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만들고 정치를 조종해온 권력집단, 왜 말썽인가
<1990년 11월 월간조선>
성역(聖域)이 된 최강의 권력기관
국군보안사령부는 해방 후 한국의 현대사에서 최강의 권력기관으로서 때로는 국민 위에, 때로는 정당 위에, 때로는 군부 위에 군림하여 왔다. 특무대-방첩대-보안사로 그 이름은 바뀌어져 왔지만 1개 사단 규모도 안 되는 이 부대는 두 명의 대통령, 세 명의 정보부장, 두 명의 육군참모총장 두 명의 여당대표, 두 명의 여당사무총장을 배출하였다. 2대에 걸친 군사정권 지배층의 가장 큰 인력공급원이 보안사였다. 보안사는 정권을 만들고 안기부는 그 정권을 조종하였다.
보안사의 첫째 존립목적은 군부의 쿠데타 방지라고 한다. 그러나 12·12사태 때 보안사는 쿠데타를 스스로 주도하였다. 보안사의 두 번째 임무는 방첩이다. 보안사는 수많은 북한간첩들을 체포함으로써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여순 반란사건 직후의 숙군 수사 때부터 간첩조작의 산실이라는 비난도 꾸준히 받아왔다.
어떤 법에도 쓰여져 있지 않지만 보안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치사찰이었다. 「정국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글이 보안사의 역사책「대공30년사」에도 나올 정도로 보안사는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정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정보부는 공화당을, 보안사는 민정당을 만들었다. 결국 보안사는 존립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임무를 수행하여 왔다.
최근에 터진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은 관행화 된 월권적 임무수행 방식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선진화·민주화 돼 가는데 보안사는 아직도 수구적 생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실槿構?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월권적 목적달성에는 필연적으로 탈법적인 수단이 따르게 된다. 고문·도청프락치….
이런 수단이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성역화 된 군부대 내의 밀실에서 이뤄져 옴으로써 이 조직의 체질로 굳어져 버렸다. 이번 폭로사건을, 그런 생리를 바꾸는 계기로 활용만 한다면 보안사는 민주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군 정보기관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보안사는 한 번도 제대로 정화돼 본적이 없는 유일한 정부기관이다.
1980년 공직자 숙정 때 정보부에선 약3백 명이 쫓겨나고 세무서장·경찰서장의 약3분의 1이 정화되었지만 보안사는 무풍지대였다. 국보위백서는 5천4백여 명의 숙정자 중 약29%인 1천5백여 명이 사정기관 공직자였다고 자랑하였지만 보안사를 숙정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정의의 기준은 무너졌고 다른 사정기관에 대한 보안사의 우월 의식과 성역의식만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오직 한 사람의 눈치만 봐
보안사가 해방 후 최강의 권력기관일 수 있었던 것은 독재자가 정권안보를 위한 감시기관으로 이 조직을 사물화해 온 데다가 군이라는 최강의 물리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독재자)로부터의 권력과 밑(군)으로부터의 물리력을 아울러 갖추었기 때문에 보안사는 정보부 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진 기관이 되었다. 정보부가 천장에 매달린 잘 익은 사과라면 보안사는 끈질긴 잡초였다.
10·26사건으로 정보부를 뒷받침하던 독재자의 권위가 사라지자 보안사는 간단하게 정보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10·26사건-12·12사태-5·17-광주사태로 이어지는 격동기에서 수많은 사건을 기획하고 해결하며 수습해갔다. 보안사의 추진력은 목표가 주어지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 이 부대 특유의 분위기에서 나오고 있다.
해내고 만들어 내는 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 부대는 수사권과 정보수집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에는 「수사권을 가지면 정보수집이 쉽다」는 안이한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 바탕에는 정보를 위협으로 수집하고 수사를 정보수집의 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약점을 이용한 정보수집에 익숙해지면 정보기관의 수집력과 판단력은 절대로 향상되지 않는다. 정보와 수사를 함께 하면 권력기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정보·수사를 겸한 소련의 KGB 와 정보만 맡은 CIA의 차이가 그것이다.
이종구(李鍾九)국방장관은 『일개 이등병이 나라를 뒤흔드는 사태를 개탄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보안사의 한심한 정보관리였다. 권력에 한 눈이 팔려 있는 사이에 이 부대의 존립근거가 한구석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정보·수사 뿐 아니라 육·해·공군의 수사·정보채널을 통합함으로써 구조적으로 견제를 받지 않는 기관이 돼버렸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보안사령관은 직속 상관인 국방부장관을 따돌리고 대통령에게만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시만 받아왔다. 5공화국에 들어서는 법적으로 보장된 안기부의 보안사 감사도 유명무실해짐으로써, 그리고 국회와 언론도 보안사를 성역으로 방치함으로써 보안사는 여전히 한 사람-대통령에게만 충성을 바치면 되는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의 눈치만 보면 되는 조직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다. 보안사의 42년 역사를 관통하는 이 조직의 행동규범은 정의도, 법률도 아닌 오로지 권력이었다. 「법이 이성보다 강하고, 권력은 법보다 세며, 하늘은 권력보다 강하다」(非理法權天)는 말 그대로 보안사는 이번 사건으로 권력 위에 있는 하늘, 즉 민심(민중의 힘)의 무서움을 깨닫게 도리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보안사의 독특한 생리는 그 탄생과정에서부터 이미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친일헌병·경찰의 온상
보안사의 역사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이해 5월27일 육군정보국 내에 특별조사과(제3과)가 창설되었다. 한국에 있던 미군의 제971 CIC파견대는 각 연대 정보과에 근무하던 장교 및 간부 33명을 불러 올려 방첩관계 교육을 시킨 다음 특별조사과를 방첩대(SIS)로 개칭, 여기에 배속시켰다. 초대 방첩대장은 박정희(朴正熙)소령과 동기생(육사2기)이던 김안일(金安一)대위였다. 여순 반란사건 직후 방첩대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가면서 국군내부에 침투한 남로당조직의 색출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방첩대는 네 차례의 숙군 작업을 통해서 1천3백여 명의 군 내 좌익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 숙군 작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이가 김창용(金昌龍) 당시 1연대 정보주임(뒤에 특무과장·특무부대장)과 친일헌병 경찰출신이었다.) 이들의 무리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가 많았음을 「육군전사」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방첩대가 창설 초기에 벌써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히던 친일경찰·헌병출신들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은 그 뒤 이 부대의 성격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김안일(金安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숙군 작업으로 전문 수사요원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어 경찰관들을 특채하게 되었다. 수도청 사찰과 형사들과 일제헌병 출신들이 수십 명 들어왔다. 경찰 출신들은 주로 일제시대부터의 경험자였다. 노엽(조선군 헌병출신), 이진용(일제 경찰관 출신), 도진희(일제 경찰 출신), 장보형(조선군 헌병 출신), 장복성(일제 경찰출신)같은 이들이 이때 방첩대로 들어왔다』
노엽씨는 해방 때는 조선군사령부 원산헌병대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의 계급은 특무조장(지금의 준위). 한국인으로는 헌병대에서 가장 높게 오른 사람이었다. 85세로 지금 여의도에서 살고 있는 그는 원산에서는 주로 대소(對蘇) 방첩업무에 종사했고 독립운동가의 탄압은 본 임무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육군정보국 방첩대는 6·25전쟁이 나자 그해 10월 21일 육군 특무부대(CIC)로 독립하였다. 초대 부대장은 김형일(金炯一)대령이었고, 김창용(金昌龍)은 경인지구 CIC대장으로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였다가 특무부대장으로 승진했다.
용공조작의 기술자 김창용(金昌龍)
김창용(金昌龍)은 1916년 7월에 함남 영흥에서 났다. 1937년에 그는 북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대의 군속이 되었다. 사환의 일을 보면서 온갖 궂은 일을 성실하게 하여 3년 뒤엔 관동군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그 뒤 헌병하사관이 된 그는 주로 항일중국인 조직을 파괴하는 정보수집 업무에 종사, 많은 실적을 남긴 듯하다. 해방 뒤 그는 북한에서 전범취급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다고 한다.
김창용(金昌龍)은 숙군 수사, 그리고 6·25 전쟁 중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직통채널을 확보했다. 이것이 그가 발호 할 수 있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다. 김안일(金安一)씨는 김창용(金昌龍)을 이렇게 평했다.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단점이 있다. 공 앞에서는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었다』
용공조작의 원조가 된 김창용(金昌龍)은 그 조작의 기술자로서 친일경찰·헌병출신들의 도움을 받았다. 친일경찰과 헌병 출신들은 해방 뒤 늘 불안했다. 권력의 향방에 대한 취각이 예민한 그들은 권력자의 신임만이 생존의 지름길이란 사실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신임을 받으려면 기술자로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없는 사건도 만들고, 무고한 사람도 공산당으로 몰아야 했으며 그러 자니 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용(金昌龍) 특무부대장의 측근에서 그의 머리와 손발이 되어준 이들(영관급·지구대장급·처장급·고급 문관급)은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잇는데, 관동군·만주군 헌병 출신자, 조선군헌병 출신자, 그리고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그는 관동군 헌병학교 동기생들을 많이 썼다. 이상무(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김인측, 김광진, 최기원, 박노승, 이영호, 곽홍진 같은 장교들이 그의 동기생으로서 관동군 및 만군에서 헌병으로 있었던 이들이다.
관동군 헌병의 선배로서는 최일엽, 공병술, 공병익, 이옥봉, 이대섭 등을 측근에서 부하로 부렸다. 일제 경찰 출신으로는 도진희, 고영섭(청진서 고등계 출신), 장복성, 조병진(고등계 출신), 최석범(만주국 경찰), 계종운(고등계 출신), 최창화 등을 중용했다. 조선군 헌병 출신으로는 노엽, 염희춘, 허태영, 장보형 등이 있었다. 특무대에서 특히 부정적 기능을 많이 한 것은 취조를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출신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특무대에서 일했던 金모 당시 수사관은 『고등계 출신자들은 조작이나 고문에 대해선 양심이 마비된 것 같았다. 고문을 통해서 피의자와 한판 승부를 하여 자백이란 걸 받아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이 김창용(金昌龍)의 용공조작 실상은 1956년 1월31일 그가 암살 당함으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두 부하를 시켜 金을 죽인 이는 허태영(許泰榮) 대령이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이긴 했지만 허태영(許泰榮)은 김창용(金昌龍)과 같은 질의 인간은 아니었고,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정보부로 넘어간 친일파
허(許)대령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강문봉(姜文奉) 중장은 군법회의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내가 일선 지휘관이었을 때 나의 부대에 파견된 특무대원은 소련의 케페우처럼 행동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장관이 퇴임하면서 『장관이 보안사를 장악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다.
독재자의 사물처럼 돼버린 보안사는 한 번도 군의 지휘계통 하에 놓여본 적이 없다. 1971년 8월에 육군보안사령관이 된 강창성(姜昌成)소장은, 전임자인 김재규(金載圭)가 업무를 인계하면서 『매일 청와대에 서류보고를 올리되, 중요사항은 의전비서관을 통해서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 육군총장과 국방장관에게는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고할 것』이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姜사령관에게 『정보보고는 총리를 거치지 말 것』을 직접 지시하더란 것이다. 5·16 뒤 중앙정보부가 발족하자 특무대 출신들이 많이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고문과 조작의 기술도 건너갔다.
예컨대 특무대 취조관 고영섭(高永燮)씨는 일제 때 함흥·신의주에서 고등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사냥했던 이였다. 그는 조봉암(曺奉岩) 사건수사에도 참여했다. 曺奉岩에게 북한 공작금을 대준 사람으로 지목돼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양명산(梁明山)은 재판정에서 高고문관으로부터 당한 고문을 생생하게 진술했었다. 高육문관은 정보부로 넘어가 신문관으로 일하다가 몇 년 전 죽었다. 육군 특무대는 4·19직후인 60년 7월20일 육군방첩부대로, 1968년 9월23일에는 육군보안사령부(해·공군은 보안부대)로, 1977년 10월 7일에는 각 군 보안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로 변천해 왔다. 이름은 바뀌어도 초기의 생리는 전통으로 굳어졌다.
「대공 30년사」 2백31면에는 「양이섭(梁利涉)은…상해 임시정부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던 자로서…」라는 표현이 있다. 독립운동을 범죄활동처럼 설명한 이런 표현은 보안사 인맥의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반공이 민족이나 민주보다 우선하는 가치체계가 돼 온 조직 속에서 일제 헌병·경찰출신자들은 그 기술로 해서 존경을 받으면서 최근까지 건재하였다. 이들에게는 독립운동가와 반정부활동가는 다 같이 골치 아픈 존재란 점에서 구별이 되지 않았다. 특무부대 시절 이 부대의 용공조작에 단골로 걸려들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었다.
쿠데타 예방기관의 쿠데타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은 『쿠데타를 막아야 할 보안사가 정보채널을 독점한 채 역적모의를 하고 있었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2·12사태는 지금도 그대로인 보안사의 잠재적 위험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군부를 독점적으로 감시하는 기구가 쿠데타의 주체가 될 때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10·26사건 뒤 전두환(全斗煥)의 보안사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변신, 정보부·경찰·검찰·헌병을 장악하고 대 민간 사찰 활동을 부활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수사권뿐 아니라 정보망까지 독점해 버렸던 것이다.
12·12사태 그날 밤 보안사는 전군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각 지구 보안부대를 활용하여 육군본부라는 적법한 지휘계통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독재자에 의해 2원화 되었던 군의 지휘체제는 이날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전두환(全斗煥)은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정치적 사생아였다.
이날 보안사에 앉아서 쿠데타작업을 지휘했던 것은 쿠데타를 막는 전담 부서인 보안처장 정도영(鄭棹永)준장이었다. 이날 밤 간첩을 잡는 게 고유 임무인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들은 鄭총장의 측근들에게 선제사격을 한 뒤 그를 납치해 와 물 고문 시키는 일을 했다. 이런 공을 세운 수사관들은 지금도 보안사에 근무중이다. 이들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는 일종의 건국공로자로 초청을 받아갔다.
명예를 생명으로 삼고 있는 군인 사회에서 부하가 현역총장을 물 고문한 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할 것이다. 이것은 보안사의 생리가 돼 온 권력지상주의가 진정한 군사문화까지도 오염시킨 경우이다. 정승화(鄭昇和)씨는 회고록에서「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고 썼다.
일단 명령만 떨어지면 인륜을 무시한 행동까지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보안사의 생리다. 끝가지 육본의 적법한 명령에 충성하다가 부하의 총격을 받았던 정병주(鄭柄宙)특전사령관은 강제 예편 당한 뒤 자택에서 보안사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에 살던 張장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역모를 했다고 오해하여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다. 그 2년 뒤에는 서울대학생이던 아들이 그의 할아버지 묘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을 겪었다. 張씨에 따르면 보안사요원들은 좁은 집에 들어와 같이 기거하다시피 하면서 부부간의 대화까지 캐묻더라는 것이다.
지휘권 2원화로 군기 문란
보안처장은 장교들에게는 보안사령관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으로 통한다. 장교들의 동향에 대한 신상기록을 관리함으로써 승진·전보 등 인사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보안처는 누구를 장성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장성이 되지 못하게 할 힘은 갖고 있다. 전국 보안부대도 보안처가 관할하고 있다. 군단, 관구별로 설치된 지구 보안부대장은 대령 급이다. 최근에 기자가 어느 군단장을 인터뷰하러 갔더니 군단 보안부대장이 배석하였다. 군단장들은 중요회의뿐 아니라 사적인 모임 때도 아예 보안부대장을 합석시킨다.
이재전(李在田) 전 대통령 경호실 차장(중장예편)은 『나는 한 번도 보안부대장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영관급 보안부대장들이 장성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 자체가 군기를 흐트려 놓는 짓이다. 부하들이 군단장에게 건의할 일이 있어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12·12사태 직후 신 군부는 군부 내의 풍토쇄신 6개항 중 하나로서 보안부대의 월권금지를 결의했으나 5·17이후에는 지켜지지 않더라고 한다. 보안부대장의 인사권이 그 부대의 지휘관 손에 있지 않다고 해서 대령이 중장과 맞먹는 행동을 함으로써 단일화돼야 할 군 지휘계통을 어지럽혀 온 결과는 12·12사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국가의 군대를 제외하고는 선진국의 문민통치하 군대 치고 지휘계통이 우리나라 처럼 통째로 2원화 된 나라는 없다고 한다. 보안사 역사상 쿠데타 음모를 적발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1965년 5월 박인도(朴麟道/2군단 포병사령관)·원충연(元忠淵) 대령(정훈학교 부교장)이 반 박정희(朴正熙)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당시 육군 방첩대(부대장 윤필용(尹必鏞))에 검거된 것이다. 육군방첩대 출신인 李모 중령이 朴대령의 지원요청을 받고 방첩대에 제보했던 것이다.
1973년 강창성(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朴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윤필용(尹必鏞)수경사령관과 그 계열의 장교들을 독직혐의로 구속하였다. 이 수사는 정규육사출신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수사로 확대돼 많은 장교들이 옷을 벗거나 좌천되었다. 그러나 하나회의 지휘부인 전두환(全斗煥)씨 등은 수사에 협조적이었고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감싸주어 온전할 수 있었다.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그 뒤 다시 수도권 부대로 돌아와 12·12사태 때 결정적 역할을 했다.
朴대통령은 보안사로 하여금 수경사와 정보부를 견제·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보안사와 수경사의 패권다툼은 1212사태와 윤필용(尹必鏞) 사건으로 결판이 났다. 尹必鏞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한 김재규(金載圭)의 보안사 직원들을 내쫓을 정도였고, 12·12사태 직전에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은 보안사에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정치수사와 대공수사가 섞여
서빙고 수사분실의 증축·개축을 지시한 사령관은 나중에 전부 이곳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 보안사가 권력자의 통치기구로 활용되다가 보니 정승화(鄭昇和/방첩부대장 출신) 김재규(金載圭/보안사령관 출신) 윤필용(尹必鏞/방첩부대장 출신)씨 등 3명은 과거의 부하들로부터 혹독한 수사를 받았다. 1972년 10월 유신 때는 강창성(姜昌成) 장군이 지휘하던 육군보안사가 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연행, 가혹한 조사를 했다.
1980년 5·17뒤에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조사를 대공처가 주도하였다. 간첩을 수사하도록 만들어진 보안사 대공처가 그런 정치적 수사에까지 손을 댐으로써 보안사 수사관들의 생리는 인권이나 적법절차를 경시하는 쪽으로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을 정해놓고 두드려 맞추는 수순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수사는 합법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할 수사풍토를 망치기 때문이다. 보안사 사건에서 조작이란 비난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일반수사까지도 정치수사 식으로 하는 게 버릇으로 돼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안사는 수사관들을 운용하면서 일반사건 수사와 대공수사를 구별하지도 않고 있다. 1982년에 이(李)·장(張) 어음사기사건이 터지자 전(全)대통령의 지시로 보안사는 이철희(李哲熙)씨의 운전수 등 관련피의자들을 신문하였다. 형사소송법을 무시하고 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의 수사까지 떠맡도록 한 권력층의 보안사 운용방식은 보안사 직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월권적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윤석양(尹錫洋) 이병이 폭로한 민간인 사찰자 1천3백여 명의 명단에 대해서 국방부는 「전시나 비상시에 보호 또는 차단하기 위한 자료」라고 해명했다가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명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수사기관에서 쓰는 「보호」라는 말은 경찰서 보호실 처럼 감금과 격리를 뜻한다. 이 자료는 간첩용의자나 전과자 자료도 아니고 적어도 수만은 넘을 국가요인 자료도 아닌 반정부적 경향의 인물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자료를 수사부에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구나 도주로까지 그려져 있었다는 것은 이 자료가 유사시의 예비검속대상자 명단이었음을 추리케 한다. 더구나 대공처는 5·16과 5·17때 두 차례 예비 검속을 실천한 경험이 있다. 5·16 뒤 육군 방첩대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조직, 혁신계 인물 및 사상전과자 약3천3백 명을 예비 검속하였다. A, B, C 등급으로 분류하여 A, B등급은 입건 조사한 뒤 각 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에 송치하였고 C급은 훈계·방면하였다(「대공 30년사」) 5·17 하루 전에 보안사 대공처는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동시에 검거할 「예비검속자 명단」을 나눠주었었다.
1·19 민간사찰 금지조치
보안사 사람들 사이에서 「1·19조치」로 통하는 게 있다. 1978년 1월19일을 기해 보안사의 대(對) 민간사찰이 금지된 것을 이른다. 이 조치안을 기안한 것은 당시 정보부 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金淇春)씨(현 검찰총장)였다. 1·19조치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전방사단의 한 대대장이 통신병을 데리고 월북한 사건이었다. 현지 보안대가 그 대대장의 사소한 과오를 지나치게 추궁하여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월북의 이유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이 대노하자 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보안사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민 사찰금지 안을 기안하도록 김기춘(金淇春)국장에게 시킨 것이다. 내무부, 검찰 등 다른 부서에서도 이 조치를 환영하였다.
10·26사건 이후에 실권을 잡은 보안사 대공처 간부들 사이에서는 그때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金씨를 잡아넣자는 얘기가 진지하게 거론되었다. 대공처의 이학봉(李鶴捧) 중령이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으면 金씨가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보안사에서 1·19조치를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민간부문에 대한 사찰이 중단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보안사는 대민사찰 기구인 정보처를 방산처로 개편하여 방위산업체의 보안업무를 맡도록 함으로써 인력을 흡수하였다. 이때 보안사를 퇴직한 요원들 중 10여명은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부리던 사설 정보대(대장 이규광(李圭光))에 취직하였다. 이때 정비된 보안사의 조직과 기능을 국군보안부 대령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대공30년 사」수록).
제3조(하부조직) ①사령부에 제1처, 제2처, 제3처, 제5처, 제6처, 제7처와 비서실, 감찰실, 자료 처리실, 경리실, 본부사령실, 병기근무대 및 통신근무대를 둔다. ②사령부는 그 예하에 군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국방부 연락관실, 육군본부 해군본부 및 공군본부 보안부대와 군사령부 보안부대, 군단 보안부대, 관구 보안부대, 사단 보안부대를, 기능별 보안지원을 위하여 통신 보안부대를, 부대원 교육을 위하여 보안교육대를 둔다. ③제1처장 제2처장 및 제3처장은 장관급 장교 또는 영관급 장교로, 기타 처실장 및 부대장과 국방부연락관실장은 영관급 장교로 보한다.
제4조(사무분장) 사령부 구성 조직의 사무분장은 다음과 같다. 1·제1처(보안처) 가·국방부, 국방부직할부대 및 기관과 각급 부대에 대한 인원, 시설, 문서, 통신자재 보안지원 나·군사첩보의 수집처리 다·경호경비 라·보안제도 및 교리연구 2·제2처(방산처) 가·군수업체 및 국방부장관의 조정감독을 받는 기관에 대한 인원, 시설 및 문서보안지원 나·군수업체 관련첩보의 수집처리 다·군수업체 보안제도 및 개선자료의 제공 라·군수업체 및 국방부장관의 조정감독을 받는 기관의 파업, 선동 또는 파괴행위의 예방 및 분쇄 3·제3처(대공처) 가·군 및 군과 관련 있는 간첩 기타 정보사범의 검거처리 나·대 간첩작전 기술지원 4·제5처 가·기획업무 예산편성 및 집행조정규제 나·심사분석 군사감사업무 다·작전 편제 교육 및 정훈업무 라·부대 발전책 연구 5·제6처 가·부대병력 유지 나·인사관리 다·사기앙양 및 유지 라·보건업무 마·군기 및 질서유지 바·인사행정 업무 6·제7처 가·군수보급 운영 재산관리 나·시설계획 및 부동산 관리 다·영선 병기업무 계획감독 라·일반통신운영 지원 7·비서실 가·사령관에 대한 행정적 보좌 나·의전업무 8·감찰실 가·부대자체 보안업무 나·부대예방 감찰 및 조사업무 9·자료 처리실 가·존안자료의 관리유지 나·자료지원 및 회시 10·경리실 가·세출예산의 집행 및 결산업무 나·휘하부대에 대한 자금지원 11·본부사령실 가·사령부 사병의 인사행정 및 군기유지 나·사령부 내의 안보 방공 방화 교육훈련 및 경계 다·사령부 장병에 대한 복지의료 군수 지원 라·사령부 시설관리 12·병기근무대 병기 및 근무지원 13·통신 근무대 유무선통신 근무지원
재일 동포와 납북어부들이 표적
10·26사건 직후 전두환(全斗煥) 합수본부장은 최(崔)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대통령령으로 된 국군보안부대령을 고쳐 대민 사찰업무를 부활시켰다. 그래서 정보처가 되살아나고 권정달(權正達) 부산지구보안부대장이 처장으로 전보되었다. 이 정보처는 그 뒤 국보위조직·민정당조직·개헌작업·언론인숙청·언론사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정권의 산실이 된 10·26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병력은 4백97명이었다. 보안사가 3백76명, 헌병 79명, 경찰 37명, 검찰 8명, 정보부 6명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보안사에서 근무했던 한 장교출신 인사는 이런 소감을 밝혔다.
『고참수사관들일수록 아주 편견이 많습니다. 반정부와 반국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빨갱이로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보안사가 간첩수사의 주된 공략표적을 재일동포로서 모국에 유학 온 학생들과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에 두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민족적인 비극입니다. 재일동포 학생들은 사상적인 터부가 없는 곳에서 자랐고 그런 환경에서 인간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을 국내인과 같은 기준으로 취급한다면 국가보안법에 안 걸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납북어부들이 북쪽에서 견문하고 온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아 수사를 시작하기도 하는데 작은 약점을 그럴 듯하게 꾸미면 다 간첩단이 되지요, 간첩 잡은 이에게 포상하는 제도도 없애야 합니다. 쓸데없는 경쟁으로 억울한 일들만 생깁니다.』
장기수 가족모임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1백60여명이 회원인데 정말 간첩행위를 한 이는 20% 쯤 될까요? 나머지 80%는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 같아요. 5공화국 때는 보안사에서 조작한 사건이 가장 많은 것 같고, 고문의 정도도 보안사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보안사 간부출신인 한 5공주도 세력인사에게 솔직한 견해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리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공작이 변화하는 데 따라 대응하다가 보니까 재일동포 학생 등을 수사 대상으로 삼게 되었지 처음부터 조작하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입북=간첩」이란 등식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사이에 보안사는 북한의 간첩 남파 예상자 사찰에 총력을 기울였었다. 월북자가 있는 가족, 납북 어부, 6·25때의 국군포로 등이 사찰대상이었다. 이즈음부터 일본을 통한 우회침투가 활발해지자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중점적인 사찰대상이 되었다. 북한이 포섭대상자를 공산주의 활동자와 그 연고자에서 「사상 온건자」로 전환하자 보안사는 그들이 접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5천여 명의 지식인·학생·교수의 신상정보를 분석하여 50여명의 간첩을 색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사는 또 「대공처 공작과를 부활시키고 대일 공작계를 신설, 3백84명의 공작근원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김영작(金榮 作), 김철우(金鐵佑) 등 30여명의 간첩들을 일망타진하였으며 75년부터는 교포유학생을 대상으로 7백37명을 선발하여 공작활동을 전개, 강종헌(康宗憲) 일당 등 20여명의 간첩을 색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대공 30년 사」)
이 기술에는 의문이 났다. 보안사가 간첩으로 기소한 김영작(金榮作), 김철우(金鐵佑)씨는 재판과정에는 일본 유학 중 일본을 통해 북한에 간 사실은 시인했으나 간첩활동을 한 사실은 부인했다. 이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金榮作씨는 보안사 인맥의 추천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金鐵佑씨는 포항제철 부사장직에 까지 올랐다. 그들이 진짜 간첩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안사의 수사분위기는 「입북=간첩」의 등식이다. 힘없는 피고인들은 이 등식에 따라 장기수가 되고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은 곧 사회로 복귀한 사례가 더러 있다는 얘기다.
**표 <간첩 검거자 비교> 삽입
경쟁심리가 조작의 토양
사건의 규모면에서나 우리 대공 팀의 활동면에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대 사건이었다」(「대공30년사」고 보안사가 「우리 대공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대공 활동사에서 찬연히 빛날 공적으로서 자랑하고 있는 것은 「학원침투 서승(徐勝)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총련에 연고자가 있는 K라는 공작원을 보안사가 대북 역 공작에 이용하여 성과를 거둔 사례였다. 보안사는 K를 일본으로 밀항시켜 조총련 공작원의 안내로 북한에 들어가 대남 간첩교육을 받고 오도록 하였다.
이 K와 접촉하려는 고정간첩 강창구(姜昌玖)를 체포했고, 姜을 전향시킨 다음 일본으로 보내 재일동포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오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잡힌 것이 재일동포 유학생 서승(徐勝)·서준식(徐俊植)형제였다. 이 형제는 큰형 서선웅(徐善雄)의 주선으로 북한에 다녀왔었다. 법정에서 두 사람은 입북사실은 인정했으나 간첩사실을 부인하고 수사 중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양심수로 유명해졌다.
간첩수사에서 고문과 조작 등 무리를 빚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사기관끼리의 경쟁의식이다. 경찰이나 안기부가 간첩검거 발표로 대통령의 칭찬을 받으면 보안사령관은 아래로 압력을 넣게 된다. 대공처장 등 간부들은 간첩수사 실적에 따라 승진에 큰 영향을 받게 되므로 실적을 올리는데 열심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가 간첩 체포자에 대한 포상제도가 미끼로 작용한다. 이 포상금은 형이 확정되기 전에 지급된다. 수사관들의 과욕과 강박관념은 무리한 수사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를 견제해주는 것은 안기부와 검찰의 통제, 국회와 언론의 감시이다. 5공 때는 보안사의 힘 때문에 이런 견제는 전무상태였다. 역대 군사정권 관리 층에서는 반정부운동이 강화되면 간첩사건을 적기에 터뜨려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70년∼81년의 5공 출범기, 1984∼86년의 민주화 운동시기에 간첩사건 발표가 많았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간첩이 그렇게 타이밍을 맞춰 잡혀 주지 않는 한 간첩수사의 정치적 의도는 조작의 토양이 된다. 궁여지책으로 이미 잡아놓은 간첩을 그런 정치적 타이밍에 맞추어 발표하는 예도 많았다. 냉전논리 속에서 「간첩은 고문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었다는 것도 보안사의 무리한 수사풍토를 온존시켜 온 중요한 조건이었다.
수사관 입장에서는 간첩이 아닌 사람도 일단 간첩으로 몰아놓으면 무리를 할 수 있었고, 언론이나 야당의원들까지도 간첩 혐의자가 받았다는 고문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문제는 수사와 재판을 해 봐야 간첩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간첩을 고문하는 게 아니라 (간첩으로 확실하면 고문할 필요가 없다) 간첩 비슷한 사람을 고문하게 되는 것이다.
나종인(羅鍾寅)씨 사건의 의문
보안사는 1981년쯤에 체포한 남파 간첩으로부터 「나경애라는 여자 간첩이 고향에 다녀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나경애라는 이름만 갖고 전국의 호적을 뒤졌으나 그럴 듯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경혜」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해서 그쪽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781번지 나석균씨(사망)의 장녀가 나경혜(1932년 생)였다. 나경혜는 6·25 전에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공처 수사관들은 근 4년간 이 가족들을 미행하다가 별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사건을 깨기로 했다. 「깬다」는 것은 혐의자들을 일단 연행하여 조사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나경혜 씨의 동생 나종인(羅鍾寅)씨(52) 서울에서 삼화엔지니어링 이라는 단단한 전자 자동제어기 수입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84년 10월 5일에 영장 없이 연행돼 약 70일간 서울시 송파 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羅씨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다니던 1960년, 그리고 제대 뒤인 1965년에 남파된 누나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왔으나 간첩 활동을 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번의 월북은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다. 나종인(羅鍾寅)씨는 보안사가 자신을 계속범으로 만들기 위해, 羅씨가 업무 차 일본을 드나든 것을, 일본에 있는 임갑순이란 북한공작원에게 첩보를 제공하기 위해 잠입한 것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사는 영장 없이 구금했던 羅씨를 84년 12월말에 일단 귀가시켰다. 보안사는 羅씨에게 20년 전 월북했을 때 안내한 사람을 찾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넉 달간 羅씨는 「공포에 질려 정신나간 사람처럼 돼」기억을 더듬으면서 서울근교를 헤매고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보안사는 1985년 4월초 羅씨를 구속, 간첩죄로 기소했다. 羅씨는 검사 앞에서, 또 1심 판사 앞에서는 자백했다가 징역15년이 선고되자 2심에서는 검사와 보안사에 속았다면서 범죄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상고가 기각되었다.
그는 지금 5년째 대구교도소에서 살고 있다. 상고심 변호인 이범열(李範烈)씨는 『일본에 산다는 임갑순을 붙들지 못한 상태에서, 또 임이 북한공작원이란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법원이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李변호사는 또 『영장 없이 구금조사를 받고 귀가한 피고인의 몸무게가 13kg이나 줄어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작성된 조서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李변호사는 평소에 『간첩사건재판에서 7년 선고가 나면 나는 사실상 무죄선고로 본다. 판사가 수사기관이 겁이 나 무죄인 줄 알면서도 양형을 낮추는 정도밖에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하곤 하는 이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우리 판사들 중에는 「이북 갔다오면 빨갱이다」는 단순한 논리를 갖고 안이한 판결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식의 반공주의로서 자신의 오판을 자위하는 것이다』고 했다. 한 현직판사는 『간첩사건 재판에서는 자백이 원칙을 무시하고 수사기관에서의 자백만 갖고 ㅇ죄선고를 하는 관행이 있어 왔다』고 시인했다. 수사기관에서의 그 자백이 장기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오판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여섯 달 뒤 검거 발표
그런데 재미있는 자료가 하나 발견되었다. 보안사 대공처에서 간첩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공소보류로 풀려난 뒤 2년간 보안사에 수사관으로 채용돼 일했던 재일동포 김병진(金丙鎭)씨가 일본으로 돌아가 쓴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5계 수사관들에 따르면 羅씨는 『지독한 놈』이었다. 한겨울 알몸으로 밖에 내놓고 얼어붙게 해도 자백을 안 했다고 한다. 고추물을 먹여도 안되고 전기에 달아보아도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일단 羅씨를 석방했다. 羅씨는 어느 회사와의 거래전화를 일본어로 했는데 그 감청 테이프를 내가 번역했다. 상거래 이야기 말고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羅씨는 다시 연행되었다. 5계는 羅씨를 「계속범」이라고 조서를 꾸며 송치하였다」
이런 우연의 일치로 봐 羅씨가 불법감금과 고문을 당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그러나 재심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고문한 이들이 먼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 羅씨의 부인 김유자(金有子)씨는 『그 뒤 회사는 망하고 저는 심장과 간에 병을 얻었다』면서 『남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을 보안사 직원들이 협박하여 재판정에 못 나오게 했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남편이 일시 풀려난 뒤 공포에 떨던 때가 가장 괴로웠다. 다시 끌려갈 때 자꾸만 뒤돌아보던 남편의 모습이 선하다』면서 『수십 명의 친척들이 조사 받았는데 시누이와 시동생이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보안사가 羅씨 검거를 언론에 발표한 것은 85년 11월1일이었다. 그는 그해 5월에 이미 기소되었는데도 여섯 달을 묵힌 것이다. 보안사는 발표문에서 북괴는 고향방문단 교류 등 남북대화에 응하면서도 대공경각심을 해이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보안사령관은 이번에 국방장관이 된 이종구(李鍾九)씨였다.
10·26사건 나자 정보부 접수
보안사 인맥이 권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5공화국시절은 보안사의 최 전성기로 기록될 것이다. 1979년 2월에 진종채(陣鍾埰) 보안사령관이 물러난 것은 보안사가 이세호(李世鎬)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을 조사하여 진급에 관련된 부패구조를 밝혀낸 것과 관련이 있다. 李총장은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김계원(金桂元)비서실장은 陣사령관의 수사를 지원하였다.
권부 내의 이런 갈등으로 李총장은 정승화(鄭昇和)장군으로, 陣사령관은 전두환(全斗煥)장군으로 교체됨으로써 격동기의 두 주연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보안사에선 朴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全장군이 부임하자 『이제 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고 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안사는 김재규(金載圭)의 정보부와 차지철(車智澈)의 경호실 사이에 끼여 「역사상 가장 약체」로 있었다.
全사령관이 朴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 보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보안사에서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내용을 車실장이 계속적으로 파악할 정도였다. 부마사태가 나자 全사령관은 시국타개책으로서 김재규(金載圭)와 차지철(車智澈)을 다같이 제거하고 보안사가 주도하여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하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26사건이 터졌다. 보안사는 합수본부직제를 이용하여 정보부를 접수하였다. 감독관을 보내 정보부의 예산집행 등 운영을 통제했으며 정보부의 존안자료를 가져와 활용하기도 하였다. 정보부 보고의 헛점, 예산의 낭비 등도 이때 파악되었고 80년 여름에 3백여 명의 정보부 직원들을 숙청하는 데 참고하기도 했다.
보안사는 김재규(金載圭)의 궁정동 사무실을 수색하여 압수한 약5억 원을 수사비로 전용하기도 하였다. 1980년 4월에 全보안사령관이 정보부?서리직을 겸임하게 된 한 이유는 정보부의 예산을 정권 인수준비 작업에 쓰기 위함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때 정보부의 1년 예산은 약 1천억 원이었는데 외부 감사를 일체 안 받는, 쓰기에 편한 돈이었다. 5공 출범기에 全장군의 손발이 돼주었던 보안사의 네 대령은 모두 처장급이었다. 권정달(權正達) 정보처장, 허삼수(許三洙) 인사처장, 이학봉(李鶴捧) 대공처장,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은 그때 보안사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안사에서는 대령과 처장이 실무책임자들이므로 이 네 대령들이 중요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11월 전두환(全斗煥)합동수사본부장은 법무 참모를 불러『계엄령이 해제된 뒤에도 정보부를 보안사가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법무참모는 아무리 법전을 뒤져보아도 중앙정보부법의 뒷받침을 받는 국가정보기관인 정보부를 대통령령에 근거한 군 수사·정보기관인 보안사가 견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보고하였다. 全본부장은 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보안사의 법률적 한계는 군부대라는 점이다. 아무리 법령을 교묘히 개정한다고 해도 보안사는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기 마련인 것이다. 10·26 뒤 허용되었던 대민 사찰도 어디까지나 군의 보안과 관계 있는 범위 내로 규제돼 있는데 이를 확대 실시하고 있다. 보안사 인맥은 1981년에 계엄령을 해제하고 합동수사본부를 해체하면서 안기부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해 3월2일자로 개정된 국가안전기획부법과 정보 및 보안업무기획·조정규정은 정보부가 갖고 있던 보안사 등 여러 정부기관에 대한 조정·감독권을 기획·조정권으로 완화시켰다.
안기부의 對 보안사 견제 약화
정보부법에는 보안사 등에 대해 매년 1회 이상 정보 및 보안업무를 감시하여 대통령에 보고하게 돼 있었다. 개정된 안기부 법에는 「보안업무 감사는 중앙단위기관에 한하며 정책자료발굴에 중점을 두도록 한다」고 순화시켰다. 정보부는 군 출입 요원을 두고 정보수집을 해 왔었는데 안기부 시절로 넘어와서는 그것을 중단하였다. 그 대신 보안사는 정치 및 대민 사찰을 계속함으로써 보안사의 안기부 견제는 가능한데 안기부의 보안사 견제는 제도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다만 안기부는 우리나라 여러 정보기관을 조정하는 입장에서 정보예산을 관할하는데 보안사가 쓰고 있는 수사비 등에 대해서 통제와 감사를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보안사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은 대통령을 빼고는 국회와 언론밖에 없다. 그 동안 국회와 언론이 오히려 보안사의 사찰을 받아왔으므로 보안사는 오로지 한 사람을 제외한 전체 국민들로부터 성역이 돼 왔었던 것이다.
박준병(朴俊炳) 보안사령관 시절에는 청와대에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곁에 밀착돼 있던 허삼수(許三洙) 사정수석·허화평(許和平) 정무수석이 보안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朴사령관이 인사처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올라가 두 許씨로부터 과장인사결재를 받아온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것은 두 許씨가 全대통령의 보안사에 대한 관심을 대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일 수도 있다.
朴사령관은 1981년 여름 육사 12기 동기생인 박세직(朴世直) 수경사령관의 조사를 수사담당과장에게 명령하면서 『정중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담당과장은 부하들 앞에서 『수사를 어떻게 정중히 하란 말인가』고 투덜댔다고 한다.
朴수경사령관에 대한 수사는 朴보안사령관이 두 許씨의 지시를 받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역학관계를 민감하게 파악한 보안사 수사간부의 반응이 그런 불손한 태도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 보안사 간부들 중에는 직접 청와대로 통하려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장세동(張世東)씨가 안기부장에 취임한 1985년부터 안기부는 국정을 조정하는 힘을 되찾았다. 이때부터는 보안사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 한 안기부 간부는 『우수한 장비와 인력을 가진 안기부는 평화시에는 보안사를 실력으로 리드해갈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통신감청에 의한 정보수집 능력에서 보안사는 안기부를 따를 수가 없었다. 해외정보망 등 국제적인 협조관계에서는 안기부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아무리 보안사령관 출신 대통령이라도 안기부를 중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선거에 적극 개입
5공시절 보안사 대공처에는 심사과가 새로 생겼다. 광주지구 보안부대의 수사과장으로서 광주사태를 치렀던 서(徐)모 중령의 발상이었다고 한다. 徐중령은 심사과 과장이 되어 의식화 학생들의 강제징집과 순화교육을 지휘하였으나 대상 학생들 중에는 사고사나 자살사건이 잇달아 이 과는 페지되었다. 徐중령의 심사과는 1984년 로마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방한을 앞두고 「종교계에 침투한 간첩을 잡으라」는 청와대로부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천주교계에 프락치를 침투시키기도 했다는 것이, 대공처에서 수사관으로 근무했던 재일옰?김병진(金丙鎭)씨의 주장이다. 민주화 운동이 거세지면서 보안사는 시국사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숙이 민간부문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특무부대 시절에 이 기관은 선거에 개입하여 군인들이 여당후보를 찍도록 공작하였다. 1960년 3·15선거를 앞두고도 그러하였다. 박정희(朴正熙)장군은 이런 군내 부정선거에 반발함으로써 청년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4·19 뒤 군부정화를 맨 처음 제기한 朴장군의 도덕적 기반이 그런데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대통령이 되자 이 기관을 선거공작기구로 활용하게 된다. 윤보선(尹潽善)씨와 붙었던 첫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승화(鄭昇和) 준장이 지휘하던 방첩부대가 군사정권의 치적을 홍보하는데 그치고 투개표 부정은 못하게 했으나 그 뒤로는 투개표에 손을 대었다.
보안사는 85년 2·12총선과 87년 12·16대통령선거 때 적극적으로 군인들의 부재자투표에 개입하였다. 81년 총선 때는 전혀 간여하지 않아 여당의원들의 부재자 득표율과 일반 득표율은 차이가 거의 없었다. 2·12총선 때는 여당후보들이 부재자 표에서 70% 내외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통령선거 때 노태우(盧泰愚) 후보는 군인 표가 대부분인 부재자 표에서 60%내외의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보안사의 한 간부는 『대통령 선거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더구나 국군 통수권자를 뽑는 선거였다』면서, 『군도 하나의 이익집단이라면 군의 이익을 대변해 줄 후보를 미는 것은 당연하다』고 털어놓는다. 대통령선거에서 보안사가 중립을 지키기 어려운 것은, 보안사가 유일하게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대통령이며,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기 때문이다. 88년 4·26총선 때는 보안사가 각급 지휘관들에게 「전환기의 군부대책」이란 지침을 내려보내 「비밀·자유투표의 보장」「상하 공히 정치언동금지」 등을 지시, 중립을 지켰다.
이 때문에 여당 후보들은 부재자투표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해 5월16일 이상훈(李相薰) 국방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90년 말까지 현 병력의 14%인 8백60명을 감원하겠다』고 말했었다. 보안사의 당시 병력은 약6천1백 명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안기부보다 많은 숫자다. 6공에 들어 국방부는 보안사의 민간사찰을 중단하겠다고 했으나 언론계·정당 등에 대한 출입이 다소 비 노출활동 식으로 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지난 6월경부터는 대민 정보 수집활동이 다시 노골화되었다. 일부 예비역 장성들에 대한 전화도청도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폭로
이번 윤(尹)이병의 폭로는 원천적으로 견제가 불가능한 보안사의 내부를 프락치 식으로 까발려 놓아 변칙적이지만 견제의 효과를 내고 있다. 尹이병의 폭로 이전에도 그런 견제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앞에서도 소개한 김병진(金丙鎭)씨(35)가 일본에서 써낸 「보안사」란 책은 尹이병의 폭로보다는 훨씬 더 심층적으로 보안사 대공처의 수사실태를 폭로하였다. 金씨는 주로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간첩조작」사례들을 체험기로써 폭로하고 있다. 金씨는 지옥도와도 같은 고문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수사관들의 행태를 낱낱이 까발렸다.
「매년 보안사는 80명에서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을 연행해 왔다. 그 연행의 대부분은 대공처의 수사과와 공작과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소위 특명사건이라 불리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간첩 용의자였다. 그리고 꼭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어느 해(1984)의 통계를 내가 보고 대충 헤아려 본 숫자에 의하면 연행자의 8할이 재일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간첩으로 기소된 것은 그 숫자에서 보면 물론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간첩 창작」의 일은 보안사만이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 치안본부가 행하고있는 것이다. 한국 군사독재의 역사는 한편에선 공작과 불법연행, 고문의 역사였다. 그 사실을 나는 계속 보아왔다. 침묵은 죄악이다. 나의 기분이 어떠했던 간에 내가 수사관의 한 사람으로서 관여한 날조의 희생자들은 지금도 옥에 갇혀 있다」
보안사로서 가장 경악해야 할 일은 수심명의 대공수사요원들의 실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성격이나 재산상태에 관한 묘사까지 포함해서. 더 흥미 있는 것은 金씨가 공소보류 된 뒤 일했던 부서가 대공처 수사2계였다는 점이다. 2계장은 김용성(金容成)소령이었다. 金소령은 그 뒤 중령으로 승진했는데 바로 윤석양(尹錫洋) 이병이 소속돼 있었던 과의 과장으로 있다가 이번 사건을 만난 것이다. 金容成 중령의 직속상관은 대공처장 우종일(禹鍾一)대령이다. 이 禹대령은 1983년에는 김병진(金丙鎭)씨가 소속한 과의 과장(중령)으로 있었다. 그러니 禹대령과 金중령은 金丙鎭씨가 폭로에 이은 尹이병의 폭로에 대해 모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보안사가 88년에 나온 「보안사」의 폭로를 교훈으로 삼아 대책을 강구했더라면 적어도 똑 같은 사건의 되풀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안사는 이 책이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데만 힘을 썼지 그 교훈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해의 대학생 생매장 사건도 비슷한 과정에서 일어난 폭로였다. 이 세 사건 폭로자의 공통점은, 보안사가 자신들의 약점을 잡고 프락치나 협조자로 이용하려는 데서 연유한 갈등, 분노, 그리고 복수심이다. 비 인륜적 수사가 가져 온 인과응보인 셈이다.
보안사는 변할 것인가?
김병진(金丙鎭)씨의 「보안사」에서는 김용성(金容成)소령이 「동국대 ROTC출신으로서 성과를 올려 승진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쫓기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그해 1983년은 金소령의 진급심사뿐 아니라 수사과장 우종일(禹鍾一)중령의 대령 진급심사까지 겹쳐 클라스에 대한 독려가 예년에 없이 심한 편이었다」 尹이병이 자료를 갖고 탈영했는데도 金중령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대령진급대상에 해당돼 혼자 해결하려고 한 때문이라고 이상훈(李相薰) 전 장관은 말했었다.
보안사의 관료주의가 수사관들에게 주는 스트레스, 여기에 조작과 은폐의 원인이 있다는 얘기인 것 같다. 尹이병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인 지난 9월 24일 서울지법 남부지원 이석형(李錫炯)판사는 해군보안부대 대위로 재직시 피의자를 고문한 이성만(李成晩)씨에게 구형량 보다 높은 징역 2년을 선고, 법정 구속시켰다. 그러자 李판사에게 전·현직 군수사관을 자칭하는 사람들로부터 협박전화가 하루에도 대 여섯 번 씩 걸려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였었다.
이처럼 尹이병의 폭로라는 대 폭발이 있기 전에 몇 번의 조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보안사의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은, 시민들의 변화하는 인권의식을 따라잡기는커녕 거꾸로 달리고 있는 보안사의 구태의연한 행태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보안사는 바뀔 것인가?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구창회(具昌會) 신임보안사령관도, 이종구(李鍾九) 국방장관도 아니다. 노(盧)대통령만이 보안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보안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盧대통령이 취한 인사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육사14기 출신인 이종구(李鍾九)장관은 하나회 수사실무책임자에 따르면 하나회의 총무격 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보안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거친 경북고 출신이다. 구창회(具昌會) 신임보안사령관은 노태우(盧泰愚) 소장이 12·12사태 때 서울에서 전화로 9사단의 1개 연대를 불러들일 때 그 전화를 받았던 이다.
具장관의 후임으로 수방사령관이 된 金진선 소장은 육사19기로서 12·12사태 그날 밤 수경사 상황실장이었다. 盧소장은 12월13일 새벽에 金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뒤 전화기를 전두환(全斗煥) 소장에게 바꾸어 주어 재차 다짐을 받게 했었다. 金중령은 옛날에 盧장군의 직속 부하였다. 金중령은 다른 장교들과 합세하여 張수사관을 체포하는 「공」을 세웠고 그 뒤 육본 인사참모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이처럼 이번 인사는 盧대통령과 연고가 깊고 충성도가 이미 확인된 장군들을 중용 한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보안사 월권은,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있다는 자만심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그런 장군들까지도 변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적 압력을 넣는 수밖에 없다. 그런 압력은 언론, 국회의 감시와 보안사에 대한 안기부·검찰의 제도적 견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보안사 파동은 그 동안 민군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써온 군인들에게 가장 큰 좌절과 분노를 안겨 준 것 같다. 정치도 사찰도 모르는 그런 군인들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셈이다.
출처:조갑제 홈 페이지 편집(정리):가우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