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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부론
- 성실한 삶의 자세와 견고한 신앙의 힘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A.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은 성실할수록 자신을 얻게 된다. 성실해질수록 태도가 안정되어진다.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정신을 자각하게 된다. 하늘 땅 앞에 자기가 엄연히 존재해 있다는 관념은 성실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자각이다.”라고 말했다. 고수부 수필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성실함이 아닐까. 이번에 그는 수필집 11권에 도전한다. 한두 권도 아닌 10권의 수필집을 내고 다시 11권째 수필집을 내는 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성실함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척추 수술로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한국문인협회 수필창작과 강의에 결석을 한 바 없는 성실함은 타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B. 플랭클린은 “백 권의 책보다 단 한 가지의 성실한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 보다 큰 힘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G.초서도 “성실함이란 인간이 갖는 가장 고상한 것이다.”라고 했다. F.W.니체는 “자기 자신에게 대한 성실성과 관계없는 위대함이란 나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들 유명 인사들의 어록으로부터, 그가 성실함으로부터 인격의 고상함과 인생의 위대함을 챙겼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성실로써 내용을 이루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하루하루를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는 내가 가진 그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라야 한다. 고수부 수필가는 뜨거운 인생의 열기를 부둥켜안고 있는 작가로서 삶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있다. 그는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면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서를 녹여내고 있고, 저층에 ‘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서를 깔고 있으며,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성실한 마인드를 갖고 있다. 적어도 지도교수로서 내가 수년간 봐 온 바 그렇다는 평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는 힘의 작가, 햇살 내리비치는 볕 좋은 날의 행복한 소년 같은 작가다. 말씨와 행동에 품위를 갖춘 수련의 선비 같은 작가다. 여기에 더하여 그에게는 독실한 신앙의 힘이 내장되어 있다. 신앙이란 의견이지만 그 의견은 진리를 함축한 의견이다. H.W. 롱펠로우는 “마음이 반짝이고 소박한 사람은 신과 자연을 믿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진실, 눈물, 소박이 감동의 삼 요소라면, 고수부는 이를 다 가지고 있다. W. 애덤스는 “신앙은 이성의 연장이다.”라고 했듯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그의 의도 속에 숨어있다. 선과 악을 가려내는, 신앙은 그에게 있어서 인격의 밑바탕이 되었다. 신앙은 그의 본성에 튼튼히 자리 잡고 있어 어떤 난관에도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그는 신과 영원을 믿는 것에 의하여 악 중에서도 선을, 어둠 속에서도 빛을 토할 수 있었으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성실한 자세와 아름다운 믿음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신앙’이란 우주와 세계,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의 한 형태다. J.밀은 “신앙을 갖는 인간은 집단에 있어서의 권력자보다도 이해타산으로 모이는 오합의 아흔아홉 사람보다도 강하다.”고 했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은 그에게 있어서 삶의 핵심이다. 수필의 주제 지향성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하여 노력해왔던 기저에는 군인으로서 성장해 온 자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또한 두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작품을 써왔다는 점에서 그의 수필은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수필은 이런 삶을 향한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수필이 eye-catching factor를 갖지 못하면 11권의 수필집을 펴내려고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작품을 직접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작품을 통해 그의 문학이 지닌 힘을 확인해보자.
II. 고수부의 수필세계
1. 윤슬처럼 반짝이는 애정의 숨결
공자는 “그 자식을 알지 못할 때에는 먼저 그 아버지를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을 모를 때에는 그 벗을 보아야 하며, 그 땅을 모를 때에는 그 초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링그레스는 “아버지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아버지답기는 어려운 일이다.”라고 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은 개체 자체가 그 역할을 다 하도록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성격을 최대로 나타내는 걸 ‘다움’이라고 한다면, 다 큰 딸아이에게 아버지로서 존경받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고수부는 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다. A.F. 프레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연의 걸작이다.” 고수부는 든든한 두 딸의 사랑으로 당당한 아버지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누리는 분이다. 누군가에 의지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다. 고수부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두 딸에게로의 지향성이다. 후썰의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 사랑함과 사랑받음의 귀착지는 두 딸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딸이 있어서 만족해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딸을 향한 절절한 지향성이다.
수필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란 수필의 마지막 부분,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은 딸 때문에 불행했지만 나는 딸들 덕분에 차디찬 겨울을 견뎌내고 새봄을 맞았다. 말로는 사랑을 속삭였지만 행동으로는 배신당한 리어왕에 비하여 나는 다행히 진심으로 부모를 아끼고 돌보는 딸들을 두었다. 그 점에서 나는 리어왕보다 훨씬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표현이 있다. 이 작품뿐만 아니다. 그의 수필에는 딸에 관한 이야기들이 흥건하다. 이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혜라 하겠다. 상당수 수필들이 딸들의 관심과 효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랑의 근원,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남다른 가족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 입증한다. 제목도 멋지지만, 수필도 딸 둘의 효성에 관한 이야기로써 감동을 준다.
이순신에게 남은 배 12척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딸 둘 외에도 그의 곁에는 손자 민석이와 손녀 라희, 그의 수필작품을 읽고 그를 알아주는 찐팬 독자들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책머리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낼 때마다 잊지 않고 정성껏 독후감을 써 주는 몇몇 소중한 독자들이 있어 나는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특히 군 복무 중인 손자 민석이가 보내준 편지는 내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필집을 애정 있게 읽어주었고 군에 가서도 열심히 독후감을 써 보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명령만 따르는 단순한 군 복무에 사고 또한 마비되어감을 느끼던 중 문학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다시금 할아버지 수필의 열성 팬이 되려 합니다. 수필집을 앞으로 계속 내시길 바랍니다” 손자의 이 진심 어린 글을 보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수필집을 발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니, 손주들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대단해 보인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애정’이 필요하다. 고수부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패밀리즘과 인정투쟁에서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단의 향기라 하겠다. 고수부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모습에는 이런 관계적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성실함과 진솔함이 표현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것이다. 고수부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솔직한 감정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준다고 하겠다.
큰딸이 내 곁에 앉아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이 병원은 면회가 제한되지만, 딸은 특별히 양해를 얻어 내 곁에 남아 병간호를 도왔다. “왜 이렇게 발이 얼음장같이 차요?”라며 내 발을 두 손으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무려 한 시간을 넘게, 그녀는 묵묵히 내 발을 쥐고 문질렀다. 차가웠던 발에 온기가 서서히 돌기 시작하자, 내 눈시울도 함께 뜨거워졌다. 어린아이 같던 딸이 이제는 장성하여 곧 교감 발령을 앞두고 있음에도, 학교 일정까지 조정해가며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그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주연아, 고맙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빠도 저 어릴 때 이렇게 해주셨잖아요.”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정성을 쏟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은혜를 갚으려는 딸의 마음이 나를 더욱 뭉클하게 만들었다. 오후 네 시쯤, 딸은 병원을 떠났다. 면회 시간이 끝났기에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나는 혼자 남은 병실에서 수술 후의 고요함을 느꼈다.
- <지옥문> 중에서
수술실을 들어가면서, 단테의 신곡 ‘지옥문’을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가졌던 그는 좁아진 척추 뼈 사이를 벌리고 철심으로 고정한 후, 흘러나온 디스크를 제거하는 수술을 통해 통증의 근원을 제거하고, 두 딸의 케어를 받고난 후, 수술 과정과 그 후의 심정을 토로한 수필 <지옥문>이란 수필을 썼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그는 지옥문 같았던 수술실에 누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 하에서 자신의 곁을 굳건히 지킨 두 딸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불러본다. 이는 두 딸을 무한한 효성의 자식으로 부각시킨다. 이 수필은 수술이라는 상황 제시를 통해 아버지 곁을 지키는 딸 둘의 자세를 반추하는 글이다. 아버지와 두 딸 사이에 담긴 사랑이 긍정과 희망적 인생관과 버무려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수술이라는 일상사의 중대한 실험에서 출발된 사랑이 노정된 이 글에는 아버지를 향한 효의 정서가 풍성하다. 수필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라는 걸 되새겨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순수한 연모와 향기나는 사랑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두 딸이 나를 바라보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중에 작은딸 서연이가 말하길, “언니는 아빠가 휠체어에 실려 들어갈 때 계속 울고 있었어요”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딸이 함께 서로를 애정하며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이 눈물겹게 읽힌다. 딸 둘의 “아빠, 저 여기 있어요.”라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뜨거운 감동을 안겨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라희가 서너 살 때 우리집에 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무작정 건넛방 서재로 끌고 갔다. 어른들끼리만 놀지 말고 할아버지는 내 친구가 되어달라며 회전의자에 나를 앉히고 마구 뺑뺑이를 돌렸다. 올 때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집 안을 휘젓고 뛰어다니던 아이였는데 중학생이 되어 얌전히 앉아 이모와 이모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라희는 내가 다니는 신일교회의 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다. 내가 본당 예배가 끝난 후 아래층에서 선교회원들과의 친교하는 사이에 누가 뒤에서 살짝 건드린다. 이상하다 싶어 바라보면 귀여운 라희가 아닌가. 나는 반가워 남이 보든 말든 손녀를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휙 돌린 다음 내려놓는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가볍게 들어 올려져 내 품에 안긴 손녀는 병아리처럼 귀여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할아버지 모 하세요’‘뭐 하세요’를 잘못 표현한 그것이 오히려 더 귀여웠다.
- <귀여운 라희> 중에서
이 수필에는 눈물보다 끈적한 손녀 라희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끔찍하게 아끼는 손녀의 애정이 펼쳐져 있다. 사랑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손녀의 ‘할아버지 모 하세요’는 관심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아장스망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건조한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희가 서너 살 때 우리집에 오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거실에서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무작정 건넛방 서재로 끌고 갔다. 어른들끼리만 놀지 말고 할아버지는 내 친구가 되어달라며 회전의자에 나를 앉히고 마구 뺑뺑이를 돌렸다.”던 손녀가 중학생이 되어 이모와 이모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끼는 작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가족들이 손녀의 진로문제를 격의없이 토론하는 모습이 문학가 집안의 멋을 풍겨낸다.
여기에는 필시 사랑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문학적 체험과 같은 정서적 호응은 문학작품의 서정성을 구성하는 요체다. A. 반 다이크의 말대로 “대리석의 방바닥과 금을 박은 담벽이 가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집이든지 사랑이 깃들이고, 우정이 손님이 되는 그런 집이 행복된 가정이다.” J.H.페스탈로치도 “가정의 단란이 지상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이 작품은 행복한 가정과 민주적 열린 가정생활이 문명의 근본적인 목표이며 모든 노력의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걸 말해주고, 독자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이 가정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각인시킨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고수부는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내 책상 앞 벽에는 중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 표지그림 한 장이 붙어있다. 라희가 어렸을 때 자기 엄마와 같이 중구 독서마당이라고 하는 이벤트 모임에서 책 읽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표지 그림으로 내보냈다. 그 신문의 표지를 오려서 벽에 붙여놓고 손녀가 보고 싶을 땐 수시로 그 사진을 보곤 한다.’는 진술은 둘 사이의 사랑이 최고로 극대화된 부분이다. 오고 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손녀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손녀의 대견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큰딸은 학교 일에 늘 바빴지만 주말이나 잠깐의 틈만 나면 병원에 달려와 내 곁을 지켰다. 수술 후 허리를 구부릴 수 없어 일상적인 몸 가누기도 힘든 나를 위해 말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불편해 하는 작은 몸짓도 놓치지 않고 살펴주었으며 한겨울 병실이 춥다고 하자 두툼한 겉옷을 챙겨다 주었다. 또 단백질이 필요하다면서 직접 반찬을 만들어 꾸준히 가져다 주는 정성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큰딸은 책임감이 남달라 아침저녁으로 내 안부를 확인했고 동생에게는 고생한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혼자 집에 있는 아내까지 챙기며 말 그대로 집안의 큰 어른 역할을 해냈다.
-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 중에서
고수부 작가에게는 딸 둘이 있다. 큰딸은 학교 일에 바빴지만 잠깐이라도 틈만 나면 병원으로 와서 그의 곁을 지켰고, 둘째 딸 서연이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입원할 때와 퇴원할 때 운전을 도맡아 해주었다. 수술 당일에도 병원에 왔고 입원하는 기간에도 수시로 드나들며 잔심부름을 해주었다. 퇴원하는 날에도 병원에 일찍 도착하여 퇴원 수속을 밟고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다시 강남 재활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런 딸 둘의 효성을 ‘리어왕도 부러워할 딸 둘’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쓴 것이다. 작가는 딸을 주연으로 등장시켜 딸들의 극진한 애정을 더욱 크게 부각시킨다. 두 딸의 케어 덕분으로 “나는 다행히 진심으로 부모를 아끼고 돌보는 딸들을 두었다. 그 점에서 나는 리어왕보다 훨씬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 라고 고백하는 작가는 스토리 위주의 일상적 이야기에서 에세이로 승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수필의 제목을 멋지게 간접화하였다.
고수부 수필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사랑에 대한 지향성이다. 그 귀착지는 두 딸의 효성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아버지를 깍듯하게 아끼고 존경하는 딸로서의 자세가 돋보인다. 한마디로 서로간의 애정이 위 수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괴테는 “왕이건 농부이건 가정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J. 메이시의 말처럼, 인간애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인간의 감화는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손수 실천하고 보여준 것이다. 이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주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만이 행복한 가정이다’라는 것을 살펴보는 데 있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랑의 향기와 지혜의 미학이 이 대목에서 투영되어 나온다.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아버지의 병수발을 도와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자식으로서 최선의 효도가 아닐 수 없다. 일종의 아름다운 복종이요, 순종이다. 여기에는 필시 가정이란 ‘애정집단이다’라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이 작품이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자신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딸 둘에 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다. 이 수필은 화목한 가정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애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후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보면, 세계 속에 가정이 있는 게 아니다. 실은 가정 속에 전 세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고수부의 가정은 두 딸과 아버지의 사랑이 합쳐진 곳이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곳이 아니라 합쳐서 있는 곳이다. 그들이 함께 합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영육이 합쳐서 두 개체가 아닌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그것이 이들의 양심이며, 고수부 가정의 정체다. 한마디로 고수부의 수필적 정서는 두 딸에게서 받은 사랑의 힘에 기반한다고 하겠다.
독자가 써준 글을 읽어보면 책 제목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나와 있다. 뷰즈헤어 K 씨는 ’책 제목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뭔가 예술적인 느낌과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라고 했다. 미국에 있는 아내 친구 H 씨는 “책 제목이 너무 멋있고 표지 그림 또한 좋았습니다. 저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한 마디 던져놓으신 ’길에 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라는 말은 깊어가는 가을에 낙엽을 우수수 다 떨어뜨리고 홀연히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각각 나름대로 알맞은 해석들이었고 나 역시 공감이 되어 느낀 바가 많았다. 교회 안수 집사 K 씨는 ‘길에 선 나무는 왜 웃지 않을까. 웃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누가 웃지 말라고 했나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서 본문을 찾아봤지만 내용이 없어 더욱 여러 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라고 썼다.
- <황혼기의 나, 길에 선 나무> 중에서
이미 10권의 수필집을 낸 고수부 작가에게는 손자 손녀, 두 딸뿐만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독후감을 보내주신 독자들이 많다. 어떤 책이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독자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일 뿐이다. 만일에 한 독자의 의견이 세상의 다른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독자 자신의 의견이 가치를 가질 뿐이다. A. 포프의 말처럼, 세상 사람들의 신앙과 희망은 일치하지 않지만 모든 인간의 관심사는 박애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고난의 생애를 살아갈 수밖에 없고, 타인에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는 이들의 고견을 소중히 간직하며, 그들이 주는 멘트나 리뷰를 작품의 소재로 쓰고, 전문을 제5부에 걸쳐 소개하기도 한다. 독자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라 하겠다. 아마도 이런 열성 독자들이 11권의 수필집을 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나싶다. 독자들이 제10집 제목 ‘길에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에 대한 논평을 많이 냈던 것 같다. R.W. 에머슨의 말처럼 ‘좋은 독자는 좋은 책을 만든다.’ 특히 그는 ‘길에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맑은 공기와 푸른 숲의 품을 떠나 도시 길가에 서 있는 나무는 찬바람 맞으며 외롭게 서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여 찬란했던 청춘의 낙엽들을 다 떨구고 이제 마지막 길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삶의 나무는 길에 선 나무처럼 웃을 수 없는 나의 모습이 아닐까.’라고 피력하면서 나무를 ‘자신’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2. 희망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문심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문학의 가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먹는 것,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메슈 아놀드는 문학교육을 통한 교양의 축척이야말로 조화로운 인간과 건전한 사회의 추구에 본질이 된다고 하였다. 아놀드는 진정한 문학창조능력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요소를 ‘사상’이라고 하였다. 고수부 사상이 거처하는 공간은 수필이다. 그는 새로운 사상을 발견해서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을 활발하게 사회에 순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춘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기 위해서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사상성의 구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고수부가 수필문학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인간적 향기를 내보일 수 있는 수필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수부의 <수필에 살고 수필에 죽는다>는 그 행위자의 문학에 대한 견고함으로부터 문학이 주는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문인이면 가져야 할 문학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평론가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문학은 개인의 인간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높은 형태의 예술임을 역설하였다. 모든 수필이 예술로서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다. 심미적 안목이란 화려하거나 현란한 언어 구사와 거창한 주제와 경이로운 소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필 작품을 통해 이르는 효과에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인간의 흥건한 정이 배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문학적 미학은 완성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지식은 물론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루이스 보르헤스는 자신의 글쓰기 행위는 오로지 ‘달’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고수부는 무엇을 위해 문학을 할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수생수사’는 이 물음에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우리 수필반의 이름은 ‘수생수사(隨生隨死)’의 준말인 ‘수생반’이다. 수필에 살고, 수필에 죽겠다는 지도교수님의 문학 철학이 담긴 명칭이다. 나 역시 수필에 몰입하여 사는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소중하다고 느낀다. 오늘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한다. 손가락을 자판 위에 얹고, 한 자 한 자 눌러 글을 써 내려간다. 그때마다 나는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경쾌한 자판 소리를 들으며 행복해진다. 수필 한 편을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그 기쁨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수필이 있어 내 삶은 빛나고, 수필 덕분에 나는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 <수필에 살고 수필에 죽다> 중에서
그는 매주 목요일이면 안국동 운현타워 202호 수생반 강의실로 향한다. 수필을 사랑하고, 제2의 인생을 문학으로 꽃피우려는 이들과 함께 배우고 나누는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배움의 기쁨과 동료애, 그리고 문학에 대한 경외심을 느낀다. 수강생들은 모두 진지하고 열정이 가득하다. 얼마 전 입회한 한 여성 회원이 첫 수업을 마친 뒤 써온 수필, ‘경탄의 90분’에 있던 “여느 대학 강의보다 더 깊은 열정이 느껴졌습니다”라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그는 글을 잘 쓰기 위해 처음에는 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도 하고, 용산문화원에 등록하여 수필을 배웠고, 요즘에는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에서 본격수필을 배우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깔끔하게 양복으로 정장을 한 채다. 최선을 다하는 멋진 신사의 모습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문학적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되어 왔던 것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여야 한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성의 순정한 면을 발견하고 진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수필에 살고 수필에 죽다>에는 이런 작가의 각오가 드러나 있어 좋다. 그는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수필의 가장 큰 특성인 ‘자조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의 글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데서 그 매력이 뿜어져 나온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소재를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인생학’을 넘어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고수부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피드백>이라는 작품이 이루는 구도의 한 축에는 예리한 작가의식이 투과된 문학정신이 자리 잡고 있어 평자를 안도하게 했다. 고수부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이유는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수필관을 확실히 세워둔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자신의 문학적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독자들과의 거리를 좁혀 접근성을 강화하고자 고수부는 독자들의 리뷰를 소중하게 여긴다.
오늘은 이번에 발간한 수필집에 대한 칭찬을 두 분한테서나 받았으니 피드백의 결과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 신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피드백에 대한 압권은 지도교수인 권대근 교수님의 서평이다. 컴퓨터를 열고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권대근 교수방’에 들어가 보면 ‘고수부론’이 나온다. 그 맨 마지막 문장에 ‘이 수필집은 베스트셀러는 아닐지라도 베스트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다’라고 평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피드백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수생반에서 공부하는 회원이기에 후한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더욱 분발하라고 주는 칭찬이겠지만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충만해지며 사기가 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피드백의 소박한 힘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이런 귀한 ‘귀환’을 위해 내 안의 성장마인드셋 스위치를 늘 켜둔다.
- <피드백> 중에서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수필창작에의 욕구 때문에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수필이 좋았다 또는 감동을 받았다 등의 평가를 들어야 했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피드백의 결과를 적은 위 수필은 고수부 문학인생의 자기 고백록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보여준 열린 자세다. 여러 사람의 논평을 하나하나 소중히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더욱 분발하라고 주는 칭찬이겠지만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충만해지며 사기가 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피드백의 소박한 힘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이런 귀한 ‘귀환’을 위해 내 안의 성장마인드셋 스위치를 늘 켜둔다.’라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의욕을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문학적 장치를 동반하면서 피드백을 ‘성장마인드셋 스위치’로 환원하는 그의 저력이야 말로 고수부 수필이 가지는 매력 중의 매력이라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가로서의 치열성이라는 열성적 태도가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시험을 보면 성적표를 받는데 이는 우리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알려주는 피드백이다. 우리말로 귀환이다. 성적표를 보고 우리는 공부 방법을 바꾸거나 더 열심히 할 수 있다. 나는 바로 이 같은 피드백은 수필집을 내고 난 후의 독자의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데서 본격수필의 꽃을 피우려는 결연한 자세를 볼 수 있다. 고수부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와 삶의 진솔한 파동이 느껴진다. 그는 깊은 의식과 반성적 성찰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주문과 자신의 수필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일 것이다.
수필의 제재는 지식에서 찾아야 할까 지혜에서 찾아야 할까. 수필 한 편을 짖기 위해 글감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많다. 어디에서 그것을 얻어야 할까. 수필은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에 훌륭한 수필은 글감이 좋아야 한다. 재료가 좋아야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줄리아 카메른이 쓴 ‘아시스트 웨이’에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창조의 샘이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갖가지 송어 떼들이 살고 있다. 그 샘에서 뛰놀고 있는 송어 떼들이 이미지요 아이디어요 글쓰기의 재료가 되는 원천이다.
- <지혜의 샘, 수필의 샘> 중에서
고수부는 다 태우지 못한 수필에 대한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수필정신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그는 지식과 지혜라는 개념을 대립항으로 놓고 분석하면서 수필과 가까운 것으로 지혜를 받아들인다. 작가는 ‘수필의 샘’을 읊조리며, 지혜란 단어에 몰입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수필은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에 훌륭한 수필은 글감이 좋아야 한다. 재료가 좋아야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라고 언급하면서, 줄리아 카메른이 ‘아시스트 웨이’에서 말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창조의 샘을 떠올린다. 거기에 살고 있는 갖가지 송어 떼들이 이미지요 아이디어요 글쓰기의 재료가 되는 원천이라고 하면서, 그는 “수필의 글감은 바로 우리 영혼의 샘에서 뛰놀고 있는 송어떼들이다. 이러한 송어떼들을 낚아내어 독자들이 먹기 좋도록 잘 요리하여 만든 작품이 수필이라고 하면 맞지 않을까.”라고 수필의 글감을 영혼의 샘에서 찾는다. 일상에서 꽃피우는 재료보다는 영혼으로 버무려낸 그림이 멋진 수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고수부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자신의 신앙과 삶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지혜의 샘을 고취시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고수부가 지식보다 지혜에 방점을 찍고 수필의 글감을 찾는 데 있어서 영혼의 샘을 언급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모습까지 가감 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 수필은 그의 수필관을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수필가라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임을 알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이렇게 글을 쓰는 방법이 있다. 글은 내가 나에게 말하는 대화다. 물론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글을 써서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 것은 차후 문제다. 일단 글을 쓰는 순간에는 나와의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나니 나의 우울함은 어느 정도 해소된 느낌이다. 이 글을 가지고 안국동 수생반에 들고 나가 발표하고 강평을 받는 동안 우울증은 사라지고 대신 ‘다음에는 무슨 글을 쓸까’에 대한 설렘이 피어오르며 삶은 활기차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 수필 쓰기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 <찾아오는 글, 떠나지 않는 마음> 중에서
고수부는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나니 나의 우울함은 어느 정도 해소된 느낌이다. 이 글을 가지고 안국동 수생반에 들고 나가 발표하고 강평을 받는 동안 우울증은 사라지고 대신 다음에는 무슨 글을 쓸까에 대한 설렘이 피어오르며 삶은 활기차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진술을 통해서 수필을 통해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신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하루 치의 글쓰기를 마치고 나면 무엇인가 바꿀 수 없는 충만함으로 빛난다. 그 자체로 순간순간 나는 받을 것을 다 받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글이 내게 찾아왔을 뿐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글쓰기는 우울증을 푸는 좋은 친구이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준다는 진술로 볼 때, 그는 수필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비록 문학적으로 뛰어난 글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그의 작가적 태도는 삶에 대한 사색이며 음미다.
그는 삶을 천천히 맛본다. 수필은 시간의 관성에 따라가지 않고 느리게 순간을 즐기며 주위를 돌아보는 진지한 성찰 작업이어야 한다. 훌륭한 수필가는 방랑가요, 게으름뱅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구원성’에 있다.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작가를 구원한 작품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의 지친 영혼을 달래준다. 고수부는 ‘글은 내가 나에게 말하는 대화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골 깊은 고독을 해소할 수 있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내 안에 피어나는 아집과 헛된 욕망의 실체를 자주 대면하면서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언젠가 작가의 마음자리는 큰 작가를 보장해 줄 것이다. 그것이 글을 풀어냄으로써 작가가 받는 보답이며 글을 읽음으로써 독자가 얻는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자아의 노력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일 터, 그것을 작가는 ‘자신과의 대화’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3. 구원성과 영원성을 묘파한 손맛
D.H.로렌스는 그의 에세이 곳곳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인간중심적이기보다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동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수부는 객체 지향 존재론으로 현실의 메마름을 극복하는 작가다. 어둠이 사라지면 빛나는 새벽이 올 것을 믿는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신앙밖에 없다’는 이런 깊은 신앙은 고수부 수필에 영성을 불어넣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구원과 영원한 곳을 향한 발걸음에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그 신앙이 굳으면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그 애타는 탈출의 귀착지는 교회다. 인간은 자기 속에 무엇인가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지속적으로 믿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이 경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그 믿음도 언제까지나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만다. 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을 표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인적 신에 대한 신앙의 힘이다. 복음서에 적혀있는 역사적인 보고는 역사적으로 본다면 틀린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신앙이라는 것은 ‘이성에 따른 보편적인 진리’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증명은 신앙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마디로 그가 지향하는 것은 절절한 믿음이다.
대부분 고수부 수필들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함에 있어서 익숙함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 기도가 이를 입증한다. <불안의 구름 속에서>에 보면, ‘사건·사고 소식이 그칠 날이 없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의 삶은 마치 파리 목숨처럼 가볍고 위태롭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문득 떠오르는 찬송가 한 구절이 있다.’찬송가를 통해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작가의 신앙심이 묻어난다.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만나는 신앙은 기도를 통하면 박하 향기처럼 상쾌하고 레몬 향기처럼 상큼한 손맛을 낸다는 것이 고수부 작가의 지론이다. 고수부의 수필에서 가장 빛나는 메시지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풍겨난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젊게 가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문학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문학 중에서도 수필이 제일이라 여긴다. 수필은 허구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느리게 인생을 사는 방법의 하나가 수필 쓰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라투르의 행위소네트워크이론에 따라, ‘젊게 살기’와 ‘수필 쓰기’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간혹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그날 퀴논의 새까만 하늘 아래에서 벌어진 불꽃의 소용돌이가 떠오른다. 불길 속에 스러진 내 젊은 날의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그것을 붙잡아준 누군가의 손길. 어쩌면 우리 인생도 예고 없는 화재처럼 언제 어느 순간 시험과 고난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내 손을 붙잡아주고, 또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퀴논의 불길은 사그라졌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화재의 기억이 아니라, 책임감과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불멸의 불꽃이었다.
- <아 퀴논, 그날 밤에> 중에서
루카치는 ‘문학이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끊임없이 창조적인 형식 부여의 작업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그에게 문학 작품의 올바른 형식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해 강조되는 형식은 어떤 내용에 주어진 미적 형태, 즉 한 작품에의 시대나 작중인물과 사회상황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기법적 특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고수부에게 힘이 되었던 건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죽을 뻔한 상황에서 살아난 사건이다. 삶은 인간의 잡다한 감정들과 마주하면서 마음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풀기가 힘들 때도 있다. 힘들 때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고 쓰다듬어주는 ‘불길 속에 스러진 젊은 날의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그것을 붙잡아준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 작가는 일상을 새털처럼 가볍게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만나는 ‘퀴논, 그날 밤의 사건’은 엄숙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견한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퀴논에서의 구사일생 경험담은 신앙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지닌 인생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푸는 시발점이 되었다.
어떻게든 군인으로서 죽음을 불사하고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떳떳함을 누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비록 불발되었지만 눈물겹게 읽힌다. 순간적인 판단이 불러온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자의 환희를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불멸의 불꽃’으로 돌리고 있음을 볼 때, 그의 신앙은 단지 신의 위력에 의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신과 인간의 관계에 밀접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사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잘 보여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공존의 힘이다. 이 수필은 이런 힘찬 가치들을 조합해서 잘 정리해 놓았다. 이 글이 주는 힘은 우리가 느끼는 인생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는 머리로 이해하는 세상살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느끼는 세상살이다. 작가가 중요시하는 건 머리와 가슴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공병장교로 근무하면서 죽을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상사를 잊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두 번 다시는 없을 자살충동을 극복했기에, 오늘 그는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전쟁터에서의 깨달음이 신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해 보게 된 것이다.
그때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늘 아침마다 성경 구절을 보내주는 마봉원 집사님의 카톡이었다. 무심코 넘기려던 찰나, 유독 눈에 들어온 말씀이 있었다. 마가복음 11장 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 이게 응답이구나.’ 지금 당장 눈이 밝아지지 않았더라도, 이미 응답은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받은 줄로 믿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곧장 아내에게 전했다. “여보, 아직 눈이 안 보이더라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때가 이르매> 중에서
이 수필을 읽는 묘미는 아내의 시력 회복에 대한 기도를 통해 작가가 아내를 달랠 해법을 찾아가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있다. 교회에서 주도하는 52일간 하는 새벽기도회에 참여하기로 하고 고수부 부부도 새해 첫날부터 완주를 목표로 정했다. 다만 교회로 직접 가는 대신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에 임하기로 했다. 자신에게는 아내인 사람의 약화된 시력을 기도를 통해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가 비신도들에게는 무모해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진심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자 실망하면서도, 한 집사가 보내준 성경 구절을 보면서, ‘아, 이게 응답이구나.’라고 하는 진술은 고수부 작가의 신앙심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성경의 약속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며 웃었던 사람이 아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달 동안 매일 새벽마다 한 시간 넘게 기도한 끝에, 그는 ‘응답은 시력 회복이 아니라 믿음의 회복으로 나타났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눈물보다 끈적한 부부애의 향기와 믿음의 회복을 믿는 두 분의 신앙심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하느님의 권능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크리스쳔 작가의 수필에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려는 작가의 노력은 문맥의 곳곳에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부부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작가는 아내와 함께하는 새벽기도를 통해서 아내의 시력이 회복되길 바란다. ‘기도 제목은 변함없다. 아내의 시력 회복. 하지만 지금은 단순한 회복을 넘어서 믿음이 깊어지기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새벽마다 성경을 펴고, 손을 모으고, 다시 그 말씀을 되뇐다.’는 표현에는 고수부의 아내에 대한 진한 사랑이 녹아 있다. 아내가 시력이 안 좋아 절망했을 시간들 속에서 겪어야했던 모진 아픔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는 ‘기도 제목은 변함없다’는 말로 잘 표현하고 있다. ‘믿음을 따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그 약속 하나 붙들고 오늘도 새벽을 연다.’라는 마지막 멘트로 자신도 아직 믿고자 한다는 말을 놓치지 않는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부부애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인간애의 고양으로부터도 나온다. 이 글도 이러한 힘을 느끼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 남편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 이상이다.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소중한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작가는 이런 점을 잘 알기에 아내가 건강해야 한다는 점을 ‘새벽기도’에 담고, 그래야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성경 구절’에 담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시켰다. 주제를 제재에 담아 문학적으로 조리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고수부의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문제를 찾아서 지난 세월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소재의 측면에서 평범성의 한계를 보이지만, 나름대로 문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묻어나서 그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재를 통해 주제를 우려내는 솜씨의 탁월성이 수필가 고수부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하겠다.
나는 그처럼 확고한 믿음이 부럽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 감옥에서도 찬송을 멈추지 않는 용기, 순교를 앞두고도 주저하지 않는 믿음. 그런 믿음을 나도 갖고 싶다. 주여, 적의 포화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울 같은 믿음을 내게도 허락하소서. 순간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삶의 끝자락에서도 당신의 평안과 확신으로 내 영혼을 붙들어 주소서.
- <포화 속의 기도> 중에서
위 인용 글은 <포화 속의 기도> 결말부 내용이다. 고수부는 이 수필을 통해 자신의 흔들리는 믿음을 피력하고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의 고비마다 의심이 올라오곤 한다. 믿음이라는 것도 유동적이다. 한순간은 믿음으로 가득하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 의심이 고개를 든다. 애정도, 우정도, 신앙도 때로는 변한다. 상황이 유리하면 하나님을 찾고, 불리하면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본성이다.’라는 진술이다. 결정적인 흔들림은 월남전에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에 부하의 목이 날라간 것을 본 순간, 매복 작전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니 걱정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죽음이 실제로 닥치자 그 믿음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믿음보다 더 앞선 건 생존 본능이었다.’고 고백하는 그에게서 우리는 인간 그 자체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 수필이 주는 감동은 솔직함으로 흔들리는 믿음을 잘 표현, 수필의 맛을 잘 끌어올리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나는 그처럼 확고한 믿음이 부럽다.’는 표현 속에 약간의 흔들림이 포착된다. 그러나 결말부에 가서는 한 단락 전부를 기도로 채울 정도로 그는 흔들림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절차에 참회의 기도 순서가 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으나 자신의 이익과 이생의 안목에 사로잡혀 살았던 잘못과 은밀하게 지은 죄를 침묵으로 고백하는 시간이다.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남몰래 저질렀던 검은 마음을 확인하고 회개하는 순서이다. 그 시간에 나도 회개하는 순간을 갖는다. 포겟용 손거울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손거울을 꺼내서 비춰보면 여기저기에 시커먼 먼지들이 쌓여 있다. 화를 내지 말았어야 할 순간에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검은 점들이 보인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정직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도 않은 위선적인 검은 점들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밝히지 못할 죄를 침묵으로 회개하는 그 시간은 엄숙하다.
- <거울 하나 거울 둘> 중에서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다. 그 반성의 기회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잘못된 것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할 수가 있는 나약한 존재다. 참회의 기도시간이 되면, 그는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 남몰래 저질렀던 검은 마음을 확인하고 회개’한다. 이 대목은 그를 보통 작가 이상으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참회를 통해 우리 시대 인간상을 다시 반추하게 한다. 포켓용 손거울은 외모의 흠을 확인하지만 양심의 손거울은 인간의 내면에 쌓인 검은 점을 찾아낸다. 그래서 고수부는 또 하나의 손거울을 추가하여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외모를 단정하기 위한 포켓용 손거울이며 또 하나는 핸드폰에 내장된 양심의 손거울이다. 이중구조로 직조한 문학적 성취가 돋보인다.
이런 문학성이 있는 글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돌출되는 검은 점을 찾아내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외모를 단정히 하고, 내면의 양심도 살펴보겠다는 그는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을 가진 작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참회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원래 수필은 반성적 성찰의 글이다. 고수부의 수필은 한마디로 구원이 있는 성찰의 공간에서 출발한다. 어딘가에 부드러운 곡선의 안식처가 있을 것 같은 작가다. 그래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머문다. 참회하는 수필들은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시커먼 먼지를 닦아낸다. 포겟용 손거울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손거울을 꺼내서 비춰보면 여기저기에 시커먼 먼지들이 쌓여 있다. 화를 내지 말았어야 할 순간에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검은 점들이 보인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정직한 척했지만 속은 그렇지도 않은 위선적인 검은 점들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 수필은 일반적 인식이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런 그만의 예리한 참회는 경험자의 진술이라는 지점에서 보편성을 띠며 공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진정한 자세라는 측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의 이상이자 누구나 찾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인생은 후회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고 있는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삶의 체계 속에서 본말, 대소, 경중을 항상 마음속으로 고려하여 지금의 온갖 지식을 만들어 참으로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양심에 따라 스스로 정진 노력하는 데 모자람이 없어야 하고 자기 반성을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를 따라 힘껏 살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수부는 확실히 향기를 지닌 사람이다. 수필이 수필다운 향기를 지니려면 우선 수필가 자신부터 자기의 분명한 향기를 지녀야 한다. ‘자기 향기’란 작가의 숨결이요, 체취다. 이런 체취는 문체로 잘 드러나며, 독자는 작가의 체취를 음미하기 위해 시나 소설보다 수필을 즐겨 찾는다. 자기 향기가 없으면 자기 영혼이 없다는 것이며, 영혼이 없는 사람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이미 사람이 아닌 바와 마찬가지로 수필 작품에도 언제나 작가의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만의 향기를 갖추는 일이다. 한 편의 글을 쓰면서도 쉽게 쓰지 않는 성실성을 보여준 점도 감동을 주지만, 이 글에 담긴 메시지가 큰 공명을 울려주기에 고수부의 글에 독자들이 매료되는 된다고 하겠다.
Ⅲ.
고수부의 수필을 읽으면, 그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것은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인과율에 의해 삶은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인생은 뱃길이다’라는 말로 의미화하였다. ‘사랑’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으니, 그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주체적 행보라 할 수 있다. ‘외모를 젊게 하려고 흰머리를 염색하듯 마음을 젊게 하기 위해서는 문학이라고 하는 염색약으로 퇴색한 마음을 푸르게 염색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우리 사회의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할 것 같다. 삶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의 운명은 신앙생활에 달려 있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이것을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고, 구도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문학이라는 염색약’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헤겔의 어법에 따르면, 작가는 디지털문명이 드리워진 현실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희망을 보여주어야 하는 현세적 책임을 짊어진 예언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필은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을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는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고수부의 수필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참신한 인식의 힘이다. 수필 한 편 한 편이 진실하고 성실한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즈’에서 나온다. 수필은 제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통해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는 선인들처럼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정신을 길렀다. 고수부의 수필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감동과 반성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미적 감동을 준다. 유경환은 수필을 쓰는 사람의 삶은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오랜 수필 수련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의 수필이 나왔겠는가. 인식과 형상이 조화된 본격수필을 다시 만나게 되어 글을 읽는 한동안, 나는 행복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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