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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라
시편 92:1~15
오늘 본문은 표제에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부른 노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휴식의 날일 뿐 아니라 거룩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더구나 안식일에 가장 적합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런 의미에서 감사의 날입니다.
본문 1-3절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지존자여” 이 말은 창세기 14장 19-20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축복하실 때 쓴 하나님의 대명사임과 동시에, 아브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쓴말이기도 합니다. 이 우주 안에 하나님보다 높으신 이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람에게 있는 것 전부를 다하여 하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는 정숙하게 찬양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지적인 면과 정적인 면의 균형을 이룬 찬양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사이 어떤 곳에서는 순전히 인간의 감정만을 흥분시키는 것 같은 인상이 들 정도로 찬양을 하는데,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소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우리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음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정숙한 소리와 자세로 찬양해야 합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시뻘겋게 되고 얼굴이 상기되어서 찬송을 부른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도가 지나치면 잘못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곡에 맞추어 박자를 따라 해야 합니다.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하신 분들이 그냥 되는대로 한 것이 아니라, 깊은 영감에서 작사하고 작곡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즐겨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곡에 맞게 불러야지 그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가령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고 찬송을 부를 때,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보십시오. 얼마나 의미 심장하고 결의와 비장한 마음이 필요한 찬송입니까?
내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안일하고 영광된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은 죽고 주님만 따르려는 마음을 가지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가슴에 무거운 것이 콱 와서 닿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길이기에 좁은 길이요, 가시밭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지만 주님께 나아가기 원하는 마음의 결단이 표현된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박수를 치면서 빨리 불러 대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 응원가를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합니다.
여러분, 감정이 흥분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얼마 안 가서 그것이 가라앉으면 그것처럼 허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흥분적으로 모이는 데를 자주 찾아다니게 되면 그런 분위기가 아니면 맥이 빠지고 졸며, 잠자고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합니다.
주님은 생각만 해도 기쁘고 좋은 것인데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후렴 :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주님만 나를 구하시네
주 없는 세상 평화는 없네
오 주 없인 살 수 없네
평화 없는 세상 고통과 싸움 뿐
사람들 모두 두려워해
평화의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죄와 전쟁은 끝이 없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지, 정, 의의 세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늘 입버릇처럼 말씀드립니다만 머리는 차게, 가슴은 뜨겁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숙한 자세와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우선 건강에도 좋습니다. 일에도 능률이 납니다. 찬양하는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면 상대방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3장 15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감사와 감격, 그리고 찬양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기에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이슬이 내려 초목이 윤택해지는 것처럼 시편 119편 147절에도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밝아오는 새벽 미명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새벽에 하나님은 한 날을 승리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새벽에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베푼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밤마다 하나님의 성실을 찬송함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밤은 재난의 시기를 상징합니다. 성도는 재난을 당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성실하게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밤중에도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끊을 수 없고, 그 성실하신 사랑의 보호를 믿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감히 어떻게 못할 것을 확신하므로, 역경 중에서도 밤중에 찬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 안에서 부른 찬송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밤에 부르는 찬송은 지금은 비록 밤 같은 역경에 처해 있지만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도우셨고, 어떻게 건져 주셨나 하는 은혜 받은 사실을 되살려 가면서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했습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이 말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우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한 번만 돕고 안 돕는 그런 도움이 아니라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위험한 일 당할 때,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7장 17절과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하였습니다. 영어 번역에 보면 “He will wipe away every tears from their eyes.”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방울마다 닦아주십니다. 걱정될 때마다 도와주십니다. 위험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십니다. 밤마다 성실하신 약속을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27편 1절 이하에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히브리 원문에는 ‘키’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그의 과거의 체험인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일찍이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은혜를 받은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그 은혜를 생각할 때 감격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감격의 요소를 빼어 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사랑의 요소가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감격이 없을 때 찬송도, 기도도, 봉사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니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한정된 이성으로 하나님의 그 크신 행사와 경륜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 생각의 그 깊으심을 우리가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8절 이하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구약 욥기 11장 7절 이하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이사야서 55장 8절 이하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그러므로 6절에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사실 주님의 행사는 너무 크고 주님의 생각은 너무 깊은 반면, 우리 인간의 생각은 너무 얕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미처 알지 못하고, 우리가 무지하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해 공연히 염려하고 두려워하였으나, 지내놓고 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이 움직이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0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온 한국인 교포 사업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분에게서 아주 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 꼭 들려 드리고 싶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분은 6.25 전쟁 때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유엔군과 더불어 남한에 내려오게 되었는데, 어떤 군목한테서 전도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시리라”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에 깊이 들어와서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싶으면 그 말씀을 따로 외우고는 “아멘” 하곤 했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수입이 적어서 구두닦이도 하고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겨우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했으나 경제 사정이 도저히 대학에 갈 수가 없어서 미국 가면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미군에게 이야기를 해서 미국 대학에서 입학을 허락받고, 그 당시 우리 정부에 달러가 적을 때였기 때문에 50불 바꿔 주는 것을 가지고 미국엘 갔습니다. 그것이 28년 전 일입니다.
이 젊은이가 첫 학기는 학교에서 봐주어서 다닐 수 있었지만 다음 학기에는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니던 미국 교회 목사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목사님이 “학생, 여기 미국이 그렇게 공부하기 쉬운 곳이 아니예요. 그런 형편이면 도저히 미국에서 공부하기 어려울 것이니 본국에 돌아가서 준비해 가지고 오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하더랍니다.
그러나 “목사님,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보내신 데는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지 최선을 다해서 힘써 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열심히 했답니다. 그런데 방학(크리스마스 때 15일간) 전에 보름 동안 먹을 것이 전혀 없어서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공부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니 통이 하나 있길래 그것을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 목사님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내가 학생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갑니다. 여기 들어 있는 캔들은 우리 교회 친교실에서 쓰려고 사왔다가 쭈그러져서 열기 어려운 것, 레벨이 떨어져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된 것을 창고에 넣어 두었는데, 교회에서 청소를 하던 중 버리겠다고 하기에 학생 생각이 나서 내가 가져왔어요. 먹지 못할 것은 없을 터이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답니다. 그것이면 방학 때까지 겨우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보름 동안 쉬는데 그 동안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이틀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며 식당에서 심부름하는 것을 하려 해도 도저히 일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안면이 있던 L.A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사모님에게 5불을 빌어 버스 비를 장만해 가지고 내려갔더니 친구 아버지 공장에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는데 식당에서 일하면 시간당 1불인데 비해 그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 시간당 4불 50전을 받게 되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다시 한번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첫 학기를 마치고는 한 학기 쉬면서 학비를 좀 벌어 놓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 공장에서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일해서 그 다음 학기부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는 학비를 벌어 공과대학 4년을 졸업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공장에 취직해서 낮에는 공장엘 다니고 밤에는 야간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국에 간 지 10년만에 대학과 대학원을 다 졸업했습니다. 그 동안 모은 돈이 9천불인데 이것으로 지금부터 18년 전, 집에 있는 차고에서 장난하듯 전자회사 제품의 부속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잘되어 요사이는 마이크로 컴퓨터를 제작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700명이 넘는 사원을 고용하며 회사를 운영해 나가는데, 현재 computer display로서는 세계 제일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타임’지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두 사람을 소개하는 데 뽑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는데,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난관도 극복하며 최선을 다한 것밖에는 없음을 간증합니다”라면서 말을 맺더군요.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0장 28-31절까지 읽고 기도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가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1.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근심 걱정 버리고 선한 싸움 싸우며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후렴 :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새 힘을 얻으리
2. 주를 앙모하는 자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달려갈 길 달리며 면류관을 얻으리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3. 주를 앙모하는 자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길을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다니며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4.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의 은혜 안에서 빛난 영광 보아라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복음의 비밀
(시 92:1-15)
찬송 384장
시편 92편은 저자나 저작배경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지만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표제어와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인 것을 감안해 보면 포로 후 안식일의 성전예배 때 부른 찬송이었음을 봅니다.
본시의 내용은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인 형통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본편에 나타나듯 하나님의 성실하심, 인자하심, 위대하심, 존귀하심, 공의로우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또 그 사랑과 공의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날마다 하나님과 그 복음을 믿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