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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이야기]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하오.”(2사무 24,2) - 다윗이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열한 번째 이야기 : 2사무 24장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24,2) 통치 말기에 이르러 다윗은 전쟁 때 군사가 될 장정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에서 브에르 세바’ 는 이스라엘 영토 전체를 뜻하는 전통적인 표현이다.(판관 20,1; 1사무 3,20; 2사무 3,10 등) 인구 조사는 군사적 목적과 조세 부과의 목적 두 가지로 시행되곤 했다.(탈출 30장, 2사무 24장, 1역대 21장) 그런데 다윗의 오른팔인 요압 장군은 이를 간곡히 만류한다.
요압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불어나게 하시어,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임금의 말이 요압과 군대의 장수들을 위압하였다. 그리하여 요압과 군대의 장수들은 임금 앞에서 물러 나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러 떠났다.(24,3-4)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다윗의 지시가 올바르지 않기에 재고해 볼 것을 간청하는 말이다. 요압은 왜 반대했을까? 탈출기는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사람마다 자기 목숨 값으로 주님에게 속전을 바쳐야 한다. 그래야 인구 조사 때문에 그들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다.”(탈출 30,12)라고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야훼 하느님만이 당신 백성의 수를 알 권리를 지니신 분이셨다. 고대의 전쟁은 각 민족이 모시는 신들의 전쟁이기에 병력을 가늠해 전쟁의 승패를 저울질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믿음과 배치되는 불신의 표지로 여겨졌다. 이를 다윗이 모를 리 없었다.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늘 여쭙던 다윗은 지금 주님께 묻지도 충복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자기 뜻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성경은 두 군데에서 다윗의 완고함에 대한 이유를 언급했다. 먼저 사무엘기는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시며…”(24,1)라고 표현한다. 반면 역대기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거슬러 일어나,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다윗을 부추겼다.”(1역대 21,1)라고 해석하고 있다. 사탄은 욥기에서 보듯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고발하는 존재로 인간의 숨은 욕망, 하느님께 벗어난 어두움을 들추었다. 고대 근동의 여느 왕처럼 말년의 다윗 또한 물리적인 군사력에 기반을 둔 왕권 강화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백성의 잘못에 대한 징벌에 다윗의 약점이 도구가 되어 버린 셈이랄까.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24,10)
다윗의 병적 조사는 지금까지 하느님과 맺어왔던 관계를 무산시키는 행위였다. 하느님 편에서 보면 참 섭섭할 일이다. ‘내가 너를 돌보아 주었고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다른 데서 네 왕국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드느냐? 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느냐?’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시지만 세 가지 벌, 곧 7년의 기근, 석 달의 도망자 생활, 3일간의 전국적 흑사병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하신다. 근래에 3년의 기근을 겪었기에(21,1) 첫째 것을 선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석 달 동안 적에게 쫓기는 벌은 다윗의 일생에 점철된 고난이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떠돌던 시절(1사무 18장-31장)과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신했던 일(15장-17장)은 나이 든 지금에서는 차마 다시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24,14)라는 말과 함께 전염병을 선택한다. 비록 3일이었지만 흑사병은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의 목숨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24,17)
마침내 다윗은 자신의 목숨과 왕권을 받은 집안까지 주님 앞에 던져 놓으며 다시 주님께 자비를 청했다. 백성을 ‘양들’이라고 표현한 다윗에게서 처음 그가 임금으로 부르심 받던 순간이 엿보인다. 목동으로서 자기 양을 위해 목숨(1사무 17,34-35)을 걸었던 다윗을 주님은 영도자로 세워 주셨던 것이다.(7,8)
이스라엘에게 있어 인구 조사는 하느님의 백성을 통솔하기 위한 행위였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청하는 다윗의 고백과 탄원은 두 차례 반복(24,10.17)되는데, 주님과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그의 빗나간 걸음을 거듭 돌이키는 것처럼 보인다.
회개의 표시는 언제나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에 있다. 다윗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 장차 성전이 될 자리에 제단을 쌓아 친교 제물을 바쳤고 주님께서 그의 간청을 들어주시니 왕국은 평화를 되찾았다.(24,18-25) 마치 인간적 욕망이 정화된 자리에 하느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리가 마련된 듯하다. 어쩌면 하느님께 예물과 기도를 드리는 제단은 그분께 순종하는 이의 마음에 있지 않을까.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자주 잊어버리는 게 사람이다. 모름지기 주님을 섬기는 이는 여러 모양으로 건네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가벼이 듣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24,3)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여푼네의 아들 칼렙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헤브론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시절 ‘칼렙’이 상속재산으로 받은 성읍입니다. 유다 지파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칼렙의 이름 뜻은 ‘개’입니다. 사람 이름에 ‘개’를 붙이는 일이 흔치 않고 성경에서도 개가 그리 긍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기에(시편 22,17; 마태 7,6 등) 그 이름이 무척 낯설지만, 이는 그가 지닌 ‘충성스러움’을 반영하려 한 것 같습니다.
칼렙은 이집트 탈출 뒤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파견한 정찰대의 일원이었습니다.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명의 대원(민수 13,2)은 가나안이 좋은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그곳 주민들이 힘센 나필족이라며 백성의 의기를 꺾어 놓습니다(25-33절). 이때 칼렙과 여호수아가 나서 계획대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백성은 정찰대 대다수에 부화뇌동하여 가나안 진입을 포기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약속을 불신한 이집트 탈출 1세대는 광야에서 죽을 운명을 맞게 되고(14,34-35), 칼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고(신명 1,38) 칼렙은 상속재산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민수 14,24; 신명 1,36).
칼렙이 받은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은 여호 14-15장에 나오는데요, 특히 여호수아기에서는 가나안 땅의 분배에 관해 서술할 때(14,6-19,51) 칼렙의 이야기를 맨 앞에 놓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하느님의 약속대로 땅을 차지했음을 밝히고, 그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의 모범으로 제시하려 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칼렙은 장장 사십오 년 동안(14,10) 믿음을 잃지 않고 기다려 약속의 실현을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 여호 14,2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제비를 뽑아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만, 칼렙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한 땅을 청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그것을 획득했습니다. 이미 아낙족이 살고 있던 땅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차지한 것입니다(12절). 그런데 이런 칼렙이 본래 이방인이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칼렙은 여호 14,6.14 등에서 “크나즈인”으로 소개됩니다. 크나즈인은 예부터 가나안에 살던 민족인데(창세 15,19) 에돔, 곧 에사우의 후손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창세 36,11.15.42; 1역대 1,36.53). 이들 가운데 칼렙의 집안은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로 합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출신 배경에도 칼렙은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주인을 따르는 개의 충성스러움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가히 성조 아브라함도 능가하는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이 될 때까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아들을 약속하신 하느님 말씀에 웃으며 이스마엘이라도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17,17-18). 헤브론에서는 이방인이던 칼렙이 한결같은 믿음으로 유다 지파의 지도자이자 백성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빛이 되라] 하느님의 ’남다른‘ 백성 : 세 번째 이야기, 가나안 문화에 젖어버린 백성
여호수아는 광야의 2세대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던 그들에게 정착할 땅이 생기고 집이 생겼다. 참으로 낯설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자란 2세대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착 생활이란 농경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사짓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워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농사짓는 데에 날씨, 특히 비는 필수적인 요소다. 비가 없으면 그것은 곧 흉작으로 연결된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주관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비와 바람의 신인 바알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비가 잘 내리게 하는 비결이며, 이것이 곧 풍작으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농사를 잘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도, 도구도 아니었다. 바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먹고 살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할 백성들에게 우상이 들어온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는 ‘구별되어’ 살아가야 할 이 백성들에게 ‘세속’의 것들이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갓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들, 하느님의 말씀으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단련 받은 이 세대들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백성들은 변해간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그들의 마음을 판관기는 잘 보여준다. 백성들은 선택적으로 신을 모셨다. 선택적이라는 말은 여러 신들을 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신들을 불렀다는 뜻이다. 신들마다 나름의 기능(?)이 있었다. 야훼 하느님은 만군의 신이요, 전쟁의 신이었다. 전쟁이 잦았던 때에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이었다. 하지만 땅이 생기고 농경 생활이 시작되니 이제는 다른 신이 필요했다. 풍요와 다산의 신, 곡식도 많이 거두게 하고 가축들도 많이 낳게 해줄 신이다. 주변 민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신의 이름이 바알이라고 했다.
어느새 백성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전쟁의 신보다 필요한 것은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일이겠는가? 하느님보다 재물을 택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은가? 예언자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한다고 수없이 호소했지만, 백성들은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때에, 자기에게 필요한 신만을 찾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가나안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세속화’되어 버렸다. 그들은 어느새 가나안 사람처럼 생각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찾는 것을 찾으며,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2열왕 17,17)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한다는 말은, 몰록이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기의 갓난아기들을 불 속에 던져 제물로 바친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속화된 백성들의 결말이다. 백성들뿐인가? 아하즈, 므나쎄 등 왕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랬다. 왕들마저 자신의 아기들을 불 속에 던져 인신 제사를 바쳤다. 그들은 더 이상 거룩한 백성이 아니었다.
이들을 이제 어찌해야 할까. 이들의 결말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미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계약을 너희가 어기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면, 주님의 분노가 너희에게 타올라, 너희는 주님께서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바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여호 23,16) 그곳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거룩하지 못한 이들이 차지할 곳이 아니었다. 이제 이들에게는 정화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7) 시편
구약 성경이 함축된 찬양가이자 탄원가
시편은 히브리어 타낙 성경에서 ‘세페르 테힐림’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우리말로 ‘찬양가들의 책’이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타낙 성경은 시편을 성문서의 첫 자리에 배치할 만큼 중시합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위해 기도와 전례 안에서 읊은 찬가가 바로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시편을 ‘프살모이’(Ψαλμοι)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현악기(하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프살모이를 그대로 옮겨 ‘프살무스’(Psalmus)라고 표기합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시편(詩篇)’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시편의 다른 이름으로 ‘성영(聖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시편마다 두 개의 번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시편 번호를 기본으로 헬라어 칠십인역 시편 번호를 괄호 안에 별도 표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시편 9-10편, 114-115편을 9편과 113편으로 하나로 묶고, 116편을 114-115편으로, 147편을 146-147편으로 나눴습니다. 그래서 시편 번호 표기가 차이 납니다.
시편은 고대 왕정 시기(기원전 12세기) 이전부터 마카베오 시대(기원전 2세기)까지 1000년이 넘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150편으로 수집 편집돼 정착된 찬양가 모음집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시편이 예루살렘 제2성전 시기에 사용되던 전례 성가집의 일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시편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결정체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이스라엘의 종교 심성 전반이 시적 운율 안에서 결정을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시편에는 이스라엘의 율법과 역사, 지혜, 예언 등 구약 성경을 형성하는 주요 구성 요소들을 녹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시편은 구약 역사 전반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집약돼 있다고 말하며 ‘구약 성경의 요약집’이라고 평가합니다.
“시편은 유배 혹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억압의 상황과 부조리의 현장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주던 민족 정서의 총체였다. 그 안에는 고통과 기쁨, 불신과 신뢰, 탄원과 찬양, 불안과 평화, 거부와 다가감, 불평과 감사 등 인간 내면의 모순된 감정과 세상에서 체험하게 되는 모든 정서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김혜윤 수녀, 「시서와 지혜서」 24쪽)
시편 저자는 유다인의 전통 안에서 다윗 임금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윗 임금을 시편의 저자라고 간주하는 데는 150편의 시편 가운데 73편에 ‘레 다윗’이라고 표현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 다윗’은 ‘다윗의’라는 뜻뿐 아니라 ‘다윗에게’ ‘다윗을 위한’ ‘다윗에 관한’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전치사 ‘레’를 번역하지 않고 ‘다윗’으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74편에는 ‘성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시편 137편은 바빌론 유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시편 전체의 저자를 다윗 임금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적합합니다.
따라서 성경학자들은 시편 저자를 다윗 임금뿐 아니라 코라의 자손들, 아삼, 솔로몬, 제라 사람 헤만과 에단, 모세, 여두툰, 작가 미상도 있다고 봅니다. 코라의 자손들은 다윗 시대 용사로 활약했고(1역대 12,7), 성전 문지기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1역대 9,19) 레위 지파에 속한 이들은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했기에 시편의 많은 부분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삽과 제라 사람 헤만, 에탄은 다윗 시대 성가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아삽은 시편 50편과 73─83편의 머리글에 이름이 나옵니다. 헤만은 1역대 2,5과 1열왕 5,11에 등장하는데 솔로몬 때 활동했던 유명한 현자로도 소개됩니다. 여두툰은 역대기와 느헤미야기에 등장합니다.(1역대 9,16; 25,1; 2역대 5,12; 느헤11,17) 그는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이로 시편 39편과 62편, 77편 머리글에 나옵니다.
시편 150편을 집대성해 편집한 이들은 유다 히즈키야 임금의 명을 받은 레위인들로 추정됩니다. “히즈키야 임금과 대신들이 레위인들에게 다윗과 아삽 선견자가 지은 노랫말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이르니, 레위인들은 몹시 기뻐하며 찬양하고 무릎 꿇어 경배하였다.”(2역대 29,30)
총 150편의 시편은 모세 오경처럼 다섯 권의 책에 수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다섯 권의 노래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섯 권의 책은 서로 구별하기 위해 각 권의 마지막에 ‘아멘’을 표기해 두었습니다. 1권(1─41편)ㆍ4권(90─106편)ㆍ5권(107─150편)은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로, 2권(42─72편)ㆍ3권(73편─89편)은 ‘엘로힘’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크게 ‘찬양시’와 ‘탄원시’로 나뉩니다. 찬양시는 첫음절에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노래합니다. 탄원시는 기도자가 하느님을 부른 다음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 앞에 하소연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