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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8주)
실재를 보면 달라집니다
출17:1~7; 빌2:12~13; 마21:28~32
여러분,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예배 부름 때 말씀드렸지만, 본래 추석 한가위는 우리민족의 감사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추석을 감사절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감사는커녕, 원망과 불평의 발단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여러분은 어떤 명절을 보냈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명절을 보내는 세태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충 개인이나 작은 가족 단위로 쉬고 충전하는 쪽으로 변해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특히 우리 부모세대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그들이 보냈을 힘든 시간들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그래도 그들보다는 더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리는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언제 그들이 쉽게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었으며, 우리가 접하는 많은 정보와 배움의 기회들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요즘은 그래도 산책하거나 운동하면서 자신을 돌볼 수도 있고, 하다못해 법륜스님의 즉문직설이라도 들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새로운 시선을 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에겐 훨씬 많은 기회들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세대는, 일은 쌔빠지게 하면서도,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막상 자신들을 돌볼 수 있는 기회는 우리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더 행복하게, 더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게 맞습니다. 죄책감 없이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게 맞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세대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요즘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들,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이(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이브리>라고 합니다) “(사막을) 지나가는/통과하는 사람들”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이브리>가 “지나가다, 통과하다”는 의미의 <아바르>에서 왔다면 말입니다. (물론, 다른 설도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막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사막을 통과할 때 사막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고스란히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감추어 두었던 원망과 불평을 끄집어내고, n우리의 약점을 끄집어내고, 우리의 절망을 끄집어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저항하고 반항했던 것은 그들이 유난히 모자라고 못되 먹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보편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프로그램, 계속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아트만 프로젝트”를 보게 하십니다.
사막이 사람들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안에 있는 것을 고스란히 끄집어 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막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지요. 사막의 교부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그래서 진정한 내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사막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막이 안내하는 길을 찾아갔는데, 그 목적지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에 자신들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존엄성을 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막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혹과 시험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은혜와 자유의 장소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사막 여우가 알려주지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오아시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도 재미있는 말놀이가 있는데, “사막” 즉, <미드바르>에는 <다바르> 즉 “말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미드바르>에는 <다바르>가 숨겨져 있다, 사막에는 말씀이 숨겨져 있다, 광야에는 은총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삶이 힘들면 힘든 만큼, 우리가 이리 저리 걸리는 것이 많으면 많은 만큼, 우리는 지금 사막을 통과하고 있는 중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다툼”과 “시험”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지금 사막을 지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막을 지나고 있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지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사막이 유혹과 시험의 장소로만 끝날 건지, 아니면 마침내 은혜와 자유에 이를 건지는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가, 그리고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가나안 복지”를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이집트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토마스 키팅은 말합니다.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십시오!” 안소니 드 멜로의 버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잠을 깨십시오. 여러분은 어른들입니다. 잠들어 있기에는 너무 컸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장난감 놀일랑 이젠 그만 두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7장의 “므리바 사건”은 광야 여정 중에 겪게 된 전형적인 주제입니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모세에게 대들어 다투고(므리바), 주님을 시험하면서(맛사) 불평하는 장면이지요. 그러면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위기를 느꼈던 모양입니다. 민수기20장에 똑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서 백성들은 모세와 다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동족이 주님 앞에서 죽어 넘어졌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소. 어쩌자고 당신들은 주님의 회중을 이 광야로 끌고 와서, 우리와 우리의 가축을 여기서 죽게 하는 거요? 어찌하여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 고약한 곳으로 데리고 왔소? 여기는 씨를 뿌릴 곳도 못 되오.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소.”(민20:3~5)
우리는 이들의 위기와 곤고함도 충분히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위기와 곤고함을 하나의 대상에 초점 모아 모든 원망을 쏟아 붓는 일도 똑같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원망과 불평을 한 대상에 쏟아 붓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것이 하나의 의식으로 의례화 한 경우도 있습니다. 레위기16장에 보면, 아사셀 염소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염소 하나를 취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다 덮어씌운 후에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속죄를 받은 거지요.
외부에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수없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북쪽 사람들은 모두 뿔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 우리가 얼마나 세뇌 당했습니까? 이런 말만 해도 괴뢰정권 고무찬양죄로 바로 잡혀들어갔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투사는 우리 안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꼭 보아야 할 지점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가치들에 세뇌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하고 그 속임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세상에서 주입한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독소 조항들은 없는지 세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원망과 불평을, 나의 불편함을, 나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애꿎은 세상에 던지고 있지 않은지? 이럴 때 우리는 실재를 보지 못합니다. 자신은 아주 예리하고 날카롭게 현실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동굴의 시야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해서 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저도 전에 이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저의 불편함을, 그림자를 많이 덮어씌우곤 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원망과 불평을, 나의 불편함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소위 잘나가는 남들을 비판하기도 쉽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쌓아놓고, 겉으로는 대단히 정의로운 척 해도, 자신 안에 돌아가는 이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사실 우리는 그저 프로그램대로 돌아가는 기계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다툼”과 동시에 주님을 시험하는 일(<맛사>)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원망과 불평, 그리고 다툼(그림자 던지기)이, 실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나는 괜찮은가? 나는 안전한가, 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있는가, 나는 힘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막 가운데서 우리 안에 돌아가는 무의식적인 프로그램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버석버석한 바위틈에서 생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십니다. 바위틈에서 흐르고 있는 물을 보게 하십니다. 아무리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더라도, 아무리 불같은 광야를 걷고 있더라도, 바위틈에서 흐르고 있는 샘물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목을 축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사막 가운데 흐르고 있는 샘물을 보십시오. 물이 날 것 같지 않은 바위틈에 샘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적 프로그램만 살피려다 보면, 또 다른 다툼과 시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방이 아니라,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위틈에서 흐르는 생수는 우리를 살리는 근원적인 처방입니다.
오늘 복음서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렴.”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이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는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해 놓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논쟁하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입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맏아들입니다.” 너무 쉬운 질문이지요?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첫째 아들이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아들은 처음 대답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은 처음 대답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이지요.
첫째 아들은 모르는 것 같았으나 결국은 진짜 알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는 것 같았으나 진짜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사람은 맏아들이라고 쉽게 대답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믿지도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알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진짜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셨습니다.
여러분, 겉으로 번지르하게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겉으로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을 다 말해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키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진짜 깨어나는 것입니다. 진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왜곡된 생각으로, 자신의 좁은 시야로 본 것이 전부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쉽사리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돌아가는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돌아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소위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거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 다 탕진하고는 돼지치기로 전락을 해 버린 작은 아들이 나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배불리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비유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눅15:17)
저는 여기서 “제정신이 들었다”는 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전에 보던 눈으로 보지 않고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이 돼지우리에 처박혀 굶어 죽어가고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저는 이 말이 자신을 탓하거나 반성하거나 현실을 분석하는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말은 새로운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실상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는 말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지요. 실재를 보면 달라집니다. 자기 얼굴에 숯덩이가 뭍은 것을 보았다면, 어떻게 할까요? 가서 세수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았으니, 그 다음의 행동은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그는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눅15:20)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고 자신이 돼지우리에 처박혀 있는 것을 알았는데, 돼지우리에 더 이상 질척거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책하면서, 뭐가 잘못된 걸까 분석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보고, 알았는데요. 이것이 진정한 회심입니다.
누가복음의 탕자에게 일어난 일처럼,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 비유에서, 첫째 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을 보았던 것이지요. 실재를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둘째 아들은 실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진정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들 안에 돌아가는 프로그램과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지금 우리는 바위틈에서 흐르고 있는 생수를 보고 있을까요? 마시고 있을까요? 아버지 집에 있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외면하는 고집 센 사람들인지, 우리가 어디에 주저앉아 일어나 걸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원망과 불평과 다툼으로 삶을 허비하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그림자를 남들에게 돌리고 남들에게서 그것을 보면서 지적질하고 있는지. 동시에 우리의 마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 있는 풍요로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자칫하면 우리의 프로그램을 자책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하신 말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다 안다고 넘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앎이, 여러분의 지식이 여러분을 속이지 않게 하십시오. 실재를 보아야 달라집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고 돌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