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30
10월31일 [연중 제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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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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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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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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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사랑이 전부입니다!>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야 사랑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팔청춘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서른 안팎까지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것은 너무나도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아무리 인생의 막장 앞에 설지라도, 그럴수록 사랑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목숨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것이더군요. 이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치 않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사가 잘 풀릴 때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꼬이고 꼬인 인생길을 걸어갈 때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지긋지긋한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만사가 OK인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늘 기쁨과 감미로움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면 향기로운 장미꽃 길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고통의 길을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을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결국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 인생의 전부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생문제의 해답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최종 기착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절입니다. 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라도 내 그릇된 언행, 부족한 사고, 빈약한 가치관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좀 더 사랑스런 존재,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로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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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GLKCI6XL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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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만이 당신을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이 해답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다 지쳐서 ‘그냥’이라는 해답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중년에 들어서면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에 공허함도 느낍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답을 지금까지 명확하게 주는 인물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역사상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돈도 많고 힘도 세고 나라도 다 정복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영웅이 언젠가 징그럽게 생긴 훔바바(Humbaba)라는 괴물과 싸우게 됩니다. 물론 길가메시가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엔키두라는 친구가 죽습니다.
길가메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자신도 언젠가 죽을 운명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유명하고 성공하고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죽으면 다 의미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먼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고생하다 결국 어느 먼 곳에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아주 유명한 산신령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은 죽음을 초월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를 찾아간 길가메시는 그가 어떻게 불사신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우트나피슈팀이 대답합니다. “나는 신들에게 잘 보여서 불사신이 되는 약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그것을 먹었더니 불사신이 되었소.”
길가메시는 “저에게도 그 약을 하나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약을 줍니다. 길가메시는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약을 놓고 연못에서 목욕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서 그 약을 훔쳐 가버립니다. 이 약이 없으면 죽음으로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데 뱀이 훔쳐 가버렸으니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가메시는 다시 우트나피슈팀에게 가서 약을 하나 더 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약은 한 번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길가메시가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합니까?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우트나피슈팀은 말합니다. “그냥 집에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아라.”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길가메시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오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의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우트나피슈팀이 길가메시에게 주었던 그 약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신들이 줄 수 있는 바로 그 약,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에겐 그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탄이라는 뱀, 혹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그 계명의 중요성을 잃습니다. 그래서 또 그냥 생존 욕구대로 살아갑니다.
생존 욕구는 그저 태어날 때 생존을 유지하게 하려고 넣어진 욕구이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불사의 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약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대상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창조자만이 줄 수 있는데, 창조자가 아니시면 우리에게 그런 계명을 주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누구에게도 생존을 포기하라는 욕구를 줄 수 없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욕구를 주면서 자기까지 사랑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생존을 포기하라는 사랑의 욕구를 줄 수 없다? 일본 천황은 가미카제 특공대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천황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명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양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정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 자기가 창조하고 다시 생명도 줄 수 없는 이들을 자살로 내몰면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라면 그런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피조물에 다시 생명을 줄 수 없어서 자신이 피 흘려 창조한 무엇이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이용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라? 이것은 마귀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줄 수 있는 분들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창조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당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까? 항상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녀를 창조하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영약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삶의 의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약을 주신 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도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목숨을 바친 당신 자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이 계명으로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오직 창조자만이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 영약을 절대 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래야 모든 삶이 의미로 가득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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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즉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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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라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형식적으로 봉헌하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물을 봉헌하기만 하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신의와 하느님을 옳게 아는 것을 더 바라셨습니다(호세 6,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제물을 봉헌하고 전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계명보다 강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미사에 참석한다고, 주일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감사드릴지 생각하며, 만약 미워하는 이웃이 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함께’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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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32-34)
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말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사무엘 예언자의 말에서는 ‘순종’이 강조되어 있고, 복음서에서는 ‘사랑’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생각하면, “사랑은 곧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1요한 5,3)
2)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한 분뿐이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속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속에 ‘하느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만 모든 힘을 쏟고, 다른 일에 헛심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정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사랑한다면 제사는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니고, 제사를 안 드려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전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니까 거행하는 일, 즉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례’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사랑으로, 또 정성껏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행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전례를 거행할 때에는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성을 다 쏟는 법입니다.) 사랑 없이 전례를 거행하는 경우에는 정성도 없습니다. (‘정성의 부족함’에서 ‘사랑 없음’이 금방 표시가 납니다.) 사랑도 없고 정성도 없으니 대충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4)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 쏟아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5)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세속의 ‘좋아하는 감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
즉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입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쳐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이 말을,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죽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을 얻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야고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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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1 주일이고, 10월 31일입니다. 31일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위로를 주었던 ‘잊혀진 계절’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잊혀진 계절도 좋지만 윤동주 시인의 ‘서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학생 때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성적인 사랑’입니다. 생명의 목적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생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손을 낳아 번성하는 것입니다. 작은 나비부터, 가장 큰 수염고래,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까지 이 목적은 같습니다. 이 감성적인 사랑에는 윤리와 도덕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본능에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사랑’입니다. 철학, 문학, 예술, 건축, 음악은 이런 이성적인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이성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이성적인 사랑에 의해서 꽃이 피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인 사랑’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종교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고,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 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 사랑 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 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도, 역경도, 굶주림도, 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든, 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 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 애정을 받고, 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 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 자연, 대지, 우주, 기, 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느 차원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2021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 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 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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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재성 요한 신부님]
<묵주기도의 힘과 첫째 계명>
10월 묵주기도 성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된 후 매일 아침 등산을 다녔습니다.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 1시간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지향은 ‘본당 교우들의 건강과 일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면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는 에너지를 얻어서 좋습니다.
‘묵주기도’의 정식 명칭은 ‘Rosarium Virginis Mariae(로사리움 비르지니스 마리애)’이며, 이를 번역하면 ‘동정 마리아의 장미 꽃다발’입니다.
‘인체의 호흡’에 비유될 만큼 신앙생활에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묵주기도는 구원 역사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세상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셨듯이, 우리도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쳐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째 계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은 헌법의 역할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구체적인 규정이 생겼는데, 총613개나 되었습니다. 율법 규정이 많다 보니, 율법 정신을 살기보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데 급급했고, 허례허식과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고달픈 삶을 얽어매는 귀찮은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매섭게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의식 있는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십계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큰 계명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12장 29절-31절)
이것은 613개의 율법 규정과 십계명에 부담스러워하던 사람들에게 명쾌한 가르침을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장 12절)고 하신 예수님의 당부처럼,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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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영식 요셉 신부님]
<공짜로는 다다를 수 없는 하느님 나라>
담벼락 너머 감나무가 가을과 함께 노랗게 몸치장을 하며 익어갑니다. 바야흐로 땅 은 진수성찬(珍羞盛饌)의 시절을 맞습니다. 놀랍습니다. 온 우주가 힘들여 키우는 오곡백과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쌀 한 톨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전우익 선생은 수풀 속에서 익어가는 누런 호박 하나도 결코 공짜로 굴러오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눈썰미 좋은 시인은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가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장석주 ‘대추 한 알’)며 대추 한 알조차도 허투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모세는 “하느님 백성은들어라. 기억하라!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래야 살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는 천지간에 널린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오직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제1독서 신명기 6장 2절-6절)
예수님은 법을 팔아 권력을 사고 떵떵거리며 살던 율법 학자들을 이렇게 견책합니다. “한 분이신 주님을 목숨과 정신, 힘을 다해 사랑하되 내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라! 그것이 어떤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마르코복음 12장 28절-34절)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라던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도 세월과 함께 떠나갔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떤 희생 제물이나 번제물보다 낫다고 대답했던 슬기로 운 율법학자도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랑이 부족하고 노력없이 댓가를 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법, 편법, 탈법의 카르텔이 정의와 공정의 가면을 쓰고 노력 없이 돈과 권력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해서 놀랍지도 않습니다. 수고, 희생, 연민, 환대, 사랑의 결실을 말하는 것은 강 건너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며칠 전 스님 한 분이 잘 익은 알밤과 함께 <관, 도일체고위(觀, 度一切苦危)> 다섯 글자를 적어 이렇게 멋진 해설을 덧붙여 보내주셨습니다.
“모든 종교의 기본입장은 고통의 세상을 벗어나서 완전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여기서 관(觀)은 예수님을 만나 뵙는 것, 예수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것이고 불교적으론 선악 시비 분별을 완전히 극복한 경지로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예수님을 만나 뵙는 길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라는 불청객과 더불어 산 시간이 2년이 되어갑니다. 몸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다쳐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시절 안녕하시기를, 오직 하느님과 이웃을 힘내어 사랑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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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태환 요셉 신부님]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을 규정하고 얽매는 규정들은 많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첫째가는 계명은 어느 것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우리가 더 자주 만나는 것은 사랑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많은 구절이 두려운 하느님을 말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표현도 많습니다. 하느님은 절대 군주이고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와 같이 표현된 부분도 많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인간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이 강조됩니다.
신명기에 와서 하느님의 사랑이 이야기됩니다. 모세오경 중에서 유일하게 하느님 사랑의 중요성을 언급합니다. 십계명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의 이름은 존중되어야 하며,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결론이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가지로 요약합니다.
제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두려움, 존경, 섬김, 율법, 우월감과는 다릅니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 빠진다는 것은 뭘 하는 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서 숨 쉬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속성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숨 쉬고,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며,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에겐 하느님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을 하느님처럼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연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려면 그 출발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해야 ‘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느낄수 있고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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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별지기 신부의 복음 묵상#
유튜브 듣기 : https://youtu.be/POU3LQukfh4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교리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고, 많은 시간 동안 기도도 드리고 활동도 해 온 우리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한 동안 멈칫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뭐... 사랑하는 거?”
만약 이렇게 대답한다면 백점은 맞는데, 영 찜찜한 백점이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데 그냥 머리 속으로만 아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답을 좀 더 확신을 가지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정말 이 사랑을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문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모든 것의 중심에 이 사랑이 있는지 말입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궁금증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고 계명에 관한 것은 그야말로 전문가의 전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거침없이 나옵니다. 이 정답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우리가 듣고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주님과 이 율법학자는 이 말씀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정답이기에 지금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친숙한 계명은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참 계명인 이 사랑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십계명은 그저 사람을 죄인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가르침이자 동시에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잘 이해하는 이에게 십계명은 하느님이 알려주신 사람의 잘못과 약함에 대한 안내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는 십계명의 잘못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수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사람에게 잘못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찾고자 하심이지 벌하고자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함께 기뻐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단순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또한 구원의 열쇠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빼고 다른 것에 대한 답을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이것을 빼고는 시작도 마침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주일은 그 사랑의 날입니다. 죽을 수 있는 사랑, 그러나 결코 죽지 않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 바로 이 계명을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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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경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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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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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https://youtu.be/qaJcuMV5n8Y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그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첫째가는 이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제와 영원히' 우리가 꼭 들어가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첫째 길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첫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첫째 계명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이 두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느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지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내 원수와 박해자를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힘으로부터 나오며, 하느님의 힘인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랑을 합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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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라네>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라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라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고
머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고
손발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다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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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왕따를 시킬 수 있죠?” 어떤 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면서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에 직접 물어보았냐고 여쭤보니, 자신이 나타나면 시선을 돌리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직접 그 이유를 물었는지 여쭤보니, 자기들끼리만 따로 모임을 하면서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셨어요?” 직접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을 보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본 뒤에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고 했습니다. 며칠 뒤, 이분은 환한 미소를 띠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서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모두 풀었다는 것입니다. 눈치를 보는 자매님 모습을 보며 그 공동체 분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을 걸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눈도 잘 마주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사적인 모임이 갑작스럽게 생겨도 이런 자리를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십니다.
지레짐작은 서로 간 오해를 낳고 서로 힘들게 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을 낳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은 지레짐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나의 이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불신과 오해가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사랑은 점점 커져서 우리의 진정한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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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있는 삶>
일주일 중 이틀(화, 수)은 성지에 함께 생활하는 다른 신부님께서 성지 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이틀 동안 그중에 밀린 일들을 몰아서 하곤 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또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날도 이렇게 못다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불안했습니다.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한 주를 너무 바쁘게 보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글도 안 쓰고, 강의 준비도 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으면 음악을 들으며 책만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일 빈둥거리기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한 주를 그렇게 바쁘게 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따라 흘러가는 세상이기에 내 생각이 이루어질 확률은 너무나 낮습니다. 여유 없이 힘들게 살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여유 있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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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 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 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 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 한 것과 골을 넣을 뻔 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 그저, 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큰 부자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강한 모래 바람을 만나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수색대를 조직해 사막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불행히도 아들의 생존여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끈질긴 수색 끝에 비행기 추락지점을 발견한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비행기의 잔해와 조종사의 시체만 있을 뿐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아들을 지켜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뒤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지를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써야 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의 생존법? 아니야!”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가 결국 전단지에 적은 글은 단 한 마디 였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그 외마디 절규가 사막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해 가던 아들이 그 전단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 반드시 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전단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한 아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아들을 찾는 수색작업은 고되고 험난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색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수색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아버지가 보낸 전단지를 손에 꼬옥 쥐고 쓰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 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아들을 구했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한 마디가 사막의 열기와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 LOVE
L은 웃음(laugh)이니 서로 웃는 모습을 보여라.
O는 OK이니 서로 상대의 말을 옳다고 하라.
V는 빅토리니 힘을 합쳐 승리하라.
E는 엔조이니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되라!
## 에덴 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 “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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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매일의 최고의 선택>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사랑-
요즘 강론중 ‘선택’을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흡사 새로운 발견처럼 참 반가운 말마디 ‘선택’입니다. 그러고 보니 삶은 ‘선택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잘 선택하여 살 수 있도록 지혜와 열정, 용기를 주십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타고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태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심판하십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것들만 해도 무궁무진합니다. 하루하루 날다마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입니다.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인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점에서 모세와 예수님도 일치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모세의 명령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몇날이 아니라 한결같이 평생토록 하느님 경외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거듭 이어지는 모세의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우리 하나하나 모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당장 늘 잘 보이는 곳에 써붙여 놓고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수시로 마음에 새기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살기위하여, 참 사람 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살아갈수록 사랑으로 우리 인생 날로 깊어지고 익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참 나를 알아가게 됩니다.
참으로 갈림없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와 방향, 중심과 의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최고의 선택도 모세와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롤모델로 했음이 분명합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물으시자 첫째만 아니라 둘째까지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누가 여러분을 보고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 묻는 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지체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하는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없으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엇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 막막합니다. 늘 하느님 사랑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강론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삶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제가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화장품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은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꽃처럼 제 고유의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의 사랑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예전 써놨던 자작시 두편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한 모두 주님 사랑을 표현한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임 오시면
달맞이꽃 청초한 연노랑 저고리에
메꽃 소박한 연분홍 치마
달개비꽃 영롱한 연보라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
임 오시면”-2000.7.16.
그러고 보시 제 무수한 졸시拙詩들이 온통 하느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눈이 열려 하느님 베푸시는 무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발견하고 깨닫게 되니 더욱 주님 사랑도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사랑의 천국이옵니다”-2018.10.16.
사랑의 시인,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최고의 시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주님은 하느님 사랑에 이어 둘째로 중요한 이웃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경천경인敬天敬人을 하나로 묶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해월 최시형의 말씀대로 경천과 애인(敬人)에다 만물 사랑까지 이르는 경물敬物을 더하고 싶습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가 가져오는 환경위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옛 사람들의 몸에 뱄던 경물 정신입니다.
구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만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경천경인의 중요성을 새롭게 상기시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언젠가 어느 사랑 많은 자매님이 미사예물이 적다 미안해 하기에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자매님 사랑의 삶 자체가 최고의 미사예물입니다!” 정말 진심이 담긴 덕담입니다. 사실 경천경인의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능가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성대한 전례라도 경천경인 실천의 사랑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겠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경천애인의 본질적 사랑입니다.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시자 주님을 몹시 흐뭇해 하시면 화답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참으로 경천경인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도 현실화됩니다. 아니 이런 이들 자체가 하느님의 현존이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됩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경천경인의 모범을 보여 주시며 중재자 역할을 하시는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고백 그대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사랑의 거룩함, 사랑의 순수, 사랑의 순결입니다. 바로 우리의 경천경인의 롤모델이자 결정체인 대사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평생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헌신해온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최고의 선택이 경천경인의 사랑입니다. 참행복의 비밀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랑의 선택에 이어 시종여일 한결같은 사랑공부와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예수님의 사랑 공부에 비하면 언제자 초보자처럼 생각되는 우리의 사랑 공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초발심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공부와 실천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생 매일 하는 기도와 말씀 수행의 궁극 목적도 경천경인의 사랑을 잘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경천, 경인, 경물의 사랑에 항구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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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립해 주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이 말씀은 제1독서와 복음에서 동시에 울려퍼집니다.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들려 주셨지요.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입장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니까요.
"이스라엘에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분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근본 정신을 들려줍니다.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의무를 앞서지요.
제2독서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은 새로운 계약으로 옛 계약을 완성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늘 우리를 위해 빌어 주시는 중재자 예수님의 사제직은 그분이 항상 살아계시기에 "영원"하며,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원을 가져오셨기에 "완전"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가장 탁월한 중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하는지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는 사랑으로 엮여 있습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동행하시니,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본능이고 도리입니다.
마음, 목숨, 정신, 힘은 인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어느 한 부분만으로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사실 사랑은 부분이 나뉘지 않습니다. 마음은 사랑하는데 행동은 안 따라가고, 생각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욕정 채우는데 이용하고 있다면 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 숙고해야 합니다. 사랑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체를 쏟아붓는 것이니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그래서 하느님과의 사랑은 사람 사이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이들 안에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성 삼위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사랑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가게 되지요. 한 분 하느님의 하나의 사랑 안에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된다니,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지요!
사랑하는 벗님! 묵주기도 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시길 기원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는 위드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사랑으로 분별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랑이 되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10월 한 달도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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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4zqscExq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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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마주하는
사랑의
주일이다.
첫째로
지켜야 할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있다.
사랑이
삶이다.
사랑을
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로
사랑을 뜨겁게
배우는 사랑의
여정이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하느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래서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된다.
사랑의 순간이
나눔의 순간이며
거룩한 순간이다.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을
만나는 것이
만남의
복음이다.
우리 사랑을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분 또한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구원이다.
다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사랑을
채우는 것도
언제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우리 또한 본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하기에
생명도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빛이
있다.
하느님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은
없다.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의
힘이다.
서로
사랑하는
내어주는
사랑만이
모두를 위한
살길이다.
첫째는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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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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