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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한상봉 기자 |
1. 사회 현실
오늘 한국사회는 살벌하고 잔인합니다. 삶의 원칙을 잃어버린 때문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소수의 가진 자들에게 이익과 혜택을 독점적으로 주기 위하여 그들의 시녀가 되어버린 국가권력이 폭력과 죽음의 비극을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대추리마을 찬탈; 미국자본에게 빗장을 열어준 한미 FTA; 광우병과 쇠고기 파동; 잔인한 공권력이 부른 ‘용산참사’; 공장에서 쫒겨난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평택쌍용노동자; 무분별한 개발로 가난한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참혹한 현실;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된 삼성재벌의 자본축적; 조.중.동에 일방적 특혜를 주는 종편방송; 일본 원전재앙을 보고도 원자력산업 부흥만을 꿈꾸는 에너지정책; 4대강 사업과 날치기로 처리한 친수구역 활용 특별법;
4대강 사업이 강을 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강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강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반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살리기”란 말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살리기”란 말 자체가 타락했습니다. “살리기”란 말 뒤에는 권력가,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의 탐욕이 숨어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평화를 위해 피조물을 보호하라고 가르칩니다. 대다수 환경토목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우려를 표명하고 반대합니다. 주교회의도 이웃 종교들도 공사를 중단하라고 소신공양, 오체투지를 합니다. 4대강 사업 현장의 참상에 애끓는 호소와 동참 연대를 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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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한상봉 기자 | 2. 한국가톨릭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와 현실
일제 치하에서 가톨릭교회는 “선교의 자유”를 누리는 대가로 정의와 평화의 정신을 저버렸습니다. “정교분리”를 내세웠지만 일제의 강제 한일합방을 인정하였습니다.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민주화 열사들을 자살자로,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동성당을 스스로 민주화의 성지라고 말합니다.
4대강 사업은 교회의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하며, 교회의 가르침을 위배합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순명체계를 흔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포장하는 일치, 순명은 속으로 곪아터지고 냉소와 무관심만 키울 뿐입니다.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로마 1, 32)
교회는 세상의 잣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세 확장과 자기치장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수십억짜리 성당을 건립하고 전례는 점점 더 겉꾸밈에 빠져듭니다. 병원, 학교의 사업 확장, 명동 개발은 더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경쟁의 올무에 걸려있는 모습입니다. 평화상조회, 매일미사 책 발간 등은 교회가 얼마나 독점적이며 다양성을 기피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전통적 애령회 정신이 아쉽습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고, 되는 일에 속도를 내며, 세상의 다른 기관들과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세상의 힘에 의지합니다. 자기치장과 자기 확대를 지향하면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불의 고발과 정의 선포는 사라집니다.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로 정교유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말은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과 자연의 현실, 아픔을 외면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소위 쓸모없고 생산성 없는 사람들의 입장은 더 이상 교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불의에 대한 고발이 없으니, 정의에 대한 선포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서러움과 아픔을 경험하지 못하니 애간장이 끓어오르는 연민의 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돌심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에는 참다운 소통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선언과 명령뿐입니다. 대화를 기피하고 독단적입니다. 이익관계가 직접적인 권력가들과 소통하고 환대합니다. 얻는 이익이 없어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교회가 가진 것을 더 나누어야 할 권력 없는 이들, 밥 없는 이들, 헐벗은 이들을 방치합니다. 평등이 사라지고 차별이 스며들어 번져갑니다. 사람들과 자연이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과 죽음의 현장이 바로 성체성사와 기도, 전례와 영성이 싹트고 자라나는 고향입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멀리하고 성당의 담장 안에서만 읊조리는 기도는 한낱 죽은 언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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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한상봉 기자 | 3.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교회는 갈바리아 십자가의 언덕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속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육화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속합니다. 교회가 따라 가야할 존재는 주님뿐입니다. 주님의 삶과 행적과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삶과 현실 속에 표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양분으로 삼아 주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분신이 됩니다. 교회의 양분은 밥도, 권력도, 지위와 명성도 아닙니다. 교계는 교회의 한 부분일 따름입니다. 교계는 교회에 속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무수한 오류와 실책, 죄악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교회 역시 성인들의 교회가 아니라 죄인들의 교회입니다.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든 죄와 허물들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줄기찬 생명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생명의 원천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교회의 지체를 이룬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교회의 외곽에 서서 그저 교회를 비관하거나 냉소하는 방관자가 되라는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불만으로는, 비난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냉담, 무관심은 교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악덕들입니다. 나쁜 것이 고쳐지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의 지체가 잘못을 범하면 이를 공동의 허물로 여기고, 그런 일로 생긴 다른 지체의 상처를 기꺼이 돌보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미리 아시고 책망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배려와 혜안이 교회의 참 덕목입니다. 자연과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맑은 눈과 양심을 청합시다. 신음하고 절규하는 백성, 울부짖는 백성과 창조세계가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를 교회가, 우리가 다시금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과 도우심을 청합시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 코린 15, 26)
이렇게 살아가는 교회는 더 이상 군림하거나 자만하지 않으며 자기 확장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한없이 밑으로 내려가고 자기 영역을 끊임없이 줄여가는 교회가 됩니다. 종의 교회, 참다운 교회, 주님을 닮은 교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문정현 /신부, 전주교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