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연정사 가는 길
이종수
1. 하회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 마을에서 작은 강을 건너면, 그 가파른 언덕 위에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다. 강 건너편에서 소리 높여 부른다면 너끈히 들릴 만한 정도의 거리다. 그러니까 마을과 그리 동떨어진 공간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이상하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격절감. 옥연정사 마당에 들어서고 나면 얼마 되지도 않을 강줄기, 그 너머의 마을이 제법 아련하기만 하다. 애초 이 집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 의도된 고요함, 그것이었을 테니. 집 주인의 소망 그대로였다. 옥연정사는 그 주인이 머물던 시절엔 나룻배로나 마을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주인은 직접 기문記文을 지어, 애써 이 자리를 택해 집을 짓고자 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북쪽 못을 건너서 돌벼랑 동쪽에 특이한 터를 얻었다. 그 자리는 앞에는 호수의 풍광을 안고 뒤로는 높은 언덕을 업었으며 오른쪽은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은 흰 모래가 띠를 두른 듯한 곳이다.... 그 자리가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앞에는 깊은 못이 막혀 있어 사람이 오고자 해도 배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 강기슭에 매어 두면 객이 와서 모래밭에 앉아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응답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이 들어앉아 사는 일에 일조가 된다....
병술년丙戌年 늦여름, 주인 서애거사西厓居士는 적는다. -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
서애거사, 바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세상을 피해 조용히 들어앉기 위해 지은 집인 것이다. 병술년이라면 1586년, 류성룡이 마흔 다섯 되던 해다. 그는 과연 자신의 소망대로 이 집에서 시름을 잊으며 풍광을 즐기는,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자신만의 그윽한 공간에서 소박하지만 충만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주인의 마음에는 좋았겠으나, 후대의 누군가가 옥연정사 작은 마당을 이처럼 남다른 마음으로 거닐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애써 이곳까지 찾아 내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옥연정사(玉淵精舍)
2. 어찌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잦던 안동 답사 길에 어째서 유독 옥연정사만 빠져버렸는지. 안동은 물론 그 주변까지 아울러, 이 유서 깊은 지역의 종가와 서원, 그리고 옛 절들까지. 제법 숨겨진 곳곳을 느끼며 걷고, 다시 걷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류성룡의 흔적들이 남겨진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 또한 여러 차례 오갔었는데.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류성룡이 마음 깊이 그리워했을 이 옥연정사로 발길을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아직, 류성룡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내가 류성룡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의 좀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미술사 쪽에서 보자면 류성룡은 언급할 대목이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는 사람이다. 그 자신 그림을 즐긴 문인화가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어느 그림의 주인공으로 남아 았지도 않다. 미술사가들이 깊은 눈길로 들여다볼 인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의 연보 한 대목이 그를 들여다보고픈 인물로 불러오기 시작했다. 임진년의 전쟁이 끝나고도 여러 해가 지난 1604년의 어느 가을 날. 무심한 듯, 마냥 무심하지는 않은 한 구절.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畵師를 보내와서 선생의 초상肖像 그리기를 요청하였으나, 선생은 방금 훈적勳籍을 사퇴했다는 것으로써 사절하여 보냈다.
- <서애선생연보西厓先生年譜> 1604년 9월.
공신功臣 초상을 그리기 위해 서울에서 안동까지 내려 보낸 화사를 그냥 돌려보냈다는 기록이다. 이유인즉 그 자신, 공신 책봉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으니 초상화 또한 남길 수 없겠노라고. 미술사 입장에서는 살짝 아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림 하나를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하지만 내가 류성룡이라는 인물을 좀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 건 바로 이 장면으로 인해서였다. 그림을 남겨서가 아니라 그림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기록 때문에 말이다.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초상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그 인물에 대해 궁금해졌으니. 초상화를 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 같은 건 벌써 잊었다. 우리 미술사에 초상화 하나쯤 더 있고 없음이 그리 큰 문제도 아닌 바에야.
공신도 싫다, 초상화도 싫다, 다시 서울의 임금 곁으로 돌아가기도 싫다... 사실 좀 독특한 발언 아닌가. 물론 낙향하여 자연 속에 살고 싶다, 는 사대부들의 노래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임을, 우리 또한 대략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사실, 왕조 시대에 임금의 부름을 진심으로 거절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물러나 있던 전직 관료들의 꿈은 서울, 임금 곁으로의 복귀임을. 그 자신들만큼이나 우리 또한 모르지 않는다. 이런 배경을 얹어 읽는다면 정말 그렇다. 초상화까지 남기지 못하겠다는 이 사람, 평범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리고 류성룡이 화사를 돌려보낸 그 때, 1604년 가을은 류성룡이 <징비록懲毖錄> 집필을 막 끝냈을 무렵이다. 그것도 바로 이 옥연정사에서.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 132호
3. 옥연정사를 처음 만나던 날, 어라?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회 마을 그 당당한 집들과는 분위기조차 겹치지 않았으니. 작은 집이라 알고는 있었으나 예상보다도 더 조촐한, 낮은 색조의 집. 집이 그 주인의 취향을, 지향을 닮는 것일진대. 류성룡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그는 좀 까칠한 사람일 것 같다. 살짝 결벽증도 있었을 게다. 단아하고 조용하며 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기록도, 의례적인 미화가 아닌 사실 그대로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은, 함부로 큰 소리 따위를 내는 자신을 참기 어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어지간한 상황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도량이 넓었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봐주고 넘어가지 못하는 품성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도 같다. 그가 남긴 시를 읽으면서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유독 꽃을 완상하는, 혹은 그리워하는 작품이 많다. 그처럼 힘든 시절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음풍농월 속에서도 꽤 근사하게 살아갔을 성정이다.
이런 사람이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게다가 하필, 그 전쟁을 안팎으로 책임져야 할 이름이라니. 영의정에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해야 했다. 정치와 전쟁의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할 자리다. 저런 유약한 이에게 어찌, 하며 미심쩍어하는 눈길들도 있었지만. 흔들어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 전쟁을 묵묵히 치러내었다. 공로 뒤편의 과실이 어찌 없을까마는. 적어도 그 힘든 자리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적어도 해야 할 일을, 그 전쟁을 견뎌내야 하는 일을 외면하는 불성실한 날들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교지(敎旨)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책임진 자의 책임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 전쟁이 끝난 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들어앉은 곳이 바로 조용히 말년을 누리고자 했던 집, 옥연정사다.
이에 내가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겨 조그만 집을 지어서 늙도록 조용히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자 하나, 다만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마침 산승山僧 탄홍誕弘이란 자가 그 건축을 주관하고 속백粟帛으로 물자를 대겠다고 자천하였다. 일을 시작한 병자년(1576, 선조9)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1586, 선조19)에 겨우 완성되어 깃들고 쉴 만하게 되었다. - <옥연서당기>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책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그의 뜻은 이루어졌으나. 전쟁을 치르고 그 이후에 파직까지 당하게 되는 말년이라니. 적어도 마흔 다섯, 집을 완성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문을 짓던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이 결말을 류성룡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신의 고요한 거처에서 고요히 자연과 학문을 누리며 살아갔을까.
그렇게 느닷없이 돌아온 이곳에서 그가 한 일은, 절대로 돌아보고 싶지 않았을 전쟁을 돌아본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자세하게. 틀어박힌 채 꼭 해야만 했던 일이 이 참혹한 전쟁의 기록, 징비록을 남기는 것이었다면.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그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옥연정사는 그에게 즐거운 고독으로 남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의미 있는 집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작은 집에 앉아, 징비록을 써내려갔을 그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그 길었던 7년의 전쟁을 다시 홀로 겪어야했을 한 남자의 마음을 따라가 보았다. 그 마음을 한 권의 책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평전評傳이라면 어떨까, 류성룡 평전. 당연히 첫 장은 이곳, 옥연정사에서 시작하면서.
옥연정사 가던 길. 징비하라, 깊게 고민하던 류성룡의 마음에 다가가는 길. 옥연정사는 그런 공간이다. 징비하라고,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이 작은 마당에 앉아 피고 지는 꽃 속에, 오고가는 계절쯤은 누려보라고. 그가 남겨준 공간이다. 이런 공간 하나쯤.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집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 싶다.
작가소개
- 이종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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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를 강의하며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으며, 역사 속 인물의 내적 고뇌와 미학적 승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림문답>, <그림에 기댄 화畵요일>, <이야기 그림 이야기>, <벽화로 꿈꾸다> 등을 비롯해 <류성룡 7년의 전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