리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온 것은 1712년 청의 강희제가 조ㆍ청(朝ㆍ淸)간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을 제의하면서였다. 이때 세워진 것이 ‘백두산 정계비’다.
이후 170여년간 잠복해있던 간도의 귀속문제는 1881년 청이 조선정부에 간도지역 조선인의 본국송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표면화됐다. 흉년이 들어 조선 사람들이 대거 간도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양국 간 을유담판(1885)ㆍ정해담판(1887)을 열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조선정부는 간도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일제도 을사조약 후인 1907년에 ‘간도는 조선영토의 일부’라며 조선정부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 했으나 사실은 2년뒤 간도를 높은 값에 팔기위한 술책이었다.
1909년 9월4일에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챙기는 대가로 간도를 청에 넘겨준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100년이상 피땀흘려 개척했던 광대한 지역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우리 영토에서 사라져갔다. /조선
[2001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다.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목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통칭 직지심체요절은 백운화상 경한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1372년에 펴낸 불교 서적으로, 상·하권으로 이뤄어졌다.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중심주제인 직지심체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2001년 9월 4일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 뿐인데, 1800년대 말 콜랭 드 프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 공개
2001년 G&G그룹 회장 당시 이씨는 계열사의 자금 800억원을 횡령하고 보물선 발굴사업 등을 미끼로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이씨가 수사 무마를 위해 검찰, 국가정보원, 정치인 등에게 로비를 시도한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이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다.
이씨는 수감 중이던 2003년 말 변호사를 통해 몰래 반입한 증권 조회용 단말기와 휴대전화로 ‘옥중 경영’을 하다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6년 및 벌금 250만원이 확정됐지만, 이씨의 유죄 인정의 증거였던 증언이 위증으로 확인돼 일부 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2007년 3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씨는 출소 직후 재기를 위한 물밑활동을 시작했다. 이씨는 “돈을 댈 테니 사업을 같이 하자” “경영자나 자문으로 와 달라”는 러브콜을 여기저기서 받았고 인수·합병(M&A) 사업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일요시사
[1995년] 북경 세계여성회의 개막
제4차 북경 세계여성회의가 1995년 9월 4일 평등, 발전, 평화를 주제로 개막되어 21세기에서 여성 지위를 높일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북경 중심가 북쪽의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명예단장 손명순 여사와 김장숙 정무제2장관 등 50여명의 우리 정부 대표단을 비롯, 1백85개 가입국 가운데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도미니카 등 7개국을 제외한 1백78개국 정부대표들과 각종 유엔 산하기구 대표 1만여명이 참석했다. 꼭 20년 전인 1975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던 1차 세계여성회의 GO 회의 참가자가 2천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무려 다섯배에 이르는 수적 팽창이다.
이번 회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제 권한의 강화에 초점이 주어진 것. 여성들이 정치, 경제면에서 실제 권한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했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특징은 성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건강 결정권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점. 여성이 자신의 성생활과 자녀수 결정에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바티칸과 회교권 국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12일간 계속된 북경세계여성회의 정부간 회의는 9월 15일 "전세계의 여성들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평등-발전-평화를 증진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북경 선언'을 채택하고 폐막됐다. /조선
[1994년] 일본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 개항
1994년 9월 4일 개항한 간사이국제공항은 일본이 21세기를 대비해 세계로 가는 일본의 새 관문으로 조성한 최첨단 공항이다.
일본공항 최초로 24시간 운영체제를 갖추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공항을 지향하고 있다. 오사카 동남쪽 5Km 해상에 건설된 공항은 도로와 철도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과 연결돼 있다. 육지를 잇는 길이 3.75Km의 연육교는 상단은 왕복 6차선도로, 하단은 복선 철도가 배치돼 있다.
특히 국내선과 국제선이 같은 청사를 사용함으로써 연결탑승이 쉽다. 그러나 간사이공항은 바다를 매립했기 때문에 사용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항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간사이공항이 제1의 경쟁상대로 꼽는 곳은 우리나라의 인천국제공항이다. /조선
[1994년]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1994년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제103차 총회에서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최종확정된다.
IOC위원 85명은 하루 전 임시집행위원회에서 상정한 태권도와 철인3종 경기의 올림픽종목 채택안을 이날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태권도는 올림픽에서 남녀 4체급씩 8개의 금메달이 걸린 종목이 됐다.
태권도는 앞서 이미 86년 아시안게임의 정식 종목으로,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었다. /YTN
[1990년]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개최
1990년 9월 4일 남북고위급 제1차 회담이 서울에서 열려 7일까지 계속되었다. 1989년 2월 8일부터 여러 차례의 예비회담과 실무대표 접촉을 가진 끝에 성사된 본회담이었다. 1991년 12월까지 모두 5차례의 본회담이 열렸다. 제1차 회담에서 남한은 8개항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 10개항의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방안', 8개항의 '정치적·군사적 신뢰 구축방안'을 비롯해 남북한 군비감축을 위한 5개항의 방안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남북한간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6개항의 정치적 대결상태 해소 방안과 9개항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 방안을 제시했다. 제1차 회담은 다각적인 교류와 정치적·군사적 문제해결의 병행을 제시한 남한측 주장과 먼저 정치적·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 기초하에 다각적으로 교류하자는 북한측 주장이 맞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상대측의 입장만을 확인하는 선에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제5차 회담에서는 남과 북이 한 걸음씩 양보해 서문과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등의 4장 25조로 구성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남북고위급회담의 개최는 한반도 문제가 비로소 남북한의 책임 있는 당국자간에 공개적·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브리태니커
[1989년] 추리소설작가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 1903~1989) 사망 ← the Belgian 100 Years of Georges Simenon coin, minted in 2003
벨기에 리에주 출생. 아버지는 프랑스의 브르타뉴 출생이고 어머니는 벨기에 사람이다. 상세르베이대학교 졸업. 16세 때 《리에주 가제트》라는 지방신문의 통신기자가 되었고, 17세 때 처녀작을 이 신문에 발표하였다. 20세에서 30세까지 16가지의 필명을 사용하여 수많은 통속 장편을 썼다.
1931년 심농 명의로 《죽은 갸레씨》 《남자의 머리》 《누런 개》 등 11편의 장편을 발표하였다. 메그레 경감을 등장시켜, 심리적 탐정법에 신기축(新機軸)을 나타내면서 추리소설 작가로서 화려하게 활약하였다. 매월 1권의 다작(多作)이었지만, 1948년 발표한 《눈[雪]은 더럽혀져 있었다 La Neige tait sale》와 1951년의 《창녀의 시간》 등에서 범죄심리를 분석하여 순수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A.지드가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위대한 참다운 소설가라고 격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후에도 10여 권의 장편을 발표하였으며, 메그레 경감 시리즈 80권을 포함한 약 212권의 장편을 간행하였다.
[1985년] 북한 허담, 비밀리에 서울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비밀 회동 ← 1985년 9월 5일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이 경기도 기흥별장에서 북한 밀사인 허담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와 한시해(가운데) 수석대표 일행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 DB 사진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 허담이 1985년 9월 4일부터 6일까지 김일성의 친서를 들고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허담을 수행한 인물은 한시해, 최봉춘, 안병수, 여규채 등 4명이었다. 이들이 묵은 숙소는 외부인의 시선에 잘 노출되지 않은 쉐라톤 워커힐 호텔 빌라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5일 오전 11시 경기도 기흥에 있는 동아 그룹 최원석 회장의 별장에서 허담 일행을 만나 밀담을 나눴다. 이 별장을 청와대의 별장인 양 ‘영춘재’라고 소개했다. 비밀 접촉장소를 최회장의 별장으로 정한 것은 우선 보안상의 이유였고 또 하나는 이들 북한 밀사에게 경부고속도로를 보여주려는데 있었다.
이날 회담은 박철언 당시 안기부장 특보가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북한의 한시해와 3번의 비밀회담 결과 합의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조선
[1981년] 부마고속도로 개통
1981년 9월4일, 부산∼마산을 잇는 길이 43.5km의 부마고속도로가 착공 3년4개월만에 개통됐다. 이로써 마산은 대구∼마산을 잇는 구마고속도로(1977년 12월)에 이어 두번째 고속도로 기착지를 갖게 됐다. 마산에서 냉정 인터체인지까지는 기존 2차선 남해고속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고, 냉정에서 부산 사상까지는 20.6km에 이르는 4차선을 새로 건설했다.
이날 개통으로 그동안 과밀현상을 보였던 남해고속도로의 차량이 이곳으로 분산처리되고 부산항과 마산ㆍ창원 공업단지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물동량을 신속히 수송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콘크리트 포장도로이며, 중앙분리대를 콘크리트벽으로 가설해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과의 충돌을 방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조선
[1965년] 슈바이처 사망 ←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박사
1965년 9월 4일 ‘20세기의 성자’ ‘최고의 휴머니스트’ ‘인류애의 화신’ 등으로 불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사망했다. 독일인으로 태어났으나, 고향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가 1차 대전 후 프랑스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프랑스인이 되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강사로, 그리고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보인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로 활약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슈바이처는 30세라는 늦은 나이에 모교 의학부의 청강생으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1913년 의학박사 취득후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가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인이라 하여 포로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었고 그의 병원도 폐쇄되었으나 아프리카 생활을 회상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1921)가 출판되자 그는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의사이기 이전에 칸트 연구가였고 신학자였으며 바흐연주자이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였다. 1906년에 발표한 신학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부레데까지’는 예수 전기 연구사의 결정판으로 그를 세계적인 신학자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생전에 괴테상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는 정치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이후의 말년에는 견해표명을 자주 했다. 오슬로에서 행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제목은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평화의 문제’였다. 그는 또 1957년 버트런드 러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는 핵실험 반대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193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선수 프레이저(Dawn Fraser, 1937~ ) 출생
여자 선수로서는 최초로 1956, 1960, 1964년 올림픽 대회에서 3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6~64년에 그녀는 100m 자유형에서 9차례 연속으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64년 2월 29일 노스시드니에서 세운 100m 자유형 58.9초의 기록은 1972년 1월 8일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같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영선수인 셰인 굴드가 시드니에서 58.5초의 기록으로 새로운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서 프레이저는 100m 자유형과 400m 자유형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400m 자유형에서 은메달을 땄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와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 대회에서는 다시 1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4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회에서는 400m 혼영 계주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에 앞서 그해 3월에 그녀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해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의 선전은 특히 대단한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7년 프레이저는 미국 선수권대회 여자 자유형 100m에서 우승했다.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던 100m 세계신기록 외에 220야드(약 200m)에 이르기까지 5개의 자유형 종목에서 세계 스탠더드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 기록들은 모두 1970년대초에 깨졌다. 해리 고든과 공동 집필한 그녀의 자서전 〈수면 아래에서 Below the Surface〉가 1965년에 출판되었다. 같은 책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금메달의 소녀 Gold Medal Girl〉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08년] 미국 흑인 소설가 라이트(Richard Wright) 출생
1908년 9월 4일 태어남 / 1960년 11월 28일 죽음
라이트는 백인들의 흑인차별대우에 저항한 미국의 흑인작가이다. 조부모는 노예였으며, 아버지는 라이트가 5세 되던 해 가출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북부 이주 대열에 합류해 테네시 주의 멤피스로 갔다가 시카고로 옮겼다. 그곳에서 '연방작가 프로젝트'를 통해 글을 쓸 기회를 얻었다. 1932년 공산당원이 된 뒤 1937년 공산당지 <데일리 워커 Daily Worker>의 편집장이 되었고, 이후 미국작가동맹의 부회장이 되었다. 중편소설집 <톰 아저씨의 자식들 Uncle Tom's Children>을 발표하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차별대우에 저항하는 작가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미국의 아들 Native Son>(1940)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의 아들>은 다른 흑인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문학을 통한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1941년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되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1951년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영화에서는 작가 자신이 주인공을 맡았다. 이밖에 <지하에 살았던 남자 The Man Who Lived Underground>(1942)·<흑인 소년 Black Boy>(1945)·<방관자 The Outsider>(1953) 등을 발표했다. <미국의 탐욕 American Hunger>은 그가 죽은 뒤인 1977년에 출간되었다./브리태니커
[1882년]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프랑크(Leonhard Frank, 1882~1961) 출생
188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 기계공, 공장 노동자, 자동차 운전수 등을 전전하다가 30세 무렵 문필 활동에 들어섰다. 1915년에는 전쟁을 반대하여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귀국 후 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나치를 피해 망명하였다가 1955년 뮌헨으로 돌아왔다.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의 드라마에서와 같이 표현주의적·혁명적 색채를 강하게 보여주는 소설가이다. 그의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격정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1917년에 발표된 그의 단편소설 《인간은 선하다 Der Mensch ist gut》(1918)의 제목은 전쟁을 증오하고 개인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현실을 비판하며 동포애를 부르짖는 표현주의 인간신뢰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작품은 1917년에 이미 민족간의 살인을 자행하는 전쟁으로부터 돌아설 것을 요구하는 평화주의적 혁명에로의 호소문적 성격을 띤다.
1914년에 뷔르츠부르크를 무대로 한 소년소설 《도적단들 Die Raeuberbande》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에는 사형이라는 형벌에 반대하는 심리를 분석하는 단편소설 《원인 Die Ursache》(1916)에서와 마찬가지로, 강한 반시민정신이 넘쳐 있다. 1924년에 발표한 장편 《시민 Die Buerger》은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정경이나 장면을 교차시키는 수법으로 인물들의 집단적이고 병렬적인 묘사를 위해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였다.
《카를과 안나 Karl und Anna》(1926)에서는 귀향병의 가정 비극을 다루고 있다. 시베리아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귀환병 리카르드가 초라한 집이지만 몇 년이나 기다려 온 자신의 싸구려 아파트로 돌아온다. 방 안은 떠들썩하고, 자신의 아내는 그의 옛 전우 카를과 함께 있다. 리카르드는 러시아 포로생활을 할 때 전우인 카를에게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며 상세하게 그들이 나눈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구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마음을 유혹하여 불행을 자초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옥센푸르터의 남성 사중창자 Das Ochsenfurter M nnerquartett》에서 프랑크는 남부 독일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강한 악센트를 둔 간결한 산문을 사용하여 《도적단들》의 속편을 썼다. 물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서기 2000년에는 반드시 망하고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꿈을 그린 1952년에 씌어진 《심장이 있는 곳은 왼쪽》 등이 있다.
[1870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 퇴위 ← 나폴레옹 3세, Hippolyte Flandrin이 그린 초상화(부분), Musee de Versailles 소장
1870년 9월 4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퇴위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1850~52년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과 1852~71년 제2제정의 황제를 지냈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1806~10년 네덜란드 왕을 지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32년 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죽자 자신만이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생각해 수차례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1848년 12월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으나 권력의 장기화를 목적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어 1852년 11월 제정으로의 복귀를 결의함으로써 프랑스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전제정치를 통해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으나 말년의 실정으로 서서히 몰락했다. 1859년 이후에는 제국의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해 경제와 외교 부문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1870년 7월에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야기했다. 9월 2일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9월 4일 폐위되었고,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브리태니커
[1837년] 미국의 화가 모스(Samuel Morse), 전신기 발명 ← (1791.4.27~1872.4.2)
1832년 이탈리아에서 미술연구차 유학하다가 돌아오던 선상(船上)에서 최신 전자기학(電磁氣學)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어, 전신기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 대학 동료인 L.D.게일과 공장주(工場主) A.베일의 협력을 얻어 독자적인 알파벳 기호와 자기장치(自記裝置)를 1837년에 완성하였다. 그 기호가 개량된 것이 모스부호이다.
처음에는 국가자금과 유럽에서의 특허권 획득에 실패했으나, 1843년 워싱턴~볼티모어 간의 시험선(試驗線) 가설비 3만 달러의 예산을 획득하여, 이듬해 5월에 유명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말을 베일 앞으로 송신하였다. 1856년, H.시블리가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설립한 다음부터 모스는 특허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발명의 보상을 받았다.
[1824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 출생 ← Bruckner(1860)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오르간·통주저음(通奏低音)·화성·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제2·제3)과 교향곡 2(0번·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괼레리히·샬크형체·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1768년]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외교관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François-René de) 출생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1768. 9. 4 ~ 1848. 7. 4
브르타뉴 해변 생말로의 유서 깊은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 몰락한 귀족의 어두운 그늘이 감도는 집안에서 오직 모래와 파도만을 벗하면서 자랐다. 1786년 아버지의 명을 받아 육군에 입대, 소위로 나발 연대에 근무하다가 같은 해 가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군에서 제대, 1789년부터 파리로 나와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791년 단신으로 도미(渡美), 북미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792년 귀국, 반혁명군에 참가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망명(1793)하였다. 이 때부터 7년 동안 망명귀족의 쓰라림을 겪으면서 《혁명론 Essai sur les r暴 volutions》(1797)을 써 18세기사상을 간명하게 요약하였다.
원래 그는 루소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부정하였으나, 1798년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옥중에서 희생당하자 그리스도교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대저 《그리스도교의 정수 Le g暴 nie du christianisme》(1802)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문학·예술·고딕 건축 및 제식(祭式) 등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모두 ‘도그마의 교의’, ‘그리스도교의 시학’, ‘미술과 문학’, ‘예배’의 4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부는 6장씩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의 진정한 가치는 신학적·철학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성에 있다. 이런 점에서 스탈 부인의 〈독일론 De l'Allemagne〉(1808~10)과 견줄 수 있다. 그후에 그는 아메리카 대륙 서사시의 일부로서 씌어진 2개의 작품, 즉 자연계의 정경, 인간의 정열과 그리스도교와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아탈라〉를 제3부 6편에, 작가 자신의 소년시절을 각색한 〈르네 René〉·(1802)를 〈열정들의 모호함 Vague des passions〉의 삽화로 제2부 4편에 넣었다
이 밖의 작품으로 《순교자》(1809) 《예루살렘 기행》(1811) 등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정수》로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아 1803년에 로마 대사관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외교계에 진출, 왕정복고 후에는 대사로서 각지에 부임하고, 한때는 외무대신이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이 앙기앵 공작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혐의가 불충분한데도 부당하게 재판해 성급하게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전체를 들끓게 하자 이에 항의해 사직했다. 이듬해에는 문학작품 집필과 수차례의 연애사건으로 주목을 끌었다. 181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었다. 1814년 부르봉 왕조의 부활과 함께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815년 자작작위를 받았고 귀족원 위원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도 그에게는 레카미에 부인과의 관계가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며, 여생의 위안이었다. 〈죽음 저편의 회상 Mémoires d'outre-tombe〉은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되었는데, 아마도 가장 뛰어난 기념비적 작품일 것이다. 1821년 6개월 간 베를린 대사를 지낸 뒤 1822년 런던 대사가 되었다. 1822년 베로나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으며, 1824년까지 과격 왕당파의 총리였던 빌렐 백작 조제프 재임 당시 외무장관을 지냈다. 부르봉 왕조의 페르디난도 7세를 다시 옹위하기 위해 1823년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켰는데, 전쟁은 승리했으나 지나친 전비(戰費)의 지출로 전쟁에서 얻은 명성은 줄어들었다. 1년간(1828~29) 로마 대사를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1830년 7월혁명 이후는 관계를 물러나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 M暴 moires d'outre-tombe》(1848∼1850)을 집필하였다.
[1735년] 영국 자선사업가 레이크스(Raikes, Robert) 출생
1735. 9. 4 영국 글로스터 ~ 1811. 4. 5 글로스터.
영국의 언론인, 자선사업가, 주일학교 운동의 선구자.
교도소 내 환경개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글로스터에서 일요일이면 어린이들이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노는 것을 보고 1780년 여러 명의 여교사를 채용하여 일요일마다 아이들에게 책읽기와 교리문답을 가르치게 했다. 어린이들의 생활환경개선을 위한 이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는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 〈글로스터 저널 Gloucester Journal〉(1783년 11월 3일자)에 그 지방이 '일요일마다 정말 천국이 된다'고 썼다.
그뒤 주일학교 운동은 신속하게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1785년 주일학교협회가 세워졌고, 그가 벌인 사업의 직접적인 성과로 주일학교연맹(1803)이 설립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 최후의 황제 폐위
5세기 후반에 활동한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475~476 재위)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ugustulus)는 왕위를 찬탈하여 동로마 황제에게는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서로마군 지휘관 오레스테스의 아들로 원래의 성(姓)은 아우구스투스였다. 전(前)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낸 아버지에 의해 제위에 추대되었으나(475. 10. 31) 나이가 어려 이름에 '작다'는 뜻의 접미사를 붙여 아우구스툴루스라 불리게 되었다. 약 12개월 동안 오레스테스는 아들의 이름을 빌려 이탈리아를 다스렸으나 결국 그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게르만족 전사(戰士) 오도아케르를 지도자로 삼았다. 오도아케르의 부대는 476년 8월 28일 오레스테스를 붙잡아 처형했지만 로물루스는 어리다는 이유로 연금을 주어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에서 친척들과 살게 했다. 그후의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0년 동아시아 여성포럼, 대만에서 개막
1999년 한국방송의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첫방송.
1999년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 78.5%가 독립에 찬성
1990년 한국-잠비아 국교 수립
1990년 강영훈 총리 - 연형묵 북한총리, 서울서 남북한 첫 총리회담
1984년 동독 호네커 수상 서독방문 취소 발표
1982년 27회 세계야구대회 서울 개막 - 한국 우승
1981년 상공부, 제5차 5개년 상공부문 계획 발표
1975년 이스라엘-이집트, 2차 시나이협정 조인
1974년 미국-동독, 워싱턴서 대사급 수교 조인
1972년 일본-중공, 해저케이블 설치에 합의
1964년 정부, 언론보복조치 철회
1964년 자유언론수호 국민대회 발기준비회의, 범국민운동 전개방침 결정
1953년 딘 소장 포로교환으로 귀환
1951년 유엔군 한국전쟁에 소련군 참가 발표
1950년 여자의용군교육대(여군학교 전신) 창설
1949년 소련, 동독 농지개혁 완료 발표
1944년 소련군 헝가리에 진입
1936년 마드리드에서 카바렐로를 수반으로 하는 인민전선정부 성립
1933년 쿠바 노동자 반란
1932년 오스트리아 빈서 세계평화회의 개막, 14개국 대표 80인 참가
1907년 노르웨이 민족음악파를 창시한 작곡가 그리그 사망
1904년 세브란스 병원 개원
1892년 프랑스 작곡가 밀로 출생
1870년 프랑스 제2제정(帝政) 폐지
1857년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 사망
1460년 신숙주 여진 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