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염원 안고 장지산 지키는 두 부처님
연꽃가지 든 미륵부처님 추정
고려와 조선시대 조성 의견 분분
개성과 서울 오가는 길목에서
뭇 중생 소원 들어주며 ‘합장’
경기도 파주 장지산 용암사 옆 중턱에 남북통일의 염원을 안고 마애부처님 두 분이 서 있다.
경기도 파주 장지산 중턱 용암사 옆 중턱에 두 마애부처님이 깃들어 있다.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竝立像)’이다. 약간의 키 차이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정다운 부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높이만 해도 14.2m로 석불로는 드문 경우다.
부처님의 몸은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표현했다. 부조형식으로 얕게 돋을새김을 하여 표현했다. 상호는 두 개 내지는 세 개의 돌을 포개어 조각하여 올린 마애입상불이다.
바라보는 쪽에서 왼쪽의 부처님이 키가 크고 원형관모를 쓴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 부처님은 사각탑형의 모자를 쓰고 합장하고 있다. 정교하기보다는 투박한 조각으로 서로 대칭적 구조를 벗어나 서민적으로 보인다.
원형모양의 관을 쓴 부처님은 남성적이다. 연꽃가지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들고 있다. 이성도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는 “고려시대 최대의 환조로 만들어진 관촉사 석조보살상과 비슷한 도상을 가지고 있는데 손의 자세가 반대이다. 이곳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오른손이 큰옷 사이에 감추어지면서 드러나는 두 손가락은 매우 짧고 투박하면서도 손톱까지 표현하는 세밀함이 있다.”고 했다.
정상적인 인체비례를 살리고 거대한 돌을 깎고 덜어내면서 모양을 만들어 갔으니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돌을 조각하기에 들어가는 공력을 장인의 엄청난 땀과 노력이 투영됐을 것이 틀림없다. 학자들은 대체로 마애불의 거대한 규모, 마애불이 옷을 착용하고 있는 방식,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 등으로 짐작해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1995년에 발견된 불상 하단의 명문을 근거로 조선시대인 147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금은 분단조국의 허리부분에 위치해 교통조차 불편한 외지였지만 고려시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남쪽의 남경(한양)으로 남하하는 길목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수많은 민초들이 오가는 길목이 아니었던가. 고려시대에는 혜음원이라는 곳이 이 근처에 있었다. 이는 고려 예종(1122)년에 건립된 이른바 ‘국립숙박시설’로 수도 개경(개성)과 남경(서울)을 통행하는데 활용했다.
마애불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와 박영민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의 글을 종합하면 조성시기는 고려시대에 방점이 찍히면서 발견된 1995년에 발견된 불상 하단의 명문을 근거로 조선시대 조성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고려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때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왕의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파평군 분수원 장지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인데, 향불이 오랫동안 끊겼으니 궁주는 자비심으로 우리에게 향을 켜고 공양하면 은덕을 보답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왕이 알아본 결과 장엄한 바위 두 덩이가 나란히 서 있었고, 궁주가 꿈에 본 도승의 모습을 본 따 입상을 조성하고 부근에 절을 지어 공양을 드렸다. 그러자 그 해에 한산후 윤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선종이 후사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지만, 선종과 원신궁주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한산후라는 것은 사실에 기반한다. 반면 1471년 제작 설은 마애불 우측 바위면과 오른쪽 불상의 하반신 부분에 새겨진 명문을 근거로 한다. 명문은 총 세 곳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는데, 각자(刻字)가 깊지 않고 자간이나 행간이 바위형태에 따라 불규칙하며 박락이 심하여 육안으로 관찰하기 어렵다. 확인된 명문에서는 ‘성화(成化) 7년’, 즉 1471년이라는 연대와 함양군(咸陽郡) 등 왕실 종친, 화주 혜심(惠心) 등 스님 이름, 관료 등 시주자가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명문 뒷부분에는 세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구절이 있어, 이 발원문이 조선시대 세조를 추도하고 왕실의 안녕을 비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중부일보 2021년 09월 27일자 인터넷 인용)
장지산 건너편에서 본 마애부처님의 온화한 모습.
마애불의 조성연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바위에 부처님의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그리 녹록하진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은 혼신의 노력으로 거대한 자연석에 스며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사력을 다했을 것이고, 나투신 부처님의 모습은 뭇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바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새기는 작업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불교라는 신앙을 각인하는 큰 불사였을 것이다. 거대한 바위에 장인은 생명을 불어넣어 민중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하는 작업은 무척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조각가 오채현씨는 마애불 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거대한 바위의 갈라진 틈을 활용해 부처님의 몸을 조성하고 그 위에 머리를 조성하는 일은 그저 석불을 조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무정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기에 엄청난 노력이 들어갔을 것으로 본다. 아마도 이 바위는 불상이 조성되기 이전에도 민간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거대한 돌부처님이 민초들의 자연숭배 신앙을 계승한 게 아닌가 싶다.”
옆면에서 바라본 마애부처님으로 거대한 모습에 압도당한다.
마애불의 형상에 대해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는 “양손을 가슴 위로 들어올려 연꽃 줄기를 엇갈리게 잡고 있어 불상의 명칭을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유추해볼 때 큰 부처님이 미륵불이라면 작은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일 가능성이 있다고 일부 학자들은 보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을 조성한 장인은 이를 염두해 두었을까. 교리상으로 볼 때 미래불과 현세불을 나란히 배치하는 게 옳다고 보지만 그저 부처님을 조성한 장인은 미래부처님이건 현세부처님이건 부처님을 신봉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불성이 깃들기를 오로지 기원하지 않았을까.
그 간절한 염원은 천년이 넘어서도 단단한 신심으로 바위에 스며들어 뭇 중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혼신을 다한 장인의 땀이 바위에 녹아 부처님을 만들어 놓았고 세월을 투탈(透脫)한 현현(顯現)의 모습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민초들의 마음속에 불심을 아로새겨 줄 것이다. 지금도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파주 용미리 용암사 인근은 납골당과 묘지가 위치해 망자들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남북통일의 염원을 안고 마애부처님과 자리를 나누고 있다. 입춘이 지난 임인년 봄날 찾아간 마애부처님은 온몸에 세월의 흔적을 안고 뭇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인연은 확인할 수 없는 세월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사진 = 손묵광 사진작가 글 = 여태동 기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