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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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시 읽기> 프란츠 카프카/오규원
시가 뭐냐는 질문을 종종 믿는다. 시의 정체를 승차권처럼 자신의 손에 쥐여 주기를 바라는 눈길도 꽤 많았다. 나는 난감했다. 잠시 딴 데를 보다가 “자연과 삶을 재해석한 언어의 무늬”가 시일 거라는 말을 조용히 내려놓곤 했다. 이런 답을 사정없이 밀어내듯 풍자적 요소까지 갖춘 환유換喩의 시 앞에 내 관념은 초라하다.
시 제목이 왜 프란츠 카프카인지, 칼 샌드버그나 이브 본느프와, 가스통 바슐라르를 몰라도 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사람의 이름 옆에 고작 800원에서 1,200원이 붙은 가격도 어색하지 않다. 독자는 1980년대 커피숍의 메뉴판을 패러디한 시를 읽자마자 정신적 영역조차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는 현실을 깨친다.
본문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돈이 된다면 뭐든 괜찮다는 풍토처럼 이 구절도 낯설지 않다. 시는 돈이 아니며 교조적 계몽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를 공부하는 것이 미친 짓일 수 있는 한 세계는 희망이 있다. 시에 감춰진 뜻처럼 사람이 일군 정신적 영역은 물론 사람조차도 헐값으로 매겨진 것은 아닐까를 의식할 수 있는 한 시는, 현상과 본질이 핵심을 꿰뚫어 버리는 촉수를 빛내며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언어의 무늬는 꿈의 내용이 아닐까, 언어와 언어가 만나서 새 의미로 생성되는 지점, 거기서 시의 희망처럼 언어의 무늬가 아롱지는 게 아닐까. 따라서 시에 ‘미친’이라고 적힌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입김은 사실과 반어反語로 함께 읽힌다. 이 세계는 돈 벌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이들도 적잖을 것이므로.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 2021.
첫댓글 여러 예술가들을 커피 값으로 표현했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싸서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병초 시인의 '까치독사' 시집을 완독하는 시간을 비대면으로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