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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마6:5-15)-2019.10.6
제가 오늘 아주 유치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몇번이나 기도하십니까? 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질문이지요? 그러면 약간 수준을 높여 질문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기도의 양이 얼마나 되냐는 것입니다. 일 질문에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의 사람이십니까? 나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흔쾌히 대답할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당신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필수요, 삶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듣고 많이 하는 주제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들도 많습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기도교’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기도를 강조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을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기도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사는지 모릅니다. 다만 기억할 것은 기도가 단순한 것 같지만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한 것 같으나 복잡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가늠대와 같습니다. 각 사람의 기도는 각 사람의 영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물론 기도의 분량이나 기도의 방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칼빈이 말한 기도의 정의를 새겨 볼만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도자들이 자기들이 설정한 기도의 목표와 조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때로는 읊조리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윽박을 지르기도 합니다. 혹은 협상을 하고 타협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울며불며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토해내며 스트레스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위로를 받고 그것을 기도의 응답인 것처럼 여기고 위안을 삼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소리만 지른 채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기도는 단순한 울부짖음이요, 소음이며, 흐느낌입니다. 믿음과 상관없는 종교행위입니다. 사실 기도는 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의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기도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른바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 속에 나오는 두 가지의 기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기도는 내 뜻대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기도요, 뒤에 나오는 기도는 그 기도를 위한 나의 간구입니다.
사실 죄인인 우리는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영을 부어주셔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어야 합니다. 스바냐서 3장9절은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부정한 입술을 가진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화저로 지저주신 것처럼 말입니다(사6:6). 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입은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도도 우리 이름으로는 할 수 없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신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도의 능력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지요. 이른바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알아보십시다.
(1) 기도의 원리(5-8)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의 핑계도 다양합니다. 대부분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피곤해서 기도할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할 줄 몰라서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못합니다. 기도는 특정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대부분 기도에 대한 오해는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다급함을 아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기도의 원리를 알고 기도하면 부담감이 줄어듭니다. 주님은 기도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은 기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먼저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5절). 그리고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6절). 또한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7절). 뭐라해도 기도의 생명은 진실입니다. 기도를 거짓으로 꾸며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는 솔직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취조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진실해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당연히 진실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여 기도의 흉내를 내는 것이니까요. 그런 자들은 회당과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동네방네 떠들면서 기도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는 진실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미사어귀를 꾸며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기도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6절).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드리는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이른바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 말입니다.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고, 사람의 귀를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만큼 방해받지 아니하고 진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혼자 있을 때 자기의 참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가 나름대로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가 비교적 정직하기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7절). 기도를 장황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백화점 물건을 나열하는 듯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 밝으시고 귀가 밝으십니다. 하나님은 심중에 있는 우리 마음까지 아십니다. 신음소리도 들으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아버지만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 드립니다. 하지만 그분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부르짖는 아버지 속에는 그의 신앙의 인격이 들어 있고, 간절한 소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수다한 말이나 논리적인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애가 울기만 해도 부모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우리 기도가 단순하게 드린다고 해서 무식한 기도가 아닙니다. 대부분 유창한 문장을 많이 사용해야 기도가 세련되고 풍성한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채 주님만 묵상해도 우리의 기도는 심히 깊고 오묘하며 풍성한 기도인 것입니다.
(2) 기도의 목적(9-15)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기도한다고해서 기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만 받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말합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표적인 기도입니다. 그 주기도문은 예배 시에 암송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달라는 청원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모르는 기도를 무슨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주님의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무엇을 해달라는 청구로 시작해서 간구로 끝납니다. 대부분의 기도가 나의 원대로 해달라는 청원형의 기도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적 기도의 대표적인 모델은 요한복음17장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기도의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도인 셈이지요.
각 사람의 기도는 각 사람의 신앙의 인격과 수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소아적인 기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믿음이 성숙한 사람의 기도는 깊고 넓고 높습니다. 오묘하고 신령합니다. 또한 맑고 순수하고 청아합니다. 기도의 구심축이 다릅니다. 성숙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 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퍼져나가고, 간구는 먼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결의 파동이 퍼져나가듯이 회개하고, 간구는 먼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로 돌아오듯이 해야 합니다.
이른바 회개는 나로부터 시작하고, 간구는 당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원칙이 항상 교과서처럼 적용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도할 마음을 주사 나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자세를 말씀드린 것일 뿐입니다. 기도는 절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않는 잡동사니요, 공염불입니다.
(3) 믿음의 기도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기도하려는 계획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른바 기도거리를 찾아서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정코 말씀드리지만 내가 기도하려고 하면 그 기도는 실패합니다. 만일 기도하려면 가장 먼저 나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하루 종일 기도할지라도 주님이 나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5분의 기도보다 못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드리는 하루 종일의 기도보다 주님이 내안에서 기도케 하시는 5분의 기도가 훨씬 더 진지하고 진실하며 풍성하고 은혜로운 기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만 받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십니다(롬8:26-27).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서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르지 못한 기도라 할지라도 성령은 바르게 조정해 주십니다. 이 부분을 스펄전 목사는 ‘내 기도가 바르게 고쳐진 상태로 하늘에 올라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완전한 기도, 온전한 기도로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평생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의 분량이나 기도의 횟수가 솔직히 얼마나 될까요?
비록 우리의 미련한 생각으로 기도할지라도, 우리 인간의 연약한 상태로 기도할지라도, 우리의 낮은 영적수준으로 기도할지라도, 즉 인간적인 수준에서 기도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정화하사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케 하실 줄을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시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8:26-27). 보혜사 성령은 항상 우리 기도를 도우십니다. 비록 우리의 수준에 맞는 기도를 드릴지라도 성령이 우리를 만지시어 우리의 기도를 풍성하게 해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기도하려고 하는 부담감을 떨쳐 버려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께 집중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기도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기도의 분량이 채워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의 기도의 분량이 채워졌다고 생각되면 영적인 포만감을 느끼고 만족스러워 합니다.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만족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의 잡동사니 우편물에 불과하다는 후안 까를로스 목사의 말이 맞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도에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만족 혹은 자기 위안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 자들의 기도는 의무적이고 형식적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이 책망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큰 소리로 자랑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눅18:11).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세리를 보십시오. 그 기도가 주님이 받으시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수반합니다(히11:6). 믿음이 수반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지 않는 기도,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기도, 믿음을 수반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는 주님이 하게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님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의 내용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의 제목과 내용을 직접 짭니다. 심지어 응답의 일정까지 조율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짜여진 각본에 주님이 사인만 해달라고 졸라대는 것입니다. 아무 날 아무 시까지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해 달라고 통보하듯이 말입니다. 그런 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묻는 것을 생략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 동의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은 자기들이 터트리고 책임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저 하나님은 자기 뒤처리만 해달라는 식이지요. 당신이 그 사업장을 열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 보았습니까? 아니면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을 시작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물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일을 벌인 후에 주님께 사후 통보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아무 날 아무 시까지 반드시 해결해 달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베짱이요, 용기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닙니다. 일의 시작도 기도로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죄라’고 말입니다(롬14:23).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라도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싫어하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있음을 아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다윗 왕이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거절하셨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다윗의 손을 들어 성전을 짓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그런 일이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좋아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는 기도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꼬이고 막히면 당황합니다. 때로는 그런 좋은 의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도대체 우리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닐는지요? 일의 시작도 기도요, 진행도 기도며, 마침도 기도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기도는 삶이요,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도 없이 스스로 해보다가 안되면 기도합니다. 즉, 평안할 때보다는 어려울 때 기도합니다. 좋을 때보다는 안 좋을 때 기도합니다. 잘 나갈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하는 일이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지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무조건 형통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속지 마십시오. 형통이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함정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든 일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말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는 자는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만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책임을 져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최고로 복된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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