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기영회'(耆英會)
1846년 퇴임吏胥. 武任들이 모임 결성
우리사회에는 동창계.친척계.형제계.고향친구계 등 많은 [계모임]이 있다.
일반인들은 하나 이상의 계 또는 비슷한 모임에 들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같은 현상은 문화인류학자나 사회학자의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계들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지만 오래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대를 이어 명맥을 유지해 오는 것은 거의 없다.
성격은 많이 바뀌었지만 150년 전통을 이어 오는 모임이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사단법인 동래기영회"가 바로 그 단체.
동래구청에서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 쪽으로 가다보면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가면 유형문화재 8호인 장관청이 있다.
장관청은 정면 6칸,측면 2칸의 " "자형 건물이다.
이 일대는 동헌을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이 집중되어 있던 읍치,즉 동래부의 중심지였다.
장관청 출입문에는 "사단법인 동래기영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기영회가 현재 회관으로 사용하면서 관리중이다.
건물 정면에는 "기영당" "기로당"이라는 현판이 긴세월에도 그날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기영회는 장관청과 어떤 관계이기에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을 회관으로 쓰고 있을까.
이것은 150년 전 기영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와 무관하지 않다.
1846년(헌종 12)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학소대남쪽 학림거사 윤언서집에 모여 이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중국 고사를 따서 모임 이름을 "기영계"라 하였다.
계원 자격은 50세 이상이며 계원 40명으로 출발했다.
기영계를 만든 사람은 동래부의 퇴임 이서와 무임들이었다.
조선후기에 지방에는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6방 중심의 질청길청)과 치안이나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무청이 있었다.
국방의 요충지인 동래에는 일반 군현과는 달리 무청이 많았다.
중군청 군관청 교련청 장관청 수성청 별기위청 별무사청 도훈도청 등이 그 중심이었다.
장관청은 속오군과 아병군을 맡고 있는 무청이었다.
당시 동래에는 질청의 퇴임자가 만든 대동회와 무청의 퇴임자가 만든 만동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따로 있던 두 조직이 1846년 기영계로 합친 것이다.
이 조직은 단순한 퇴임자의 모임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서나 무임의 인사 등 많은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래부사는 이들의 경험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은 다른 지역에도 있었다.
남원에는 이서와 무임의 퇴임자로 구성된 양로당이 있었고
경주나 안동의 안일방도 비슷한 조직이라고 할수있다.
기영계는 1853년(철종 4)에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1876년(고종 13)에는 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내산기영회"로 명칭을 고쳤다.
1883년(고종 20)과 1897년(광무 1)에는 동래부사가 이 모임에 가입하기도 했다.
동래부사까지 가입함으로써 기영회는 동래지역의 대표적인 모임으로 발전해 갈수 있었던 것이다.
기영회는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는 송공단.
동래의총을 비롯하여 거사단.영보단.관황묘등의 각종 제사를 담당했다.
특히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를 모시는 관황묘의 제사를 담당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우리나라에 관우신앙이 정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다.
관우는 용맹의 상징으로 무임 집단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이다.
기영회의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교육운동,국채보상운동 등 한말
동래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점이다.
1883년 우리나라 근대적 사립학교의 시초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산에도 1895년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개성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동래에도 각종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898년(광무 2) 기영회 회원 신명록 등이
동래군한문소학교(동래부학교)를 설립했었다.
이 학교는 1904년에 개교한 개양학교에 흡수된다.
개양학교는 일본인의 보조를 받고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보통소학교라서
학생을 수용하거나 교육 수준을 높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06년 기영회 회원과 주민들이 삼락학교를 설립,조선의 인재양성에 주춧돌을 놓게된다.
1907년 기영회가 삼락학교에 개양학교를 흡수하여 새로 사립동명학교를 세웠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성격은 다소 바뀌었지만 지금도 명문 동래고등학교가
이학교의 그 빛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박필채 정도용 이광욱 등 7명의 사립동명학교 교장 가운데 정도용을 제외하면 모두 기영회 회원이였다.
특히 초대 회장인 박필채는 양반 출신으로 1905년 기영회에 가입했다.
이임과 무임 출신자로 구성된 기영회에 박필채가 가입한 점은 주목된다.
동래에 세거한 이임이나 무임 출신이 아닌 사람도 가입한 것은
기영회 조직이 점차 개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846년의 창립회원 중에는 부산 왜관의 도중상고도 있었다.
도중상고는 일본과의 개시무역을 독점한 무역상인이다.
기영회 회원 중에는 도중상고 외에 대일무역을 비롯한 상업에 종사한 동래상인들이 많았다.
1905년의 을사강제조약에 대항하는 국권회복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때 일어난 범국민적인 애국계몽운동이었다.
부산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부산상무회의소 회원이다.
여기에는 이유명 등 기영회 회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특히 동래에서는 "동래부 국채보상 일심회"가 1907년 만들어졌다.
정한정.송상종.이상흔.신명록 등 기영회 회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지방금융기관은 1912년 설립된 구포은행.
구포은행이 설립되기전에 구포저축주식회사가 있었다.
1908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방금융기관의 선구이며
구포은행의 전신으로 이은행의 설립과 운영에는 장우석.윤병준.윤상은 등
기영회 회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918년 복천동에 동래은행의 설립에도 윤병준.추종엽.김형찬 등
기영회 회원이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이 개항기 부산의 민간계로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한 기영회도 150년 전통을 이어오면서
조직이나 성격이 많이 변했다.
지난 85년엔 문화회관을 짓는 등 지금도 각종 문화.장학.사회 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65세 이상으로 연령이 제한되어 있으며 현재 4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회원 중에는 동래부 이임과 무임의 후손들이 많이 있으나 아닌 사람들도 다수 있다.
150년 전에 만든 목적이 무엇이든간에,동래기영회는 동래지역 터주대감들의 모임으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동래기영회의 앞으로 150년 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음 세대가 평가할 문제다.
부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시간이 날때 전통의 기영회가 자리한 동래 장관청을 찾아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 겠는가.
/김동철.부산대 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