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각성과 같은 대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신비가는 왜 여전히 침묵하는 편을 선택할까요?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사실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우며,
또한 어떤 타고난 성향이나 카르마적 추진력은 물론 유리한 환경을 요구하지요,
이 상태에 ㄴ고나해 전하려면 형상ㅇ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상당한 에너지 소모를 ㅇ합니다.
그냥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쉽고 보다 자연스럽습니다.
침묵은 또한 다른 평화로운 방식으로 봉사하지요,
침묵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낸 뒤에 이런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신비가는 성격을 계속 보유합니까?
그것은 설명하기가 다소 까다롭습니다.
남아 있는 '성격'은 사실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격은 계속되는 인간사에 표면적으로 평범하게 참여할 수 있 상호 작용하는 '페르소나'지요,
(페르소나 : 개인이 타인이나 사회와 소통하며 살아갈 때 사용하는 방어적이자 적응적인 자아의 모습).
하지만 그것은 그저 목격되고,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을 뿐이지, 의무적인 것은 아닙니다.
페르소나는 참나의 유용한 도구이거나 수단입니다.
참여 정도는 임의적이며 일반적으로 순간에 봉사할 뿐이지요,
육체와 마찬가지로 성격에는 실제적 중요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하게 일시적이고 자발적이며 부분적인 활동이지요,
영화관에서 사람은 아무 때나 일어나서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페르소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참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허락됩니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성격 또한 '자기' 가 아니라는 것이 빍혀집니다.
성격은 사실상 유용한 '그것' 이지요,
활동으로서의 성격의 관여는 저절로 계속되지만
단순한 의지적 분리를 통해 그것은 에너지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성격의 참여를 허락하기 위해서는 또한, 세상이 어떤 식으로 일들을 바라보는지 기억해 내고
적절해 보이도록 세상의 관점에 적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사는 하찮은 것을 과대평가하고 심오한 것을 무시하는 연극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신비가의 의사소통은 그러한 모순을 반영하는 일이 많고, 인생은 '부조라극'의 유머로 재맥락화되지요.
그래서 신비가는 세상에서는 비극으로 여기는 것을 향해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환상과 실상(Reality)간의 대비의 부조리함 때문이지요,
신비가는 내재젹 실상을 알고 있으며,
잠복해 있는 영적 앎의 능력을 활성하시키는 데 촉매가 되는 방식으로
그 앎을 되비춰 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읜식 척도를 따라 올라갈 때, 측정 가능한 힘의 수준은 상승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힘과는 별도로,
그 수준의 본질이 갖는 성질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의식 척도 맨 아래 있는 정보가 납과 같다면, 맨 꼭대기에 있는 정보는 백금과 같습니다.
납은 상대적으로 무력하지만,
백금은 소량으로도 수 톤의 광석에 대해 촉매 역할을 할 수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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