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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불명(不飛不鳴)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不 : 아닐 불(一/3)
飛 : 날 비(飛/0)
不 : 아닐 불(一/3)
鳴 : 울 명(鳥/3)
(유의어)
복룡봉추(伏龍鳳雛)
삼년불비불명(三年不飛不鳴)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
와룡봉추(臥龍鳳雛)
용구봉추(龍駒鳳雛)
출전 : 사기(史記)의 골계열전(滑稽列傳), 여씨춘추(呂氏春秋) 중언편(重言篇)
사기(史記)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제(齊)나라 위왕(威王)은 날마다 음주가무뿐 아니라 음탕한 놀이도 서슴지 않고 즐기며 정사는 중신들에게 맡겼다. 이에 정사가 문란해지고 신하들 사이에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으나 누구도 함부로 나서서 위왕에게 간언하지 못하였다.
이때 순우곤(淳于髡)이 위왕에게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不蜚不鳴) 새'가 무슨 새인지 물었다. 위왕은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르며,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순우곤의 의도를 알아챈 위왕은 비로소 정사를 정상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중언편(重言篇)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거의 3년 동안 날마다 주색에 여념이 없었고, 이를 간언하는 신하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오거(伍擧)가 연회석에서 장왕에게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새가 무슨 새냐고 물었지만 장왕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주색에 빠졌다. 이후 충신 소종(蘇從)이 같은 질문을 하자 그때야 뜻을 이해하고 정사를 바로잡았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은 재능이 있는 자가 재능을 발휘할 때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일단 뜻을 펼치면 큰일을 한다는 긍정적인 말이다. 복룡봉추(伏龍鳳雛: 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새라는 뜻으로, 초야에 숨어 있는 훌륭한 인재를 말함), 와룡봉추(臥龍鳳雛: 누워 있는 용과 봉황의 병아리), 용구봉추(龍駒鳳雛: 뛰어난 말과 봉황의 병아리) 등도 인재가 때를 기다린다는 뜻도 있으므로 불비불명과 비슷한 고사성어이다.
초(楚)나라 장왕(莊王)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22대 군주, 6대 왕. 초나라의 군주 중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며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출생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원전 614년 부친인 초 목왕이 급사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왕 때부터 불안정한 왕권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어린 나이 때문에 그의 재위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거기에 재위 초반에 일어난 홍수, 냉해로 인한 기근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를 진정시키려 측근 반숭과 영윤(재상) 자공이 동정을 나간 사이 약오(초나라 제14대 군주) 씨족(대대로 재상을 배출해온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인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공자 섭을 내세우고 수도를 장악한 다음,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향했다. 그러나 여 땅에서 즙리와 습윤 등의 유인에 빠져 사망하고 장왕은 간신히 풀려난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이 조금 진정되자 장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지한 채로 매일 사냥과 주연을 벌였다. 몇몇 대신들이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장왕은 "간언을 하는 자는 대부(大夫)와 상오(常晤)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활이 3년이나 지속되면서 정계에는 간신들이 들끓게 되었고, 국력은 나날이 쇠락해졌다.
초 장왕 3년(기원전 611년), 이렇게 매일 같은 방탕의 끝에, 참다 못한 '오거'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렸다. "언덕의 새 한 마리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어떤 새입니까(有鳥在於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장왕이 말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다니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三年不蜚,蜚將沖天), 3년 동안 울지 않았다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三年不鳴,鳴將驚人). 경의 뜻은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시오(舉退矣,吾知之矣)."
그 뒤로 몇 달이 지나도록 장왕은 여전히 향락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거의 친구이자 또 다른 충신인 대부 소종(蘇從)이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자, 장왕은 비로소 잔치상을 치우고 소종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고는, 다음날 그동안 아부하던 간신들을 숙청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3년에 걸친 사치와 향락은, 나라가 너무나도 혼탁해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없자, 일부러 사치와 향락을 즐겨 옥석을 가리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간신들을 처단한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이후 신분이 미천하고 촌 사람이었던 손숙오를 영윤(재상)으로 삼고, 토지 개간 및 화폐 개혁을 실시해 국력을 크게 키우며 패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유명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이다. 그야말로 간지 폭풍의 일화. 조상들도 저 일화에서 간지 폭풍을 느꼈는지, 이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가 상당히 많다. 불비불명(不飛不鳴),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 삼년부동불비불명(三年不動不飛不鳴) 일비충천(一飛冲天) 일명경인(一鳴驚人) 등 보면 알겠지만 위 일화에서 오거와 장왕의 대화를 한자로 풀어 만들어진 고사성어들이다.
패자를 자처하다
초 장왕 3년(기원전 611년), 용(庸)나라를 정벌하였다. 초 장왕 6년(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차 200승(대)을 얻었다. 초 장왕 8년(기원전 606년), 장왕은 육혼(陸渾)의 융(戎)을 정벌하고, 낙하(洛河)에 이르자, 주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한편 위기를 느낀 주나라는 권력은 없었지만, 종주국이라는 명목은 있는 나라였는데, 주정왕(周定王)은 왕손 만(王孫 滿)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주나라의 사신인 왕손 만이 오자, 초 장왕은 '구정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는데(問鼎輕重), 왕손 만은 "천자의 자리는 정(鼎)이 아니라 덕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어찌 정에 대해 물으십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는 초장왕의 말은 "중원의 패자가 되어 천자의 권위를 내가 가지겠다"라고 떠 본 것이고 사신인 왕손 만은 "아직 덕과 명분이 주나라에 있으니 천자의 권위를 넘보지 말아라"라는 뜻이다.
그러자 장왕은 껄껄 웃으며 "우리 초나라는 도검과 갈고리에 붙어 있는 날 만을 꺾어 녹여도 구정을 여럿 주조할 수 있지요"라고 하면서 허울 뿐인 권위 따위는 초나라의 무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말했는데, 이에 왕손 만은 "먼 옛날 순과 우임금의 치세가 성하자 정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神奸)'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라의 걸이 덕을 어지럽히자 정은 은나라로 옮겨갔고, 은나라의 주가 포악하게 굴자 정은 주나라로 옮겨갔습니다. 덕이 있다면 구정은 작아도 무거운 법이고, 간사하고 사악하면 아무리 커도 가벼운 법입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하긴 하였지만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의 경중을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고, 장왕은 이를 듣고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버리게 되었다.
참고로 구정은 하나라 때 만들어진 솥으로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국보였는데, 그것의 무게를 물어봤다는 것은 자기가 그 솥의 주인이 되어 초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겠다는 속마음의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장왕의 초나라가 패권국을 넘어서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종주국이 되려고 했던 야망을 표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 사신은 '아직 덕과 명분은 주나라에게 있다. 이는 초나라의 군사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부분이다'라고 지적하였고, 초 장왕도 이를 인정하고 물러난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초나라가 주나라가 아닌 상나라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주나라 질서가 아닌 묘족의 영역에 위치한 나라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즉 상나라 전기 이주민으로 시작한 만큼 주나라보다 기원이 길면서도, 장강에 위치하여 주나라를 벗어나 독자 의식을 가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오나라는 주나라의 중시조의 자손이 세운 나라이니만큼 주나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 나름의 명분이 있지만 초나라는 주족이 개척한 제후국이 아니라 상족과 묘족들이 후대에 주나라에게 명목상 복속한 것이기 때문에 주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적었다.
다른 제후국들이 현실적인 힘이야 어찌됐든 명목상으로나마 주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오나라 역시 시조가 주나라 왕실의 혈통이라 봤기 때문에 일정 부분 주나라의 체면을 지켜준 반면 초나라는 전혀 연관 관계도 없고, 신세진 것도 없었기에 주나라를 경시했다.
초나라가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초나라가 중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지 복속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이는 군주의 명칭을 주나라와 같은 왕을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황제란 단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천자의 공식 작위는 왕이었고, 제후국들은 오등작 명칭을 사용했다. 장왕의 발언은 단순히 그의 야망이라기보다는 초나라의 야망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투월초의 난
초 장왕 9년(기원전 605년), 투월초(鬬越椒)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어떤 이가 투월초를 모함했는데, 장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워서 전쟁 중에 장왕을 두 번이나 활로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선 장왕이 투월초의 화살에 맞아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이 초나라에 보물로 내려오는 화살이 3발이 있는데, 그걸 투월초가 두 발을 훔쳐가서 이제 두 발을 다 썼으니 다시는 장왕의 목숨을 노릴 일이 없다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이런 소문을 퍼트린 한편으로 장왕은 계략을 써서 투월초가 활을 쏘는 것을 못하게 막아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게 하여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때 투월초와 대결한 사람은 양유기(養由基)였는데, 양유기는 버들잎을 100보 앞에서도 맞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은 활쏘기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먼저 투월초가 3발을 쏘자 양유기는 활로 막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화살을 이로 물어서 투월초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다음에 한 발로 투월초를 쏴서 반란을 제압했다. 그 뒤에 초 공왕은 양유기가 재주만 믿고 함부로 날뛰니, 활을 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초장왕 13년(기원전 601년), 서(舒)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 시대 최대 스캔들
초 장왕 16년(기원전 598년), 진(陳)나라에 하어숙(夏御叔)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하어숙의 부인인 정나라 출신 하희(夏姬)는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하어숙이 죽고 난 이후 하희가 정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정분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진(陳)나라의 군주였던 영공(靈公)까지 하희와 스캔들이 나서 하희의 아들이었던 하징서(夏征舒)가 영공을 살해해버렸다.
당시 맹주였던 초 장왕은 신하가 군주를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진(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은 진나라는 성벽이 높고 양식이 많으며 무기가 많아 작은 나라일지라도 쉽게 정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장왕은 그 말을 듣고서 진(陳)나라가 그 정도로 성벽이 높으며 양식이 많고 무기가 많다는 것은 백성들을 고달프게 해서 성벽을 높게 하고 양식을 빼앗으며, 무기를 만들게 해 그 원망이 얼마나 클 것이냐라고 하며 진(陳)나라를 쉽게 정벌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陳)나라를 공격했다.
장왕은 진(陳)군을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여버리고 하희를 초나라로 데려왔다. 하지만 하희가 워낙 미인이라 장왕이 탐을 내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신하인 신공 무신(申公 巫臣)이 하희는 남자를 망치는 여자라 하면서 장왕이 후궁으로 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자 장왕은 그 말을 들어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신하에게 하희를 시집보냈다. 하지만 그도 전쟁에서 죽게 되자 하희를 고향인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5년 후, 제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무신이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무신이 제나라로 가던 도중 정나라에 있던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초 성왕은 무신의 가족을 몰살시켜버렸다. 신공 무신은 초의 재상인 영윤 자중과 사이가 나빴는데, 영윤 자중이 송나라를 정벌한 공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를 하사해달라고 했지만 무신이 반대하여 영지를 받지 못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무신의 아들은 죽고 그 재산은 대부들이 나누어 가졌다.
잘한 것 하나 없는 무신은 이에 극도로 분노해 양심은 있냐? 진나라 군주에게 본인을 오나라로 보내주면, 오나라를 크게 일으켜 두고두고 초나라의 근심거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듣보잡 나라였던 오나라는 무신에 의해 중원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합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자서와 손무를 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하고 종묘를 불태우기까지 이른다.
고작 몇 사람의 성욕 때문에(...) 여러 가문과 여러 나라가 쑥대밭이 된 나비 효과인 셈이다. 어이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근대에는 나라의 정책 결정이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에 개인적 원한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국익에 별로 도움될 것도 없는데 그냥 순수하게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릉대전을 일으킨 유비라거나.
지과위무(止戈爲武)와 사망
초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 장왕은 정나라를 공격하여 포위를 하고, 세 달 만에 함락시켰다.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쳐 굴복시키자, 진문공(晉文公) 이후 중원의 패자를 자처하던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필(邲) 땅에서의 전투에서 진나라(晉)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초장왕이 정나라 땅 형옹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 신하 반당이 말했다.“임금께서는 어찌 병장기들을 끌어모아 쌓고 진나라 군의 시신을 거두어서 경관(京觀)[18]을 만들지 않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승전을 하면 반드시 자손이 그 무공을 보고 잊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에 초장왕이 말했다. 잘 모르는 소리다. 글자를 봐라. '武(무)'자는 '止(멈출 지)'와 '戈(창 과)'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무릇 武(무)의 7덕은 금폭(禁暴), 집병(戢兵), 보대(保大), 정공(定功), 안민(安民), 화중(和衆), 풍재(豊財)이다. 그래서 자손이 그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두 나라 병사들의 뼈가 들판에 흩어지게 하였으니, 이것은 폭력[暴]이다. 무력을 과시하여 제후들을 위협하였으니, 이것은 병기를 거두지 못한 것[兵不戢]이다. 폭(暴)하고 불집(不戢)하니, 어찌 보대(保大)를 할 수 있겠는가. 진나라가 여전히 존재하니, 어찌 정공(定功)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바라는 것에 거스른 것이 이미 많거늘, 어찌 안민(安民)했다 할 수 있겠는가. 덕이 없으면서 제후들과 강함을 다투었으니, 무엇으로 화중(和衆)할 수 있겠는가. 남의 위태로움을 나의 이익으로 여기고, 남의 환난을 나의 평안으로 삼아 영화를 누리고자 하니, 어찌 풍재(豊財)를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무(武)의 7덕 중 나는 한 가지도 가진 게 없는데 무엇을 자손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저 선대 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전쟁에 이겼음을 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무(武)는 나의 공적이 아니다. 옛날의 밝은 왕들은 불경한 자들을 토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여 땅에 묻고 흙을 쌓아올려 큰 치욕을 받게 하였다. 그런 일로 경관(京觀)이 만들어져, 불의하고 부정한 무리들을 징계한 것이다. 지금 진나라는 죄로 삼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모두 충성을 다해 그 군주의 명에 따라 죽었으니, 내가 어찌 그들을 경관(京觀)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춘추좌씨전 中)
초장왕은 황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선군의 사당을 지어 전승을 고한 후 초나라로 돌아갔다. 초 장왕 23년(기원전 591년), 장왕이 죽으니, 그의 아들 웅심이 초 공왕이 되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중언편(重言篇)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거의 3년 동안 날마다 주색(酒色)에 여념(餘念)이 없었고, 이를 간언(諫言)하는 신하(臣下)는 사형(死刑)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오거(伍擧)가 연회석에서 장왕(莊王)에게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새가 무슨 새냐고 물었지만 장왕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주색에 빠졌다. 이후 충신 소종(蘇從)이 같은 질문을 하자 그때서야 뜻을 이해하고 정사를 바로잡았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은 재능이 있는 자가 재능을 발휘할 때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일단 뜻을 펼치면 큰 일을 한다는 긍정적인 말이다.
장왕(莊王)은 멋이나 호기심으로 놀음에 빠져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동안에 충분히 신하들을 관찰하여 쓸 수 있는 자와 쓰지 못할자를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일에 손을 대자 일거에 인사를 쇄신하고, 국정의 기반을 갖추었던 것이다. 실로 멋진 솜씨였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왕(莊王)이라는 사람은 수완가에다 예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리한 인물은 대개 그 예리함으로 인해서 부하를 두려워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반면에 좀처럼 심복 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장왕(莊王)은 그 점에서도 예외적인 존재였다. 예리한 인물이면서도 통이 큰 일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많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고서, “오늘 밤은 신분의 상하를 구별않고 터놓고 마시는 술 좌석이다. 사양말고 마음껏 놀아라” 해서 군신들이 함께 신명나도록 마셨다. 그런데 이윽고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방안의 촛불이 모두 꺼져 버렸다. 때는 이때다 하고 왕의 애첩(愛妾)을 껴 안고서 장난을 친 신하가 있었다.
애첩(愛妾)은 다부진 여인이었던 모양으로, 그 신하의 모자 끈을 떼어들고 장왕에게 호소했다. “모자의 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빨리 불을 켜고서 붙잡아 주세요.” 그러자 장왕은, “아니다. 원인을 따지자면 내가 술을 마시자고 해서 생긴 일이니까, 일개 여자의 정조를 중하게 여겨서 부하에게 망신을 줄 수는 없다”고
애첩(愛妾)을 제지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밤은 무례를 용서할 테니 모두 모자 끈을 떼어내고 술들을 마셔라.” 불이 켜진 다음에 보니까 신하 가운데 누구 한 사람 모자 끈을 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년 뒤, 장왕은 진(晋)나라라는 강국과 전쟁을 했다. 그러자 항상 아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전사가 있었다. 초(楚)나라는 그의 활약으로 마침내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장왕은 그 신하를 불렀다. “그대같은 용사가 있는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나의 부덕(不德)의 소치다. 그러한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운데는 다른 무슨 이유라도 있느냐?”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한번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무례를 범했을 때, 임금님의 따뜻한 온정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그때부터 신명을 던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날 밤 모자 끈을 잘리운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복룡봉추(伏龍鳳雛: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새라는 뜻으로, 초야에 숨어 있는 훌륭한 인재를 말함), 와룡봉추(臥龍鳳雛; 누워 있는 용과 봉황의 병아리), 용구봉추(龍駒鳳雛; 뛰어난 말과 봉황의 병아리), 자복(雌伏;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세월만 보낸다는 뜻), 퇴장(退藏; 물러나 숨어 있다는 뜻) 등도 인재(人材)가 때를 기다린다는 뜻도 있으므로 불비불명(不蜚不鳴)과 비슷한 고사성어이다.
우리는 어떤 리더를 갈망하고 있는가?
초(楚) 장왕(莊王)의 리더십에 주목한다(1)
무너진 리더와 리더십
탄핵 정국이 새삼 우리에게 리더와 리더십 문제를 깊게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향후 대한민국 호를 이끌 리더가 어떤 리더였으면 좋을까. 또 그 리더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몇 회로 나누어 풀어볼까 한다.
우리는 리더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고 기댄다. 이 때문에 리더의 자질에 대한 철두철미한 검증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그가 내뱉는 구호에 함몰되었다. 여기에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 학연, 혈연, 인연 등이 겹쳐 리더가 도저히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리더를 선택하기에 앞서 이런 구조적 병폐와 구습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전제로 향후 나라를 이끌 리더의 풍모와 리더십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5천년 중국 역사를 통해 수없이 많은 리더가 출몰했다. 제왕급 리더만 600명이 넘는다. 하지만 매력과 능력을 동시에 갖춘 리더를 찾기란 매우 힘들다.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제왕 체제의 근본적 한계 탓이기도 하지만 인간적 매력과 실질적 능력을 동시에 갖춘 리더가 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리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춘추시대 장강 이남의 초나라를 강대국으로 이끈 장왕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장왕, 어떤 사람이었나?
먼저 장왕 전후 초나라의 상황과 장왕이 어떤 인물인가를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남방 장강 이남에 위치한 초나라는 중원의 제후국과는 다른 문화와 풍토를 가진 강국이었다. 춘추시대가 시작되는 기원전 8세기 무왕(武王, 미웅통熊通)은 주(周) 왕실과 대등한 관계임을 과시하기 위해 ‘왕’을 자칭했고,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장왕이 춘추시대 패자의 하나로 군림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장왕의 성은 미(羋), 이름은 려(旅) 또는 려(呂)로 쓴다. 기원전 613년부터 591년까지 23년 동안 재위했다. 즉위한 후 왕권을 신장하는 한편 과감한 조치들을 취해, 약오씨(若敖氏) 등 수구 기득권 귀족 세력의 반란을 평정하고 청백리의 대명사 손숙오(孫叔敖)를 중용, 내정 개혁을 벌여나갔다. 수리 사업을 일으키고 군비를 강화했다.
기원전 606년에는 육혼(陸渾) 지역의 융(戎, 지금의 하남성 숭현崇縣 북)까지 정벌하고, 군대를 주(周) 왕도(王都) 교외에 사열시킨 다음 사람을 보내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의 안위 여부를 묻는 등 기세를 높였다. 여기서 문정경중(問鼎輕重)이란 고사성어가 파생되었다.
기원전 597년 필(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 동북)에서 당시 최강국이었던 진(晉) 군대를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정(政), 송(宋) 등과 같은 나라들을 귀순시킴으로써 진(晉) 문공(文公)을 이어 춘추오패의 하나가 되었다.
문정경중(問鼎輕重), 불비불명(不飛不鳴) 등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초 장왕 미려는 춘추시대 패자의 위상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즉, 주 천자의 상징인 구정의 무게를 물었다는 ‘문정경중’의 고사는 제 환공에 의해 제기된 주 왕실을 호위한다는 최소한 명분마저 거두어들이고 모든 것을 힘의 강약에 따라 국제 정세를 좌우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새로운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심세(審勢) - 삼년불언(三年不言)
고대 중국의 리더들 중 몇몇은 즉위한 후 3년을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심하게는 9년, 10년을 말하지 않고 지낸 이야기도 전한다. 상고시대 상나라 왕 무정(武丁)은 먼 왕족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궁정이 아닌 민간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어떤 세력 기반도 없었던 무정은 즉위 후 3년을 말없이 지냈다.
고심 끝에 무정은 신하들 앞에서 갑자기 졸도하는 쇼를 벌였다. 사흘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무정은 신하들에게 꿈에서 천신이 나타나 어진 인재를 소개하며 그와 함께 일하면 상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며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다. 귀신 숭배와 제사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던 상나라에서 이런 신이한 현몽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갖는 것이었다.
무정은 꿈에서 본 현자의 모습을 일러주며 그를 찾게 했고, 신하들은 부험이란 곳에서 일하고 있는 열(說)이란 사람을 찾아냈다. 이가 무정을 도와 상나라를 중흥시킨 부열(傅說)이란 인재다. 고립무원의 무정은 젊은 날 민간에서 일할 때 알고 지냈던 부열 이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이런 쇼를 벌였던 것이다. 말없이 지낸 3년은 놀고먹은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틈과 기반을 찾기 위해 고심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초나라 장왕은 즉위 후 3년을 말하지 않고 지낸 왕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장왕은 즉위한 다음 무려 3년 동안 나랏일은 도외시한 채 밤낮없이 향락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자는 죽음으로 다스리겠노라 엄포까지 놓았다. 모두들 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오거(伍擧)가 나섰다.
오거는 중국 역사상 복수의 화신으로 이름난 오자서(伍子胥)의 할아버지로 알려진 강직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장왕을 찾았으니 모두들 숨을 죽인 채 초조하게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떻게 끝날지 기다렸다. 장왕을 만난 오거는 직언이 아닌 뜻밖의 수수께끼 하나를 내며 대화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오거가 말했다. "지금 우리 초나라 궁정 뜰 앞 큰 나무에 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가 어찌 된 일인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3년을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가 있다면 대체 그 새는 어떤 새입니까?" 장왕이 말했다. "3년을 날지 않았다면 장차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듯이 날 것이며, 3년을 울지 않았다면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 무슨 말씀인지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저 유명한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란 뜻의 ‘불비불명(不飛不鳴)’과 ‘한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한번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른다’는 뜻의 ‘일명경인(一鳴警人), 일비충천(一飛沖天)’이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장왕이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지 않자, 이번에는 곁에서 장왕을 모시던 대신 소종(蘇從)이 참지 못하고 왕에게 직간을 했다. 그러자 장왕은 노기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대 말을 듣지 않겠다면?" 소종이 말했다. "이 몸이 죽어 군주가 현명해진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 뒤로 장왕은 놀이를 중단하고 오로지 정무에만 힘을 쏟기 시작했다. 장왕은 사실 3년 동안 놀고먹은 것이 아니었다. 은밀히 조정의 동태와 신하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펴왔던 것이다. 이를 ‘심세(審勢)’라 한다. 형세를 깊게 살핀다는 뜻이다. 그렇게 누구와 함께 일을 할 것인지, 누구는 내칠 것인지를 결정하고 때를 기다렸다.
장왕은 3년 만에 인사 정책을 실시해 오거와 소종을 재상으로 발탁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초나라의 국력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져 단숨에 정나라를 정벌하여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결국 장왕은 춘추시대 두 번째로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는 장왕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로써 이 성어는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 뜻을 숨긴 채 남모르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큰일을 준비하는 중국인의 속마음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줄여서 도회(韜晦)라고 하는 표현도 비슷한 뜻이다.
장왕이 당초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던 3년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은 장왕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시간’을 이용했는가 하는 점과, 또 ‘기회를 기다려’ 행동으로 옮겼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동안 장왕은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숨기는 ‘도회’의 전략을 굳게 견지했다.
식견은 준비된 기다림을 통해 갖추어질 수 있는 리더십이다. 노력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리더는 자격 미달이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나아가 세상의 흐름을 감지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말하자면 계기(契機)를 예견(豫見)하는 식견의 리더십이다.
식견(識見)과 임기응변(臨機應變)
여기서 식견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한자 문화권에서 식견이란 단어는 상당히 추상적이다. 사물이나 상황을 보아서 그 본질을 파악해내는 능력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지식, 이해력(지성), 판단, 견해, 관점, 통찰력, 분별력, 예지력 등 매우 다양한 능력이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식견’은 리더십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임기응변을 이야기해보자. 흔히들 임기응변하면 얄팍한 술수 정도로 이해하여 리더의 덕목으로 보길 꺼려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임기응변은 글자 그대로 풀자면 어떤 계기를 맞이하여 그 계기의 변화에 따라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위기나 긴급한 상황을 극복하거나 그에 과감히 맞서 해결해 나가는 능력, 즉 ‘상황조절 능력’이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게 이 능력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능력을 얄팍한 꼼수나 천박한 기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임기응변과 식견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식견 없이는 적절히 임기응변할 수 없거나 아예 못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조절하는 임기응변의 능력은 위에 언급한 대로 식견의 리더십에서 요구하는 거의 모든 능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이제 식견과 임기응변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리더에게 얼마나 필요한 덕목인지를 매력적인 리더 초 장왕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다.
장왕이 배신을 일삼는 소국 진(陳)을 정벌하러 나섰을 때의 일이다. 장왕은 공격에 앞서 몰래 사람을 보내 진나라 성의 상황을 엿보게 했다. 세작(細作)들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상황으로는 진나라를 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세작들은 그 이유로 진나라의 성이 높고 견고하고, 해자는 대단히 깊으며, 성 안의 식량도 넉넉하게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장수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장왕은 어떤 판단을 내렸겠는가? 평소 주위의 충고나 직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장왕이고 보면 세작과 장수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장왕은 바로 진나라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모두들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장왕은 그 첫 번째 이유로 작은 나라인 진의 성이 그렇게 놓고 견고하며 해자까지 깊다는 것은 백성들을 심하게 부렸다는 점을 꼽았다. 둘째, 넉넉한 식량 비축 역시 세금이 과중하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현재 백성들의 원성이 높을 것인즉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모두들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근거하여 공략 불가를 이야기할 때 장왕은 같은 물질적 조건을 통해 상대국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했다. 요컨대 장왕은 자기 역량을 벗어나 지나치게 물질적 조건을 강구하는 것은 결국 민심을 해치는 자충수이자 악수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장왕의 진나라 공략이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것이 리더의 식견이다. - 여씨춘추 사순편(似順篇), 설원 권모
다음으로는 장왕의 임기응변과 관련된 사건이다. 집권 초기 장왕의 개혁 정치에 반발하여 영윤(令尹) 두월초(斗越椒)가 반란을 일으켰다. 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장왕은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며 군사들을 격려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두월초가 활을 쏘았다. 화살은 장왕이 타고 있는 전차를 향해 날아들어 북을 뚫었다. 장왕이 급히 화살을 피하기가 무섭게 두월초의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어 이번에는 전차의 지붕을 뚫었다. 병사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허둥지둥 퇴각했다.
진영으로 퇴각한 초나라 군사들은 두월초가 쏜 두 발의 화살을 뽑아서는 서로 돌려가며 구경했다. 화살은 별스럽게 크고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모두들 이 화살이야말로 ‘신전(神箭)’이라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월초의 ‘신전’에 잔뜩 겁을 먹은 병사들을 본 장왕은 야간에 군영을 순시하는 책임자를 불러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우리 선군이신 문왕께서 당시 식(息)이란 나라를 공격하다 세 발의 날카로운 ‘신전’을 얻었다. 그런데 두월초란 놈이 그 중 두 발을 훔쳐갔다. 오늘 그 두 발을 다 써버렸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마음을 놓았고, 이튿날 장왕의 군대는 용감하게 싸워 두월초의 반란을 물리쳤다. 두월초의 신전이 초나라 군대에게 공포를 가져다줌으로써 군대의 군심이 전반적으로 동요하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신전’이 몰고 온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야만 했다. 장왕이 이 상황을 수습하는데 보여준 임기응변은 대단히 고명했다.
먼저, 장왕은 ‘신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을 부인했다가는 도리어 거짓말한다는 혐의만 사게 되고, 이것으로는 병사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왕은 ‘신전’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기지 넘치게 활을 쏜 ‘사수’와 ‘화살’을 분리했다.
그는 활을 쏜 사수 두월초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그저 ‘화살’의 대단함을 담담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활을 쏜 두월초의 실력을 자연스럽게 깎아내린 것이다. 이로써 반란군에 대한 병사들의 미신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게다가 장왕은 일부러 두월초가 두 발의 ‘신전’을 훔쳐갔다고 흘림으로써 두월초를 나쁜 자로 모는 동시에, 오늘 전투에서 그 두 발의 화살을 다 사용했기 때문에 더는 두려워할 것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다음 날 전투에 두월초의 ‘신전’이 다시 등장했더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다른 기록들을 참고해 볼 때, 장왕은 이에 대비해 명사수 양유기(養由基)를 이튿날 두월초와 겨루게 하여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군심의 안정이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장왕은 아주 절묘하게 상황을 일단 수습했고, 그런 다음 이튿날 전투를 위한 대비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장왕의 임기응변은 리더의 자질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상황이 어렵다고 무조건 현상을 부정하고 보는 리더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급작스럽게 닥친 어려운 현상을 인정하되 그 현상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 반전시킬 수 있는 시간과 대책을 마련해내는 임기응변의 힘은 장왕에서 보다시피 깊은 식견과 예리한 상황 판단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 또한 장왕이 과거 문왕 때 얻은 ‘신전’ 세 발의 이야기를 평소 숙지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임기응변이기도 했다.
리더가 위기 상황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적절하게 임기응변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백성들을 불안에 떨지 않게 만드는 리더십이기도 하다.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떨거나 상황을 과장하는 리더를 바라보는 백성의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왕의 임기응변 리더십은 리더의 안정감이란 면에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초(楚) 장왕(莊王)의 리더십에 주목한다(2)
나라의 삼보(國之三寶)
어느 날 장왕은 급한 일로 태자를 궁으로 불러 들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태자는 급한 김에 궁문에서 마차를 멈추지 않고 그냥 궁 안으로 들이쳤다. 그런데 형법을 관장하고 있는 관리가 태자의 마차를 가로막고 나섰다. 마차를 타고 들어서서는 안 될 문을 태자의 마차가 무단으로 넘어버린 것이다. 이는 엄격하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법을 어기면 마차의 끌채를 자르고 마부는 목을 베었다. 태자는 왕이 급하게 부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차를 몰고 궁문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담당관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태자의 마부를 끌어내어 목을 베고, 마차의 끌채를 잘라 버렸다.
궁으로 들어와 장왕을 만난 태자는 울면서 그 담당관을 처벌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장왕은 태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법령은 종묘사직을 경건하게 지키고 국가의 정권을 존엄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법제를 지켜서 국가 정권과 조상의 강산을 보호하는 사람은 나라의 충신이다. 그런 사람을 어찌 처벌한단 말이냐? 법령을 무시하고 개인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 위에 놓는 사람은 반역자와 같아 국가의 가장 큰 적이자 군주의 지위를 뒤엎은 가장 큰 근심거리다. 법제가 일단 흔들리면 정권도 흔들리고, 법제가 보장을 받지 못하면 정권도 보장을 받을 수 없다. 그럴 경우 내가 네게 무엇을 전할 것이며, 너는 또 무엇을 후손에게 전할 것이냐?”
말귀를 알아듣는 태자의 표정을 확인한 장왕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담당관은 설사 내가 앞에 있었더라도 나 때문에 너를 봐주지 않았을 것이며, 네가 장차 내 뒤를 이을 후계자라서 네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야말로 정말 덕과 능력을 갖춘 충신이 아니겠느냐? 이런 신하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초나라의 복이다!”
태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흘 동안 한데서 잠을 자며 죄를 뉘우쳤다. 전하기로는 태자가 훗날 즉위하여 그 담당관을 두 등급이나 승진시킴으로써 그를 표창했다고 한다. 장왕은 국가를 유지하는 법령과 그 법령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충신 그리고 그런 인재를 중시하는 정책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라고 확신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장왕의 삼보’라 부르며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칭송한다. 장왕의 삼보는 나라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세 가지 큰 축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작동될 때 국가의 기틀이 제대로 선다는 점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장왕이 괜히 매력적인 리더가 아니다. 그가 인재를 얼마나 중시하고 갈망했는지 다른 일화를 통해 좀 더 확인해 본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걱정하다 - 불식불침(不食不寢)
전국시대 개혁가이자 군사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던 오기(吳起)가 자신을 발탁한 위(魏)나라 무후(武侯)와 나눈 대화에 초 장왕이 등장한다. -오자(吳子) 도국(圖國), 신서(新序) 잡사(雜事)
무후가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는데 신하들 중 누구도 무후의 생각을 따르지 못했다. 조회가 끝난 뒤 무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 많은 신하들 누구도 자기를 뛰어넘지 못한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오기는 춘추시대 패주의 한 사람이었던 장왕의 일화를 꺼냈다.
초 장왕은 신하들과 나라 일을 상의한 뒤 자신의 식견을 뛰어넘는 신하가 없으면 물러나와 울적해 했다. 대신 신공(申公)이 그 까닭을 묻자 장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듣기에 모든 시대마다 성인이 계시고 나라마다 인재가 있다고 했소. 성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이라야 왕이 될 수 있고, 성현을 친구로 둘 수 있는 사람이라야 패주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내 능력도 보잘 것 없는데 신하들조차 나를 뛰어넘지 못하니 초나라가 위기에 처할 조짐이 아닌가 두려울 뿐이오!”
이야기를 마친 오기는 무후에게 “장왕은 그 때문에 근심하고 우울해 했는데 왕께서는 오히려 의기양양해 하시니 신은 심히 두려울 따름입니다”라 했고, 무후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군주와 신하는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들로 재능이란 면에서 객관적으로 높고 낮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군주의 재능이 신하를 앞지를 때 무후와 같은 군주는 아주 득의만만해 했다. 반면 장왕은 매우 걱정스러워 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심리 상태는 두 유형의 서로 다른 인식 상태를 반영한다.
위나라 무후가 보기에 신하들이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뜻이고, 이 때문에 당연히 군주가 되는 것임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그 자신의 자긍심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능력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게 했다. 그래서 무후는 다행과 기쁨을 함께 표출했다.
그러나 장왕이 보기에 신하들이 자신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인재의 부족과 국가의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장왕은 이런 현실이 천하의 패주가 되려는 장왕의 객관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장왕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못했다. 물론 이런 상반된 인식은 그 나름대로 성립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무후와 장왕은 모두 한 나라의 군주라는 최고 리더이다. 군주를 보다 큰 사회적 관계 속에 넣고 살펴보면 군주가 이런 사회적 역할에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그가 국가의 건설과 발전에 적극적인 추진 작용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고명한 군주라면 늘 주의력을 나라 일에 쏟고, 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야만 자신의 가치도 최대한 실현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무후의 인식은 진정으로 요구되는 군주의 역할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한 차원 낮은 심리적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장왕의 시야는 보다 넓고 그의 인식은 더욱 우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군주의 지혜와 능력 차이가 갈라진다. 이 차이는 결국 역사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사실 군주와 신하는 서로 다른 사회적 역할을 갖는다. 사회는 이들에게 다른 역할을 요구한다. 군주가 갖추어야 할 재능은 구체적 일을 꾀하는데 있지 않고 주로 신하들이 제기한 일들을 조종하고 판단하는데 있다. 군주가 신하들을 능가하는 출중한 재능과 신하들에게 일을 충분히 위임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그가 추구하는 사업은 무한한 생기와 활력을 가질 것이며, 동시에 성공의 조건과 기초를 갖추게 될 것이다.
무후는 구체적으로 일을 기획하는 면에서 어쩌면 정말로 신하들보다 뛰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개개인의 뛰어남만 볼 줄 알았지 수하 인재들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보질 못했다. 이는 리더의 주의력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과 거시적 인지력와 파악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기는 장왕의 고사를 꺼내 이를 깨우쳐 주려 했고, 무후는 부끄러워했다. 이는 적어도 무후가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리더의 풍모까지는 잃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입만 열었다 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를 남발하는 우리 주변의 리더들을 장왕은 말할 것 없고 무후를 비교해 봐도 얼마나 부끄러운가? 분명히 말하건대, 경험에도 유효기간이 있고 유통기한이 있다. 경험이 리더의 소중한 자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리더십으로 승화되려면 부단한 자기노력과 자기성찰이 따라야만 한다.
유효기간과 유통기한이 지난 경험에 매몰되어 진작에 화석화된 경험으로 모든 일을 진단하고 판단하려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하다. 해봐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해보고 그 일로부터 어떤 지혜와 통찰력을 얻은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사지는 못 생긴 여자가 잘 하더라가 아니라 그런 문화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문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심각한 인식과 성찰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리더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경험의 과장과 일반화는 조직원과 백성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은 참고의 대상이지 무조건적 자랑과 맹목적 추종의 대상이 결코 아님을 리더는 단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믿고 맡길 인재이자 멘토를 찾다
장왕의 인재관이 어떠했는지는 위 일화 하나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나라의 세 가지 보물로 인재를 중시하는 정책을 꼽았고, 자기를 뛰어넘는 인재가 보이지 않으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걱정했던 그런 리더였다. 그런 리더에게서 손숙오(孫叔敖)라는 역사상 최고의 청백리가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손숙오는 중국 역사상 손에 꼽는 명재상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초 장왕 때 재상에 해당하는 영윤(令尹)이란 고위급 벼슬을 지냈다. 민간의 처사로 있던 손숙오를 영윤 우구가 자신의 후임으로 장왕에게 추천함으로써 불과 석 달 만에 영윤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영윤이 되자 초나라에는 새로운 기풍이 생겨났다. 손숙오가 영윤으로 있을 당시 상황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료사회는 평화롭게 단합되었고, 풍습은 훌륭하게 유지되었다. 정치는 느슨했으나 단속하는 대로 지켜졌고,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하급 관리도 없어졌다. 도적떼도 사라졌다. (…) 모든 사람이 편익을 얻게 되면서 백성들은 모두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
도대체 손숙오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한 나라를 이런 경지로까지 끌어올렸을까? 이와 관련해 '열자'에 실린 일화를 소개한다. 호구 장인이란 은자가 손숙오에게 “사람에게는 세 가지 원망이 있는데 아시오”라고 물었다. 손숙오가 ‘세 가지 원망’이란 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은자는 “작위가 높은 자는 사람들이 질투하고, 권력이 큰 자는 군주가 미워하고, 녹봉이 많은 자는 원망이 뒤따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손숙오는 “저는 작위가 높아질수록 뜻을 더욱 낮추었고, 권력이 커질수록 마음을 작게 먹었고, 녹봉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베풀었으니 세 가지 원망을 피할 수 있겠지요”라고 답했다.
관리 노릇을 하는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따르기 마련인 작위, 권력, 녹봉은 관직의 높낮이에 비례한다. 사람들이 더 높은 관직을 원하는 이유도 이런 것들이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높은 작위, 더 큰 권력, 더 많은 녹봉이 있다면 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란 양면성을 갖기 마련이다. 먼저 보다 높은 작위일수록 그 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다 높은 작위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다. 높은 작위에 있는 사람은 결국 출세를 꿈꾸는 사람들이 오르려는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권이 사회에 베풀 수 있는 권력의 총합이란 객관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누군가 한 사람이 아주 큰 권력을 갖고 있다면 군주의 권력을 감소시킬 수밖에 없고, 나아가 군주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니 군주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녹봉을 받게 되면 보통 사람들의 생활수준과 격차가 벌어지게 되고 사치와 안일한 생활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그래서 원망을 사게 되는 것이다. 호구 장인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손숙오에게 사회생활을 전면적으로 통찰할 것과 보다 깊게 생각해볼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손숙오는 세 가지 원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런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한 시대의 명재상으로서 그는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세 가지 원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먼저 그는 작위가 높아질수록 마음가짐을 더욱 낮게 가진다고 했다. 낮은 작위와 무작위는 높은 작위가 존재할 수 있는 기초다. 한 사람이 영광스러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렇지 못한 다수의 민중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손숙오는 백성들을 멋대로 대하거나 능멸하지 않고 늘 존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에게서 나온 영광을 최대한 다시 돌려주려고 한 것이다. 손숙오는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했기 때문에 자리로부터 오는 시기와 질투를 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권력이 커질수록 손숙오는 더 근신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갖는 한계를 잘 알았다. 자신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이 한계선상에 올려놓고 통제했으며, 한계를 넘어 권력을 남용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군주가 충분히 자신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철저하게 위협을 피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양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해진 예의규범과 각종 현실적 요구에 맞추어 신중하게 처신하면서 평온과 적절함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그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군주의 미움이나 증오를 피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녹봉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에게 그만큼 더 많이 베풀었다. 손숙오에게는 많은 녹봉이 향락과 안일한 생활의 밑천이 아니었다. 빈민을 구제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본이었다.
이렇게 손숙오는 백성을 위해 일하는 공평무사한 관리로서의 고상한 정조를 나타냈고, 백성들 역시 이런 그에게 어떤 원망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손숙오가 다스린 나라가 어땠겠는가? 손숙오의 통치는 유연했다. 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시행했다. 다음 일화는 통치나 정책의 시행과 관련하여 유용한 지혜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초나라 민간에서는 바퀴가 작고 몸체가 낮은 수레인 비거(庳車)가 유행하고 있었다. 장왕은 비거가 말에게 불편하니 수레를 높이라는 법령을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손숙오는 “법령이 자주 내려가면 백성들은 어떤 것을 지켜야 할지 모릅니다. 수레의 높이를 올리고 싶으시다면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문의 문턱을 높이십시오. 수레를 타는 사람은 대개 높은 사람들로서 솔직히 이들이 문턱 때문에 번번이 수레에서 내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는 대응책을 내놓았다. 반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스스로 수레를 높였다.
손숙오의 이런 통치 방법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평가한다. “결국 이는 가르치지 않아도 백성들이 절로 감화되어 따르는 것이다. 즉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직접 보며 본받고, 먼 곳에 사는 사람은 주변에 보이는 것을 모방하게 되어 있다.” 관리와 지도층의 솔선수범이야말로 순조로운 통치와 정책 시행을 위한 최상의 방법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손숙오는 세 차례나 재상직에 올랐어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재능이 그 자리에 오르게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 번이나 파면되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것이 자신의 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손숙오가 얼마나 청렴결백한 관리였는가는 그 자손들이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손숙오와 함께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었던 연예인 우맹(優孟)은 손숙오의 식솔들이 형편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손숙오처럼 분장하여(우맹의관) 장왕 앞에서 손숙오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장왕은 앞서 간 청백리 손숙오가 새삼 그리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맹에게 정중한 예를 갖추어 절을 올렸다. 장왕은 진심으로 앞서 간 청백리 손숙오와 그런 손숙오를 새삼 상기시켜 준 우맹을 공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 바로 손숙오의 후손들이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게 충분한 배려를 해주었다.
장왕에게 손숙오는 부하 관리이기에 앞서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정신적 멘토였던 것이다. 리더와 그를 따르는 인재와의 관계는 장왕과 손숙오처럼 담담해야 한다. 두 사람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권력이 가져다주는 편리를 초월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함께 봉사한다는 차원 높은 경지에서의 감동적인 조우를 2600년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飛(날 비)는 ❶상형문자로 새가 날개 치며 나는 모양으로, 날다, 날리다, 빠름의 뜻이 있다. 부수(部首)로 쓰일 때는 날비몸이라 한다. ❷상형문자로 飛자는 '날다'나 '오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飛자는 새의 날개와 몸통을 함께 그린 것이다. 飛자는 본래 '날다'를 뜻하기 위해 만들었던 非(아닐 비)자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글자이다. 飛자는 새의 날개만을 그렸던 非자와는 달리 새의 몸통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飛(비)는 ①날다 ②지다, 떨어지다 ③오르다 ④빠르다, 빨리 가다 ⑤근거 없는 말이 떠돌다 ⑥튀다, 튀기다 ⑦넘다, 뛰어 넘다 ⑧날리다, 빨리 닿게 하다 ⑨높다 ⑩비방(誹謗)하다 ⑪새, 날짐승 ⑫빨리 달리는 말 ⑬높이 솟아 있는 모양 ⑭무늬 ⑮바둑 행마(行馬)의 한 가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상(翔)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의 영향이 다른 데까지 번짐을 비화(飛火), 공중으로 날아서 감을 비행(飛行), 태양을 달리 일컫는 말을 비륜(飛輪), 빠른 배를 비가(飛舸), 하늘을 나는 용을 비룡(飛龍), 날아 다니는 새를 비조(飛鳥), 높이 뛰어오르는 것을 비약(飛躍), 날아 오름을 비상(飛上), 공중으로 높이 떠오름을 비등(飛騰), 세차게 흐름을 비류(飛流), 공중을 날아다님을 비상(飛翔), 하늘에 오름을 비승(飛昇), 매우 높게 놓은 다리를 비교(飛橋), 날아서 흩어짐을 비산(飛散), 날아오는 총알을 비환(飛丸), 여름 밤에 불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방을 비아(飛蛾), 날아가 버림을 비거(飛去), 내리는 서리를 비상(飛霜), 바람에 흩날리며 나리는 눈을 비설(飛雪), 용맹스럽고 날래다는 비호(飛虎), 던지는 칼 또는 칼을 던져 맞히는 솜씨를 비도(飛刀), 띄엄띄엄 넘어가면서 읽음을 비독(飛讀), 날아 움직임을 비동(飛動), 일의 첫머리를 비두(飛頭), 힘차고 씩씩하게 뻗어 나아감을 웅비(雄飛), 높이 낢을 고비(高飛), 떼지어 낢을 군비(群飛), 어지럽게 날아다님을 난비(亂飛), 먼 데 있는 것을 잘 보고 잘 듣는 귀와 눈이라는 뜻으로 학문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의 넓고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 또는 그 도구의 뜻으로 책을 두고 이르는 말을 비이장목(飛耳長目), 날쌔게 말에 올라 탐을 이르는 말을 비신상마(飛身上馬), 천리까지 날아감을 이르는 말을 비우천리(飛于千里), 날아가고 날아옴을 일컫는 말을 비거비래(飛去飛來), 곧바로 흘러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비류직하(飛流直下), 특히 여자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이르는 말을 비상지원(飛霜之怨), 성인이나 영웅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있음을 비유하는 말을 비룡재천(飛龍在天), 모래가 날리고 돌멩이가 구를 만큼 바람이 세차게 붊을 형용하는 말을 비사주석(飛沙走石), 새도 날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성이나 진지의 방비가 아주 튼튼함을 이르는 말을 비조불입(飛鳥不入),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한 일이 공교롭게 다른 일과 때가 일치해 혐의를 받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오비이락(烏飛梨落),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 저리 흩어진다는 뜻으로 엉망으로 깨어져 흩어져 버림이나 사방으로 흩어짐을 일컫는 말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름을 일컫는 말을 혼비백산(魂飛魄散), 새가 삼 년 간을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큰 일을 하기 위하여 침착하게 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불비불명(不飛不鳴),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힘을 일컫는 말을 여조삭비(如鳥數飛), 벽을 깨고 날아갔다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출세함을 이르는 말을 파벽비거(破壁飛去), 말이 천리를 난다는 뜻으로 말이 몹시 빠르고도 멀리 전하여 퍼짐을 일컫는 말을 언비천리(言飛千里), 어둠 속에서 날고 뛴다는 뜻으로 남모르게 활동함을 이르는 말을 암중비약(暗中飛躍), 두 마리의 봉황이 나란히 날아간다는 뜻으로 형제가 함께 영달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양봉제비(兩鳳齊飛), 제비가 날아올 즈음 기러기는 떠난다는 뜻으로 사람이 서로 멀리 떨어져 소식없이 지냄을 이르는 말을 연안대비(燕雁代飛),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오뉴월의 더운 날씨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유월비상(六月飛霜), 함께 잠자고 함께 날아간다는 뜻으로 부부를 일컫는 말을 쌍숙쌍비(雙宿雙飛), 오는 해이고 토는 달을 뜻하는 데에서 세월이 빨리 흘러감을 이르는 말을 오비토주(烏飛兔走) 등에 쓰인다.
▶️ 鳴(울 명)은 ❶회의문자로 鸣(명)은 간자(簡字)이다. 鳥(조)는 새의 모양으로, 나중에 꼬리가 긴 새를 鳥(조), 꼬리가 짧은 새를 새추(隹; 새)部라고 구별하였으나 본디는 같은 자형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 것이며 어느 쪽도 뜻에 구별은 없다. 한자의 부수로서는 새에 관한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수탉을, 口(구)는 입, 소리로 수탉이 때를 알리는 모양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鳴자는 '울다'나 '(소리를)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한자를 이해하는 팁 중 하나는 글자 앞에 口(입 구)자가 있으면 대부분이 '소리'와 관련된 뜻이라는 점이다. 鳴자가 그러하다. 鳴자 역시 口자와 鳥(새 조)자가 결합한 것으로 새가 우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수탉이 운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鳴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鳴자를 보면 口자와 함께 닭 볏이 강조된 수탉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수탉이 鳥자로 표현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鳴(명)은 ①새가 울다 ②울리다 ③소리를 내다 ④부르다 ⑤말하다, 이야기하다 ⑥이름을 날리다 ⑦놀라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울리어서 진동함을 명동(鳴動), 마음에 느껴 사례함을 명사(鳴謝), 북을 쳐서 울림을 명고(鳴鼓), 산 비둘기를 명구(鳴鳩), 혀를 참을 명설(鳴舌), 종을 쳐서 울림을 명종(鳴鐘), 고운 목소리로 우는 새를 명금(鳴禽), 우는 학을 명학(鳴鶴),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짐을 명향(鳴響), 원통하거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여 나타냄을 명로(鳴露), 코를 곪을 명비(鳴鼻), 큰 소리를 내며 뒤흔든다는 명흔(鳴掀), 갑작스러운 위험이나 두려움 때문에 지르는 외마디 소리를 비명(悲鳴), 남의 생각이나 말에 동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는 생각을 일으킴을 공명(共鳴), 저절로 소리가 남을 자명(自鳴),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 바다에서 들려 오는 먼 우레와 같은 소리를 해명(海鳴), 땅 속의 변화로 산이 울리는 소리를 산명(山鳴), 때를 알리는 종이 울림을 종명(鐘鳴), 사이렌 등을 불어 울림을 취명(吹鳴), 새가 소리를 합하여 욺으로 여러 가지 악기가 조화되어 울림을 화명(和鳴), 외손뼉은 울릴 수 없다는 뜻으로 혼자서는 어떤 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 또는 상대 없이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고장난명(孤掌難鳴),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과 개의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라는 뜻으로 천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요긴하게 쓸모가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계명구도(鷄鳴狗盜),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 또는 많은 학자들의 활발한 논쟁을 일컫는 말을 백가쟁명(百家爭鳴), 함곡관의 닭 울음소리라는 뜻으로 점잖은 사람이 배울 것이 못되는 천한 기능 또는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함곡계명(函谷鷄鳴),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래킨다는 뜻으로 한 번 시작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대사업을 이룩함을 이르는 말을 일명경인(一鳴驚人), 새가 삼 년 간을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큰 일을 하기 위하여 침착하게 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불비불명(不飛不鳴), 닭이 울고 개가 짖는다는 뜻으로 인가나 촌락이 잇대어 있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계명구폐(鷄鳴狗吠), 닭 울음소리를 묘하게 잘 흉내 내는 식객을 이르는 말을 계명지객(鷄鳴之客), 새벽닭이 축시 곧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 운다는 뜻에서 축시를 일컫는 말을 계명축시(鷄鳴丑時), 닭 울음의 도움이란 뜻으로 어진 아내의 내조를 이르는 말을 계명지조(鷄鳴之助), 종을 울려 식구를 모아 솥을 벌여 놓고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부유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종명정식(鐘鳴鼎食),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라는 뜻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를 이르는 말을 일우명지(一牛鳴地), 태평한 시대에는 나뭇가지가 흔들려 울릴 정도의 큰 바람도 불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풍불명지(風不鳴枝), 개구리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댄다는 뜻으로 서투른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논을 조롱해 이르는 말을 와명선조(蛙鳴蟬噪)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