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는 다 벌어진 상처의 틈이 있고, 아픔의 틈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틈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입니다. 우리는 그 틈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때, 우리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부어드리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로 적혀 있고, 요한복음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며, 부어드린 곳이 예수님의 머리가 아니라 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통하여 말씀을 더욱 풍성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옥합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말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가졌던 틈 사이로 마귀가 들어오자, 그는 결국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합니다.
마 26:14-16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 '배신'과 '배반'
배신과 배반은 나이와 계층을 막론하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은 "배신은 두터운 관계 있는 사람들에게서 신뢰라는 접착제를 떼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주 신뢰가 강한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떼어질 때, 그것이 배신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 되게 하신다'는 단어 "콜라오"(kollavw )는 '아교로 접착하다' 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교는 물성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무가 나무와 아교로 접착이 되면 각각 다른 나무였지만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부분이 떨어지면 울퉁불퉁한 흔적이 생깁니다.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배신이나 불신으로 인해 신뢰가 깨지면 상처가 남게 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윗은 자기의 아들인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했습니다. 너무 슬픈 배반입니다. 또한,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신의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뜨렸다가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삼하 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창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그런데 성경은 배신을 가장 많이 한 대상이 이스라엘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가장 많이 배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배신에 특별한 사람은 없고,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합니다.
겔 14: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 배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배반을 배반이라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 사울을 배신했고, 여리고 성의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줬지만 우리는 그들을 배반자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면 어떤 것이 배반이고, 어느 정도까지가 배반이며, 얼마나 크게 배반해야 배반자가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아주 큰 사건이나 굉장히 나쁜 행위들 속에서 배반을 말합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가룟 유다를 옹호해주는 곳은 없습니다. 성경 주석을 봐도 그는 배반자이며, '가룟 유다'라는 그의 이름보다 배신자 유다로 훨씬 많이 적혀 있습니다.
막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넘긴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유다가 굉장히 나쁜 사람처럼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다가 한 행동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권주의'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는 킹 제임스버전 성경을 제외하고 근래의 많은 성경들은 "넘겨주다" (hand over)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고민이 생깁니다. 그것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단어인 "넘겨주었다"라는 단어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유다를 설명하면서 유다의 역할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잔혹한 배반자의 역할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사역이 모두 비밀리에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의 비밀의 위치를 알려주고 예수님을 넘겨주는 것이 아주 큰 배반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넘겨주는 것이 배반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넘겨주었다"라는 단어를 더욱 집중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넘겨주다"의 뜻을 가진 헬라어 “파라디도미(paradivdwmi)"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굉장히 자주 쓰입니다. 우리는 이 넘겨준다는 말이 아주 작아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 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 가셨을 때와 산헤드린 공회에 넘겨지셨을 때, 그리고 빌라도가 재판을 위해 예수님을 넘겨받았을 때에도 "파라디도미"가 사용되었습니다.
마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결국,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준 일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준 일은 제사장의 집으로, 산헤드린 공회로 이어지고, 빌라도와 마지막 십자가 사건까지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것을 '최소한의 적대적 행위'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가벼이 넘기는 모습들이 결코 작지 않음에 주목하고 또한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일로 바빠 기도 시간을 넘겨주고, 말씀 읽는 시간을 넘겨주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이어져 결국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
가룟 유다는 틈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생긴 그 틈 사이로 마귀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틈 때문에 예수를 판 사람이 되었고 영원한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런데 반대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에게도 틈이 있었습니다. 그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또한, 풍랑 속에서 바다를 걷다 의심의 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내미시는 손을 즉시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우리 가운데 물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의심의 물에, 세상의 물에, 아픔과 슬픔의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순간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
마 14:30-31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도마도 흔들렸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손에 넣으며,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야 믿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질책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을 넣어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 붙잡기를 원하십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마지막으로, 미국의 카톨릭 사제인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이라는 분은 불행한 유아 시절을 보냈고,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결혼을 위해 신부직을 포기했다가 이혼 한 후 다시 신부가 된 사람입니다. 이 분의 일생은 그다지 경건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수님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끝까지 믿음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흔들리고, 후퇴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전진해야 합니다.
▶ 틈
1. 틈의 여러 유형
1) 땅의 틈 (시 60:2)
2) 배의 물 새는 곳 (겔 27:9)
3) 다윗의 장막의 틈 (암 9:11)
4) 성전의 파손된 곳 (왕하12:5)
5) 성벽의 금 간 곳 (느 4:7, 겔 26:10)
6) 엿보기 위한 창살 틈 (아 2:9)
2. 조심해야 할 틈
1) 고소하려는 자 (단 6:4-5)
2) 마귀 (엡 4:27)
▶ 붙잡다
1. 성도가 붙잡아야 할 것
1) 주님 (사 64:7)
2) 하나님의 말씀 (행 18:5)
2. 성도가 붙잡지 말아야 할 것.
1) 어두움 (요 12:35)
2)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 (골 2:20-22)
오늘의 한마디 : 틈이 있고, 흔들리더라도, 끝까지 주님 붙잡는 성도 됩시다!
공동 기도 제목
1.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통령, 안보, 통일 등)
2. 교회를 위해서 (교회와 속한 기관 및 봉사자, 교역자, 선교사 등)
3. 해외선교지를 위해서 (에티오피아 MCM, 캄보디아, 필리핀 등)
4. 국내선교와 기관선교를 위해서 (안동성소병원, 소망교도소, 장학관 등)
5. 교회 안의 이웃을 위해서 (군입대자, 해외유학생, 환자 등)
6. 세상의 이웃을 위해서 (새터민, 이주노동자, 노숙자, 소년소녀가장 등)
[관련설교]
http://www.msch.or.kr/xe/?document_srl=173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