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강세황, ‘벽오청서도’, 종이에 연한 색, 30.5×35.8cm, 개인 소장. |
“이 사람의 원대한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만한 것이 아니다.”
도안의 볼품없는 외모에 대중들은 경멸하고 무시 놀라운 불법 경지 펼치며 마침내 세상에 명성 떨쳐
심주의 그림 참고했지만 독창적 작품 만든 강세황 아류 취급받지 않은 이유
불도징(佛圖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대중들은 불만스러웠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불도징이 누구인가. 서역인으로 전법의 뜻을 품고 79세에 낙양으로 오신 분이 아닌가. 불법홍포를 위한 그의 열정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나라의 신인(神人)’으로 불릴 만큼 신통력이 뛰어났다. 신비한 주문에도 통달했고 귀신도 부릴 수 있었다. 그가 불법홍포에 신통력을 발휘한 것은 문화가 낮은 호족들의 교화에 큰 효과가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난폭한 군주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를 불교에 귀의하게 해 많은 백성들을 폭정에서 구했다. 그는 죽은 석호의 아들을 살려 초파일 때마다 관불행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보듯 훤히 알아 사람들은 ‘스님께서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감히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의 노력으로 중국인의 출가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만 거의 1만 명이였다. 그가 세운 전국의 사찰이 893곳이었다.
그런 분이 도안(道安,312~385)을 가리켜 다른 사람과 비교할 만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대중들은 스승님이 왜 저렇게 형편없는 도안을 감싸고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도징이 도안을 칭송하며 아끼는 것에 반해 대중들은 그를 경멸했다. 정신과 지혜가 뛰어난지는 알 수 없으나 생긴 것이 이상하고 몰골이 누추했다. 그런 도안을 스승은 강론할 때마다 곁에 두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강의를 되풀이하게 했다. 도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중들은 이렇게 소곤거렸다.
“다음에 어려운 질문으로 저 새까맣고 형편없는 인간을 죽여 버립시다.”
드디어 불도징의 강의가 끝났다. 도안이 복강(覆講)을 위해 강단에 올랐다. 이곳저곳에서 도안을 골탕 먹이기 위한 어려운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도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무리 칼날처럼 예리한 질문을 던져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는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진리의 세계를 펼쳤다. 그가 펼쳐낸 불법(佛法)의 세계는 한 두 해 공부해서 얻은 경지가 아니었다. 일곱 살에 책을 읽은 후 책의 내용을 두 번 보면 외울 정도로 총명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사촌형의 손에서 자란 도안은 열두 살에 출가했다. 출가한 후에는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스승에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스승이 아침에 준 경전을 저녁이면 다 외우자 마침내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여러 고을을 유행하며 경전과 계율의 대가들을 만나 도에 대해 묻고 공부했다. 특히 업도(鄴都)에서 만난 불도징은 그의 사람됨을 알아봤다. 하루 종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감탄하고 칭송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도안의 능력을 인정한 대중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굴이 새까만 도안이 사방 이웃을 놀라게 한다.”
도안은 존경하는 스승 불도징이 입적한 후 전란을 피해 태행산맥의 호택(濩澤)과 비룡산에서 살았다. 그는 특히 후한(後漢)의 안세고(安世高)를 존경했다. 안세고는 안식국의 태자였는데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한 후 전법을 위해 중국으로 왔다. 안세고는 낙양에서 경전번역에 주력하고 선정을 실천했다. 도안은 안세고가 번역한 ‘음지입경(陰持入經)’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십이문경(十二門經)’ ‘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 등에 주석을 달거나 서문을 썼다. 도안에 의해 비로소 격의불교(格義佛敎)시대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경전 이해와 규범을 바탕으로 한 중국 불교가 시작되었다. 격의불교는 경전을 번역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노장(老莊)사상을 빌려 불교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산중에서 축법아(竺法雅), 축법태(竺法汰), 강법랑(康法朗) 등과 함께 포교에 힘썼다. 도안이 40대에 접어들어 항산(恒山)으로 이주하였을 때 혜원(慧遠)과 혜지(慧持) 형제가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그는 50대에 400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양양(襄陽)으로 옮겨 백마사에서 경전 연구와 번역 사업을 계속했다. 그의 문하로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자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졌다. 나중에 단계사(檀溪寺)를 창건하여 48종의 주해서를 펴냈다.
도안은 불교뿐만 아니라 노장과 음양, 산수 등에도 능통해 명문자제들이 그에게 와서 배웠다.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사대부와 관료들이 많았다. 그 중에 습착치(習鑿齒)라는 사대부가 있었다. 그는 도안을 만나 자신을 ‘사해(四海)에 유명한 습착치’라고 소개했다. 사해는 사방의 바다이니 온 천하, 세계를 뜻한다. 자신은 온 세상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이니 세상에서 제일이란 뜻이다. 그러자 도안이 자신을 ‘하늘(彌天)에까지 이름을 떨친 석도안’이라고 응수했다. 불교가 유학보다 뛰어남을 드러낸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공적은 경전 연구와 계율의 제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승려들의 성씨를 석씨(釋氏)로 통일한 것도 도안에 의해서였다. 당시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서역 승려들은 자신의 출신 지역에 따라 강씨, 안씨, 지씨 등의 성을 썼고 중국의 승려들은 스승의 성을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도안은 출가 사문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이므로 석씨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제안했다. 이후 모든 승려들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법명 앞에 석씨를 붙이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고승전(高僧傳)’에 도안에 대한 자료가 도안(道安) 대신 석도안(釋道安)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온 지 300여년 만에 불교는 외래 종교가 아닌 중국의 종교로 뿌리내렸다.
| | | ▲ 심주, ‘개자원화보’. |
중국 명청(明淸)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화보(畵譜)가 출판되었다. 그 화보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많은 선비들과 직업화가들은 화보를 보며 필법을 익혔고 간접적으로나마 명작과 조우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활동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대표작인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는 화보를 보고 그린(倣) 작품이다.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선비가 벽오동나무 아래 들어선 초옥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선비는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 동자를 무심하게 쳐다본다. 그늘을 드리운 벽오동과 뒤란의 파초 그리고 먼 산에 가해진 푸르스름한 담청에서 한여름의 싱그러움이 뚝뚝 떨어진다. 생명의 계절이 맹렬한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만상이 내적인 충만에 젖어 고요 속에 잠겼다. 지나가던 바람조차 숨을 죽인다. 한낮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은 오직 빗자루로 마당 쓰는 소리뿐이다. 강세황은 18세기를 대표하는 남종문인화가(南宗文人畵家)답게 여름날에 만날 수 있는 선비의 일상을 담백하게 우려내었다. 그림 상단에는 ‘심석전(心石田)의 벽오청서를 보고 그렸다’고 적었다. 석전은 명나라 때 활동한 문인화가 심주(沈周,1427~1509)다. 강세황은 이 그림을 심주의 진품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에 실린 흑백 그림을 참고했다. 벽오청서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종종 그려진 주제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이유신(李維新)의 ‘벽오청서도’가 간송미술관에 전한다.
그런데 강세황이 심주의 ‘벽오청서도’를 보고 따라 그렸는데도 심주의 아류로 취급받지 않는 비결은 여기에 자신의 해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강세황은 심주의 원판에 자신의 해석을 넣어 독창적인 ‘강세황 버전’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도안이 기존의 경전해석에 자신만의 주석을 넣은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한편 전진(前秦)왕 부견(苻堅)은 379년에 도안이 사는 양양을 공격하여 수중에 넣는다. 부견은 평소에 도안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를 자신의 측근에 두고자 양양을 공격한 후 장안으로 돌아왔다. 부견은 도안을 만난 후 얼마나 기뻤던지 그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짐이 10만 대군으로 양양을 공격한 것은 오직 한 사람 반을 얻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한 사람은 도안이요, 반 사람은 습착치였다. 부견은 도안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언제나 천자의 수레에 동승하게 했다. 이에 출가승이 천자의 수레에 동승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신하의 간언이 들렸다. 이에 발끈한 부견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안 스님의 도와 덕은 존경할만하여 나는 천하와도 바꾸지 않겠다. 가마를 함께 타는 영예 정도로는 그의 덕에 맞지 않다.”
도안은 부견의 후원을 받으며 장안의 오중사(五重寺)에서 주석하며 불법홍포에 진력했다. 도안이 중국불교사에 남긴 업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경전 번역에 심혈을 기울여 장안에 온 서역 승려의 역경에 참여했다. 또한 여러 경전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주석을 달았을 뿐만 아니라 경전에 대한 서문도 많이 지었다. 당시까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던 번역경전의 목록을 작성하고 체계를 세웠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분류한 사람도 도안이었다. 더불어 ‘승니규범(僧尼規範)’을 제정해 계율과 불교 의례를 정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라 하겠다. 중국 불교의 기초를 확립한 도안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미륵상 앞에서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서원했는데 385년에 세납 72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사상은 여산의 혜원이 계승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