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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로 돌아가면 2021-02-28
지난주에승리하는 삶은 우리가 정죄 받지 않는 자가 되었음을 알 때, 시작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고린도 후서 3장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는 말씀으로 우리 눈이 열려야만 은혜와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수건이 벗겨진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눈에 덮어진 베일이 벗겨져야 그 속에 숨겨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단순히 구약과 신약으로만 구분하고 있지만, 그러나 수건이벗겨지면, 구약성경이 율법 조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뿐 아니라- 신약의 말씀도 모두가 새 언약이 아니라는 것도 분별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20장에서 십계명을 받은 후, 곧바로 히브리 종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2절에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가 종으로 있는 동안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7년째에 그 종은 자유를 얻게 되지만, 가족들은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종이 자신의 주인과 가족을 사랑해서 떠나지 않고 계속 종으로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주인은 그를 데리고 가서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고, 그는 영원히 그 주인의 종이 되는 법규가 출애굽기 21장에 나옵니다.
이 기록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자마자 곧바로 히브리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종은 누구를 보여주고자 하신것입니까? 히브리 종은 본래 자유 자입니다. 그가사연이 있어서 잠시 종의 신분으로 내려갔지만, 7년이 되면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 종이 주인과 가족을 사랑함으로 영원히 종이 되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이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얻은 처와 자식들, 곧 교회를 위해서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찔림을 당하신 것을 미리 보여준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영원한 종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해서 친히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면서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거기서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 조항으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의식과 제사는 사실상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밝히 보지 못하면, 모든 가르침을 종교적 계율로만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바울 사도는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수건이 벗겨지면,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속에도 메시아의 예언적인 그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서 거기서 이방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는데- 이와같이 예수님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버림을 받아 죽으심으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어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먼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끝 날에는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므로- 바다가 물을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날이 온 세상에 올 것입니다. 즉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로 바꿔질 것이 요셉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3장14절을 보시면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이 굳어져서 단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율법 조문으로만 본다면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실 율법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종교적 행위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게 해주는 생명에 관한 책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경을 기독교의 계율을 가르치는 책으로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명령과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은혜와 진리로 오신 아들을 계시하시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므로- 그 사랑의 사귐 속에서 자발적인 순종으로 계명이 지켜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된 가지로써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은 우리가 율법에 명시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결심과 애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갈5:6)임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믿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계시가 없이는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선한 대접을 받고, 악한 일에 악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데도, 믿음으로 선한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은총으로 주어지는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늘 새롭지 않으면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이나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항상 먼저 은혜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에서- 우리가은혜로 살려면, 세 가지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Wealth(부) 이고 두 번째는 Work(행함), 그리고 마지막은 Welfare(복지) 입니다. 모두가 W로 시작되기 때문에 3W 원칙이라고 말하는데- 맨 먼저 가 나오는 것은-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얼마나 부유한 자인지를 알아야만- 그다음에 이 뒤따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주님께로 받은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당연히 복과 형통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그는 가뭄이 와도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늘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대로, 먼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가 된 것을 알고 안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행하는 것”을 배우고, 맨 끝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먼저, 안식하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이며- 얼마나 부유한 자인가를 알고 기뻐하는 믿음을 가질 때, 삶의 변화가 시작되고, 견고한 신앙 인으로 자란다는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알지 못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베풀어야 할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타지에 사는 12명의 친구가 방문한다고 합시다. 먼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 보겠지요?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모르면, 친구들을 어느 호텔로 모시고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할지 예산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큼 부유한지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부유함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는 것을 짜내는 삶이 아니라 있는 것을 누리고 나누는 풍성한 삶입니다.
부부의 친밀함과 자녀 양육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이 강조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좋은 manner를 알게 되면 다 잘 할 수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되셨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삶의 근원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부부의 친밀함도 자녀에 대한 사랑도 사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이며,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 곧, 정체성을 더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코 열매 맺는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방법이야 다양하겠지만, 그것을 실천할 진실한 사랑과 헌신이 있으면, 진실은 다 통하기 때문에 방법은 그리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대해 충분히 알고 믿을 때, 거기서 나온 힘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삶을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생활의 실천만을 강조하면,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결국 낙심하고 자책하면서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 절로 과실을 맺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보고 있지만,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으므로그리스도를 구주로 생명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진다.”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창세기 12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처음부르실 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아내인 사래만을 데리고 떠났어야했었는데, 문제는 조카 롯이 그의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있었고- 아브람은 그때까지 아들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브람이 롯을 함께 데리고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아브람에게 큰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늘어나자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아브람이 롯에게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는데- 이것이 아브람의 눈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봅니다.
롯은 히브리어로 “수건”을 뜻합니다. 곧, 얼굴을 가리는 "veil"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아브람의 눈을 가리는 수건이 되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롯이 떠난 후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창 13:14‐15절을 보시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라고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의 눈을열어주셨습니다. 그가 장차 받을 기업(유산)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수건이 벗겨지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기업 (유산)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 18~19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성도들을 위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성경을 보고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임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 후서 4장 3절을 보시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망한다는 건 지옥에 가는 것인데- 누가 지옥에 갑니까? 복음이 가리어진 자만이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이 세상의 신”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소문자“god”으로 표기됐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소문자 “god”으로 표기된 것은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소문자 “god”으로 만드신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대문자 “God”이라 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주권 아래서 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상 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마귀의 유혹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그의 주권을마귀에게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 마귀가 세상 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악한 일들은 사실상 지금이 세상 신인 마귀가 그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담이 가진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빼앗아 간 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담이 빼앗긴 권세를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되찾아 주셨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복음의 말씀이 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다시 보시면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 말씀해 줍니다.
이세상의 신(god)인 마귀가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는 수건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그저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율법의 계율로만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영광의 복음의 광채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면, 그가 신학자라고 해도 수건에 가려진 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성령의 계시로 그 수건이 벗겨지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에“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 책망하시되” 25~27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권능(기적)을 직접 보게 되면, 믿음을 쉽게가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한 것을 봅니다.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신 것을 보시면, 믿음은 계시가 주어질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계시 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겸손한 자에게 계시가 열리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마귀가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이유는-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그 즉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십자가의 도(道)로 복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말씀에 대한 지식만 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오, 주님! 오늘도,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저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계시로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만날 때, 우리는 주의 은혜을 아는 자가 되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만났어! 주님의 못 박힌 손도 보았어!”라고 했을 때,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그의 손을 넣어보지않고는 믿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주일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야 너는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야“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도마처럼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질 때,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하나님으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결혼예식을 보면, 주례 목사님이 성혼선포를 하고 나면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벗겨 줍니다.이와같이 율법의 모든 목적은 “그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니까,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 베일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보통 여자들은 아침 일찍이 우물가에 오지만 사마리아의 여인은 정오에 우물가로 왔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사연을 다 아시고 정오에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때, 여자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했을 때, 주님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는 생수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주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을 때,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주님을 만났고, 거기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예배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서- 눈이 열림으로 메시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여인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솟구쳐 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예수님을 전파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로도 안식을 얻지 못했었는데, 이제 7번째로 만난 그리스도로 인하여 비로소 안식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눈은 롯에 의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받게 될 기업의 어떠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무려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믿음을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은 율법을 지켜야 할 계율로만 알고 있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율법 아래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종의 믿음으로 힘들게 사는 분들은 없는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어딘가에 수건이 덮여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여러분에게서 떠나보내야 할 롯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벗겨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을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얻고자 하신다면, 우리 생각(혼)을 점유하고 있는 다른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셔야 합니다. 우리의 율법적이고 철학적인 지식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내 눈을 가리는 수건임을 아시고 그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을 비운만큼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주님께로 돌아갈 때, 수건이 벗겨지고 그리스도만이 나의 의가 됨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를 향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의 선물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버려진 자였지만 저희를 받으시고 영원히 사랑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가 된 것을 다시 감사드리며 이 생명과 은혜를 찬송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