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pildo.kr/bbs/bbs/board.php?bo_table=prayer&wr_id=7
저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먹고 사는 걱정할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누어주고 꾸어주며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주님과 복음을 위해 마음껏 바치고 일하면서 항상 넘치는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자녀들이 크게 성공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전 세계 인류를 위해 크게 공헌하는 인물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건강하여 모세같이 120세가 되어도 눈이 흐려지지 아니하고 몸이 쇠하지 아니해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아주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은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서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살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복을 받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이 교만한 자임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가 얼마나 교만한 자인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교만의 뿌리가 깊은 밑바닥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교만하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교만의 뿌리가 뻗어 있어 평생 나를 교만한 인간으로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왜 교만한지 무엇이 교만한지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교만하지 않다고 말해도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교만이 있습니다. 분명히 교만한데 교만한 것 차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은 소나 말처럼 밤낮으로 일만 하는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공부나 특별한 훈련을 받지도 못하고 노동만 했는데 교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교만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만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낮춰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부산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줬으면 좋겠다고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교회도 잘 모르고, 목사님도 모르는데, 목사님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연세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갔습니다.
교회에 가보니 낙동강 근처 변두리였습니다. 제게는 낯선 곳이었습니다. 예배당도 조그맣고, 교인이 백 명도 되지 않아보였습니다.
첫날 저녁 담임목사님과 장로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교회 사택에서 함께 식사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님, 권사님들이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서 대접해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에게 “우리 교회에서는 김창인 목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목사님을 부흥회 강사로 청하는데, 목사님은 특별히 청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한 후에 숙소에 갔습니다. 예배당 옆에는 축대를 높이 쌓아서 높은 집이 있고 교회는 축대 밑에 있는데 예배당과 축대 사이에 좁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 합판으로 방을 만든 곳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합판 밑에 연탄을 집어넣어서 연탄가스도 들어오고 씻을 곳도 변변치 않은 곳을 숙소라고 했습니다. 연탄가스 때문에 도저히 잘 수 없어서 제가 “그냥 춥게 잘 테니까 연탄을 빼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최고의 목사가 아니면 강사로 청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합판으로 만든 방을 숙소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이해될 텐데, 자기 분수도 모르고 자기 교회 형편이 어떤지 모르고, 숙소로 만들어 놓은 곳이 어떤지도 모르고 마치 꿈속에서 사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만할 것이 없는 것 같아도 교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누가 봐도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엄청난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도 교만한데,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욱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만해지기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방언을 하고 능력이 나타나고 불을 받았고 환상을 봤다고 하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얼마나 교만해지기 쉬운지 모릅니다.
왜 교만해지기 쉬운가 하면, 주위에서 너무나 부러워하고 칭찬을 많이 하니 자기 자신이 보기에도 그렇다고 인정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잘되니, 기도하지 않아도 잘되니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일이 잘된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신명기 8장 11~14절에 보면,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무나 부유해지고 잘될 때,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아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언제나 겸손한 사람은 받은 축복이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교만해지면 교만해질수록 받은 복이 많아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 47~48절에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해주셨음에도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들은 기도 자리에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교만해지면
첫째,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잠언 16장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가 되어야 복을 받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집을 망하게 하십니다.
잠언 15장 25절에 보면,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넷째, 교만해지면 사람이 미련해집니다.
잠언 14장 3절에 보면,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섯째, 교만한 사람은 충고를 잘 받지 않습니다.
잠언 15장 10절에 보면,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견책하실 때에 잘 받아야 합니다.
잠언 15장 12절에 보면,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충고하실 때에 잘 받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교만해지면 사람이 미련해져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생각합니다.
잠언 26장 12절에 보면,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들보다 더 미련한 사람입니다. 진짜 미련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있어도, 우리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1분 후에 죽을지 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잠언 28장 26절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아침저녁으로 달라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없습니다. 상황 따라서 때에 따라서 얼마나 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믿습니다.
잠언 13장 10절에 보면,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잘났다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을 합니다. 큰소리치고 혈기를 부리고 다투게 됩니다.
잠언 11장 2절에 보면,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욕을 많이 먹습니다. 어디 가서나 자기가 잘났다고 하고, 자기가 제일 지혜롭다고 하니 미움을 받고 욕을 먹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잠언 18장 12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교만한 사람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마음에는 지옥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교만해서 망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울 왕은 왕이 되었을 때에는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을 전멸시키라고 말씀하셨는데 왕을 살려서 왔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버림받고 망했습니다.
골리앗도 교만해서 망한 사람입니다. 그가 겸손했더라면 무방비상태로 함부로 갔다가 물맷돌에 맞아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작고 무기도 없이 막대기 하나를 들고 나오니 그를 깔보고, 자기는 무기가 많고 덩치가 크니 방심했습니다. 골리앗이 물맷돌에 맞아서 쓰러졌을 때, 다윗이 그의 칼을 뽑아 목을 베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방심합니다. 방심하다가 당합니다. 내가 교만한가 교만하지 않은가를 알려면,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는지 아니면 방심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솔로몬도 교만해서 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면, 자손이 이방 여인의 우상을 섬기게 되어 결국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딸을 주지도 말고 데려오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솔로몬은 이방 여인을 천 명이나 데리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은 교만해져서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해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나라가 강성해질 때에 교만해져서 대제사장이 할 수 있는 분향하는 일을 자신이 하려고 하다가 나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고생했습니다.
히스기야 왕도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려줬으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텐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해야 할 텐데,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마지막은 좋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교만함으로 망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구나 교만해지면 망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막아주십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육체의 가시가 생겨서 괴로워하는 분이 계신다면, 가시는 우리의 교만을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만을 빨리 깨닫고 회개하여 교만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았습니다.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사람을 만나봤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4절에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체험을 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에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을 때 사도 바울이 아주 교만하기 쉬울 때입니다. 여러분 중에 주의 음성을 듣거나 성령의 불을 받거나 방언이 터져 나오거나 특별히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을 때에 교만해지기 쉬우니까 조심하십시오.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가시’라고 한 것은 너무나 아프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그것이 떠나도록 하나님 앞에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가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겸손할 때에 큰 은혜를 받으면, 그때 가장 능력이 크게 나타납니다. 내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도 부어주시고 능력도 부어주셔서 겸손한 사람을 크게 들어 쓰십니다. 약할 때에 겸손해지기 쉽습니다. 약할 때에 오히려 더 강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가시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떠나지 않고 얼마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가시는 괴롭지만,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우리가 약하면 평소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또 더욱 충성하게 되고, 목숨을 걸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첫째, 질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간질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남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종이 자기 병도 고치지 못하고 간질병에 걸려 쓰러졌다고 하면, 많은 성도가 시험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눈이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편지 쓸 때도 다른 사람이 써주고, 사도바울은 맨 마지막에 사인만 했다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을 좋아하지 않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없지만, 다른 교회를 보니 하나님의 종을 괴롭혀서 비참하게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헤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이야기했겠습니까.
주의 종을 괴롭히면 반드시 갚으십니다. 주의 종을 괴롭혔던 사람이 어떻게 되나 보십시오. 예외가 1%로 없습니다. 100%입니다.
15절에 보면,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굉장히 공격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20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양심의 그릇에 믿음을 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버리면, 그 사람의 믿음은 올바를 수 없습니다. 양심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은 믿음이 올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양심을 저버린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오죽하면 사탄에게 내줘버렸다고 합니다. 포기한 것입니다.
사탄에게 넘겨지면 사울 왕처럼 악신에게 사로잡혀 악한 짓을 하다가 비참하게 멸망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가시 노릇을 하던 사람이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빌립보서 1장 12~18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다음에 오히려 전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사도바울 대신에 복음을 전하려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고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없어도 얼마든지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고약한 심보로,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할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가시 노릇을 한 사람은 박해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자들로부터 얼마나 매를 맞고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다 가시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고통이 되었겠지만, 사도 바울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해주고, 더욱 충성하게 해주고, 더욱 큰 은혜 가운데 살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가시가 사도 바울에게 지장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축복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백전백승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그러니 칭찬을 듣고 존경받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울 왕보다 다윗을 더 높였습니다.
이때가 다윗이 가장 교만해지기 쉬운 순간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승리했어도 교만해지면 버림받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때야말로 가시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셨는데 사울 왕의 마음속에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셔서 그때부터 사울이 다윗을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얼마나 고통이 되는 가시였을까요.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한 것과 우리아 장군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 수치와 고통이 되었고, 자기 신하와 백성 앞에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라가 전쟁에서 늘 승리할 때 다윗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죄를 범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축복받는다고 해서 깨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다고 승리한다고 깨어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찾아와서 시험했는데, 누가 겁이 나서 시험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항상 정신 차리고 방심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시로 말미암아 겸손해진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항상 기도하는 다윗이 되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올라갈까요 말까요”하며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고 행동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둘째, 원수를 자기 손으로 멸하지 않았습니다.
심판 주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자기가 갚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그를 죽이고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셋째,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고 저주했습니다. 그때 스루야의 아들들이 당장 가서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 왕은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라고 말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나서 당장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 저주하라고 하시니까 나는 저주받아야 한다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비방을 하면 비방 당하고 보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겸손한 마음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에 장례식을 잘 치러주고 후손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는데, 그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자기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게 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인구 계수하는 죄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져 7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대상 21:17)”라고 기도했습니다.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11절에 보면
다윗은 성전건축을 위해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1~14)”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건축을 위해 어마어마한 헌금을 했지만 자기 것을 드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셔서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이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죽도록 충성했어도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칭찬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대접 받으려고 생각하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 그것 때문에 보상받고 인정받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가 욕을 하고 비난하고 화내지 않고 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덜된 인간,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제일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한 사도 바울을 높이 들어쓰시고 그를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교만의 대가는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만을 없애기 위해 많이 연단하시고 많은 가시를 주시고 많은 과정을 밟게 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가정에서 너무나 어렵게 살았습니다. 제게 교만한 근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만의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속상한 것은 나는 그 사람에게 해를 주거나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괜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고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의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하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다 교만 때문에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저는 교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만을 깨닫지 못하면 손해를 자주 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학교 졸업생 중에 매년 1등으로 졸업하는 사람은 강도사 고시를 치면 반드시 떨어집니다. 교만의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떨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강도사 고시에 떨어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안의 교만을 꺾기 위해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수지맞지만, 깨닫지 못하면 손해가 큽니다. 왜냐하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낙방한 분들은 잘 연습해서 고속도로도 달리지만, 시험을 치면 꼭 떨어집니다. 시험관이 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이 너무 잘한다고 생각해서 조심성 있게 운전하지 않고 막 달리고 차선을 변경하니 시험에 떨어뜨립니다.
교만하면 낙방합니다. 그런데 낙방한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 때문에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떨어질 것 같은 사람이 합격합니다. 자신이 없어 아주 조심해서 안전하게 운전하기 때문에 합격합니다.
어떤 분은 건강하고 돈을 잘 벌어 예수 믿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을병에 걸리게 하셔서 병원에 다녀도 방법이 없고 그냥 죽어갑니다. 그때야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교만의 대가를 크게 치르고 나서야 아주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예수 잘 믿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빨리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교만하면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까지 잊어버립니다. 교만하면 기도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의 뿌리를 뽑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밤 특별히 기도합시다. “아버지 제가 깨닫지 못하는 나의 교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교만의 뿌리를 뽑는 밤이 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정필도목사 © All Rights Reserved.
대표 전화번호 : 051-714-6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