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7일(화) 11:40분에 서대전역 대합실에서 만난다.
예약해서 표를 끊어 놓고, 표를 나눠 갖는다.
여수expo행 무궁화 열차. 손님이 별로 없어서 호젓하다.
철도회사는 손해겠지만,
편안한 기차 여행. 난방도 잘 되어 있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들,
멀리 위왕산, 현지 주민들은 우렁이산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위왕산 앞에는 물이 돌아 가는 곳 무도리, 하회(河回) 마을 같은 곳이다.
우명동 땅이름과 정감록이 생각나는 곳, 신도안이 머지 않았다.
'팥거리' (바깥거리가 줄어서 되었겠지 그것이 한자로는 두마(豆磨)로 쓰이고)....
지금은 그나마 계룡시로 완전 바뀌었지만...
옛 두계역이 지금은 계룡역, 창밖으로 신도안 자리 뒤의 계룡산이 보인다.
이조 궁궐터 초석이 남아있는 곳, 종로터 등 지명도 있고,,,
별로 높지도 않은 산들인데 굴길(터널) 들이 5개나 된다.
산과 냇물 등의 지형이 이렇듯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옛날 격전지임을 증명해준다. 후삼국 시대의 왕건과 견훤의 최후 격전지도 이 근처이고,
그래서 개태사가 있고. 천호산이라는 산 이름도 있고,
계룡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황산성에서 끝나고,
다른 원 줄기는 양정고개를 넘어서 천호산으로 , 대둔산으로, 금산 백령성 고개를 넘어 진안 마이산, 장수 팔공산 덕유산의 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35분 여 만에 연산역에 도착한다.
여행은 즐겁다.
기차 여행만이 주는 편안함, 안전감도 느끼면서.
연산역 앞에 있는 연산역 연혁 안내판
연산의 역사가 요약되어 있다.
-연산 땅이름에 역사가 깃들어 있다-
연산이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부른 이름이다
신라 때는 황산, 백제때는 황등야산이고, 순 우리말로는 ‘누르리모이(黃等也山)’
말하는 것과 표기법이 다른 이중 언어 체계이었을까?
왕조가 바뀌면 이렇게 지명도 바뀐다.
백제 때 '고마나루' 가 신라시대 때에 와서는 웅천, 웅주(熊川, 熊州)로 바뀌었다가 고려 때 '곰주'의 뜻에 가까운 공주(公州)로 바뀌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이렇게 왕조나 국가가 바뀌면 행정 지명을 바꾸는 예는 흔하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인 1914년에 행한 대대적인 지명 변환도 그 한 예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어 지금도 지방민 사이에 불려지고 있는 데에서 옛 흔적과 역사를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는것이다.
논산(論山) 일대의 땅이 누런 황토밭 야산이 많아서인지 지금도 상월면의 황토고구마는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이래서인지 논산이라는 이름도 '놀뫼'라 부르는 것은 '누렇다, 노랗다'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는 논이 많다는 뜻의 '논뫼' 즉 '논과 산(뫼)'에서 나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은 논이 많은 쪽은 '갱갱이들'로 불리우는 강경 부근서 부터이다.
(* 백제어 전공 학자인 충남대 도수희 박사의 저서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한국지명 신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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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역 연혁에 나오는 증기기관차 시대의 급수탑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70년 대까지 사용했었단다.) 등록 문화재 . 이맛돌이 정교하다는데...
백제의 최후의 격전지 황산벌 전투로 유명한 이곳은
지금은 '연산 대추'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다. 금산이 인삼으로 유명하다면, 이곳 연산은 연산 대추 집산지이다.
가로수에도 연산 대추를 강조하듯 심겨져 있다.
뒤로는 황산성이 있는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연산천이 흐른다.
붉은 점 표시 부분이 황산성, 앞의 냇물은 연산천. 산성과 냇물은 찰떡 궁합이다.
점심 때가 지나가고 있으니 도가니탕집에 들려 이곳 별미로 허기를 달랜다.
점심 후 나오는 길 파란 늦 가을 하늘에 웬 홍시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감 예찬 글이라도 쓰고 싶어진다. 호랑이도 도망갔다는 곶감과 우는 애기 같은. 옛날 이야기이며,, .
다시 되돌아 가는 길에 보이는 '누르기재' 모습을 멀리서나마 본다.
2021년 4월 6일에 양정고개서부터 '누르기재'까지 갔던 추억(붉은 점 표시 아래)
황령산성서 깃대봉 산성 등 옛추억을 더듬는다.
수 많은 전쟁 비화를 간직해오고 있을 연산천, 아래로는 동학군의 주둔지였던 풋개다리(초포교)로 흘러 내리고,
아는지 모르는지 오리떼만이 떼지어 분주하다.
누르기재에 있던 '황산벌전적지' 옛날 사진을 찾아서 들여다 본다.
660년 (음)8월 15일에 사비 부여는 망하고, '고마나루' 웅진에서 끌려가는 의자왕.
부여 정림사지 오층탑에 비문으로 남아서 말해주고 있다.
<황산벌>
: 나무위키에서 참조
● 황산벌
황산벌 전투를 백제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黃山)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 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東部) 천호산 일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의 양정고개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늘어선 뫼)’라 이름한 것이다.
2010년 2월 2일에 올랐던 황산성에서 바라본 황산벌 모습과 천호산, 누르기재, 멀리로는 대둔산 연봉도 보인다.
벌써 14년도 더 전의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김용경 화백의 작품전시회도 본다. (연산 (1)편에 먼저 소개: . 한 분이라도 더 보게 하고 싶어서)
망외의 눈 호강을 이곳 연산문화창고에서 한다.
예전에 갔었던 진천 농다리 그림도 있고, 원목다리 그림도 생생하게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 인간의 ' 흔적'을 그림으로 독특하게 말하고 있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 다시 찾아온 연산역 구내,
볼거리들이 많다. 아이들에게 추억거리가 될 수 있는 것들. 아기자기 하다.
멀리 천호산 연봉이 고만고만하게 잘도 늘어서 있다. 연산(連山) 한자 공부라도 시키려는 듯이.
1911년에 연산역이 생기고 철도가 개통되었다니.. 쇠로 된 말이라는 뜻의 '철마(鐵馬)'라고 불렀던 기차,
기차 구경도 못했던 촌놈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겨우 두 칸 짜리 무궁화 열차에 몸과 추억을 싣고,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서대전역으로 향한다.
( 나중에 분실물 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하루,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2024.12.229. 카페지기 자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