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드라마의 최루성을 단순히 도식성의 산물로만 보지 않는다. 우연히 어떤 게시판에 <로망스>의 팬이 <네 멋>은 상투적인 죽음(백혈병, 뇌종양)을 이용한 얄팍한 구성으로 허상적 감동을 만들어냈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관점에서는 로망스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인물들이 전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대립적 관계 속에 놓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감동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사랑이 너무도 안쓰럽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개성 넘치는 구체적 사랑의 행각을 벌이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선생님과 제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역시 <네 멋>도 죽음이라는 소재 덕분에 그 감동을 창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이 감동은 로망스의 것보다 실제적인 것이다. 이 인물들은 꼭두각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경과 고복수는 그저 현실의 우리를 닮고 있다. 그들은 어떤 전형성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최초의 인물들이다. 명랑소여 성공기의 장나라님, 장혁님은 이전의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 고복수와 전경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오묘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전형적 인물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여된 전형성이 아니고, 이미 개방된 인물 그 자체에 내재된 사회성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서는 전형성이 인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물이 먼저 창조되고 그 인물의 다양한 기질 중에 한가지로서 전형적 속성이 표상되는 것뿐이다. 여기서 복수와 전경은 인정옥 작가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지만, 그것은 이미 작가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인물을 끌어다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부터 중요한 것은 지배가 아니라 방목이다. 그냥 뛰어다니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들은 도대체가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없다. 아니 그들은 자연스러운 인간인 이상 비슷한 면도 많겠지만, 다른 면이 더 많다. 사실 기존의 드라마 속 인간들과 내가 많은 동일시의 과정을 거쳤다면, 그것은 그 인물들이 깍아지고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인정옥 작가는 이 왜곡을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작가나 감독이 니체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전경의 성격을 서술하는데 그의 가정적 배경이나 계층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을 볼 수 있는 그녀의 시각을 결정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마음을 보아야 한다는 가치가 은근히 이상화되어 표출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자유분방한 기질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관점이 잉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당할 것 같다. 그 자유분방한 기질이 억압적 가정에 대한 반동에 의한 것, 따라서 그것 역시 가정적 환경에 의해 반동적으로 성립한 개성(전형성이 창조된 이후 창조된 개성)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전경의 그러한 기질이 탄생한 배경으로서 가정의 중요성은 그렇게 실감나게 재현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기질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복수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성격은 그의 그동안의 행동이나 가정의 환경 속에서 성립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지 않다. 가난한 그에게는 사회에 대한 지나친 증오도 없고, 지나친 상승의식도 없다. 그의 착하고 성실한 성품이 도대체 그가 놓여진 조건들과 어떤 관계를 가진단 말인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김하늘님의 성격이 선생님이라는 전형적 지위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전경과 고복수는 다르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은 잉태된다. 나는 여기서부터 그 감동이 허상적 감동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하고자 한다. 물론 죽음이라는 모티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네 멋> 역시 상투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아디까지나 <네 멋>을 단순히 도식성의 산물로 치환하려는 편협한 시각에서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물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공간을 보아야 한다. 복수의 맑은 정신은 그 어떤 조건의 파생물이 아니다. 전경의 맑은 마음과 자유분방함, 양성적 기질 역시 그저 전경이 놓인 드라마적 조건의 대리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전경의 그것이다.(사실 1부에서부터 이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연출가나 작가는 전경의 주변부를 스케치하는 것을 거부하고 우선적으로 그녀의 개성들을 여러개의 쇼트 - 담배를 피우는 모습, 음악할 때의 표정, 이런 것들 모두가 전경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드라마의 전형적 인물들처럼 치환가능한 것이 아니다 - 를 병치시킴으로서 몽타쥬한다. 그리고 관객은 우선적으로 전경의 조견보다 독자적 개성과 성격을 먼저 보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그들의 개방적 기질들을 자유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언어는 직관적이고, 그들의 감성은 이성의 그것보다 상위에 위치한다. 그들의 세계는 비틀어져 있다. 이것은 그들을 상투적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돕는다.
어쩌면 복수와 전경의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이성의 편으로 회귀하라는 동진의 목소리는 이 자유로운 무질서 속에서 사장된다. 그것은 애초에 그런 질서가 있다는 허상적 믿음에 대한 작가적 반동이다. 이것은 기존의 도식과는 다른 도식이다. 기존의 도식은 이성적 질서 안에서 대립되는 양자 사이를 설정 - (예를 들어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사회에서 가난한 계층과 부자 계층 간의 대립...따라서 드라마에서는 각종 장치를 통해 이 차이를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보통 가난한 집은 판잣집으로, 부잣집은 거대한 저택으로 설정된다)-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도식에서 양자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거부를 의미한다기보다 - 물론 어느 정도는 가난과 차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을 상징하는 부분도 있지만 - 그 질서 안에서도 싹틀 수 있는 아름다운 인간성을 포장해서 보여주는 것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네 멋>에서는 바로 그 질서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대체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드라마 자체가 그런 의문을 명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 새로운 구성이 이전의 이항대립적 구성, 명확해 보이는 드라마적 질서를 회의하고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렇게 기술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세계 -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듯한 세계 - 그 반대편에 새로운 21세기형 캐릭터 복수와 전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존의 드라마에서 사랑이 그들 사이에 가로 놓인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었다면, <네 멋>의 사랑은 인간을 속박하는 질서를 극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제약 아래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삶에 대한 충실한 응답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그 삶의 일부로서 죽음을 승인하는 구조에서 그들의 사랑은 드라마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다.
전경과 복수는 분명 우리 인간의 단상이다. 조금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 일반의 보편적 속성만을 대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로운 존재다. 아리영처럼 그가 놓인 조건에 의해 동선이 결정되는 인형이 아니다. 그저 그들 자체의 개성과 능력에 의해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과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의 운동 규칙을 가진 인물은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가 원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걸러진 언어를 발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 본연의 기질에 충실하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죽음은 상투적 의미의 죽음과는 다르다. 전형적 문법 아래서의 죽음과 복수와 경 앞에서의 죽음은 분명 다르다.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그들의 사랑이 승화되고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지만, 경과 복수에게서 죽음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다. 그들의 개성, 그 개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사랑이 우선 존재하고, 그것이 죽음에 의해 재확인될 뿐이다. 이것은 드라마 구성 자체에서 비롯되는 구조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드라마에서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제약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로망스에서 양자 사이에 놓인 난관(사회적 관습)이 빠져버리면, 양자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져 있지 않다면 둘 사이의 사랑은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반면, 복수와 경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그것은 자유롭게 그들을 방목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드라마 전체의 맥락에서 둘 사이의 사랑은 죽음(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나는 알레고리적으로 복수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이라는 난관을 통해서 재확인될 뿐이지, 죽음이라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 자체가 은폐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매우 미묘하고 분석하기 까다로운 부분이기 때문에 나 자신조차도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네 멋>에서의 죽음이 기존의 드라마에서의 죽음, <로망스>에서의 사회적 제약, <별을 쏘다>에서 악인과 등가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선후관계상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이 제약이 아주 절대적인 위치에서 군림하고, 따라서 그것 없이는 인물의 독특한 개성이 전혀 의미가 없는 반면, <네 멋>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인물의 개성이 먼저 산출되고, 후에 사건이 흘러간다. (모든 드라마가 다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의미론적으로 기존의 드라마는 제약조건, 난관, 인물사이의 대립적 관계가 있은 후에 그것이 제대로 전형화 되고 나서야 인물의 개성이나 독특한 말과 행동이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 사건과 계보, 조건의 성립이 우선하고 그 토대 위에서 인물이 성립한다.) 따라서 <네 멋>에서는 그 어떤 사건들도 중요도의 차이는 가질지언정 존재론적 절대성을 가지지는 못한다. 이 드라마에서 죽음만이 둘 사이의 사랑을 표상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개성과 성격에 의해 이미 신명나게 노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