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방스의 라벤더 꽃밭
34세에 늦깎이 화가로 나서면서 동생 테오의 화랑이 있는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는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아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의 마지막 3년을 불태웠던 아를과 이후 파리 근교 오베르에서의 죽을 때까지의 힘겨웠던 50일간의 삶을 조명해봅니다.
* 아를 지도, 아릉은 중앙에서 약간 왼편에...
< 밝은 태양과 색채를 찾아, 프랑스 아를 지방에서의 생활(34-36세) >
고흐는 밝은 태양과 짙푸른 하늘 등 지중해에 면한 아를 지방의 멋진 풍경 속에서 고흐는 맹렬하게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됩니다. 아를에는 이곳 특유의 미스트랄(1)이라는 돌풍이 거세게 붑니다. 이 돌풍이 불 때 야외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말뚝을 땅에 박고 거기다 이젤을 단단히 묶어서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테오가 보내주는 돈이 형편없이 적어 물감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물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는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세상에 알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해바라기’연작>, <도개교>, <밤의 카페 테라스>,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노란 집>, <우편배달부 롤랭> 등, 고흐의 절정기 작품들이 이 때 죄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제대로 영양 섭취를 못한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 갔으며 이러한 신체적 쇠약은 섬세한 그의 정신세계를 점차 병적인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 밤의 카페 테라스
* 현재의 카페
이때 화가 고갱이 이곳으로 찾아옵니다. 고흐가 아를에 온 목적 중 하나가 일종의 예술가들의 조합을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화가들이 한데 모여서 생활하면서 작업하면 식비와 집세에 드는 비용이 절약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리의 여러 화가들에게 이곳으로 와서 같이 작업을 하자고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 고갱만이 달랑 찾아 온 것입니다.
고흐보다 다섯 살 위인 고갱은 천성적으로 모험심이 강해 그 동안 선상 노동자나 주식 중개인 등을 하며 지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민 다음에는 주식중개인으로서는 꽤 성공해서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 화가의 길을 선택했으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처자는 수입이 없는 그의 곁을 떠나 친정이 있는 덴마크로 훌쩍 떠나버렸습니다.
* 고흐의 방
두 사람의 동거 생활은 불과 두 달밖에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과 예술관은 판이하게 달랐고 게다가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고갱은 앵그르, 드가와 같은 화가를 좋아했으나 고흐는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 영화 <열정의 랩소디>에서...왼쪽 고흐(커크 다글라스 분)와 오른쪽 고갱(안소니 퀸 분)
그리고 고갱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고흐는 꼭 그 그림의 결점을 지적하곤 했으니 두 사람이 온전히 지내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드디어 188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파국의 클라이막스를 맞이했습니다.
* 별이 빛나는 론강
두 사람이 대판 또 붙자 고갱이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갱이 동네 라마르틴 광장을 막 건너가려고 했을 때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그의 뒤를 쫓고 있던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골목길 입구에서 고갱이 홱 고개를 돌려 매섭게 노려보자 고흐는 바로 고개를 떨구고 그 길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고갱은 인근 여인숙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잠을 잤습니다.
짐으로 돌아온 고흐는 자기 자신의 귀를 잘라서 종이에 싸서 평소 알고 있는 어느 창녀에게 주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짐을 싸려고 고흐의 집에 들른 고갱은 고흐가 귀를 싸매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파리로 훌쩍 떠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흐가 살점 하나 없이 귀만 싹둑 도려낸 것을 두고 입방아를 찧어대고 있었습니다.
극도의 빈궁과 처절했던 장기간의 제작활동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던 데다가 특히 정신적 긴장을 야기하는 고갱과의 마찰이 지속되면서 고흐에게 면도칼을 쥐게 한 것입니다. 특히 동생 테오의 결혼이 진행되면서 그가 보내오는 송금이 끊길지 모른다고 불안해했고 그림도 한 점도 팔리지 않자 불안감이 극도로 더해졌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강한 자극을 받거나 피곤하면 발작이 재발하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 갑니다.
*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을 일으킨 이 미치광이 화가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다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마을 사람들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고흐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동네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미치광이를 강금시켜 달라는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고흐는 아를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당했습니다.
*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의 생활
하여튼 고흐도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의 아를에 머물기를 싫어했습니다. 끔찍하고 불쾌했던 기억이 가득 찬 이 시골마을에서 한시 바삐 떠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를 북동쪽 25km에 위치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도 계속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 오늘날의 생 레미 병원
테오는 아를에서 보내 온 형이 보내온 <우편배달부 롤랭>, <씨 뿌리는 남자>,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총 7점)> 등을 받고 훌륭하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아직 일반 애호가들이 형의 그림의 진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위로했습니다. 이어서 곧 파리에서 개최되는 앙데팡당전(2)에 고흐의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드디어 고흐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내어 평가의 대상이 되는 날이 온 것입니다.
* 이곳에서 그린 <아몬드 나무>
그러던 어느 날 병원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가 아를에서 귀를 자르던 사건 이후 두 번째 발작이 엄습했습니다. 잠시 진정되어 있던 발작이 재발한 것입니다. 고흐는 자신이 그 병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발작의 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수도원이었던 이 정신병원이 어떤 종교적인 무엇이가를 자기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병원은 가끔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너무나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당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에 써서 보냈습니다.
“시간만 자꾸 흘러가는구나. 내게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시간을 다투며 계속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만일 이제 또 심한 발작이 엄습하면 나는 그림을 포기해야 될 거야. 그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해 그려야 돼. 지금 나는 그동안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것을 얻은 것 같아. 시간이 지금밖에 없구나.”
* 별이 빛나는 밤
이 병원에서 고흐는 그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습니다. 고흐는 점차 자기의 병세에 대하여 초조감이 생긴다고 테오에게 편지로 토로했습니다. 테오는 답장에서 형의 그림의 제작에 쏟는 극단적인 정신 집중이 다시 발작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아울러 너무 무리하지 말고 먼저 건강을 추스르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하며 앙데팡당전에서 전시된 형의 <붓꽃>과 <별이 빛나는 밤>이 호평을 받고 있다고 위로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고흐는 병원에서 떠날 것을 생각합니다.
< 고호의 마지막 거처, 프랑스 오베르,37세 >
* 오베르 교회
1890년 5월 17일 고흐는 잠깐 파리에 들렀다가 5월 21일 그의 마지막을 보낸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의사이자 미술애호가인 가셰를 만났습니다. 이후 라부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 2층에 거처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1층은 식당 겸 카페인데 지금도 그대로이고 2층은 고흐가 살던 그대로 재현해 놓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 집을 '고흐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90년 7월 27일에 권총 자살을 기도하고 이틀 후인 29일에 절명하기까지 약 70일 동안 고흐는 소묘를 포함하여 53점의 경이적인 숫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게다가 그림의 내용도 훨씬 훌륭해졌습니다. 그림의 밝기도 전체적으로 약간 억제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본인도 자신의 그림에 만족스러워했습니다. 하여튼 마지막 불꽃을 태운 셈입니다.
* 현재의 라부 여관(2층이 고흐가 묵었던 곳)
오베르에서의 고흐는 오전에는 그림 대상을 찾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냈고, 점심 식사 후에는 자기 방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27일에는 점심을 먹고 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관집 라부 부부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해가 진 후 현관문을 열고 고흐가 돌아왔습니다. 옆구리를 구부리고 들어온 고흐에게 라부 부부가 웬일이냐고 묻자 끙끙거리며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라부 부부가 급히 올라가자 고흐는 총탄이 관통한 심장 근처의 상처를 이들 부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가셰가 급히 달려와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고 파리의 테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테오는 형에게 즉시 달려왔고 온 종일 형을 간호했습니다. 총알은 심장을 관통하지는 않았으나 심장에 아주 가까운 부위에 박혀있어 수술도 불가능했습니다. 29일 오전 1시 30분 동생 테오는 형과 나란히 누워 형의 머리를 안았습니다. 잠시 뒤에 고흐는 “이대로 죽고 싶다”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 아침 파리와 여러 곳에서 일곱 명의 친구들이 찾아와 해바라기로 방을 장식했고, 관 옆에는 그의 그림들이 진열되었습니다. 7월 30일에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베르나르, 탕기, 라발, 피사로, 로제, 요한나의 오빠 그리고 가셰였습니다.
* 의사 가셰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는 고흐가 불타오르는 듯한 황금색 밀밭에서 권총을 쏘아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고흐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고흐가 말년에 그린 음산한 분위기의 작품‘까마귀 나는 밀밭’을 보고 대충 짐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왜 고흐는 자살했을까요? 유언을 남기지 않아 확실하게는 몰라도 자꾸만 발작 증세가 도지면서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계획적으로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에서는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있던 신경이 극도로 흥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습니다.
* 까마귀가 나는 밀밭
고흐의 죽음이 있은 후 테오는 빈센트 회고전을 개최합니다. 그러나 그도 곧 심각한 정신 착란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6개월 후에 신장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형이 죽은 지 불과 6개월만이었습니다. 23년 후 1914년 요한나는 테오의 유골을 오베르의 고흐 곁에 묻어주었습니다. 이 두 형제는 현재 오베르에 있는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묘지 울타리 너머에는 한없이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두 형제는 아무런 성공에 대한 보장도, 일체의 원조도 없이 각자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패잔병처럼 사라져 간 것입니다.
* 형제의 묘지
(1) 미스트랄(mistral)
지중해성기후와 서안해양성기후의 특징이 고루 나타나는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에는 겨울 철에 괴력의 바람이 분다. '미스트랄'은 지방풍의 일종이다. 미스트랄은 산지와 관련된 대표적인 바람으로, 산지에 축적된 차가운 공기가 산지의 경사를 따라 저지대로 불어온다.
고원지대에 눈이 쌓이면 눈 탓에 햇빛의 반사율이 높아지고, 그 결과 온도가 낮아져 고기압이 형성된다. 기압의 차가 커지게 되면 협곡 아래로 공기가 이동한다. 미스트랄의 파괴적인 영향력은 프로방스의 기후와 지형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다.
(2) 앙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
1661년경부터 프랑스 미술의 교육과 전시를 전적으로 담당하던 정부 산하의 단체 프랑스미술가협회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세>를 개최하여 오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미술계에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던 진보적 화가들은 이 전시회에 반발하여 <독립예술가협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884년 5월 심사나 시상식 없이 참가비만 내면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을 개최하였다.
파리의 한 가건물에서 열린 이 전시회는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오딜롱 르동 등이 주도하였다. 헨리 루소,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빈센트 반 고흐, 마르크 샤갈, ·모딜리아니 등 인상주의 이후의 훌륭한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앙데팡당전은 19세기 말 새로운 미술의 포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 전통에 묶인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심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각의 미술을 대중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이 전시회를 거친 많은 화가들은 현대 회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프로방스의 라벤더 꽃밭 ]
어떤 장소와 시간이 특별하게 연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아이콘처럼 기억되는 풍경이 있습니다. 가령 미국 뉴잉글랜드 버몬트의 가을 단풍,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봄을 장식하는 만개한 벚꽃의 행렬, 남프랑스 여름의 연보라색 라벤더가 그렇습니다.
* 네모친 곳이 세낭크 수도원이 있는 고르드 마을입니다. 왼쪽에 아를이...
라벤더 향이 미국의 유기농 전문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향제가 되기 훨씬 전부터 프로방스의 모든 들판이며 계곡에 보랏빛 천지를 이루며 라벤더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라벤더는 오직 6월부터 8월까지만 만개합니다. 그러니 이 시기에 라벤더 순례를 가야만 하고, 죽기 전에 딱 한 번 가보는 게 아니라 아직 건강하고 감각이 팔팔하게 살아 있을 때 가서 손가락에 꽃잎을 문질러봐야 하며 톡 쏘는 라벤더 향기를 깊이 들이마셔야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수많은 라벤더 축제가 벌어지고 시장에는 라벤더를 테마로 하는 상품들(오일, 원액, 비누 등)이 넘쳐납니다. 때로는 상술에 쉽게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많이 사도 집에 가서 후회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라벤더에서는 무엇보다 마음까지 편안하게 하는 근사한 향이 납니다. 여기다 감염을 예방하고 피부를 재생해주며 피로를 풀어주고 머리를 맑게 해줍니다.
* 고르드 마을
새벽 들판에 나가 싱싱한 라벤더를 직접 대하면, 라벤더는 그저 치유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건드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프로방스 지역의 영혼이라고 할 향기 나는 보랏빛 라벤더는 내 안에 있는 영혼의 순수함을 이끌어냅니다. 장미는 여성스럽고 감각적이며, 해바라기는 위풍당당하고, 데이지는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매력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프로방스의 라벤더를 멋지게 감상하려면 이곳 작은 중세 마을 고르드에 있는 세낭크 수도원을 꼭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수도원의 건축물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 세낭크 수도원
그리고 수도원 뒤로 라벤더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곳은 프로방스를 통틀어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이 가장 많이 찍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여행자들이 엽서나 여행사 안내 팸플렛 등에서 한두 번은 반드시 보았을 법한 곳입니다.
* 고르드의 호텔
여행 작가 콘스탄스 할은 7월의 어느 날 세낭크 수도원의 오후 5시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라벤더 밭을 지났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서자 천둥소리가 수도원을 뒤흔들었고, 곧 이어 강한 빗줄기가 석조 성당 지붕 위에 쏟아졌습니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썼습니다.
"그날 오후 나는 그저 아름다운 라벤더 밭의 엽서 같은 풍경 안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실재하는 어떤 은총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 전 세계 향수의 본고장, 그라스 ]
* 오른쪽 하단의 그라스, 왼쪽에 아를이 보입니다.
그라스는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평온한 작은 마을입니다. 세계적인 휴양도시 칸느에서 24km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는 지중해라는 특유의 분위기와는 아주 다른 특별한 세계가 뚝 떨어져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붉은색 타일 지붕과 청록색 올리브나무와 잡목 숲에 둘러싸여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언덕배기에서 자라는 사이프러스 소나무의 솔잎 향이 모든 골목을 휘감는 향기로운 곳입니다.
* 향수 공장
그라스의 깨끗한 물과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온난한 기후, 비옥한 토양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면서 히아신스, 튜브리즈, 미모사, 레몬그로브, 재스민이 가득 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을 겁니다.
원래 그라스는 중세 이전에는 가죽산업이 발달한 고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두질한 동물의 가죽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르네상스 시대에 어느 향수 제조업자가 가죽을 만드는 일꾼들의 장갑에 꽃향기를 향기를 집어넣으면서 향수 제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그라스 마을
이후 이곳 사람들은 향기 나는 장갑을 앙리 2세의 아내이자 왕을 세 명 출산한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1)에게 선물했고, 그 덕분에 그라스가 전 세계 향수의 본고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원래 이탈리아 출신인데, 프랑스로 시집올 때 함께 왔던 사람들이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라스 지방의 향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고, 덕분에 이곳은 유럽 향수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향수 진열대
그러나 프랑스에서 가죽제품에 대한 세금이 높아지면서 향기 나는 장갑의 인기가 점차 수그러들자 업자들은 아예 가죽산업에서 손을 떼고 향수제조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7세기 중반에 꽃잎을 차거운 물에 오래 담가서 향기를 더욱 짙게 우려내는 냉침법을 개발하면서 더 섬세한 향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900년 초반에는 천연 향료보다 훨씬 강한 인공 에센스를 탄생시키면서 전 세계 향수 시장을 확실히 석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20세기 최고 시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폴 발레리(2)가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글을 발표하여 일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 이론을 잽싸게 받아들여 사업을 성공시킨 사람이 코코 샤넬이었습니다.
* 향수 가게
당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코코 샤넬은 1921년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향수 제조사인 에르네스트 보와 손잡고 '넘버 5'라는 향수를 출시했습니다. 이것이 천연향에 인공화합물을 첨가한 최초의 향수였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연간 꽃 수확량은 30톤 정도로 줄었지만, 샤넬 기업은 아직도 그라스에 샤넬 향수의 원액이 되는 재스민과 메이로즈가 자라는 광대한 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1)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피렌체 공화국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적장자 후손이며 프랑스 앙리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차남 샤를 9세의 즉위를 계기로 왕국의 실권을 장악, 신구 양 교도의 충돌을 조정하며 종교전쟁 중에서도 프랑스 발루아왕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탈리아 문화와 예술, 요리를 프랑스 궁정에 도입하였다.
(2) 폴 발레리
폴 발레리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세트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을 졸업했다. 홀로 습작을 하던 중 1890년 몽펠리에 대학 개교 기념 축제에 우연히 만난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앙드레 지드를 알게 되었고 시인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뒤에 파리로 나아가 프랑스 시에서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장시 <젊은 파르카 여신>을 발표하고, 이어서 대표작 「해변의 묘지」와 「나르시스단장」 등을 담은 시집 <매혹>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