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의 분수령이 된 '명동투쟁'
6월항쟁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전두환 '살인정권'에 쐐기를 박는 데는 성공한 민주화의 분수령이었다. 그리고 6월항쟁의 변곡점은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이 크게 관여한 명동성당의 시민ㆍ학생시위대였다. 이 분야 연구가의 기록이다.
오전 11시경 명동성당 구내방송에서는 사제들의 확고한 투쟁 방침이 발표되었다. 서울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은 성명서 <우리의 바람과 고발>에서 앞의 4개항과 거의 유사한 내용의 농성투쟁 지지와 농성시위대 보호를 천명하면서, 학생들에게 폭력 사용의 자제를 호소하고 정권의 무차별 최루탄 발사의 폭력성을 성토했다. 사제단은 11일 성당 내 최루탄 발사는 양심의 보루마저 무너뜨린 폭거로 단정했다.
그와 함께 오늘(12일) '민주화와 성역 침해 항의기도회'를 갖고 계속하여 6월 15일까지 명동성당에 남아 기도를 바칠 것이며, 6월 15일 오후 8시에는 명동성당에서 전국 차원의 기도회를 개최할 것임을 밝혔다. 농성하는 젊은이들을 대신해 이제는 사제들이 싸우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성명서였다. 40여 명의 신부들은 무차별 최루탄 발사에 항의해 시한부 동조농성에 들어갔다. (주석 11)
중무장한 수천 명의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가 명동성당에서 사제들의 보호를 받게되고, 이웃한 계성여고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걷어 건너주는 등 격려와 시민들의 지원으로 새로운 대열을 갖추게 되었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 접근하거나 담벼락을 통해 빵ㆍ김밥ㆍ초코파이ㆍ비스킷ㆍ돈 봉투ㆍ의약품ㆍ속옷ㆍ양말ㆍ우유 등을 던져 넣었다. 의약품이나 박카스, 화장지도 꽤 많이 들어왔다. 어떤 때는 이곳이 농성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원품이 수북할 때도 있었다. 그만큼 상인이나 사무원, 일반 시민들의 농성에 대한 '공감'이 컸다. 계성여고생들처럼 농성을 지지하는 여사무원들의 쪽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시위대는 감격에 북받쳤다. 우는 학생들도 있었다. 성금도 들어왔다. 농성 5박 6일 동안에 거의 2,000만 원이 답지했다. 토큰이나 회수권, 시계, 귀금속을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주석 12)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많은 시민과 상인들이 동조하면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검토하고, 전두환은 6월 13일 청와대 관계장관 회의에서 "시위와 명동성당농성 사태가 급진좌경 세력과 반체제세력의 연계하에 일어난" 것이라 주장하는 등 강경진압을 논의한 것으로 전한다.
시민ㆍ상인들의 움직임에 놀란 전두환 정권은 사제단에 중재를 요청했고 천주교 측도 명동성당 농성사태가 무사히 마무리 되기를 바랬다. 시위대를 체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함세웅 신부와 정부당국의 협상이 이루어지고, 시위대는 찬반의 세 차례 투표 끝에 농성을 해산키로 하였다.
8시 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사제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특별미사는 10시경 영성체 의식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특별미사를 마친 뒤 신부ㆍ수녀ㆍ신자 등 5,000여 명이 한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손에 V자를 그리며 비가 내리는 데도 중앙극장과 코스모스백화점 두 방향으로 행진을 했다. 성당 밖에 있던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이 뒤따랐는데, 인파는 곧 1만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아름답고 장엄한 행렬이었다. 시위 행렬은 경찰과 대치하다 성당으로 다시 돌아와 해산했으나 1,000여 명은 밤늦도록 시위를 벌였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6월항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이의가 거의 없지만, 그러면서도 대개는 6월항쟁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지속된 명동에서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지투쟁으로서 명동투쟁은 단순히 6월항쟁으로 가게 한 징검다리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다. 명동투쟁으로 6월항쟁이 있게 된 것이다. 명동투쟁은 6월항쟁의 중심적 투쟁의 하나로 6월항쟁은 명동투쟁을 통해 구체성을 지니게 되었고 내실이 다져졌다. (주석 13)
주석
11> 서중석, <6월항쟁>, 325쪽, 돌베개, 2011.
12> 앞의 책, 327쪽.
13> 앞의 책, 353~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