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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문화축제는 2022년 마지막으로 진행한 뒤에 올해 2023년 울산공업축제로 명칭이 바뀌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큰 명분은
56년 역사 처용문화제 폐지 공업축제 부활 (naver.com)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1522
2008년부터 제기된 이유는 종교편향 부분이었고
울산지역의 미풍양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축제 자체의 취지는
처용설화는 처용이라는 인물의 관용, 역신을 폭력이 아닌 춤으로 쫓음으로서 화합을 상징한다.
였고
기독교연합회 주장은
1. 처용은 무속신앙의 한 유형이다.
2. 시민 세금으로 특정 종교 지원하는건 다른 종교인 시민들의 피해를 조장한다
3. 아내의 간통을 미화함으로서 울산의 성풍속을 해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유해한 정서를 함양시킨다.
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분석해야하는게 처용이 무당이라고 하는건 하나의 설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이 화랑이라는 설,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설 등 엄밀하게 무속과 엮을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은유와 비유일 뿐이지 간통을 미화했다 운운은 과대일 뿐이다.
논문 중에는 이러한 해석까지 존재한다.
김진 교수의 논문 「처용 무당설 및 아랍인설의 해석학적 오류 - 처용설화의 철학적 연구」를 인용하면 이렇다.
【처용 무당설에 버금가는 이론은 처용 아랍인설 또는 도래인설이다. 이는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왔으며, 그 모습이 기괴하다는 설화에 근거하고 있다. 처용 아랍인설은 1969년에 이용범이 발표한 이후 정수일, 김경수, 허혜정 등이 가세하고 있다.
울산이 신라시대에 실크로드의 중요한 기항지였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가설이며, 일부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처용설화의 시대적 배경에 아랍인들이 활동했다는 사실만으로 처용이 아랍인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처용 아랍인설의 주요 논지와 그 한계를 점검하기로 하겠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로부터 약 140년 후에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처용이 '외지인' 또는 '도래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정적인 근거가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 기사와 유사한 내용을 설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다루고 있다. 헌강왕 5년(879년) 3월에 왕이 나라의 동쪽지방의 군으로 순행하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그 모양이 괴상하고 의관도 달랐으므로 사람들이 산해정령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만으로 서용을 도래인이라고 규정하기는 불충분하다.
그 이후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기록이 여러군데서 확인되었다. (생략)
조선 성종 때(1493) 편찬된 음악이론서인 『악학궤범』에서는 처용의 얼굴이 '심목고비'하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처용은 당시 서역에서 건너온 사람이라는 주장들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이용범은 바다에서 갑자기 출현한 처용의 무리가 '산해정령'으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인들이 흔히 볼 수 없었던 인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처용 외래인설을 주장하였다. ........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븐 크르다지바의 『제도로 및 제삼국지』에 의하면 8세기에서 13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 서안까지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압바스조 이슬람 제국은 신라로부터 검, 명주, 도자기 등을 수입하였다. "중국의 맨끝 깐수의 맞은 편에서는 많은 산과 왕들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신라국이다. 이 나라에는 금이 많으며, 무슬림들이 들어가 그곳의 훌륭함 때문에 정착하고야 만다. 이 나라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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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편 정수일은 경주 외동면 괘릉(사적26호)의 무인석상이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신라와 아랍의 교역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무인석상은 경주 도지동에 있는 제33대 성덕왕릉이나 경주 안강읍에 있는 제42대 흥덕왕릉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무인석상 역시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신라인들 중에서 체형이 기이한 경우는 많이 보고되고 있다. 아달라왕과 지증왕의 체구가 거대한 사실이나 헌강왕과 효공왕의 체구가 기이한 사실은 처용의 형상이 기이하다고 서역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처용을 서역인이라고 간주할 경우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들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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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 아랍인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첫째로 신라에 아랍인이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처용을 아랍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점이다.
이는 이용범과 정수일의 논지에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신라에 로마와 기독교 문명의 전승 흔적까지 보고하고 있어서 자체모순적이다. 신라에 서역인이 들어 왔다면 아랍인뿐만 아니라 로마인과 유태인 또는 기독교인들조차 들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수일은 4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로마문물이 신라에 유입된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정수일은 고대 신라에 기독교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신문왕 편의 고승 혜통에 대한 찬문에는 그가 "마귀와 외도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 했다."고 기술한 사실이 있는데, 여기에서 '외도'는 당나라를 경유해서 유입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일 가능성이 있다. 혜통은 당 고종의 딸을 주술로 치유한 사실이 있는데, 고종은 바로 경교의 중국 부흥을 도왔던 황제이다. 이는 혜통이 중국에서 경교에 대한 지식을 접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경교의 중국 선교가 공식화된 것은 당태종 때(635년)이다.
원효문집에 예수가 법왕자(法王子)로 기술된 점이나, 781년에 중국 서안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건립된 사실 등은 기독교의 신라 유입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유입된 사실만으로 처용을 규정한다면 아랍인, 로마인, 기독교인 모두가 처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것이다.
둘째로 정수일은 이용범의 학설에 따라 처용의 '처'(處)는 '살 처', '곳 처', '정할 처'이고 용(容)은 '용납할 용', '용서할 용', '안존할 용', '얼굴 용'이므로 그 어의(語義)는 "입주가 허용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처용'은 보통명사의 의미를 갖게 되므로, 외래인과 관련된 다른 문건들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외국인에게 입주를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처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보고는 없다.
셋째로 처용 아랍인설을 서역인설로 확대해서 보더라도 처용이 헌강왕으로부터 급간(級干) 벼슬과 미인을 하사받았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뜻하지 않게 만난 외인에게 육두품과 진골 귀족에게만 내리는 급간 벼슬을 내렸다는 것은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라사회의 특성상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용에게 내려준 급간 벼슬은 신라 17관계에서 제 9등에 해당되며, 이는 제6등 아찬에 이르기까지 육두품 출신과 진골만이 할 수 있는 벼슬이었다. 당대 신라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진 최치원조차도 벼슬이 제6등 아찬에 그쳤는데, 그것은 육두품 출신이 할 수 있는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의 최고지성들이나
겨우 받을 수 있는 벼슬을 그 출생도 모르는 외지인에게 하사했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함께 처용에게 왕이 미인을 내려주었다는 사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이런 일은 왕이 신뢰하는 측근인사들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넷째로 처용 아랍인설은 처용 텍스트가 신라왕조의 멸망과 관련된 거대서사로서 신라의 왕권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라왕실의 탐락자심과 국가의 마지막 멸망 사건을 예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처용 사건은 헌강왕대에 발생한 여러 징조들 가운데 하나이며, 텍스트 전체의 분위기는 국가 멸망의 징후를 헌강왕이 간과하여 백성들이 탐락에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처용은 신라 멸망의 와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인물이고, 나중에는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역사의 중심세력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면서도, 역사의 전면에서는 완전하게 사라진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처용이 신라왕실의 핵심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면, 처용 아랍인설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정황들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도
《삼국사기- 헌강왕 5년 3월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고기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원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
처용으로 보이는 집단이 등장한 기록이 나온다.
울산의 개신교의 힘으로 축제 명칭 자체가 바뀐게 통탄스러운 일인데
1. 처용이 무속신앙인가?
고려시기와 조선시기 궁중 연회나 궁중 놀이로 진행되었고 제석 때는 잡귀를 쫓기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궁중악무의 수용상 이는 하나의 전통이니 무속신앙과 같은 방식으로 치부되어서는 곤란하다.
만약 처용과 관련된 콘텐츠가 '미신'이며 타파대상으로 여긴다면 조선시대에서 하는 궁중제례의 모든 활동이나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지역문화제(가야나 신라, 백제를 표방하는) 또한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취급해야할 것이다.
유독 처용을 미신취급 받는 이유는 유교 의식, 불교 연등축제, 궁중문화 같은 경우를 개신교 단체에서 건드린다면
오히려 역풍을 물거나 전국민적 지탄을 받을 수 있지만 처용의 경우에는 무속신앙이라는 손가락질 이외에도 만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 특정종교 편향 부분
국가보조금 사업으로 유교문화권 축제, 불교문화사업 쪽에서도 보조금 받는것은 비슷하다.
실제로 국비+시비를 받거나 아니면 기업에서 지원받거나 하는 방향으로 매년 축제가 진행되는데
이들 축제의 경우는 종교편향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이 위에서 언급했듯 쪽수나 역으로 손가락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용의 경우는 기독교 집단에서 말하는 '종교' 수준이 아니라 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를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개운포에서 헌강왕과 처용이 만났다는것 하나로 진행되는
문화 콘텐츠 사업이기에 이 사업의 주체는 종교단체 결코 아니다.
예컨데 장보고라는 인물을 추앙하는 단체가 있다고 해서 그 집단이 종교집단이 되는게 아니듯 말이다.
3. 간통미화?
헌강왕 시기에 일어난 어떠한 권력간의 사건에 대한 비극을 춤으로 승화한 이야기이고
이를 춤으로 승화한 이야기를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로
간통미화에 미풍양속이 어쩌구 하는것 자체가 어이없을 뿐이다.
그런 이유라면 지금보다 미풍양속 엄격하게 지키는 조선시대에서 신하들이 국왕에게 같은 논리로 따져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학설중에 역신의 정체를 헌강왕 또는 그와 비슷한 지위의 왕족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게 맞다고 하면 처용이 역신을 죽이거나 대들었다면 반역이고 그저 소시민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에게
미래의 시각에서 간통 미화 운운하는것 자체는 황당함을 넘어서 오만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첫댓글 저도 기독교인이긴한데 기독교는 다른 종교 지원 운운하려면 크리스마스부터 반납해야ㄷㄷ
그래서 무교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는 크리스마스에 안 쉬는 직원들이 많... 음?
@민동균 아하
기독교의 탈을 쓴 제노포비아들
저런 억지스러운 주장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졌던 축제가 사라진다니... 다른 지자체들은 억지 축제라도 개발하는 판에 뭐하는건지 모르겠군요
https://m.cafe.daum.net/Europa/3Q5x/127185?svc=cafeapp
이런 이유도 있긴 한데 이건 뭐 정치 부분이라...
@삼한일통 헣...
@삼한일통 무슨 내용인가요 저는 시민이 아니라 볼 수없네요
@빵집 움... 정치적인 내용이라 정치이슈게시판 밖에서 이야기하기가 다소 그렇네요... 궁금하고 불편하시겠지만 혹시 모를 분란 등에 대한 우려도 있고 해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저 게시판에서만 할 수 있는게 카페 규칙인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ㅜㅜ
@빵집 아니면 이참에 시민 신청 한 번 해보시는건 어떨까요
@A.E.I.O.U 쪽지로 주시면 안될까요
울산 근처 대구에서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비롯한 공연들이 취소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는군요...이건 기독교측의 태클은 당연히 아니고 불교의 태클로....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089579.html
꼴값 떠네
깐수 선생님…
공업축제... 이름부터 재미없어보인다는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처용축제랑은 이미지가 많이 달라보입니다.
한심한 작자들