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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민족의 혼을 찾아서’ 학술테마기행을 회고하며
김성재(중앙대 유아교육과 박사 수료, 2005.1.3)
1. 첫째 날
‘나’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날 ‘2004.12.26일’...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어떤 이는 크리스마스 때 마신 술로 인해 온 종일 집안에서 ‘방콕’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일출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떠났을 수도 있고....아마 다양한 일들이 생겼을 날이다. 나는 어떤가? 나를 포함한 중앙대학교 대학원생 약 30여명은 이 날 무엇을 했을까? ‘역사적인 한 획을 그은 날’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민족의 혼을 되짚어보기 위해 고구려의 옛 도읍지를 돌아보는 ‘2004 중앙대학교 대학원 학술테마기행’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직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새벽 길, 큰 짐을 둘러메고 삼삼오오 인천공항으로 도착한 30여명의 학술기행단원들. 모두들 상기된 얼굴이었다. ‘2003년 금강산’ 학술테마기행에 함께 한 원생들도 몇 명 보였다. 10시 40분 예정보다 약 30여분 늦게 중국 심양행 대한항공 비행기가 한껏 기대에 찬 우리 기행단원들을 싣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디어 시작이다.
약 1시간 30여분이 지난 후, 마침내 중국 심양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번 고구려, 발해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정에서는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님, 우리문화역사연구소의 김용만 소장님, 현지에서 ‘고대 토기’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는 정원철 선생님이 동참을 하게 되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전해 주셨다.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이 외에도 현지 여행사의 조선족 3세(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가이드 분이 함께 하며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들이 놓칠 수 있는 중국 현재의 상황과 지리, 형편 등을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심양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들은 모 호텔 식당에서 중국 전통 요리로 점심을 먹고 곧바로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 지방으로 미리 준비된 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처음으로 현지에서 먹어보는 중국전통 요리, 맛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몇 번 먹었는데, 넓은 국토를 소유한 나라처럼 음식도 아주 통이 크게 나왔다. 큰 대접에 가득가득 실려 나오는 8가지 이상의 다양한 음식들. 적당량을 작은 접시에 들어가며 모두들 즐겁게 먹는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서로가 서로를 잘 몰랐던 ‘낯설움’에서 서서히 ‘정겨움’으로 다가가는 과정 또한 시작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약 8시간 달렸을까. 드디어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졸본성에 도착하였다. 현재는 환인으로 불리우며, 중국에서는 홀본성, 오녀산성 등으로 명명되고 있다. 환인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오녀산성으로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2. 둘째 날
오녀산성을 향해, 작은 차로 15여 명씩 나누어 타고 한참 눈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빙판길로 얼어붙은 눈길로 인해 차가 오녀산성을 향해 올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교수님과 가이드, 소장님, 학생회 측과의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걸어서라도 한번 가보자고 하셨고 현지 가이드 분과 차를 몰던 현지 기사는 걸어서 가기에도 힘든 길이며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린다며 여학생들이 있는 우리 기행단원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오녀산성까지 등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대신 평지에 있는 돌 무덤을 보고 오녀산성이 잘 보이는 위치에서 멀리서나마 산성의 웅장함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일행은 한 참 토의를 거친 후, 현지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고 오녀산성이 잘 보이는 위치에서 산성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오녀산성의 웅장함과 절벽의 가파름을 눈으로 바라보는데 만족해야만 하였다.
오녀산성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현지 중국인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도 있었는데, 소와 말을 이용해 수레를 끌고 가시는 할아버지들, 석류를 1원(우리 돈으로 약 135원 정도)에 팔고 있는 장사꾼, 가장 특이한 점은 자전거와 수레를 연결한 것이었는데, 수레가 뒤에 있지 않고 자전거 앞에 수레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가이드 얘기로는 수레를 뒤에 달게 되면 물건을 도둑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페달을 밟는 사람 앞에 수레를 다는 것이라 하였다. 오녀산성에 직접 올라보진 못했으나 곧이어 찾아간, 오녀산산성 역사유적전람관 견학을 통해 그 웅장함과 산성의 기이함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는 산성과 평성 즉 높은 산 속에 산성을 쌓으면서 평지에서도 또한 성을 쌓았다고 한다. 오녀산성 위에는 물 확보를 위해 넓은 못이 있으며 약 2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넓은 평지가 펼쳐있다고 한다. 이렇게 적을 방어하고 공격하기도 좋은 산성을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발견하였을까? 그 노력과 노고에 고개가 절로 숙연해진다. 이 오녀산성은 역사적으로 약 두 번 정도 함락되었을 뿐 잦은 침입에도 방어를 견고히 한 탄탄한 성이었다.
오녀산성 유적 전람관을 견학한 후, 집안으로 출발, 집안 호텔에서 둘째 날을 지세우게 되었다. 저녁을 6시 정도에 먹은 우리들은, 낯설움에서 정겨움으로 다가가기 위해 가볍게 맥주 타임을 가지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때 나는 장기를 살려 짧게나마 흥을 돋구기 위해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보기도 하였다. 원생들 중에는 뮤지컬 배우도 있었고, 시인 신춘문예에 등단한 문예창작과 학생도 있었다. 참 다양한 친구들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고구려 유적탐방을 통해 학술적으로 많이 깨우쳐 가고, 기개가 넘치는 고구려 후손답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 점도 좋았지만,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는 원생들로부터 자신의 전공 시각에서 바라보는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과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맛’ 또한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3. 셋째 날
전용버스를 타고 오늘은 국내성(현재는 집안)을 탐방하였다.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과 환도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된 고구려 벽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견학, 웅장한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릉, 동방의 금자탑 장수왕릉 등의 탐방이 이어졌다. 발목까지 숙숙 빠지는 눈 밭길을 헤치며 먼발치에서나마 환도산성을 보고 그 밑의 산성하무덤떼를 둘러볼 때는 개인적으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장수왕릉을 볼 때는 그 왕릉의 웅장함과 거대함에 그리고, 그 많은 돌들을 어떻게 백두산에서 가져와 차곡차곡 안정되게 쌓았는지 고구려의 과학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만 소장님의 말에 의하면, 장수왕릉의 장수왕 사체는 어느 누군가가 무덤에 있는 보석을 챙기기 위해 사체와 함께 도굴해 갔다고 한다. 참 몹쓸 사람들.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위해 그 위대한 왕의 사체를 도굴해가다니. 인간의 이기심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중국이 고구려가 자기네 지방정권이라 억지 주장을 하면서 왜 이정도 밖에 관리를 못했는가? 우리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개인적으로 무예에 관심이 많은 터라,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둘러볼 때, 특히 무용총이나 사냥하는 모습들, 씨름하는 벽화 등에 눈길이 쏠렸다. 고구려인들이 사냥을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피의 냄새를 맡고, 어떻게 보면 실제 전쟁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평상시에 전쟁과 싸움, 치열함, 피의 맛을 체험하지 못하고 실제 전쟁을 치르게 되면 그 병사들이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어떻겠는가? 따라서 평소에 사냥놀이를 통해 전쟁에 관한 감각을 키웠던 게 아닐까?
광개토대왕비는 유리로 사방이 둘러 쌓여져 있었다. 비문의 글씨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형체를 뚜렷이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중국정부가 왕비의 보존을 위해 유리로 둘러 쌓다고는 하는데, 유리로 덮여 있으면 실내 온도가 더 높을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보존에 역효과를 낳지는 않을까 의문시된다. 저녁 식사 후 우리 기행단은 다시 통화역으로 출발하였다. 이 날은 기차에서 침대칸을 이용해 일박을 하는 날이었다. 저녁 9시 정도에 통화역을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새벽 5시 정도에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침대는 상중하로 나뉘어져 있고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아주 넓이가 작은 침대였다. 그러나 좁은 공간과 긴 기차여행 시간은 기행단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아 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서로의 고민도 얘기해 보고 재미있었던 일상적인 삶도 공유하고, 특히 고구려 탐방을 하며 느낀 점도 나누어보고.......앞으로 한국에서 서울-부산까지 가는데 6시간 걸리니 5시간 걸리니, 그래서 힘들다느니 이따위의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 여기 중국은 기본이 10여 시간이니, 또한 춥다고 투덜 되지도 않아야겠다. 여기 중국은 기본이 영하 15도 이상이었으니, 한국의 인천공항에서 내려 처음 들었던 말이 ‘아이고 춥다’라는 소리였다. 영하 2도라나. 이 정도면 봄 날씬데,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인가보다. 앞으로는 좋은 날씨와 기후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4. 넷째 날
이도백하에 도착 후 우리는 다시 미리 정해져 있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한참을 달려도 버스는 냉기만 가득할 뿐이 아닌가? 난방시설장치가 고장이 났다고 한다. 이렇게 50여분을 달려야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한다. 원생들 중에는 추위에 못 이겨(버스 안은 영하 20도가 훨쩍 넘었을 것 같다. 내복을 입고 무장을 하고 간 상태였지만 역시 추웠다, 다른 부위보다 발가락이 어는 것 같았다) 통로에 일어서서 뜀뛰기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런 상태로 약 30여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보드카를 꺼내 들었다. 한 모금씩, 보드카가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모금의 보드카가 내 뱃속을 통과하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오면서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하였다. 왜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자주 마시는지 이해가 되었다. 중국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꼭 맥주 3-4병씩 따라 나왔다. 한 모금의 맥주가 추운 곳을 계속 누비게 해 주었나 싶다. 어쨌든 술이 이렇게 유용하고 효율적인 것인지 처음 알았다.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등정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겨울 천지 등정을 위해 눈 속도 과감히 달리는 독일제 SNOW MOBILE을 여러 대 들여왔다 한다. 우리 일행은 스노우 모빌을 타고 약 1시간 눈길을 달려 올라갔다. 오르는 도중 산 아래로 보이는 눈 덮인 경치는 가히 절경이었다. 절로 ‘아’ 탄성이 흘러 나왔다. 천지 약 30여 미터 앞에서 모빌은 정지하고 우리는 잠깐 눈 속을 걸어올라 천지가 가장 잘 보이는 꼭대기에 섰다. 저것이 그동안 책에서나 보고 말로만 들었던 민족의 혼이 담긴 천지구나. 아쉬운 점은 영하 30도 이상의 강추위로 인해 천지가 다 얼어있었고 우리 기행단원들 또한 10여분 이상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 꼭대기는 어느 지점부터는 중국과 북측의 공동경비구역이 있다고 한다. 한 원생이 계속 공동경비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아마 잘 몰랐던 모양이다. 가이드는 목이 터져라 그 쪽으로 가지 말라고 소리 지른다. 아차 했음 북측에 끌려갈 뻔 했다(?) 천지에서 내려올 때는 나를 포함한 몇몇 원생들이 썰매를 타고 내려왔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절로 밑으로 시원하게 내달리는 게 아닌가.
다음은 장백폭포 등반이다. 사실 백두산 천지를 갈 때는 스노우 모빌이 거의 천지 앞에까지 태워주는 바람에 천지 등반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장백폭포를 향해 갈 때는 약 1시간 남짓 걷게 되어 그 맛을 느끼게 되었다. 장백폭포 또한 추위로 얼어있지 않을까 했는데 다 얼지는 않았으며 폭포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폭포 아래 눈 밭에서 우리 기행단원들은 사진도 찍고 눈 속을 뒹굴며 백두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보기도 하였다. 멋지게 팀별로 작품사진(?)도 찍어보고, 다양한 포즈도 취해보고,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된 단원들끼리 서슴없이 손도 잡고.....좋은 한 때였다.
장백폭포에 다다랐을 때 거의 오후 3시를 향하고 있었다. 폭포를 지나 올라가면 천지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단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시간관계 상 폭포 이상 등반하지 못하고 다시 백두산 별장으로 돌아와야만 하였다. 현지 가이드 말이 지금 계속 올라갔다 오게 되면 오후 4시가 넘을 것인데 깊은 산속이라 어둠이 빨리 깔려 자칫 단원들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원하는 단원들에 한해 백두산 온천에서 약 80원(원화로 약 만원돈)을 내고 온천욕을 즐기며 하루의 피로를 풀기도 하였다.
5. 다섯째 날
기행이 중반을 넘었다. 백두산을 출발한 기행단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윤동주 시인이 건립한 대성중학교를 탐방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28살의 나이로 일본 생체실험대상이 되어 주사를 잘못 맞아 명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서시가 우리를 반긴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삶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과 벅찬 감정을 억지로 눌려야만 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젊은 나이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평생 살다가다니,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 위해 하루하루 얼마나 많은 고민과 번뇌의 나날을 보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떤가, 윤동주 시인보다 더 많은 날을 살고 있는 나는, 하루를 마감할 때면 후회하는 일이 많고. 하늘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날이 많으니.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니 내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했으며,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 내 삶을 연명하고 있나.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니 세삼 내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이고 아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연길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버스는 도문에 있는 두만강 쪽으로 향했다. 아 두만강, 길지 않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측이 마주하고 있었다. 중국 측 안내원들에게 30원(원화 약 5천원)을 주면 다리 가운데까지 가서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기행단원 중 절반 이상이 돈을 내고 다리를 걸었다. 그 때였다. 이번 기행을 통해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게 된 친구가 한 쪽 구석에서 목 놓아 우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남북이 분단되어 북녘 땅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하는 심정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그 친구는 너무나 서럽게 우는 게 아닌가. 살며시 다가가 어깨를 두들겼다. 그 친구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그 친구는 그렇게 슬피 울만한 연유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 여기서는 글로 드러내지는 않겠다. 어쨌든 그 친구 얘기를 들으니 나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꾹 참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함께 울 걸 잘못 한 것 같다.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기뻐하는 것에 나는 너무 감정을 조절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페르조나에 너무 얽매여 살았다 싶다.
두만강 앞에서 두 명의 아이(한 아이는 12살, 큰 아이는 14살이라 하였다)가 강추위에도 한 겹 정도의 가벼운 옷만 입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북에서 왔는데 너무 배가 고프다며 돈을 좀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가이드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그 아이들은 조선족아이들이지 북에서 온 게 아니라고 하였다. 하루에 20원정도 구걸하면 그것으로 먹고 잔다고 하였다. 다른 사정은 제쳐두더라도 당장 눈앞에서 추위에 떨며 구걸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맹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측은지심이야말로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라고.
중국 영토에서 두만강 다리를 바라보니 작은 보따리를 둘러멘 북측 사람 한명이 북측에서부터 넘어오고 있었다. 중국과 북측은 수교가 되어있으니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겠지, 우리도 언제쯤 저렇게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 있으려나. 김용만 소장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난 30원내고 저 다리 건너고 싶지도 않고 건널 생각도 없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당당하게 건너갈 것이다. 왜 중국 사람들 좋은 일시키냐.’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30원 내는 게 북측에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중국 좋은 일시키는 게 아닌가. 어떻게 보면 중국이 통일을 원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북측과 남측이 분단되어있어야 중국은 양쪽으로부터 얻는 게 많을 테니까. 결국 우리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되지 않겠는가, 당당하게 북을 향해 걸어가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민족의 아픔을 뒤로 하고, 도문을 출발한 기차는 다시 심양에 도착할 때까지 약 13시간을 달렸다. 기차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원생들끼리 혹은 현지 가이드, 정원철 선생님, 김용만 소장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특히 나는 현지 가이드분 으로부터 이 곳 중국생활에 대해, 중국인에 대해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는 개고기 라면이 있다는 것(하나 샀는데 1원 우리 돈으로 약 135원 정도), 중국에 한국의 전라도 조직폭력배단이 들어와 활개를 쳤다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 벅찬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 조선족이 13번째 정도의 소수민족이지만(총 56개 민족으로 중국인은 구성되어 있다)다른 족과는 달리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우리 글과 말로 진행되는 학교들이 있고, 우리 말과 글의 신문이 발행되고, 각계 각층의 다양한 분야의 상위 고위직에 조선족이 많이 진출해 있다는 것이었다. 만주족(청나라를 건립한 금의 족속)은 한 때 그렇게 위세가 당당하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말과 글을 잃고 거의 한족에 동화되었지만 소수민족이면서도 조선족은 당당하게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가슴 뿌듯한 얘기였다. 자기네 말과 글을 잃는다는 것은 문화와 민족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 조선민족의 위대함과 당당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을 지원해주고 있는가?
6. 여섯째 날
새벽 6시, 심양에 도착한 우리들은 전용버스를 타고 다시 고구려 백암성으로 향했다. 고구려 요동지배의 비밀이라고 평가되는 백암성을 올라보니 왜 그렇게 명명되는가를 알 수가 있었다. 돌과 돌 사이를 촘촘하게 끼워서 이중삼중으로 만든 성벽, 성벽 사이사이 치가 구성되어 적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점, 강을 끼고 성을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한 점....
김용만 소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실제 강가 쪽에서 바라보았지만) 백암성 밑에 하단에는 큰 구멍이 두개 나 있는데, 그 것이 성 위쪽까지 통하는 비밀통로가 아닐까 추측된다고 한다. 아직 중국정부가 현장 연구를 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구멍의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하셨다. 중국정부, 연구를 하지 않을 거면 연구를 원하는 우리 측에 넘겨 줄 것이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의 지방정권의 역사로 몰아붙이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역사를 역사 그 자체로 평가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는 자태는 중국정부가 정말로 반성해야 할 일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고구려 역사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현재의 상황에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백암성 답사 후 심양시내에 도착한 우리들은 잠시나마 자유시간을 갖고 2004년 12월 31일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외국에서 맞이하는 한 해 마지막 밤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기행 도중 두어 번 교수님과 여러 전문가 선생님들과 함께 학술세미나가 두 시간 이상 진행되기도 하였는데, 중국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생들이 고구려 기행을 하며 느낀 점, 의문나는 점, 학생회 측에 바라는 점 등이 논의되었고,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고구려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이 소개되었다. 다들 중국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새로 알게 된 원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으며, 특히 자신이 공부하는 전공분야의 관점에서 고구려역사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고구려가 705년 동안 역사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의 당당함이었다’라는 김용만 소장님의 견해였다. 과학적으로 구성된 산성과 평성, 고구려 여성들의 힘, 고구려인들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 등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과 당당함이었다. ‘당당함’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외세에 당당하고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가? 당당해지려면 당당해지기 위해 많은 환경적 준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 스스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하고 사는 주체적인 자세와 태도는 항상 마음 속에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당당해지자 한국인들이여......
7. 마지막 날
새해를 맞이한 첫 날 우리들은 심양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중국의 역사와, 유물, 유적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고구려 역사와는 그렇게 상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으나 항상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한 중국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타산지석이라 하지 않던가, 중국은 또 어떻게 역사를 꾸려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 나쁠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온통 중국어로 쓰여진 유물에 관한 소개문으로 인해 상세하게 그 물건이 어떨 때 쓰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분히 눈으로 흘겨 보며 무심코 지나친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중국 역사 전문가가 설명을 해 주었더라면 보다 더 이해가 되었을 텐데, 다소 아쉽긴 하다.
어쨌든, 요령성 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 기행단원들은 다시 심양 공항에 도착, 많은 아쉬움과 미련을 남겨두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8. 가슴이 벅차며......
지금부터는 몇 가지 개인적으로 가슴 벅찬 일을 소개해 볼까 한다. 가슴이 벅차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 경우를 염두해 둔 표현이다. 너무나 슬퍼서 벅찰 수도 있고, 기뻐서 그럴 수도 있고, 감격에 겨우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앞서 얘기가 되었지만, 윤동주 시인이 세운 대성중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다간 저항시인,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고뇌하고 또 고뇌하며 살다간 시인, 윤동주 시인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보니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했던가, 윤동주 시인은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성실하게 짧은 한 평생을 살다간 인간이었다. 나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성실한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또한 가슴 벅찬 일 중에 하나는 조선족이 우리 말과 글을 지켜가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민족이 한 민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은 자기네 말과 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힘겨움이 있었을 터인데 조선족이 우리네 말과 글을 지켜나가며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이 자체에서 한없는 민족 愛를 느낀다.
고구려 산성을 둘러보았을 때 가슴 벅참을 느낀다. 높은 산성 위에서 눈으로 덮인 벌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수십만 적군이 쳐들어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말발굽소리, 창칼 소리....그러나 적은 수로도 견고하게 쌓여진 성위에서 화살을 퍼부으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굳게 성을 지킨 우리 고구려인들의 당당한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벅차 오름을 억제할 수 없다. 국가안위를 위해 자기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고구려병사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연해진다. 나는 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오늘날 신문지상을 들여다보면 병역비리가 한참이다. 참으로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만강 다리 앞에서 북녘 땅을 바라볼 때 가슴이 벅차다. 슬퍼서 벅차다. 왜 중국정부에 돈을 주고 저 다리를 건너보아야만 하는가? 주변에 새들은 저렇게 자유롭게 북녘 땅을 왕래하는데, 금수의 왕인 인간은 왜 그러지를 못하는가? 이념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같은 동포들의 살을 도려내어야만 하는가? 김용만 소장님의 말씀처럼 언젠가 통일이 되어 30원 내지 않고 당당하게 북녘 땅을 밟아보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기행을 함께 한 동료 원생들의 됨됨이를 볼 때 가슴이 벅차다. 뮤지컬 배우로서 우리들에게 가슴 뭉클한 노래를 들려주었던 친구, 12월 31일 마지막 밤 ‘가뭄’이란 시로 2004년을 마감하게 한 친구, 두만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친구, 여학우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며 웃음을 보이던 친구들, 고구려에 관해 열띤 토론과 자신의 견해를 진지하게 피력하던 친구들, 자기보다 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힘들다 소리 한번 안하고 오히려 다른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포근히 감싸주었던 친구, 자신도 빡빡한 스케줄과 이동으로 인해 피곤할 터인데 항상 밝은 얼굴로 옆 동료를 격려해 주던 친구들,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한 학우를 위해 자신의 카메라로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들, 장시간의 버스이동으로 몸이 안 좋은 학우를 정성스럽게 돌봐주고 걱정해주던 행정실 박천숙선생님이하 모든 친구들.......이 모든 인간의 얼굴들을 볼 때 가슴이 벅차다. 정말 인간미 넘치는 친구들이다.
무엇보다 고구려 기행을 다녀와서 이렇게라도 가슴 벅참을 글로 표현하고 있는 내 자신이 벅차다. 고구려 기행에 함께 한 모든 친구들, 교수님, 소장님, 여러 현지 선생님들 참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가슴 벅찬 일을 경험하게 해 주셔서. 특히 이 행사를 기획한 대학원 학생회 측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가 매년 기획돼 저처럼 가슴 벅차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깊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광활한 영토를 건설하며 민족의 기상을 세워주신 고구려인들께 감사드립니다.
자료제공// www.muyew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