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선생님 의 심초석에 대해 궁금하여 네이브에서찿아봤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서 있던 목탑.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불에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삼국 중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 하지만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열세를 극복하고 대역전극의 서사를 지닌 신라인데도 사람들은 신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아쉬움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그 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고구려 때 갖고 있던 그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린 건 왠지 신라 탓인 것만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에 대한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룬 신라,
그 꿈을 이뤄낸 선덕여왕의 집념. 그 위대한 여정이 황룡사 9층 목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불에 타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황룡사지 터의 ‘심초석’들은 엄청났던 황룡사 9층 목탑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가운데 심초석을 중심으로 해서 64개의 거대한 받침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저 받침석돌 하나하나에 거대한 기둥이 올라갔다
심초석은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가로가 4미터, 세로가 3미터. 무게는 30톤에 달한다.
이 위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우뚝 솟았던 것이니 얼마나 컸을까. 높이는 80미터. 지금의 아파트 30층 높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세우는데 사용한 못의 숫자가 0이라는 사실이다.
나무와 나무를 일일이 다 끼워 맞춰 올렸다.
하지만, 이 거대한 탑을 쌓아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도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 중건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원성을 샀던가.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외부 상황은 좋지 않았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카리스마 왕 의자왕은 끊임없이 신라를 압박해왔다.
심지어 ‘여자라고’ 안팎에서 무시까지 받았으니, 선덕여왕에게는 과감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깜짝 놀랄만한 탑을 세워 신라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것이었다.
신라는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모셔와 황룡사 9층 목탑을 짓기 시작했다.
층마다 자신들을 괴롭히고 무시하던 주변국들의 이름을 새겼다.
1층부터 차례로 일본,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를 새겨 넣었는데, 한마디로 이들을 언젠간 신라 밑에 모두 무릎 꿇리겠단 의지였다.
특히 4층에 있는 탐라는 지금의 ‘제주도’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이렇게 작은 나라로부터도 무시 받고 있었으니, 그 때 신라의 좁은 입지를 짐작할 만하다.
선덕여왕은 이 황룡사 9층 완공 뒤 선언한다.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때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는 어렵다. 이건 그저 상상해서 복원해 본 모습일 뿐...)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대단한 탑을 지어낸 선덕여왕의 결단력에 믿음이 생겼던 것일까.
결국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제압하고, 668년 고구려까지 물리친다. 삼국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그 발칙한 상상은 바로 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가능한 꿈을 감히, 가슴에 품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짓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기용해 삼국 통일을 향해 나아간 선덕여왕.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자체로도 위대한 보물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에 대해 다시 음미해볼 기회를 주는 보물이기도 하다.
천상의 컬렉션 지식백과 32회- 황룡사 9층 목탑
첫댓글 하이고,
곽선생님.
이렇게 또 공부를 하셨군요.
고맙습니다.
에세이 까페로도 모셔갑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