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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천이씨 후손들이여! 원문보기 글쓴이: 溪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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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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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論 1. 硏究 目的 및 方法 2. 硏究史 槪觀 Ⅱ. 聾巖의 生涯와 創作背景 Ⅲ. 自然觀의 文學的 具現 1. 官職生活과 自然 (1) 現實의 不條理에 대한 憂慮 |
(2) 自然 回歸에 대한 慾望 2. 自然觀의 具現樣相 (1) 膏肓과 心性修養 (2) 自然美와 興 (3) 眞樂과 塵外之意 Ⅳ. 文學史的 意義 Ⅴ. 結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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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論
1. 硏究 目的 및 方法
농암에 ‘自然觀’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대부분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어부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聾巖의 自然觀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은 미진하였다고 하겠다. 이에 本考에서는 농암의 自然觀에 대한 硏究를 그의 生涯1)와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농암에게서는 生活空間이 변화됨에 따라서 自然觀도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변화양상을 고찰해 보기 위해서 聾巖集에 실려 있는 漢詩와 國文詩歌를 중심으로 하겠다.
그의 作品들을 분석해 봄으로써 官職生活時와 退宦時에 따라 농암의 自然觀이 어떻게 달리 표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이렇게 표출된 自然觀을 조선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함으로써 농암만의 특색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농암의 자연관이 지니는 의미를 밝혀보겠다.
2. 硏究史 槪觀
악장가사 소재본의 <어부가>를 개작한 聾巖 李賢輔(1467~1555)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詩文學에 있어서 농암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윤제2)로부터였다. 조윤제는 자연미의 발견이라는 의미로 ‘江湖歌道’를 사용하면서 “근대 문학에 있어 농암과 면앙정은 가히 참된 자연미의 발견자요, 江湖歌道을 창도한 이라고 볼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江湖歌道’의 형성의 원인으로 ‘黨爭下의 明哲保身’과 ‘致仕客의 閑適’을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연구는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농암에 대한 연구는 ‘江湖歌道’와 ‘政治現實’을 관련지어 밝힌 연구, <어부가>를 중심으로 음악적인 면과 작품론적인 연구, 농암에 대한 작가론적 입장에서 접근한 연구, 그리고 종합적인 고찰을 시도한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자연관을 중심으로 조윤제의 이론을 심화 발전시킨 최진원3)은 <江湖歌道硏究>에서 귀거래를 ‘黨爭下의 明哲保身’으로 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土地私有制度’와 ‘淸風高趣’하는 觀念的 풍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연구는 조선시대 자연관의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농암이 귀거래한 주된 원인은 ‘黨爭下의 明哲保身’이라기보다 ‘致仕客의 閑適’이었다. 김흥규4)는 <江湖自然과 政治現實>에서 15C와 16C 사대부들의 자연 인식에 대한 차이점을 孟思誠과 농암을 대비시켜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김흥규는 ‘江湖歌道’ 내에서의 정치적 위상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식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김흥규의 견해와 정반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이동영5)은 영남학파의 전반적인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농암의 귀거래에 대한 원인을 ‘致仕客의 閑適’으로 보고 있다. 농암의 귀거래에 대해 중도적 입장을 제시한 김종렬6)은 <江湖歌道의 槪念 定立과 嶺南江湖歌道 硏究>에서 ‘江湖歌道’의 개념을 定立하고, ‘嶺南學派’에 대한 종합적 고찰 속에서 농암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김종렬은 농암의 귀거래에 대한 의미를 現實的인 면과 理念的인 면의 두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現實的으로는 悠悠自適한 致仕客의 人間之樂과 林泉之樂을 나타내고, 理念的으로는 정치에서 도를 실현한다는 儒家的 理想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東洋的 自然主義가 참다운 삶의 가치일 수 있음을 標榜”한 것이다.
어부가를 음악적인 측면에서 최초로 제시한 논문으로는 이우성7)의 <高麗末․李朝初의 漁父歌>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이우성은 ‘原漁父歌’를 고려 후기 新人官人層에 의하여 성립된 ‘處士的 文學’의 세계라 규정지었다. 그리고 ‘漁父歌’의 작자로 고려 말기의 ‘孔俯’를 제시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중요한 점은 <原漁父歌>가 농암의 <어부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음악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어부가>는 長․短歌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부가>가 장가와 단가로 분화된 이유를 唱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어부장가>는 唱으로 부를 수 없는데, <어부단가>는 唱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를 이어받은 최동원8)은 <어부가>를 音樂的인 성격과 文學的인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 중에서 <어부단가>는 시조 형식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葉而唱之”의 해석을 통하여 <어부단가>는 <어부장가>의 葉으로 唱되었다고 보았다. <어부가>의 史的 展開 과정에 있어서 <어부장가>는 孤山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조흥구의 사용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배를 붙이는 순서에 맞게 재구성된 것이라고 보았다. 조규익9)은 <聾巖 李賢輔의 歌曲>에서 어부가의 음악성을 중시하였다. 농암의 문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爲葉而唱之”라고 하는 구절을 중시하였다. 여기에서 葉의 의미를 최동원의 해석과는 달리 慢大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어부장가>와 악장가사 소재본의 <어부가>의 형태가 현토 부분만 약간 다를 뿐,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현토는 음악적인 이유로 변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 속가의 일반적인 성향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던 <어부가>를 眞勺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연구의 의의는 노래로 불려졌던 고려시대의 문학과 조선시대의 문학과의 연결 고리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한편 <어부가>를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분석하였다. 그럼으로서 <어부장가>에서 중간 여음은 행선에 관련된 행위를 묘사하고 있으며, 내용은 동작 혹은 시간의 순차에 따라 짜여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부단가>는 순차적 배열이 아니라 병렬과 대칭의 유기적 구조 아래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시작된 <어부가>의 연구는 80년대 들어오면서 다양화되었다. 그 중 하나는 <어부가>의 전승과정을 밝히려는 윤영옥10)의 <漁父歌 硏究>이다. 이 연구에서 악장가사의 <어부가>, 농암의 <어부가>, 경산의 <속어부가>, 병와의 <창부사>를 살펴보고, 이를 연구하여 고려시대의 <어부가>가 조선말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 논문에서 이형상의 <창부사>는 연장체이며, 후렴구가 있는 노래이기 때문에 <어부가 계열>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용면에 있어서 <어부가 계열>의 작품들과는 명백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부가>의 미의식을 규명하려고 한 이민홍11)은 <士林派文學硏究>에서 강호시가의 작가를 ‘사림파’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문학관의 차이에서부터 미의식 양상의 변별성을 밝히려 했으나, 구체적인 변별성은 아직 미진한 채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부가를 구조론적 입장에서 접근한 여기현12)은 악장가사 소재본 <어부가>와 농암의 <어부장가>를 비교, 분석하여 농암의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와 세계관, 미의식 등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어부장가>는 “不倫重疊의 지양에서 詩意의 集約化가 이루어졌으며, 素材와 心象이 구체화된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후렴구에 있어서도 율격이나 行舟過程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主文의 詞와 밀접한 관련속에서 다음 行의 詩想을 유도하며 章과 다음 章을 이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송정숙13)은 한가지 접근방법으로는 <어부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외재적 접근 방법으로 ‘개찬 배경’을, 내재적 연구 방법으로 ‘율격과 심상의 분석’을 시도를 하였다. 그 결과 <어부가>는 “在野에 있던 士林이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을 정계에 확대해 가고 있던 시기에, 농암과 退溪 그리고 황중거의 공통적인 관심속에서, 그들의 세계관과 일치되는 어부가를 개찬하였다.”고 보았다. <어부가>가 중국의 시를 集句했다는 사실과 7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七言絶句, 七言古詩, 詞와의 관계를 비교 연구하였다. 그래서 “그 平仄과 押韻이 絶句와 일치하지 않고, 通韻이나 換韻이 되지 않아 古詩도 아니며, ‘漁父歌’라는 제목이 ‘漁父’라는 詞牌의 명칭과 일치하고, 12연으로 된 연장체이며, 平聲韻으로 일관하고 있어 詞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부가>의 심상을 통하여 화자의 의식이 表面的으로는 ‘세속에서부터의 이탈’로 나타나지만, 深層的으로는 ‘세속의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연구에서 <어부가>의 율격을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어부가는 7言詩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한시들을 集構하였기 때문이다.
농암의 생애를 연구하여 작품을 이해하려는 연구가 있다. 이동영14)은 농암의 시가에 나타난 자연은 ‘致仕閑居하는 生活’ 중의 ‘自然之樂’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원주15)는 이현보의 생애와 사상을 고찰하면서 농암의 風流生活 裏面에 도사리고 있는 근심, 걱정에 대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江湖之樂’에 대비될 수 있는 ‘江湖之憂’를 농암의 의식 세계로 결론짓고 있다. 농암의 자연에서의 생활을 살펴보면 현실에 대한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농암에게는 ‘自然之樂’과 ‘自然之憂’가 공존하고 있다고 본다. 정재호16)는 <李賢輔論>에서 농암의 생애, 작품소개, 詩歌史的 意義 등을 짧은 지면 속에 실었다. 이 속에서 어부가의 화자인 ‘雪鬢漁翁’을 농암과 동일시하여 “어부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총결산”이라 하였다. 김동준17)은 농암을 ‘官吏’라기보다는 ‘詩人’이요, 영남사림파의 이념이나 기질을 詩歌로 승화시킨 방외형적 인물로 江湖之樂을 先唱하여 자연미를 발견한 자연주의 문학을 펼친 인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문헌들을 통해 고증함으로서 농암의 작품들을 확정지었다는 사실은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이병휴18)는 16세기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농암의 일생을 관련지어 논의하고 있다. 농암의 관직에서 보여준 특징이 중앙 관직의 在職機會가 지방 관직보다 적었고,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럼으로써 농암은 “개인적으로는 明哲保身하여 복을 누렸지만, 현실 대응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품 외적인 부분에 치중하여 연구하였기 때문에 문학적으로는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성원19)은 농암과 退溪의 만남에서부터 죽음으로 이별할 때까지의 문학적 여정을 ‘영지정사’에서 ‘임강사’까지의 장소의 이동에 따라 구분지어 살펴보고 있다. 이 연구에서 농암과 退溪의 交遊樣相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농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최근에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서 이상국20)과 반기환21)은 국문시가에 집중되어 있던 연구에 한시를 포함시켜 논의함으로써 농암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제까지 농암의 문학에 대한 연구 성과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연관을 중심으로 한 연구로 농암이 귀거래하게 된 배경을 ‘黨爭下의 明哲保身’, ‘致仕客의 閑適’ 으로 보았고, 귀거래를 가능케 한 요인으로는 ‘土地私有制度’, ‘淸風高趣’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농암이 政治現實과 自然중에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 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둘째로 <어부가>를 중심으로 한 연구에서 <어부가>는 ‘唱’으로 불렸는가, ‘詠’으로 읊었는가 하는 음악적인 면과 <어부가>의 전승 과정, 미의식, 개찬배경과 율격 그리고 심상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셋째로 작가론적 연구는 농암의 의식 세계에 집중되었다. 농암의 의식이 ‘江湖之樂인가’, ‘江湖之憂인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농암의 정치적 위상을 고찰하고, 농암과 退溪의 교류양상을 고찰하는 등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넷째로 농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있었다.
이러한 농암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대부분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어부가>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그의 ‘自然觀’을 다루더라도 조선시대의 자연관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부분만이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암의 자연관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은 미진하다고 하겠다. 이에 本考에서는 농암의 自然觀을 生涯와 관련지어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聾巖의 生涯와 創作背景
문학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회의 반영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이 시대나 사회의 여건과 상황 속에서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들이 작가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반영되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다를 뿐, 작품의 基底에 시대와 사회가 작용하는 힘은 실로 중대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대나 사회의 일체 상황과 여건을 흡수하고 소화하는 주체는 역시 작가라 할 때, 문학작품의 귀착점은 작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농암의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그의 生涯일 수밖에 없다.
李賢輔는 세조 13년(1467) 7월 29일 해시에 安東 禮安 汾川里에서 태어났다. 字는 斐仲, 號는 聾巖이고 本貫은 永川이다. 永川李氏는 조선초기 永川에서 禮安縣 汾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대표적인 士林家門으로 발전하였다.22) 永川李氏에서 분파되어 나온 농암의 가계는 永川人 平章事 文漢을 始祖로 하고, 5世를 지나 益陽君 克仁이 있었다. 그러나 世代가 멀어 永陽君 大榮을 1世로 잡는다. 그로부터 6世인 軒은 봉선대부로 군기사 소윤을 지냈으며, 그가 바로 聾巖의 高祖다. 軒은 汾川의 水石을 사랑하여 安東 禮安 汾川里에 옮겨 살았다. 그때부터 禮安사람이 되었다. 曾祖인 坡는 조산대부로 의흥현감을 지냈으며, 祖인 孝孫은 宣敎郞으로 通禮門奉禮였다.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중직된 李欽과 호군이었던 권겸의 女 사이에서 聾巖이 태어났다. 공의 부인은 安東 權氏이니, 忠順衛 孝誠의 딸이다. 6男 1女를 낳았으니 장남 碩樑은 訓練院正 임찬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요절하였다. 차남 文樑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를 못해 蔭士로 벼슬에 나갔다. 3남 希樑은 奉化縣監이 되었고, 4남 仲樑은 甲午년 문과에 급제하여 安東府使가 되었다. 5남 系樑은 義興縣監이 되었고, 6남 叔樑은 進士가 되었다. 딸은 해주판관 金富仁과 결혼하였다. 서자는 둘이 있었는데 潤樑과 衍樑이다. 蔭士로 나간 차남 文樑는 충순위 이승손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학수요, 딸이 세명있어 黃俊良, 琴應洗, 金箕報와 각각 결혼하였다. 이러한 농암의 가계23)를 도표로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軍器寺少尹 軒 ― 義興縣監 坡 ― 通禮門奉禮 孝孫
― 麟蹄縣監 欽 李賢輔 碩樑
文樑
權 氏 安東權氏 希樑
이현우 仲樑
季樑
叔樑
女 ─金富仁
潤樑
衍樑
이러한 가계에서 태어난 聾巖 李賢輔24)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세조 13년(1467)부터 연산군 3년(1497)까지의 成長修學期, 연산군 4년(1498)부터 중종 37년 (1542)까지의 出仕官僚期, 중종 38년(1543)부터 명종 10년(1555)까지의 致仕退休期이다. 그러나 이것을 생활 공간에 따라 분류하면 ‘官職에서의 生活(1498~1542)’과 ‘自然에서의 生活(1467~1497, 1543~1555)’로 兩分된다.
농암은 어릴 때부터 才智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으며 성품이 호탕하였다.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全力하지 않다가 19세에 鄕校에 들어가면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보면 농암의 어린 시절은 공부에 대한 관심보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암은 32세의 늦은 나이로 官試에 뽑혀 33歲되던 1498년(연산군 4년)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이듬해 농암은 벼슬아치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을 <笏賦>25)에서 밝히고 있다.
司諫院 正言으로 있던 38세(1504년; 연산군 10년) 때 농암은 甲子士禍의 여파로 일생중 가장 어려운 곤경을 맞는다. 書筵官 大司憲 洪自阿의 세자진강의 잘못을 直言하여 안동의 安奇驛으로 유배를 간 것이다. 年譜에 의하면 농암은 春秋館 記事官으로 甲子士禍 당시 三相의 직간이 時病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그 언사가 절실하다고 直書하였는데, 이 史草로 인하여 연산군의 노여움을 산 것이 바로 安奇驛으로 유배를 당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 해 12월 농암은 다시 禁府로 압송된다. 농암이 春秋館 記事官으로 경연시 임금의 언동과 대간의 啓請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기 위해 자리를 탑전 가까이 옮겨 달라는 啓請을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그 일을 기억하고 다시 禁府로 압송의 명을 내린 것이다. 옥에 갇혀 있기를 무려 70여일이 넘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석방자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농암의 바로 위에 적힌 者를 지목한다는 것이 농암을 御筆로 잘못 지적하는 바람에 생명을 보존하고 유배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종반정(1506)이 일어나서 농암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게 된다. 농암의 이러한 정치적 일화는 농암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적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甲子士禍로부터 중종반정에 이르는 동안의 이러한 정치적 곤경은, 농암에게 있어 혼탁한 정치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回歸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중종반정으로 방면 2年 뒤인 1508년에 이르러 농암는 양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고향인 영천군수를 자청하여 맡는다. 영천군수로 재직하는 동안에 농암은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으로 돌아갈 뜻을 담은 明農堂을 짓고 歸去來圖를 붙여 두었다. 밀양부사로 다시 明農堂을 방문했을 때, 歸去來圖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詩 한편을 지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니 마음대로 처신할 수 없다.”고 致仕를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안동부사로 있던 농암은 서원에서 학문을 강독하게 되면서 공부하러 온 退溪 李滉(1501~1570)을 만나게 된다. 농암이 평생 동안 많은 사람을 사귀었지만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退溪과 손자사위인 황중거(1517~1563)였으니, 이 때의 만남은 농암과 退溪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72歲 되던 중종 32년 5월, 退溪형제에게 보내는 <분어행>을 지어 귀거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로부터 4年뒤인 76歲 되던 7월 실질적으로 은퇴26)를 하게 된다.
농암은 중종 38년(1543)을 기점으로 강호 자연으로 致仕를 이룬 것이다. 농암은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致仕하니 송별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성대한 일은 近古에는 없었다.”며 놀라와 했다고 한다. 농암이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데, 배 가운데는 오직 꽃병 두어 개뿐이었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여흥에 이르니 가을이었다. 이때 강물은 맑고 산들바람은 불어오니 농암은 시동들로 하여금 도연명의 <歸去來辭>를 唱하게 하였다. 이때의 感懷를 노래로 지어 부르니 <效嚬歌>이다.
농암은 經國濟民해야 하는 유학자 의식 때문에 官職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그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感懷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심정을 고향에 있는 귀머거리 바위(聾巖)에 실어 노래하니 <聾巖歌>였다. 자연으로 돌아온 농암은 “더욱 시내와 산 사이에 스스로 放浪하여, 매양 興이 났다 하면 노느라고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다. 외출할 때면 반드시 산에서 노는 데 필요한 소도구들을 가지고 혼자 다녔다. 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수풀을 헤치고 산봉우리에 오르는가 하면, 두 노비에게 가마를 매게 하여서는 들과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하였다.”27) 1543년 77세 때 退溪(1501~1570)에게 준 편지에서 농암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중 조징에게 자재를 주어 정사 두어 칸을 짓도록 했다.”고 하였다. 농암은 영지산에 정사를 짓고 왕래하면서 悠悠自適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농암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절간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靈芝, 屛庵, 月蘭, 臨江 등이 다 그런 곳이다. 농암의 晩年에는 臨江에서 기거하면서 살았다. 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농암은 배를 띄우고 왕래하면서 노닐었다. 그러면서 시동들로 하여금 <어부사>를 부르게 하였다.
89세 되던 6월 13일 궁구당에서 생을 마치면서 농암는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九十에 이르지만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너희들 모두 잘 있으니 有感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명종 10년(1555), 8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 농암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근세 이름난 卿大夫 중에서 公은 복과 덕을 겸비하여 능히 晩年을 온전하게 보낸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농암의 諡號는 孝節公이다.
Ⅲ. 自然觀의 文學的 具現
1. 官職生活과 自然
(1) 現實 不條理에 대한 憂慮
농암이 살았던 시대는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파란의 물결이 일었던 시대였다. 戊午士禍, 甲子士禍 등의 4大士禍가 농암의 생애와 맞물려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조윤제는 이러한 사화에 대하여
연산조에 이르러서는 의외에도 정치사회에 심상치 않은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유명한 士禍요, 또 글로 기인한 당쟁이라는 것이다. 당쟁이라 하면 이조 국가 사회의 한 암이라고 이를 만한 중대한 사건으로 허다한 弊害를 남겼을 뿐아니라 마침내는 국가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버렸다는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거니와, 그 원인에 대하여는 新舊勢力의 충돌 혹은 경제권의 획득, 政治 勢力의 상탈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마는 그는 那邊에 있었던 간에 되어서 당파가 생기고 이루어서 당쟁이 되니, 이것은 도저히 심상치 않은 것이 되었다. 즉 잘되어서 당쟁에 이기고 본즉 一國의 지배권을 잡아 좋은 지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一門一族과 왼 黨이 같이 그 변화를 누릴 수 있었겠지마는, 잘못되어서 당쟁에 패하면 정권을 잃어버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僻地配所에서 운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어 그로 인해 또 얼마만한 사람의 생명이 희생이 될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明哲保身을 꾀하는 사람이면 아예 이러한 波浪이 심한 宦界에 나올 것이 아닐 것이다.28)
라고 했다. 농암은 72세 되던 중종 32년 퇴계 형제에게 보내는 <분어행>을 지어 자신의 歸去來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분어행>은 내용상 3단 구성29)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 내용은 무료함에 지친 아이들이 잡아온 물고기의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아이들은 잡아온 물고기를 ‘질그릇 동이’에 넣는다. 이 속에서 물고기는 자유를 억제당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은 처음에는 시들시들하지만 차차 적응하여 간다. 그러나 물고기는 ‘질그릇 동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고난이나 역경이 닥치면 그것을 극복하는 데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고기의 고난은 “큰 가뭄끝”이라는 시련으로 나타난다. 결국 물고기는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썪어 문드러지게” 된다. 결국 ‘제한된 공간’에서의 삶은 生을 유지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고기의 이러한 상황이 두번째 내용에서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 吾觀世上人 내 세상 사람들 보건대
宦海沈名利 벼슬길 명리에 잠겨
隨行而逐隊 따라다니며 떼를 지어
添丐恩光被 은광 입기를 비는구나
靑雲鳳池裏 청운은 봉황의 연못 속에 있어
揚揚方得意 드높이 바야흐로 뜻을 얻었구나
風波一夕起 풍파가 하룻 저녁에 일어나니
將身無處置 몸 둘 곳이 없도다.
姑息活軀命 구차하게 몸과 목숨 살리는 일
人與物無異30) 사람 물건이 다를 게 없구나.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표현하고 있다. 관직은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만이 오를 수 있는 ‘제한된 공간’31)이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들은 자유를 억제 당한 물고기와 같은 운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제한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名利를 구하여 벼슬길에 오르려는가? 벼슬의 효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송나라 眞宗의 勸學文이다.
집을 富하게 하는 데 있어 良田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 書中에는 千種의 곡식이 있으니까 // 거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높은 집을 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 / 書中에는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으니까 // 대문을 나가며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지 말라 / 書中에는 車馬가 빽빽한 대나무처럼 많으니까 // 장가를 드는 데 좋은 중매장이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 書中에는 얼굴이 玉같은 여자가 있으니까 // 남자가 평생의 뜻을 이루려거든 / 六經을 창 앞에서 부지런히 읽어라.
이 글에서 ‘벼슬’이라는 말은 ‘書’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를 요약하면 벼슬은 세상사람들에게 名利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은 當時人들의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32) 그리고, 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經國濟民하는 자세이다. 栗谷 李珥(1536~1593)는 經國濟民의 이념을
客曰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는 經國濟民에 뜻하지 않음이 없으니, 뜻과 일이 동일해야 하거늘, 혹은 進하여 兼善하고, 혹은 退하여 自守함은 무슨 까닭인가.」
主人曰 「선비의 兼善은 진실로 그 뜻이니 退하여 自守함이 어찌 그 본심이겠는가. 때의 만남과 못만남이 있을 뿐이다.」33)
라고 말했다. 이 말은 조선시대 양반의 본심이 兼善의 致宦에 있는 것이지, 물러난 이후의 自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학을 신봉하던 유학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유학은 經國濟民의 兼善을 이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名利에다 經國濟民을 이루려는 욕구로 인하여 유학자들은 비록 자유가 제한당하지만 벼슬길에 오르려고 한다. 靑雲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임금의 恩寵을 구한다. ‘벼슬’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이다. 이들에게 임금의 恩寵이 끊어짐은 고난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농암은
魚兒反笑余 고기 새끼들은 도리어 나를 비웃으며
對臆陳其志34) 내 생각을 대신하여 그 뜻을 말하는구나
라고 하여, 물고기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이때 농암은 벼슬에서 물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기에 물고기가 “나를 비웃는 듯”하다고 한다. 그를 대신하여 ‘물고기’가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물고기’는 농암의 생각을 전달해 주는 매개물로서 작용한다. 결국 농암은 ‘名利를 구하여 몰려다니는 모습’에서 벼슬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이 士禍의 원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其雨其雨日杲杲 비여 비여 해는 높은데
天心豈識民心勞 하늘이 어찌 백성의 수고함을 알리
萬口待哺方噞喁 만백성의 입이 먹을 것을 고대하며 입을 벌리고
我欲上天天路高 내 하늘에 오르고자 해도 하늘 길이 높구나
嗟茲之旱誠有由 아, 이 가뭄 참으로 연유가 있으리니
安得淑問如臯陶 어떻게 고요와 같은 판결을 얻으리오
雲師欲作風伯怒 구름이 비를 내리려 하면 바람이 화를 내니
助勢黨惡䲭音豪35) 악한 무리의 힘을 도와 흉폭한 놈들이 날뛰는 듯하네
話者는 ‘나’라는 1인칭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나’와 ‘농암’은 同一人이고, 백성과 하늘의 ‘중재자’로 나타난다. 하늘은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농암은 백성과 하늘의 ‘중개자’가 되고자 하지만, 하늘은 너무나 높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구름’과 ‘바람’으로 대표되는 두 세력은 “흉폭한 놈들이 날뛰듯이” 다투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백성들은 “먹을 것을 고대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 ‘구름’, ‘바람’이라는 자연물이 상징적 의미로 제시되어 있고, 이들의 대조를 통하여 농암은 현실의 어려운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농암은 ‘중재자’로 현실을 바로 잡으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방관으로써 삶을 보내게 된다.
㉰ 驪川東岸泊行舟 여강 동쪽 언덕에 배를 대니
赤葉黃花滿眼秋 붉은 잎 누른 꽃, 눈 가득 가을이네
嶺外歸程尙迢遞 산마루 밖 돌아갈 길 아직도 아득한데
江頭行李久淹留 강머리 행장이 너무 지체 되누나
南來不有趨庭興 남쪽으로 와도 어버이 뵙는 즐거움 없고
北望那堪戀闕愁 북쪽을 바라보며 연군의 수심 어이 감당할소냐?
紫綬銅章猶未樂 자수․동장 오히려 즐겁지 않은 건
一身分得九重憂36) 한 몸에 구중의 근심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네.
1522년 농암은 성주목사로 부임한다. 뱃길로 부임하던 도중에 여흥에 이르렀으나 바람이 불어 떠나지 못하고 글을 지어 회포를 풀었다. 여기에 임금을 생각하는 농암의 간절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을 떠나 고향이 가까운 남쪽으로 와도 어버이에 대한 생각은 없고, 연군의 愁心은 가득하다. 이러한 愁心속에서 농암은 “오히려 벼슬이 즐겁지 않다.”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을 생각하니 근심할 수밖에 없다. 이 속에서 농암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근심’하는 것밖에는 없다. 이처럼 관리로서의 농암의 시각은 ‘정치현실에 대한 우려’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귀거래한 후의 농암의 시각은 ‘사회전반’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 九耋辭家客 90세 늙은이가 집을 떠나니
遷移何所營 어느 곳으로 옮겨 살 것인가
門庭經喪亂 집 안엔 喪亂을 겪었고
邊塞報戎兵 변방에 병란이 들려 온다.
終夏民無食 여름이 끝나도록 백성은 굶주리는데
兼旬雨不零 이십 여일 동안 비는 오지 않는다.
夜深愁不寐 깊은 밤 수심에 잠이 오지 않는데
何處是蛩聲37) 어느 곳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집안에는 喪이 있고, 나라에는 兵亂이 있다. 그리고 이 속에서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걱정하여 잠 못드는 농암에게 ‘귀뚜라미 울음’ 소리는 농암의 심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농암의 정치현실에 대한 근심이 ‘兵亂’과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로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농암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정치현실’에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자연물인 ‘귀뚜라미’는 근심하고 있는 농암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 月瀾新刹僧無住 월란사 새 절에 중이 없으니
花塢秋殘但落霞 꽃핀 언덕 가을은 쇠잔하고 노을만 떨어지네
笑倩川沙勤守護 웃으면서 川沙인에게 보호할 것을 권유하지만
川沙活計亦蹉跎38) 川沙인들의 생계는 막연하기만
농암은 절에 중이 없다고 말한다. 중이 있어야 할 절에 중이 없다는 사실은 ‘생계가 막연한 川沙사람들’과 연결되어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이런 상황에서 월란사를 중축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기에 농암은 생활이 어려워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에 대해 근심하게 된다. 가을은 풍성해야 할 계절인데도, ‘쇠잔한 가을’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노을만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은 농암의 근심 어린 심정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憂國憂家憂歲歉 나라와 집 그리고 흉년을 걱정해
百憂叢裏度炎凉 온갖 근심 쌓인 가운데 세월이 지나가네
階前隱日知時節 섬돌 밑에 귀뚜라미는 시절을 알고
霜後殘英吐嫩香39) 서리후 남은 꽃송이 어리고 약한 향기를 풍기네.
농암은 ‘나라와 집 그리고 흉년’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농암의 귀로 무심한 ‘귀뚜라미’는 울어댄다. ‘근심스러운 현실’과 ‘평화스러운 자연’을 대비시킴으로서 현실의 근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심은 ‘약한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에 모여지고 있다. ‘약한 향기’에서 근심은 부각된다.
㉮, ㉯, ㉰와 ㉱, ㉲, ㉳를 구분짓는 것은 농암의 ‘自然回歸’이다. ‘自然回歸’로 인하여 농암의 부조리에 대한 시각은 변화하게 된다. ㉮, ㉯, ㉰ 시의 경우 관리로서 근심은 정치현실에 집중되어 있다. ‘제한된 공간’에 위치하면 그 곳에서의 삶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관직에 있는 농암은 정치현실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유로운 공간’인 자연으로 돌아온 이후의 농암은 사회 전반으로 시각을 확대한다. 정치현실을 걱정하는 모습은 사라지고 ‘흉년’과 ‘兵亂’ 등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의미에서도 구별된다. ㉮, ㉯ 시에서의 ‘자연’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어 농암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 ㉲, ㉳ 시에서는 자연물인 ‘귀뚜라미 울음’, ‘쇠잔한 가을’, ‘노을’ 등의 소재는 상징성을 띠지 않으면서 자연물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상징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농암의 근심 어린 모습은 더욱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시들의 주된 시간적 배경인 ‘가을’은 ‘풍성한 가을’이 아니라, ‘兼旬雨不零’, ‘花塢秋殘但落霞’, ‘霜後殘英吐嫩香’의 ‘쇠약한 분위기’를 지니는 가을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실을 근심하는 배경으로 작용되고 있다.
(2) 自然 回歸에 대한 慾望
조선시대 道學者들에 있어서 歸去來는 하나의 생활 풍조였다. 그들의 몸은 비록 벼슬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정치현실을 떠난 ‘자연’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입만 열면 「江湖에 期約을 두고 卜年을 奔走니」, 「陶淵明죽은 후의 淵明이 나닷 말가」, 「泉石膏盲을 고쳐 므슴료」와 같이 歸去來를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이오 가리업싀」와 같이 표방에만 그쳤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한결같이 귀거래를 동경했는가? 조윤제는 ‘黨爭下의 明哲保身’과 ‘致仕客의 閑適’이 그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歸去來한 후의 그들의 행동을
뜻있는 사람은 혹은 파묻히어 독서삼매에 悠悠自適하려 하였다. 조선의 山林學派란 것은 이리하여 생긴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세상 俗界일을 잊어버리고, 宦海의 風波야 높건 말건 나는 모른다 하는 듯이 山間水邊에 뜻을 부쳐 책을 덮고는 당연히 花朝月夕에 마음을 팔고 때로는 淸溪水邊에 仮漁翁이 되어 하룻날을 보내며 벗을 만나면 술병을 열어 놓고 시를 읊어 밤이 깊어 가는 것을 모른다는 완연한 太平閑民的 생활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黨爭 社會의 이면에 움직이는 動中靜의 상태로 무시할 수 없는 한 사회상이었다.40)
라고 했다. ‘黨爭下의 現實逃避’로서 생겨난 귀거래는 그 성격에 있어서 타율성을 띤다. 곧 자기 스스로 자연에 돌아가 沈潛한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귀거래는 온전한 자연으로의 歸依가 되지못하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정치현실에 끼여들 준비를 하고 있는 ‘준비 상태’였다. 이러한 모습은 孤山 윤선도(1587~1671)에게서 잘 드러난다. 그는 정치현실에서 政敵들의 ‘비방’으로 인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東西南北의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처지가 된 것이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있어야 했고, 그에게 그 돌파구는 河海요 山林뿐인 자연이었다. 그러므로 孤山에서의 자연은 일시적이요, 편의적으로 의탁하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극한 상황이 뚫어낸 절박한 경지였고, 自己實存이라 할 수 있다.41)
그러기에 그는 항상 정치현실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은 松江(1536~159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농암에 있어서의 歸去來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지닌다. 농암은 士禍가 일어나는 동안에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 생활은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농암의 귀거래는 ‘黨爭下의 明哲保身’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생각은 농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尙震(1493~1564)이 농암의 귀거래를 ‘恬退’42)라고 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尙震은 聾巖을 ‘절개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농암이 상경할 경우 馬匹을 줘야 한다고 명종에게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43) 그리고 退溪(1501~1570)는 聾巖의 귀거래에 대하여
引退非緣忘主恩 물러나는 것이 상감의 은혜를 잊어서가 아니고
高年自合愛丘園44)늙은 나이는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退溪는 농암의 귀거래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농암이 致仕하고 물러난 1542년(중종 38년)의 기록을 연보에서 보면, “왕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치사하니 송별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아 ‘이렇게 성대한 일은 近古에는 없었다’라고 사람들이 놀라와 했다.”45)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농암의 귀거래는 ‘致仕客의 閑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聾巖의 歸去來는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공간’으로의 回歸를 의미하는 것이다.
廊廟輸忠爲國家 조정에 충성을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함이니
風雲魚水會享嘉 바람이 구름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기쁨이로다.
春陽縱卜新泉石 춘양은 비록 새 샘과 바위에 자리를 잡았지만
身係安危未退何46) 몸은 나라 일에 매어 물러가지 못하니 어찌 하리요.
농암은 ‘화산’에 별장을 짓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한 忠’을 ‘기쁨’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농암은 ‘自然回歸’에 대한 생각과 ‘나라를 위한 충’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관직에 있는 것을 ‘바람이 구름’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기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농암의 ‘현실 지향적 의식’이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현실 지향적 의식’은 ‘經國濟民’하려는 ‘유학자의 소명 의식’인 것이다. 결국 농암은 ‘歸去來’에 대한 열망을 가라앉히고, ‘물러나지 못하니 어찌 하리요’하는 탄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浮沒水上忘機鳥 물위에서 귀찮은 세사를 잊은 새가 떴다 잠겼다.
慙他閒閒送歲年 부끄럽도다 조용히 세월을 보내는 것이
白首奔馳南與北 백수로 남북을 쫓아다니며
一生虛計說歸田47) 돌아가 농사한단 말 헛된 꿈이로구나.
농암은 ‘세사를 잊은 새’와 ‘남북을 쫒아 다니는 白首’를 대비시킴으로서 ‘歸去來’와 ‘유학자로서의 의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헛된 꿈이로구나” 하는 탄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何人擭妓臥東山 누가 기생을 끼고 동산에 누워
千古遺名滿世間 천고에 이름을 남기어 세상에 그득하게 할꼬
愧我一生多繫累 내 부끄러운 건 평생 많은 일에 얽매어
從他九折苦躋攀 남 따라서 고난의 길을 오른 것일세
自駒過隙難爲縶 빠른 세월은 붙잡아 매기가 어렵고
素髮垂肩不勝刪 하얀 머리털 어깨를 덮어도 짜를 수 없네
屈指餘年今半百 남은 해를 세어 보니 지금 50이니
行將一擲賭長閒48) 또 한번 던져 길이 한가함을 훔치려네
50세에 이른 농암이 부끄러워하는 것은 ‘고난의 길’에 오른 것이다. ‘고난의 길’이란 ‘벼슬에 오른 것’을 의미한다. 이 길을 그는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난의 길’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늙어 가고 있다고 한다. 벼슬길에서 늙어 가는 농암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한가함’이다. ‘한가하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기생을 끼고 동산에 누워’에서의 ‘누가’라고 하는 물음에 답을 주는 동시에,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농암은 벼슬에 오래 있을수록 ‘歸去來’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진다.
年來衰且病 세월이 감에 쇠약하고 병이 들어서
乞退惟其時 물러날 시기만을 원했었는데
家在嶺之南 집은 영남에 있고
魂夢尋常馳49) 넋은 꿈속에서도 노상 그리로 달리니
벼슬길에 오른 지 40년이 지나 농암의 몸은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마음’만이 고향으로 향한다. ‘고향으로 향하는 꿈’은 농암의 ‘자연으로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농암은 ‘歸去來에 대한 심정’을 표현할 때면 ‘나라에 대한 忠’과 대비시켜 귀거래에 대한 心情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몸은 ‘經國濟民’으로 ‘제한된 공간’에 있지만, 마음은 ‘자유로운 공간’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농암은 ‘자연’을 ‘자유로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유로운 공간’은 평화와 안온한 어머니와 같은 ‘고향’이다. 그러므로 농암은 官職에 있으면서 고향인 ‘자연’으로의 回歸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벼슬에서 물러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현실에 대하여 ‘헛된 꿈이로구나’, ‘물러가지 못하니 어찌 하리요’라는 탄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농암은 ‘自然’을 그려 놓고 보거나, ‘亭子’를 지어 놓고 자연을 감상한다.
靑山環擁覆簷端 청산은 처마 끝을 감싸 둘렀고
左右亭臺對碧灘 좌우의 정대는 푸른 여울을 대했도다.
稻熟平原歸思切 들판엔 배 익었으리, 돌아 갈 맘 절실하니
倩工摸取上屛看50) 화공 시켜 병풍 위에 그려 놓고 보리라.
농암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해 진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병풍 위에 그려 놓고 귀거래에 대한 심정을 다스려 보겠다고 한다.
龍壽山前汾水隅 용수산 앞 분수 모퉁이에
菟裘新築計非無 은둔의 집을 새로 지은 뜻이 없는 건 아니어라
東華十載霜侵鬢 벼슬살이 십년에 구렛나루만 희여지고
滿壁虛成歸去圖51) 벽에 가득히 귀거래 그림만 헛그려 놓았었네
농암은 휴가를 얻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와서는 明農堂을 짓고 벽위에 도연명의 歸去來圖를 걸어 놓고 돌아갈 뜻을 붙였다. 明農堂을 지은 것이 1510년이나 題明農堂한 것은 1514년 48세 때이다. 그 詩序에 “밀양의 부사가 되어 와서 보니 벽에 그린 그림은 별 탈이 없으나 벼슬살이에 묶인 내 몸은 예나 다름없으니 능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구절에서 江湖自然과 政治現實은 일치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농암에게 江湖自然이 平和와 安穩으로 자유로운 세계라면, 政治現實은 떠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소명으로 인해 몸담고 있는 세계이다. 이 두 세계는 합치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사이의 거리가 마지막 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귀거래 그림만 헛그려 놓았네”라는 탄식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러한 탄식은 ‘亭子’를 통하여 어느 정도 위안을 얻는다.
未負幽栖志 깊숙히 깃들이려는 뜻을 저버리지 못해서
江湖作小亭 여기에 작은 정자를 지었구려
千山環簇簇 많은 산들이 빽빽히 에워싸고
一水帶盈盈 한 줄기 물이 넘실넘실 띠를 띠었네
擧目天光遠 눈을 드니 하늘 빛이 멀고
憑欄地勢傾 난간에 기대니 땅이 기우는 듯
膏肓成此地 깊은 병이 여기서 생겨 버렸으니
夢絶帝王城52) 임금님이 계신 성은 꿈도 꾸지 않으리.
농암은 “깊숙히 깃들려는 뜻”으로 亭子를 지었다고 한다. 자연에 대한 생각이 ‘亭子’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정자를 짓고 올라 보니 사방에서 자연이 그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자연의 아름다움은 지극하여 여기에서 ‘膏肓’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임금님이 계신 서울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농암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열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열망으로 인해 농암은 자연으로 回歸를 결심한다.
余居嶺之南 내 영남에 사는 몸
京師爲旅寄 서울에선 나그네라
旣非爲祿仕 이미 녹을 받는 벼슬아치 아니며
亦無百口累53) 먹여 살릴 가족도 없다네
농암은 더 이상 벼슬자리를 탐하지 않고 남쪽 고향으로 떠나고자 한다. 벼슬을 내놓은 농암에게 서울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栗谷(1536~1584)이 “자고로 休官者는 반드시 돌아가서 생활할 토지가 있었는데 나의 경우는 서울의 주택 이외에 돌아갈 곳이 없다. 이미 退歸할 경우 마땅히 처자를 이끌고 함께 가야 함인데 본인은 처첩과 이별해야 하는 실정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귀거래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농암의 가족들은 고향에 있고, 자제들은 예안과 가까운 곳으로 출가를 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농암은 고향에 일정한 경제적 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54)에 귀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최진원 교수는 國文學과 自然에서 조선조 사대부들의 귀거래에 대한 근거가 토지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조 건국 초에는 私田을 몰수하여 국가 소유의 公田을 만들어서 科田과 功臣田은 官人과 公臣에게 등급에 따라 국가 소유의 토지를 재분배 지급하였다. 이로 인해 受給者가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혹은 죽은 후에는 子子孫孫에게 세습되었으므로 자연적으로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져 양반들의 생활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나아가 仕宦하기도 하고, 물러나와서 은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생활 근거 때문에 농암이나 고산의 멋진 강호 생활이 가능했고, 귀거래의 희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55)
이와 같은 경제적인 생활 근거가 없었더라면,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黨爭이 비록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歸去來가 동경의 대상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농암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집안의 생활에도 淸廉하여 여가에 이웃을 찾아가는데 걸어서 다녀 농부와 같았다. 집 앞에 큰 시내가 있어 배를 띄울 수 있는 데, 갓을 비스듬히 쓴 풍채가 의젓하여 사람들이 神仙과 같이 여기더라.”56)는 것처럼 자연을 즐길 수 있었다.
㉮ 歸去來 歸去來 말이오 가리업싀
田園이 將蕪니 아니가고 엇델고
草堂애 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드리니57)
농암은 76世 되던 해에 圭組를 풀고 都城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머리에 올라 <效嚬歌>를 지었다. 전송하는 많은 親知들과 술에 취하여 함께 船上에 누워 있으니 달은 東山에서 떠오르고 미풍은 옷깃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陶淵明의 “歸去來辭의 舟搖搖以輕颱 風飄飄而吹衣”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농암은 제목을 <效嚬歌>라고 한 것이다. 초장에서의 “歸去來 歸去來 말이오 가리업싀”라는 표현을 통하여 고향으로 떠나려는 농암은 많은 사람들이 歸去來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로만 歸去來 歸去來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귀거래의 어려움을 말하고, 자신은 다른 이들이 힘들어하는 귀거래를 실천하고 있음을 노래하였다. 자신이 귀거래하는 것을 “淸風과 明月이 기다리니”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자연’이 자신을 기다린다고 함으로서 歸去來가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자연’은 농암의 욕구 충족을 위한 매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 回看華嶽聳嶙峋 돌아보니 화악은 높이도 솟았어라
恩重如山祝更新 성은 무겁기 산과 같아 다시금 축수하네
我去豈堪稱報了 나는 돌아가니 어찌 성은 갚았다 칭할 수 있으리?
秋風落葉合歸根58) 추풍낙엽은 응당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농암은 서울을 되돌아 본다. 서울을 바라보니 북악산이 솟아 있다. 실제로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임금의 恩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보내 준 ‘임금에 대한 충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암’은 자신의 행동을 자연에 비유하고 있다. ‘푸른 잎’이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듯이, 농암 자신도 이미 젊은 시절을 보냈으니 이제 致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자연’은 농암의 욕구 충족을 위한 매개물로 사용되고 있다. 농암은 귀거래의 당위성을 ‘自然’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 巍峨峻嶺鎭南疆 높고 높은 고갯마루 남쪽 지방 진압하는데
來往間關七十霜 오가면서 드나들기 70성상 되었구나
寄語巉巖道傍石 깎아지른 길 옆 돌에 말을 보내노니
從今好在各相忘 이제부터 잘 있고 서로 잊어 보세나.
草草行裝白首郞 추레한 행장의 백발노인
秋風匹馬嶺途場 가을 바람에 필마로 고갯길이 멀기도 하구나
莫言林下稀相見 숲 아래 서로 보기 드물다 말하지 마오.
落葉歸根自是常59) 낙엽의 뿌리로 돌아감은 떳떳한 일일지니.
농암은 죽령 고개에 올라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은 이제 致仕하니 서울과 지방의 관리로서 죽령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았던 자연에게 서로 잊자고 한다. 이 때의 ‘自然’은 농암이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대상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歸去來에 當爲性을 ‘自然’에서 찾은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농암의 모습은 초췌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초라한 모습으로 넘는 고갯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떳떳하다’고 말하고 있다. 초췌한 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자유로운 공간’으로의 回歸는 기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농암은 ‘자연’을 매개로 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농암은 ㉮, ㉯, ㉰의 시에서 자신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농암은 “淸風明月 나명들명 가다리니”,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니”를 통하여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은 농암의 생각을 드러내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이러한 모습은 <분어행>에서 농암의 생각을 ‘물고기’가 드러내는 것과 같은 작용이다. 그렇게 본다면, ‘제한된 공간’에서 바라본 자연은 ‘이중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背景으로서의 역할과 농암의 생각을 드러내는 매개물로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면서 “衰且病”, “白首”, “素髮垂肩”의 시구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서 사용된 ‘病’과 ‘老’는 농암의 실제 모습이기도 하면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소재60)이기도 한 것이다.
Ⅴ. 結 論
농암 이현보(1467~1555)는 1498년 33세의 나이로 관직에 나가 1545년 76세의 나이로 자연으로 돌아온다. 그가 관직에서 보낸 시기는 그의 생애의 절반에 이른다. 이러한 관직 생활에서 3차례의 사화를 경험하였다. 그 중 직접적으로 화를 입은 것은 甲子士禍였다. 그때 농암은 안기역으로 유배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농암이었지만 현실에 대한 근심을 표현하고 있는 시는 몇 편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관직에서의 괴로움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출한 것이었다.
1.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經國濟民하는 유학자 의식과 名利를 위해서 벼슬을 구한다. 그러나 벼슬은 ‘제한된 공간’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욕망으로 인한 갈등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농암은 중앙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지방 관직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에 있으면서 농암의 현실에 대한 우려는 政治現實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자연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연물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과 반대되는 ‘자유로운 공간’인 자연으로 돌아오면서 농암의 ‘현실에 대한 우려’는 정치현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흉년’과 ‘병란’ 등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농암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의 자연은 농암의 생각을 매개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자연물 그대로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자연물은 ‘낭만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쇠잔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2. 농암은 甲子士禍로 禍를 당한 이후에 ‘귀거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귀거래’를 하게 된 것은 76세에 이르러서였다. 이렇게 본다면 ‘귀거래’를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는 30년 이상이 걸린 것이다. 농암은 관직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經國濟民’하려는 유학자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이 둘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귀거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현실에서 ‘귀거래’하지 못하는 마음이 ‘헛된 꿈이로구나’, ‘물러가지 못하니 어찌하리오’라는 탄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30여년의 官職生活속에서 농암이 ‘自然愛’를 해소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은 ‘그림을 그려 놓고 보거나’, ‘정자를 지어 놓고 주변의 자연을 감상’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귀거래’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결국 농암은 ‘自然回歸’를 실행하게 된다. 이러한 ‘自然回歸’를 그 당시의 사람들은 ‘恬退’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농암의 ‘귀거래’는 「黨爭으로 인한 明哲保身」이 아니라 「致仕客의 閑適」으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거래를 한 이후에 농암은 官界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몰입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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