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의 여인들 | |
번호 : 6739 글쓴이 : 선지원 |
조회 : 868 스크랩 : 0 날짜 : 2003.04.11 21:40 |
<크루에의 명백한 스타일이 퐁텐브로.학교에 속한 작품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 1594∼96년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초상의 주제는 궁정의 호화로운 분위기와 함께 유행이었다. 두 사람의 부인이 뒤에 높은 커텐 그늘에 하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난로 옆에 앉은 하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여성의 모습,목욕을 하고 있는 두사람은 자매이고, 가브리엘 데스트레(왼쪽)와 비랄 공작부인이다. 이것은 포즈와 손에 들고 있는 반지를 통해 가브리엘 자식의 탄생과 왕이 진정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인임을 예고한 것으로 앙리 4세 왕 애인이었다.> 발루아 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암살로 생각지도 않게 즉위한 후 나바라 왕 앙리는 염문으로 서상을 들썩이는 게 유일한 인생 목표인 음탕한 마르그리트(17세 때 억지 결혼)에게 남편으로서, 왕으로서 남자로서 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쾌활 호탕하고 서민적인 앙리 4세는 36세, 남자로서 한창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후는 신교도라 국민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기즈의 후계자로 지명된 메이옌느 공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는 한 이름뿐인 국왕이었다. '왕국도 병사도 돈도 없는 국왕, 아내도 없는 홀아비일 뿐’이라고 씁쓸히 자조하는 그는 17년 전 결혼한 음탕한 마르그리트와는 당연히 별거 중이었다. 넓은 어깨에 균형 잡힌 체구, 허리에는 칼, 총을 멘 군복 차림의 그는 아주 그럴 듯한 용사 같지만 다른 손에는 류트를 들고 있었다. 어느 날 야전장에서 친구인 경기병 대장 베르가르드 공이 자기 약혼녀가 프랑스 제일의 미인이라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파리 남서쪽 100 마일 정도 떨어진 숲에 둘러싸인 쿠빌 성에서 후작 아버지와 두 여동생과 사는 가브리엘 데스트레가 그 약혼녀로, 앙리는 순수한 즉흥시인이 되어 연가를 읊었고, 친구의 약혼녀와 사랑에 빠졌다. 앙리 4세의 충실한 친구이자 가브리엘의 약혼자인 베르가르드 공은 희생자가 되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지만 왕은 얼마 안 지나 그를 소환하여 연적으로서의 처참한 임무를 맡겼다. 독신녀는 왕궁의 일원이 될 수 없으므로 앙리는 그녀를 리앙크르 공과 형식적으로 결혼시켜 보포르 공작부인으로 명하고 퐁텐블로 궁내의 프랑스 왕 전용 오파르 궁전을 제공해 주었다, “나의 아름다운 천사의 입술과 팔에 백만 번의 키스를. 그리고 나는 다음 일요일에 재주넘기를 하겠다.” 신교도인 앙리는 개종을 권하던 가브리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고 드디어 가톨릭으로 재주넘기를 했다. 이렇게 그 이듬해 1594년 3월 22일, 파리에서는 부르봉가의 왕을 영입한 지 5년 만에 겨우 ‘국왕 만세!’를 들을 수 있었다. 1998년 4월, 앙리 4세는 유럽 역사상 길이 남을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공직에 진출할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며 휴전을 수용케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36년간 계속 되던 종교전쟁의 막이 겨우 내려진 것이었다. 이렇듯 눈부신 재건 사업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은 몰락의 길로 치닫는 귀족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앙리 4세는 바쁜 와중에도 사랑하는 가브리엘에게 3명의 자녀를 잉태시켰다. 그녀에게서 방돔 공작 세자르와 훗날의 대수도원장 알렉상드르가 태어나자 마르그리트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왕비로서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 채 이혼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왕이 신분 낮은 가브리엘과 결혼하는 것 만큼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왕실의 재정적자 해결책으로서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하겠다면 문제는 달랐다. 일생 동안 자유연애만을 추구해온 ‘음탕한 마리그리트’는 그녀의 명성에 맞는 엄청난 생활비를 확실하게 챙겨야 했다. "그녀라면 뚱뚱하고 못 생겼으니까 허락해도 상관없겠지.” 1592년 마르그리트는 왕비 자리를 마리 드 메디치에게 물려줄 것에 동의하고 새 정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왕이라도 종교상 이혼 문제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수긍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하나, 로마 교황 뿐이었다. 프랑스 왕가와 메디치가가 인연을 맺게 된다면 이탈리아로서도 경사스럽고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가브리엘이었다. 왕의 세 번째 아이를 수태한 그녀와 앙리 4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했으며 열흘 뒤 가브리엘이 왕비가 되는 대관식을 파리에서 거행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자간이라는 병과 왕의 세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여 앙리 4세를 깊은 슬픔에 빠뜨린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죽음에 관해서는 독살설도 있다. 대관식 준비를 위해 왕과 측근들의 전송을 받으며 퐁텐블로 궁을 출발해서 파리로 향하는 그녀를 맞이한 사람들은 왕에게 아첨하는 것이 특기인 벼락출세자와 이탈리아계 유태인인 라 메디히였다. 그는 마리의 친척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앙리 2세에게 시집올 때 피렌체에서 데리고 온 제화공이었다. 카트린이 사망한 후에도 왕실에 그대로 종사하며 선왕 앙리 3세의 눈에 들어 세리가 되었고 유태인의 신임을 얻어 고리대금업까지 진출한 인물이었다. 드넓은 관저에서 피로연이 개최되었으며 가브리엘은 고급 향신료에 잰 레몬즙이 가미된 소스 요리 등을 기즈 공이나 공주들과 함께 즐겼다. 그 이튿날인 1599년 4월 공식적으로 부활절 미사에 참석라는 날 아침에 그녀는 라 메디히로부터 섬세한 금은 세공 장식으로 꾸민,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화려한 향수병울 선물 받았다. 몇 주일 뒤 정식으로 왕비가 될 가브리엘 데스틀레는 라 메디히가 베푼, 당시에는 고가이며 사치품인 레몬 소스 요리와 금은 세공 장식의 향수병에 넣어진 독약 때문에 마침내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설이다. 어쨌든 당년 25세, 여자를 좋아하는 앙리 4세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 했던 마음씨 고운 미인이었다. 로마교황과 메디치가의 독살계획이 성공한 것인지 자연사인지 그녀의 죽음 1년 뒤인 1600년, 47세의 왕과 28세의 마리 드 메디시스는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프랑스 도착광경은 루벤스의 그림을 통해 알수 있는데 마리의 금발과 아름다움은 괜찮은 편이었으나...앙리를 실망시킨 점은 머리에 든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왕의 염문과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그로인한 왕실 여자들의 암투는 끝이 없었다.
가브리엘 데스틀레가 독살당한 슬픔에서 앙리 4세는 빠르게 벗어났다. 왕은 그녀가 죽은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앙리에타 당트레그 양에게 홀딱 반했으며 마리 드 메디치와 혼례식을 치르기 전 그녀와 결혼 약속까지 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왕은 가브리엘 때와 똑같이 그녀에게 베르뉴이그 후작부인이라는 칭호와 저택을 제공하여 왕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더구나 그녀에게도 세 명의 자녀를 갖게 하겠다며 낙천가다운 처신을 했다. 왕비 마리에게서는 다음 해, 훗날 루이 13세가 될 왕자를 생산하게 했으므로 한숨 돌렸다. 왕과 왕비는 그 외에 두 명의 왕자와 스페인 왕비가 되는 엘리자베스, 장래의 영국 왕비 앙리에타 마리아를 두게 된다. 그런데 숨 돌리자마자 문제가 속출했다. 모두 자식 복은 타고 났으나 어느 쪽이나 질투라는 장미 가시를 세우고 있는 왕비와 애인 간의 싸움은 전쟁과 사랑에 있어 투철한 전사라고 자신하던 왕마저 두 손 들게 만들었다. 궁정 내에서 마리 드 메디시스의 평판은 아주 안 좋았다. 그녀의 대선배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지난 날 남겨놓았던 여러 위대한 업적, 즉 독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만들 평화활동 때문이었다. 거기다 마리의 가문인 메디치가에 얽힌 근친 살해의 소문-아버지의 첩 비앙카 카펠로가 마리의 모친 조반나를 독살하고 마리의 삼촌이 그녀의 아버지와 정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있는 가계도 나쁜 평판의 원인이 되었다. 격렬한 기질과 야심이 불처럼 타오르는 애첩 앙리에트는 앙리 4세와 황태자의 독살을 기도했지만 영국과 스페인 왕에게 미리 상담한 덕에 영국 왕의 고자질로 그녀를 포함한 안트레그 일족과 음모 가담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판소가 사형을 선고했음에도 앙리에트의 약삭빠른 술책에 꼼짝 못하는 버릇이 있는 왕은 아름답고 요염한 그녀를 없애는 것은 아깝다고 여겨 그녀와 안트레그 일족 전원을 석방시켰다. 이 사건을 시발로 왕실은 1599년부터 9년간 분쟁에 시달렸지만 왕은 굴하지 않고 앙리에타에게 다시 애첩으로서의 화려한 생활을 허락했다. 이제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이 늙은 호색가는 다른 애인에게 눈을 돌렸다. 56세의 왕이 총애하게 된 상대는 샤를로트 드 몬모란시라는 15살의 소녀였다. 이제까지 해온 방법대로 그녀를 손닿는 곳에 두기 위해 이미 정해진 어느 장군과의 약혼을 무리하게 파기시키고 그녀가 절대 사랑할 리 없는 남자, 오로지 추악하고 욕심 많은 난폭자, 더구나 여자라면 질색하는 남색 경향의 콩티 공과 결혼시켰다. 내키지 않는 여자지만 샤를로트에 대한 왕의 집착은 그의 모반 욕구를 부추겼다. 자신과 부친의 원한을 함께 풀기 위해 콩티 공은 스페인의 힘을 빌려 왕과 조국에 대한 싸움을 걸고자 결심했으며 아내 샤를로트를 동반해 스페인으로 탈출했다. 앙리 4세의 오른팔로 변함없이 힘을 발휘하는 재상 쉴리 공은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의 열의에 대해 거의 36년에 가까운 세원 동안 변함없이 굳게 입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엔 한 여자를 둘러싼 싸움이 스페인을 상대로 한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우려가 있었다. 그 말고도 시급한 사태가 코앞에 닥쳤다. 이번에도 여자가 관련돼 있었다. 다름 아닌 과거의 애첩 앙리에트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앙리 4세가 경솔하게도 마리 왕비와 결혼하기 전 앙리에트에게 건네준 자필 서명의 결혼 승낙서였다. 앙리에트가 이 서류를 내세워 마리를 왕비자리에서 내쫓고 자기 자식을 미래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왕위에 오를 사람은 내 자식이 될 거예요! 지켜들 보라고. 이제 정식으로 왕비가 될 사람은 바로 나예요. 왕이 그렇게 바라고 약속해 준 것이니까!”(이런 멍청한, 몰래 할 것이지!!) 누구에게든 함부로 지껄여댔기 때문에 진짜 왕비는 분노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고 쉴리 공은 이 승낙서를 회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앙리에트에 대항에 마리 왕비 일파에서도 음모를 꾸몄다. 마리는 끊임없는 왕의 염문에 질투와 분노를 못 이겨 화장용 가발을 마구 찢어 버리기 일쑤였고 궁정 안은 늘 긴장이 감돌았다. 또한 왕비로서의 공식적 대관식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녀의 반발을 사기 충분했다.
앙리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
마리 왕비는 잠자코 있는 왕에게 성화를 부렸다. 왕이 왕비의 대관식을 미루는 이유는 이탈리아 출신 왕비의 대관식으로 궁정 내는 물론 국내에 불어 닥칠 불온한 기운을 미리 감지했기 때문이다. 자기 장래의 안전과 편함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어린 황태자의 손을 끌고 이리저리 다니는 마리의 주변에 몰렸다. 그들은 인기 있는 왕을 증오하고 완고하기만한 권력자 쉴리 공을 귀찮게 여겨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꺼이 머리가 텅 빈 왕비 편에 붙었다. 왕비 주위에 몰린 이탈리아 인들은 앙리 4세가 죽기만 하면 당연히 왕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왕모 마리의 섭정시대가 되며 따라서 프랑스 궁정은 자기들 세상이 되리라고 믿었다. 왕비가 지지라는 제 1군단의 대표자, 이탈리아 인 콘차니의 첫 목표는 왕실에서의 세력 강화를 위해 지방에 있는 지주 귀족들의 이익을 올려 주고 그 대신 그들의 지지를 얻는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이단인 신교도들과 후작부인 앙리에트가 왕위에 올리려 애쓰는 아들을 함께 지옥에 처박아야 했다. 그래야 마리 왕비의 아들이 장래 확실한 왕이 되는 것이다. 제 2군단의 지지자 부이용 공과 데페루농 공은 왕과 쉴리 공이 신교도이므로 정대 용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끈질기게 격분했다. 왕이 되기 위해 위장 개종한 배신자라는 의심은 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품고 있었다. 왕은 오로지 스페인에 있는 귀여운 콩데 공비 샤를로트를 데리고 도망간 콩데 공을 저주하여 그를 비호하는 스페인 왕을 때려잡으려는 작전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왕은 하루빨리 정통 프랑스 왕비의 칭호를 받고 황태자의 미래를 확실히 하고자 재촉하는 왕비에게 굴해 1610년 5월 13일, 왕비 대관식이 성 도니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이튿날 노틀담 사원의 종이 오후 4새를 알리자 앙리 4세는 충신 쉴리 공의 문병을 갔고, 왕비 파의 미라보 공, 리앙크르 등의 시종, 여기 몇몇 귀족이 동승한 마차 뒤를 경호원이 따랐다. 파리 시가지는 대관식을 마친 마리가 공식적인 CM랑스 왕비로 파리로 입성하는 순간을 보려는 군중으로 축제 분위기였다. 도중 왕은 롱구 부이르 경의 저택에 잠시 들렀고 그 곳에서 대부분의 시종들을 돌려보냈다. 마차는 혼잡한 세인트 드레노가에서 좁은 페로누리 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돌담을 따라 시내 중심가를 지나는 마차 안에서 서민적이고 겸손한 앙리 4세는 여유 있게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갑자기 혼잡한 인파에 방해를 받아 마차가 정지했다. 순간, 남자 한명이 마차에 뛰어올라 왕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거의 즉사상태였다.1610년 5월 14일 왕의 나이 57세. 가톨릭 광신도였던 범인 라바이야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온몸의 껍질을 벗기고 불에 지진 다음 능지처참을 당해 처형당하고 그의 부모와 친척들도 추방당하거나 라바이야크라는 성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사주한 인물이 여럿일 것으로 추측했다. 음모설의 뒤에는 마리 드 메디시스가 남편 살해에 가담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당연한 것이, 결과적으로 마리 왕비 일파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선량한 왕’이라고 칭송받던 앙리 4세의 죽음에 모든 국민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많은 애도의 자취를 남겼다. 왕의 사후 4년 만에 완공된 유명한 퐁네프다리 근처의 광장에 세운 기마상 외에도 앙리 4세 문, 앙리 4세 거리, 앙리 4세 광장, 앙리 4세 강변 등의 이름이 앙리를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려는 파리 시민들에 의해 붙여졌다. **이건 발견해서 그냥 덤으로...
샤를 7세의 정부 아네스 소렐. 딸래미 셋만 낳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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