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破墓' 라는 제목을 보니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도올아인 오방간다>라고 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한국
현대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소개했는 내용중
'국립묘지에 묻힌 이승만 시신을 파내야 한다’라고 한 표현이
연상된다.
여기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특정 인물을 대하는, 또는 사건이나 사상을 취급하는 시각은
해당인의 성장 과정과 지식, 경험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비추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사실에 대한
평가의 차이로서 나타나는 결과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범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기술하거나,
전혀 다른 의도로 실행한 게 명백한데도 그와 다른 해석자 본인의 해석을 추가하여 해당 인물이 ‘이런 의도를 가졌다’라고 주장
하는 경우에는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
김용옥은 이승만이 범한 여러 과오를 거론함과 함께 ‘4.19혁명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한’ 지도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승만이 많은 과오를 범했으며 국민의 뜻으로 권좌를 떠난
독재자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승만에게 과오는 있으나 공을 인정하여 그대로
둘 것인가, 과오를 덮을 만한 공적이 없으므로 이장할 것인가는
가치판단 의 영역이니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주장은 도울이 할 말이 아니다.
정치권력이 기층사회에 침투하려는 구체적 역사현상은 郡縣制
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군현제의 운영은 후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수의 군현이 屬縣의 상태로서 지방
의 관직인 外官이 부재한 상태로 이루어 졌다.
이러한 군현제 운영의 不振은 향교운영에 문제점을 노출하는
것이었다. 향교의 적극적인 儒學교육의 면모가 우리 역사에 나타난 것은 조선에 이르러 군현제의 재정비와 강력한 운영이 실시되던 시기이다.
한편 향교교육은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지방장관 시험에 합격한 鄕貢에 대한
지방에서의 천거가 있었다. 이는 개경과 함께 지방에서의 교육의 실상을 示唆하는 것이고 군현제의 강화와 함께 실시
되는 조선시대의 향교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향교의 교육.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따라서 향교의 전반적 설명은 조선왕조에서 전개된 역사상을 중심으로 설명된다.
향교의 배치는 配享공간과 講學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들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에 배향공간을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평지에 건축된 羅州鄕校의 배치와 평면을 살펴보면,
이는 전묘후학의 배치로 남쪽 정문인 外三門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의 중심으로 출입하는 정문인 內三門까지 직선의 길이 나 있다.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를 이룬다.
기장향교의 건물의 배치 형식은 남북 직선을 축으로 명륜당을 앞쪽에, 대성전을 뒤쪽에 두는 전형적인 前學後廟의 배치이다.
그러나 密陽鄕校에서처럼 동쪽에 강학공간, 서쪽에 배향공간
을 두는 예외적인 배치법도 있다.
동래향교도 명륜당 우측 뒤편에 대성전을 두어 동서로 구분
되어있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향교나 書院의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 건물 배치의 원칙 에 따라 문묘와 명륜당을 직선상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주변 지역의 지형의 특색에 따라 배치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