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츠빙글리: 종교개혁자가 된 인문주의자
루터와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단 한번 15529년 말부르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 담화에서 그들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각 종교개혁자가 상대방의 신학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오랜 영적 갈등을 겪는 가운데 영혼의 깊은 진통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 이와는 달리 츠빙글리는 개혁을 위해 인문주의적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배경과 교육은 종교를 이해하는 면에서 보다 이성주의적이고 인문주의적 경향을 따랐다.
A. 초기: 1484-1505년
울리히는 세 번째 자녀로서 빌드하우스에서 가장 우수한 가문출신이었다. 빌드하우스는 라틴과 독일적 유산을 함께 공유하는 지역이었다. 마을도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도자는 세인트 고올의 베네딕 수도원의 수도원장에 의해 임명되었고, 교구 사제는 쿠어 감독에 의해 정해졌다. 쿠울은 그리손스의 수도였다. 이에 따라 부친은 한 권위자에 따라 움직였고 삼촌 바톨레뮤는 교구 사제로서 다른 권위자의 명령을 좇았다. 빌드하우스는 연방에 속한 13개 주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므로 스위스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다. 토겐브르그인들은 알라마니계였고, 독립적이고 자기 의존성이 강한 스위스 전통을 지닌 후예들이었다.
1) 라틴학교
1487년 츠빙글리의 삼촌은 라게 발렌슈타트에 있는 베젠의 학교장이 되었다. 1489년 5세가 된 츠빙글리는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 후 5년 동안 그는 베젠에 있는 라틴학교를 다녔고, 10세가 되어 보다 먼 친척이 있는 바젤로 옮겨 고급 라틴학교에 입학했다. 2년 후, 탁월한 학교 선생인 에라스무스의 제자의 추천을 받아 베른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다. 기대가 촉망되는 그는 도미니코 수도사들의 설득으로 삼촌이 대학에 가기를 원했던 나이에 풋내기 수도사가 되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츠빙글리는 대학생이 되기 위해 비엔나로 가게 되었다.
2) 대학생활
1498년 츠빙글리의 대학생활은 매우 짧았다. 1368년에 설립된 유명한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제명되었다. 그는 비엔나를 떠나 1502년에 가끔 바젤로 가곤 했다.
바젤은 에라스무스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1504년 9월 18일 츠빙글리는 문학사를 받았고 1506년에 석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츠빙글리는 처음으로 “교회의 여러 가지 악습, 즉 면죄부 판매”에 대해 각성할 수 있는 기히를 비텐바흐교수로 인해서 가졌다고 했다. 또 그로 인해 “교회의 열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가 사하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젤에 있는 동안 츠빙글리는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입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B. 글라루스, 1506-1516년
글라루스의 교구 사제의 특권을 매입하라고 츠빙글리는 강요를 받았다. 그는, 주민들이 함께 거하지 않는 대리자보다 젊은 울리히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취임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서둘러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자신의 고향 빌드하우스에서 9월29일 최초의 미사를 거행했다.
글라르수가 젊고 용감한 용병들을 배출하는 주요한 마을이었기에, 츠빙글리는 글라루스 출신 스위스 군병과 함께 군목의 자격으로 외국 원정대에 참여하였다. 츠빙글리는 1515년, 스위스 군인으로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거룩을 지킨다는 미명아래 용감하게 몬차전투에 임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스위스 용병은 대패의 수치를 맛보았다. 이때부터 그는 스위스 용병매매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글라루스에서 츠빙글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오리게네스, 히에로니무스 및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고전 작품들에 덧붙여 에라스무스의 모든 작품을 구입했으며 특히 헬라어 성경을 읽기 위해 헬라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글라루스에 있으면서 츠빙글리는 교구 내 총명한 남학생들을 위해 라틴학교를 세웠다. 마을 주민들을 위한 최상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용병매매에 대한 그의 강렬한 반대로 인해 마을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C. 아인지딘, 1516-1518년
그는 스위스의 마리아 숭배의 중심지인 마인로드의 동정녀전당에서 목사로 봉사했다. 목사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과 함께 츠빙글리는 아인지든 시민들의 교구사제의 역할까지 감당했다.
츠빙글리의 관심을 부추긴 한 사람인 디볼드 폰 호헨겔라드제크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문서들로 가득 찬 도서관을 그에게 개방해 주었다. 디볼드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츠빙글리의 기독교 인문주의를 후원했다.
아인지든 시절이 츠빙글리에게는 에라스무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을 죄다 탐독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그리스도의 철학” 으로 이해하였다. 츠빙글 리가 간과 할 수 없었던 것은 <우신예찬>에서도 나오는 면죄부 매매에 대한 의문이었다.
비록 츠빙글 리가 복음적 진리에 이르렀다고 주장했지만 로마교황이 내리는 연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518년 9월1일, 그는 레오 10세로부터 참사 목사로 임명받았다.
취리히의 대성당의 사제직이 공석이 되자, 오스팔드 미코니우스는 츠빙글리를 추천하게 되었다. 24명의 성당 참사원들은 사람들을 위해 다음 사제를 선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D. 취리히의 종교개혁, 1519년
츠빙글리는 1519년 1월1일에 새로운 책임을 맡기 위해 1518년 12월 27일 취리히로 이주했다.
대성당의 사제의 역할은 목회였다. 처음부터 츠빙글리는 설교를 강조하면서 백성들에게 예배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도록 했다. 전통에서 벗어난 종교적 개혁을 사작할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그 일을 감행했다. 성경과 교회법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교회가 청결하게 될 수 있다는 에라스무스적인 개혁 개념을 따라 츠빙글리는 개혁을 이끌었다.
E. 1519년의 위기
츠빙글리 스스로도 염병으로 타격을 입게 되면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랑하는 동생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1520년, 그는 공적으로 로마교황의 연금을 포기했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받아온 것에 대해 사죄를 청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목회적 역할에 대한 츠빙글리의 신실함이 취리히 백성들과 참사회원들에게 인정 받았다는 것이다.
1521년 4월 29일, 그는 강 건너 프라우뮨스터의 참사원이었고 새로운 직분을 맡는 동시에 도시의 시민권도 획득했다.
F.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방법
1) 복음적 설교
1520년 츠빙글리는 마태복음에 대한 강해설교를 마무리하고 곧 사도행전으로 옮겼다. 1521년에는 디모데전서와 갈라디아서를 설교하였다. 베드로전서와 후서 히브리서도 강해했다. 1523년 그는 복음서로 다시 돌아와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이어서 설교했다. 1525년까지는 정기적 예배에서 구약성경 설교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한 변화는 매우 중요했다.
개혁적 의도를 증진시키는 효과적인 방편으로 츠빙글리는 설교에 비중을 두었다. 회중들이 늘 깨어 있기를 원했고, 종교개혁의 개념들을 항상 그들에게 소개했다.
2) 소시지 사건
츠빙글리는 3월30일, 즉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설교에서 먹을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주장했다. 다시 쓰여 지고 교정되어 4월16일 <음식에 대한 선택과 자유에 대하여>라는 소책자로 만들어졌다.이 소책자에서 츠빙글리는 금요일 마다 아니 사순절을 포함한 성일에 행해지는 의무적인 금식을 조심스럽게 거부하였다.
소시지 소식과 츠빙글리의 설교를 접한 콘스탄스 교구 감독 휴고 폰 호헨란덴베르크는 경색되었다. 감독 휴고는 스위스 의회를 설득하여 취리하에서 불과 멸 마일 떨어지지 않은 바덴의 정기모임에서 종교개혁 교리를 더 이상 설교하지 못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도록 했다.
3) 인쇄 서적
이러한 상황에서 츠빙글리는 전장을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 설교 외에 다른 무기가 필요함을 느꼈다. 바로 인쇄 서적이었다. 1522년 8월 22일 감독이 내린 혐의서에 대한 답변서인 <변증서:처음과 나중>의 서문을 마무리하여 23일에 인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랑과 확신에 대하여>에서 츠빙글리는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로마교회의 권위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소책자 서문에서 츠빙글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없는 갈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갈증은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으로 말씀을 들음으로 마음과 정신이 조명되고 믿게 될 때에만 해갈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렇게 하여 새로워 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창조하시고 형상을 심어주신 분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4) 예언적 모임
1519년에 그는 헬라어를 배워 플라톤과 헬라고전작가들의 작품들을 읽기 원한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인문주의적 가르침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학자들은 얼마되지 않아 플라톤을 잊어버리거나 헬라어 신약성경 연구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것은 예언적 모임으로 알려지게 될 것에 대한 시작이었다.
이모임은 기독교 신앙의 성격에 관해 츠빙글리의 주장들과 확신을 반영하기 시작한 선택된 젊은이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하나씩 그의 제자가 되었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이 되었다. 그들은 라틴어로 읽고 헬라어로 점검하였으며, 1522년부터는 히브리어로 점검했다.
5) 논쟁
1522년 말에 이르러, 츠빙글리는 조심스럽게 개혁의 방법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설교, 개종운동, 서적, 그리고 가르침으로 학문적 논쟁을 전개사켜 나갔다.
G. 첫 논쟁: 1523년 1월 29일
콘스탄스 감독은 취리히의 첫 논쟁에 초빙되었고 이 논쟁을 위해 츠빙글리는 67개 항목을 준바했다. 하지만 초빙에 응하지 않은 감독은 대신해서 능력있는 부감독 요한 파브리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파견했다. 1월 29일 600여명의 사람들이 이 논쟁을 보기 위해 운집했다.
츠빙글리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역 성경을 자신의 탁자위에 펼쳐놓았다. 시장은 이제 논쟁의 장을 열도록 했다. 파브리는 논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사하고 화해하려고 왔다고 표명했다.
츠빙글리는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거론했다. 그들 앞에 놓여진 문제는 로마교회가 행하고 있는 어떤 예식들의 합법성에 관한 것에 대하여 얼마나 오래 동안 지켜왔는지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식들이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러한 이슈를 결정하기 위해 종교회의 라든지 대학교에 의뢰해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츠빙글 리가 이해했던 것처럼, 복음을 자유롭게 전파하는 권리는 더 이상 침해받지 않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취리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H. 67개 항목
츠빙글 리가 작성한 67개 항목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 15개 항목은 복음주의적 진리를 확정하는 내용이고, 나머지 52개 항목은 고대 규칙들, 규율들, 그리고 로마교회의 예식들을 정죄하는 내용이다.
츠빙글 리가 말하는 “복음”이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교훈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미사의 교회법에 대한 수필”에서 주님의 성찬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주님의 성찬은 육체를 실제로 먹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인 느낌인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